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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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주일예배
✦ 종려(고난)주일 메시지 ✦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를 따르라”
(마태복음 21장 1~11절)
[들어가는 말]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흔들며 깔고 환영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또한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교회력에서 영어로는 Palm/Passion Sunday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 일주일 동안을 가리켜 고난주간(Passion Week, Holy Week)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겠지만, 특별히 이 고난주간 동안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포함하여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죄인인데, 우리 대신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세주(메시아,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나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이번 한 주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5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은, 먼저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2마일 정도 떨어진 베다니를 지나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라는 곳을 거치게 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1절)
이곳은 해발 2,600 feet(약 800미터) 정도 되는 높은 곳으로, 여기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는 길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이 길이 영광과 존귀를 향한 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난과 죽음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아픈 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셨지만,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섬기러 오신,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 위해 오신 분이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가 벳바게까지 오신 예수님은 두 명의 제자를 보내시면서 한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2-3절)
1) 구약 예언의 성취
왜 예수님은 이런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구약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4-5절)
여기서 ‘선지자’라고 되어 있는 사람이 바로 구약의 스가랴입니다. 스가랴 9:9 말씀의 인용이 5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여기 인용한 것은 왜 말이 다른가 하면,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이고 여기 신약 성경에서 인용된 것은 히브리어를 신 히브리어로 적힌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약간 말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똑같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스가랴서는 BC 520년에서 470년 사이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이날로부터 약 500년 전에 쓰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오래전에 기록된 이 말씀이 이날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 위에 타시고 이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이면 1500년대인데, 예를 들어 1500년대 조선 시대의 어떤 책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내가 지금 한번 이뤄서 거기 나와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증명해보겠다고 시도를 해도 그게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삶에는 온갖 변수가 있고 시대가 다르며, 또 내가 지금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지금 그 일을 행하러 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뭐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기 기록된 사람인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더라도 될 가능성이 아주 낮습니다. 그런데 500년 전에 기록된 게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 위에 타시고 500년 전 스가랴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하셨는데, 사실 주인이 그것을 거부하거나 끌고 오다가 어디로 도망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대로 정확하게 예수님께 이루어졌다는 것은 성경에 예언된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 맞는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예언은 구약 성경에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 잘 아는 예가 바로 시편 22편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사야 53장 말씀은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했습니다. 시편은 900~1,000년 전에 기록되었고, 500년 전에 기록된 이 스가랴 9장이나 13장 말씀 같은 데서 예수님이 이렇게 된다는 것이 이미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확률적으로 0%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정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겠다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들고다니는 것이 불법입니다. 북한 같은 곳이 그렇습니다. 성경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불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어진 자료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성합니까? 요즘엔 성경의 종류도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입니다. 한글 번역들도 참 많습니다. 옛날에 쓰던 개역한글으로 시작해서 지금 쓰는 개역개정, 삶 공부 때 사용하는 새번역, 가톨릭과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그 외에도 현대어성경, 현대인의 성경, 쉬운성경, 쉬운말성경, 우리말성경, 메시지 등 아주 많습니다.
또 크기, 색깔, 디자인에 따라 성경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인터넷 서점에서 성경 종류를 찾아보았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비전 성경, 굿모닝 성경, 굿데이 성경, 큰글 성경, 만나 성경, QA 성경, 좋은 성경, 큰글자 나눔 성경, 주석 큰 성경, 슬림 스터디 성경, 빅컬러 훼밀리 성경, 웨딩 커플 성경, 슈퍼 셀프 성경, 하나로 성경, 리더십 성경, 투데이 컬러 성경, 톰슨 주석 성경, 주석이 없는 성경, 좋은 성경, 드림 바이블, 드림 제자 성경 등등 너무 많습니다..
성경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아니 가질 수도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우리에겐 이처럼 너무나 많은 자료가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을 핑곗거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많아도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성경은 집에 있는 책장 속에 장식용으로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읽고 묵상하기 위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나귀 주인들에 관한 교훈
또한 오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나귀 주인들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 때나 지금 시대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허락 없이 가져가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제자 두 사람이 가서 나귀가 묶인 줄을 풀 때 주인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을 것입니다. ‘당신들, 뭐 하는 거요?’ 그러나 예수님이 미리 말씀해 주신 대로 제자들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그러자 주인들은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가져가도록 허락합니다.
이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The Lord needs them.” 주님이 필요로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말입니다. 주님은 그냥 하실 수도 있는데 ‘주님이 너의 것을 필요로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것을 필요로 한다.’ 사실 필요가 없으신데 필요하다고 해주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주님이 그것을 쓰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 시간, 물질, 사회적 지위, 가족 등 전부 다 주님은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 생각에 크든지 작든지, 많든지 적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상관없이 주님은 그것을 쓰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기를 원하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것이 가장 좋다거나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주님께 기꺼이 내어드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쓰겠다고 하시니까 ‘알겠습니다. 가져가십시오. 드립니다.’ 내게도 유용한 것이지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까 내어드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지금도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데 우리가 가진 게 얼마나 된다고 그걸 자꾸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예배 때 헌금을 하고 봉헌 시간도 갖지만, 우리가 드린 헌금이 주님께 정말 도움이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돈이 없어도, 우리가 시간 내어 하는 봉사가 없어도, 무엇이든 원하시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꼭 있어야만 뭔가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저는 믿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그런 능력의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온 우주를 만드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가진 것을 사용하겠다고 하십니까? 바로 그것이 은혜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라고 하실 때 ‘아이, 귀찮은데 왜 그러세요?’라고 할 게 아니라, ‘아, 나 같은 사람을 쓰시는구나.’ 하고 나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내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가족과 이런 것들을 드리는 것과 봉사하는 것은 주님을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자기 것을 드릴 때 그것은 주님께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이익이 됩니다. 사실은 주님께 드릴 때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게 되는 길이 됩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특권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붙들고 있는 그것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도움이 전혀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이 내 것을 써주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주님은 나의 도움이 하나도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받아주시다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어린아이에게 아빠 엄마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줘서 맛있게 먹습니다. 그런데 아빠 엄마가 묻습니다. “아빠도 한 입만 줘.” “엄마도 한 입만 줘.” 그럼 뭐라고 합니까? “No!” 생명과 같은(?) 이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줍니까? 그런데 정말 아빠 엄마가 그게 꼭 먹고 싶어서, 또는 꼭 필요해서 그걸 달라고 합니까? 아이가 어리지만 아빠에게 주고 엄마에게 주며 나누는 것을 훈련하는 의미도 되고, 또 함께 사랑을 나누는 것이 됩니다. 그것을 안 먹어도 아빠 엄마는 하나도 지장이 없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은 사실 그런 것보다 더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 것을 좀 쓸게.’라고 하시니까 “No!”라고 하니, 이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므로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나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 저 같은 사람이 하는 봉사도 받아주시다니요? 저 같은 사람이 내는 헌금도 받아주시다니요?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라고 하는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주님께 드려야겠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드리는 사람은 풍성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더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2. 호산나를 외친 의도 (6~11절)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6-8절)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예수님이 그 위에 앉으시도록 합니다. 이때 거기 있던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펼쳐 놓습니다(8).
고대 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왕이 성으로 들어올 때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왕이 타는 짐승 위에 겉옷을 펴 놓는 것이 왕에 대한 유대인들의 예우 방식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또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들이 가졌던 나뭇가지는 종려나무였는데, 이렇게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펼쳐 놓는 것은 메시아를 환영하며 그분께 충성을 다짐한다는 상징적 표현이었습니다.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9-11절)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그 이제 예수님 비유를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종려주일 메시지를 하는 것은, 이제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를 마치고 다음으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비유를 살펴보기 전에 오늘 종려주일과 다음 주에 부활주일 메시지를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나누었던 말씀 가운데 ‘두 아들 비유’라든지 또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와 같은 비유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렇게 입성하신 다음부터 금요일에 돌아가실 때까지의 사이에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소리 높여 외친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원래는 기도인데 마치 요즘의 ‘할렐루야’와 같이 기쁨과 환호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말은 시편 118편 26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말도 당시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도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약속하셨던 그 왕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 모습이나 그들이 외친 말의 내용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아(구원자)로 알고 환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의심했지만 이제는 메시아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메시아)가 틀림없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곧 로마 사람들을 다 물리치시고 왕이 되셔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실 것이다.’라고 기대하면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어느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적국의 땅을 정복하고 로마로 돌아올 때 공식적인 개선 행진을 대대적으로 벌여서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도록 했습니다. 개선장군은 금 병거에 타고 칼을 높이 쳐들며 행진하는 가운데 노략해온 물건들과 전쟁포로들을 끌고 가며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승리를 과시합니다. 그때 신전 제사장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향을 피우고, 로마시민들은 장군의 이름을 높이 외치며 그에게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 개선 행진은 승리한 장군이 잡아 온 포로들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우게 하고 개선장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민이 즐기면서 구경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것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는 로마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방식은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승리한 왕이나 개선장군이 금 병거를 타거나 엄청난 군마를 타고 입성하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왕이시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왕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은 왕이지만 무력이나 군사적인 힘으로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왕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로마 장군이 개선장군으로 환영받기 위해서는 최소 5천 명의 적군을 죽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몇 명을 죽이셨습니까?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리셨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셨으며, 몇십, 몇백, 몇천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역사상 셀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셨으며, 지금도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이 얼마 뒤에는 그분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게 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지금 이렇게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사람들이 며칠 만에 돌변하여 죽이라고 외치게 된 겁니까? 왜 그들은 ‘호산나’라고 외친 지 얼마 못 되어 자기들이 그토록 열렬히 환영했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됩니까?
한마디로 그들은 왜 메시아가 이 땅에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제자들도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여기까지 따라온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왕이 되어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메시아 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했었던 자기들의 생각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실망하며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뜻을 예수님이 이루어 줄 것 같으니까 따른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만족과 이익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거나 자기 뜻을 이루어 주지 못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을 다 물리칠 만한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데, 그럴 능력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체포되어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잡히실 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버리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때 예수님은 ‘지금 이것을 내가 막지 못하겠느냐? 천군 천사를 불러서이 이걸 막지 못하겠느냐?’ 하시면서 칼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때가 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시며 그 뜻을 받으셨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히신 후 예수님은 아주 불법적인 재판도 받으십니다. 밤에 재판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불법으로 그것을 강행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침묵을 지키십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거짓된 고소를 해대는 그들을 향해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불법 재판의 결과인 사형을 받아들이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밑에서 “남들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네?” 하면서 마구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예수님이 내려올 힘이 없으십니까? ‘타임아웃’ 한 다음 내려와서 다 쓸어버리고 다시 올라가서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로마를 힘으로 제압하고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셨더라면, 유대인들의 메시아는 되실 수 있었겠지만 온 인류의 구세주는 되실 수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신을 조롱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 백성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쓸어버리셨더라면, 유대인 중에서도 자신을 따르는 소수 특정인들의 구세주밖에는 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처럼 악한 자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구약 성경에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던 군중들은, 또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께 실망하고 결국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죽어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왕이 되어서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고 우리를 세계에서 넘버원 나라로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무기력하게 체포되니, 이럴 거면 아예 그냥 죽여 버려라.’라고 하며 배반한 것입니다. 자기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한 유대 백성 무리의 배반하고 변심한 모습이 바로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은 분명합니다.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 어깨에 십자가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그 순간 기겁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불평하고 항의하며 마침내 예수님을 몰아붙이면서 ‘예수님,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어드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영광의 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르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는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채 영광으로 직행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조금만 어려움이나 손해가 와도 몸을 사리며 피합니다. 그리고 길을 벗어납니다. 그러면서도 계산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어떤 게 나에게 유리한가?’ 그러면서 결론은 이것입니다. ‘적당히 믿어라.’ 여러분, 지금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지 따져가면서 하십니까? 적당히 해야겠다고 하십니까?
결박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아주 초라하고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이 되려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고, 그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뜻에 맞추어 너를 섬기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정말로 네가 나를 주님으로 모시고 나의 뜻대로 나를 섬기기를 원하느냐? 너는 오늘 선택해라. 정말 네가 나를 주님으로 섬기기를 원하느냐? 정말 너는 나의 길을 따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라!’
3. 예수님을 따르는 바른 신앙
우리도 바로 이 점을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냥 ‘어? 오늘이 일요일이네? 그럼 교회에 가야지.’ 하고 가다가 어떤 때는 바쁘면 ‘아유, 다음에
가야지.’라고 하는 이런 신앙생활이 아니라, 내가 왜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고 왜 예수를 믿고 따라야 하는지, 이걸 좀 확실하게 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환호하며 따랐던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거나 알기를 원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기 욕심과 자기 뜻을 따라 예수님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신앙생활 대부분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이면 몰라도, 믿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대부분의 신앙생활 문제가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 또 예수님의 뜻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내 뜻만 알고 나가는지?
사실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이야 예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채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 공부에서 바로 이 부분을 처음에 다루는데, 우리가 성경을 쭉 읽어보면 하나님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슬퍼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도 하나님이 슬퍼하면서 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슬퍼하셨습니까? 이 세상의 악한 자들, 이방인들, 아주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영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믿고 받아들일 때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을 따를 때 신앙생활의 확실한 전환점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믿는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 진짜 문제입니다. 지금 내 야망이나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그분을 환영했던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이용해서 자기가 성공하고 자기 소원을 이루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걸 원해서 제자들도 지금까지 계속 따라온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도하실 때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시고 결국 그 목적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환호하며 이스라엘 해방의 날을 기대하고 있다 해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던 예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의 해방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로마를 포함해서 모든 세상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억울한 압제를 당하는 자들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구원하고 그들을 압제하는 자들도 구원하고 또 부자들도 다 구원하려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자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까지 다 품으시고 그들도 구원해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십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에서 섬기며 봉사하는 일은 참으로 귀합니다. 주님을 향해 ‘호산나’ 찬송하며 열정을 다해 예배하고 섬기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열정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이름과 자기만족과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열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뜻과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A입니까, B입니까? 저는 A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B도 아니고 C로 인도를 해주셨다면, 내가 기도 응답을 못 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A가 아니라고 심통이 나고 삐지고 시험에 들었다는 식으로 나가는데, 내 뜻과 내 소원이 다 이루어지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저 사람을 죽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저쪽은 ‘이 사람을 죽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을 다 들어주셨다면 우리는 이미 다 죽었습니다.
내 뜻과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기도할 제목은 ‘하나님, 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라는 것입니다. 혹시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내가 창피를 당한다 해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왜 그분을 따릅니까? 여러분, 오늘 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무엇을 원해서 나오셨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섬기는 것이 혹시라도 짐이 되지는 않습니까? 억지로 마지못해 나온 것은 아닙니까? 주님을 따르면서 그렇게 믿는다면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짐스러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믿고,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믿는 겁니다. 지옥 갈까봐, 혹시 빠졌다가 벌 받을까 봐 믿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니 믿음 생활이 얼마나 짐스럽게 느껴지고 얼마나 무겁습니까? 주일에 교회 안 나가면 벌 받을까 봐 나가니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교회 가는 것이 재미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을 하니까 아주 짐스럽게 느껴집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특히 모태신앙인처럼 오래 다닌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너무 답답해하십니다. ‘왜 저렇게 예수 안의 풍성함을 모르고 살까?’ 하고 슬퍼하십니다. 최고의 것이 여기 있는데 안 하고 다른 데 가 있으니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나름대로 믿고 있고, 성경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복음도 자기 나름대로 재편성하여 삽니다. 그분들의 복음서 이름은 바로 ‘내가복음’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주님의 뜻을 오해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본인도 힘들고 주변 사람도 힘들게 만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면 자기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을 믿고 신뢰하기에 어떤 결과가 나와도 상관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의 풍성함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래 전 <생명의 삶> 큐티 매거진에서 읽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록 삶 속에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승리를 체험한 어느 크리스천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나누며 마치기를 원합니다.
수줍음 많은 여중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방에서 개척 교회 목사였기 때문에 형편이 넉넉지 않아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이모 집을 가던 어머니와 두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자기와 아버지는 뒤차록 가고 어머니와 두 동생은 먼저 간 것인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두 동생은 전치 50주의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학생은 얼마 전 양궁에서 골프로 전공을 바꾼 상태였는데, 졸지에 어머니를 잃고 병원에 있는 두 동생을 뒷바라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네 가지 결심을 합니다.
“첫째, 아빠가 사모 없는 목회자가 되었으니 더욱 열심히 도와드려야겠다.
둘째,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병상의 두 동생에게 최선을 다해 엄마 노릇을 해야겠다.
셋째, 골프를 위해 절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직접 오르며 체력을 기르겠다.
넷째, 세계 최고가 되었을 때 언론들과 자유롭게 인터뷰할 수 있도록 영어는 반드시 마스터하겠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쉽지 않은 결심을 최악의 상황에서 15세 여자 중학생이 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만 18세가 되는 해에 프로골프선수로 데뷔한 이 소녀는 신인상은 물론이고 대상과 상금, 다승, 평균타수 1위까지 모두 휩쓸어 버립니다. 2년째에는 한국 KLPGA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는 엄청난 실력을 보이며 대상, 최저타수상, 상금왕, 다승왕을 차지하며 2년 연속 4관왕에 오릅니다. 프로로 일찍 데뷔한 것도 동생들 치료 뒷바라지를 하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데뷔 3년째이자 어머니 죽음으로부터 5년 후인 2008년 여름, 이 소녀는 메이저 대회이자 세계에서 가장 전통 있는 브리티시 오픈(British Open) 골프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룹니다. 그것도 초청선수로 이룬 업적이었고, KLPGA에서는 대상, 다승, 상금, 평균타수 1위를 내리 3년 연속 독차지합니다. 웬만한 선수는 커리어 중 한 번이나 할까 말까 한 대기록입니다. 그래서 그때 받은 별명이 ‘골프 지존’입니다.
그 2년 후인 2010년에는 마침내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에 오르는데, 한국 선수로는 물론이고 아시아 선수로도 최초로 1위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진짜 별명은 ‘미소 천사’이고, 그녀의 이름은 ‘신지애’입니다. 1위를 오래 지키지는 못했고 현재는 세계랭킹 18위인데, 이번 여름 파리 하계올림픽이 마지막 올림픽 출전 기회라고 하며 대회 출전을 위해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선수가 엄청난 믿음의 사람이라고 우상화(?)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얼마나 훌륭한 신앙의 예입니까? 엄청난 비극을 당했지만, 그 어린 나이에 자기가 생각한 대로, 자기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거기서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믿음으로 나아가기로 결단하며 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비록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실망하거나 분노하거나 낙심하거나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감으로써,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