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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5일 주일예배

예수님의 비유 15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서

(누가복음 151~10)

 

[들어가는 말]

 

오래전 스코틀랜드에 두 명의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목회했지만, 그분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무명의 목회자였습니다. 어느 날 이 두 분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먼저 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사실 지난 3년 동안 목회하면서 진정한 의미로 거듭난 성도는 딱 한 사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목사님도 말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는 일주일 동안 부흥회를 열었고, 저는 커다란 기대 가운데 열심히 그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헌신한 사람은 일어나라고 했더니 딱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두 목사님은 서로 목회의 쓰라리고 안타까운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목사님이 자기가 목회한 3년 동안 딱 한 명밖에 믿지 않았다고 했던 사람의 이름이 로버트 마팻(Robert Moffat)인데, 놀랍게도 그는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적인 틀을 마련한 선교사가 된 사람입니다. 두 번째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헌신한 사람이 딱 한 명 나왔다고 했는데, 그는 데이비드 리빙스턴이었고 아프리카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불을 지른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것 없는 단 한 명이더라도 그 한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성경은 결코 하나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작은 것을 작다고 낮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인데 나중에는 굉장히 커진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인데, 우리 어린이들이 얼마나 귀엽고 예쁩니까?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은 힘도 약하고 작지만, 이렇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나중에 커서 놀라운 하나님의 일꾼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좀 장난치고 떠든다고 야단치거나 너무 무시하지 마시고 한번 잘 지켜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한 명의 가치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1.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 (1~3)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람의 이야기와 또한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는 여자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와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3)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처럼 무시당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당시 종교인들 눈에는 크게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립니다. 그러한 그들의 비난과 편견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오늘 이 비유들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의도로부터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가운데 본문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를 대표하던 바리새인의 종교는 외적인 형식에만 몰두하던 위선적인 종교였습니다. 겉으로 어떻게 하면 멋지게 보일까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주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나갔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냈습니다. 심지어 식물에 대한 것도 십일조를 했습니다. 또한 종교적 관습과 규례를 따라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형식에 있어서는 소위 완벽한 모범을 보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중요시하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 중에도 가장 핵심이라고 하는 십계명에서 1번부터 4번까지의 계명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관한 말씀이고, 5번부터 10번 계명까지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이 회당에 열심히 모였지만 왜 모였습니까? 또 그들이 헌금을 열심히 드리고 십일조도 다 드렸지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엄숙하고 경건한 표정으로 회당에 드나들고 또 예루살렘 성전에도 가서 제사 드리고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위선적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고 제자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관심과 의도를 따라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그들을 구원하고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사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형식에만 몰두하는 가운데 자기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며 모이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면서 저것들은 우리와 어울릴 수 없다.’라는 식으로 구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정해놓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보고 비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도 구원하러 오셨고, 하나님의 구원에서 소외되어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를 원하셨습니다.

 

 

2.   잃은 양을 찾는 목자 (4~7)

 

오늘 본문에는 2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사실 누가복음 15장 전체를 보면 3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중 세 번째인 소위 탕자의 비유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 앞에 두 비유가 나오는데, 같은 내용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째 비유를 보면, 100마리를 가진 사람이 그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 다른 양들을 들에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며, 또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4-6)

 

이 첫 번째 비유를 보면, 100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중 한 마리를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에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며, 또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직접 듣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을 듣고 다 고개를 끄덕끄덕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익숙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4절에서 예수님이 질문형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이전까지 계속 놀라운 말씀을 가르치셨고 또 엄청난 기적도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 이분이 우리 민족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구원자)인가?’ 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 같은 이상한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겁니다. 말씀을 들어보고 기적 행하는 것을 보면 저분이 메시아가 맞는 것 같은데,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라면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인지 의아한 겁니다.

 

저런 죄인들이 오면 막아야 하는데 오히려 환영하면서 사랑을 베푸시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교제도 하십니다. 심지어 마태(레위) 같은 사람도 열두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저런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둘째 아들)를 예수님이 연속해서 이야기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해서 그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 특히 너희가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저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난했기 때문에 세 비유를 연속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으로 청중들을 끌어들이시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라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익숙한 삶의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사람들이 듣기에 어쩌면 불쾌할 수 있는 역설(paradox)을 사용합니다. 이 역설의 뜻을 잘 파악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7)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상황과(4), 죄인 하나가 회개함으로 인한 기쁨이 의인 99명보다 더하다는 말씀(7)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한 마리와 아흔아홉마리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아흔아홉 마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한 마리가 왜 중요한지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입니다. 이제까지 사회의 그늘 속에 무기력하게 방치되었던 그 하나라는 미미한 존재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비록 죄인 한 사람이 대다수인 의인 아흔아홉에게는 별 존재가치가 없는 미미한 존재일 수 있지만, 죄인 한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이 지금 가장 중요하게 찾으시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100이라는 전체를 완성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100이라는 전체를 완성하려면 99는 불완전하고 반드시 하나가 더해져서 100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 한 사람은 천국에서 엄청난 기쁨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4절의 잃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원어로 주인이 가지고 있다가 단순히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잃은 양은 곧 예수님과 함께한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1).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비난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당하고 정죄받던 세리와 죄인들이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토록 찾으시는 영혼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지금 죄인들을 그냥 무시하고 정죄하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이끌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종종 교회에서 이런 비유를 잘못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생활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시험에 들었다고 하며 안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뭔가 일이 있거나 사정이 생겨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런 분들을 찾아와야 한다.’라고 하면서 이 본문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시험에 들거나 무슨 이유 또는 사정이 있어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을 격려하고 권면해서 다시 우리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사실 그것은 말씀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 나오다 안 나오는 사람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진짜 믿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데 기분이 나쁘거나 사정이 생겨서 안 나오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며 돌봐야 한다고 하면 잘못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분명히 회개해야 하는 죄인 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믿지 않는 비신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믿는데 안 나오는 사람을 말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즐거움이 굉장히 큰데, 그것이 여기서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즐거워 (양을) 어깨에 메고”(5)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쁨은 물론 아직 교회 밖에 있으며 주님을 믿지 않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기쁨을 많이 맛보지 않았습니까? 사실 전도가 그렇게 금방 쉽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할 때 바로 믿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벽돌이 한 장 쌓이고, 또 한 장 쌓이면서 됩니다. 여기서 누군가 우리 교회 또는 크리스천에게 사랑을 받아서 마음이 조금 열리고, 또 저기로 갔을 때 또 사랑을 받아 마음이 열리며,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쌓이다가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을 믿으시겠습니까?’라고 할 때 , 믿겠습니다.’라고 하며 구원받는 것입니다.

 

3, 4, 5, 7, 10, 15, 20년을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영혼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가 나가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고 돌아와서 그냥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한 명을 놓고 계속 몇 년 동안 기도하고 권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합니까? 단순히 우리가 빈자리를 채우고 교인 숫자를 늘리자는 것이 아니라, 저분도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같이 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애쓰고 눈물로 기도하며 섬기는데도 문전박대를 당하는 경우, 갔는데 허탕 치는 경우, 모처럼 온다고 해서 음식을 잘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못 온다고 연락이 와서 실망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러던 분이 조금씩 변화되면서 목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오다가 이제 교회도 나와 보지 않겠냐고 하니까 교회에도 나옵니다. 또 봄이나 가을이 되어서 <생명의 삶> 공부라는 게 있는데 한번 들어보지 않겠냐고 하니까 들어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듣다가 복음을 듣고 결단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받는 날 얼마나 감격의 눈물이 납니까?

 

그런데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 또 한 사람 세례받나 보다.’라고 하며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영혼을 그토록 찾아 나서며 섬겼던 나는 그 감격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해본 사람에게는 엄청난 감격입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냥 멀뚱멀뚱합니다. 해본 사람은 양을 즐거이 메고 오는 목자의 바로 그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기쁨을 정말 많이 누리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큰 교회는 아니지만, 콜럼버스 지역의 한인 교회들 가운데서는 제가 볼 때 가장 많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것이 맞습니다. 요즘에는 특히 20~30대 이하로는 교회를 정말 한 번도 다녀보지 않았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기에도 아마 계실 겁니다.

 

한국에서 교회를 전혀 다니지 않다가 미국에 와서 이곳으로 왔는데, 어떻게 누구를 만나서 목장이란 게 있는데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모임이라고 해서 옵니다. 그러다가 교회도 왔다가, <생명의 삶>도 들었다가, ‘, 내가 믿어야겠구나.’ 하며 믿기로 결단하여 세례받은 그런 분들이 지금까지 굉장히 많았습니다.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이런 기쁨을 계속 누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을 찾는 기쁨을 강조하면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특히 죄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찾아 나서는 노력을 통해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잃어버린 양은 저절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목자가 나가서 찾아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비유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믿는 사람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가서 찾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20년쯤 전에 밀리언셀러였던 책이 있는데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이라는 책입니다. 우리 도서실에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많이 팔렸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몇 년 동안 1위였습니다. 그 책의 저자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새들백교회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인데, 그 전에 먼저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읽고 제가 큰 감명을 받았고, 우리 교회에서 장로 교육을 할 때도 그 책을 읽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교회에는 크게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지역사회’(community)인데, 교인이 아닌 사람으로 행사가 있을 때 와주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군중’(crowd)으로, 예배에만 왔다 갔다 하며 참석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등록 교인’(congregation)으로, 왔다 갔다만 하는 게 아니라 교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헌신하고 등록한 교인입니다. 네 번째는, ‘헌신한 사람’(committed)으로, 영적으로도 성숙하고 열심히 성경 공부와 기도도 하며 성숙한 신앙의 길로 가려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핵심 멤버’(core)이며, 이들을 보통 사역자라고 부릅니다. 모든 교회 일을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중 어디에 속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역사회에 속하는 분은 전혀 교회를 안 다니는 분인데 가끔 나오는 분입니다. 여기에 그런 분은 없습니다. 지역사회에 속한 비교인, 또는 왔다 갔다만 하는 군중에 속한 분 가운데, 교회 예배에는 참석해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분들이 우리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런 분들을 우리가 환영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분들이 주님의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고, 그중 하나를 찾았을 때 천국에서는 폭발적으로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기존에 믿는 사람의 신앙이 성장하면 주님은 당연히 기뻐하십니다. 우리 각자 예수님을 믿는데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더 영적으로 성장했다면 당연히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신앙이 어떻게 자라갈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성장하는 가장 좋은 길이 바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삶> 공부 때도 제가 굉장히 강조하는 내용인데,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저 자신부터 그렇습니다. 목사가 제일 착각하면 안 됩니다. 목사가 여기 서서 나쁜 말 하는 것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다 좋은 말만 전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또 교회를 계속 다니다 보면 좋은 말만 듣습니다. 특히 우리가 삶 공부를 듣고, 열심히 성경도 배우고, 큐티하고, 기도하고, 특히 큐티를 하거나 성경을 통독할 때 성경 말씀에 악하게 살라고 하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다 좋은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큐티하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고, 봉사도 하고, 이렇게 좋은 말씀도 듣고, 또 실제로 이것저것 좋은 책도 읽고 그럴 때,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 내 신앙이 굉장히 자랐다. 영적으로 자랐다. 제자로 자랐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럴 때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은 성경을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고 큐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그런 것으로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큐티하고, 기도하고, 다 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도 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또 헌금과 봉사 등 모든 활동을 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감사해서 하는 것이고, 그런 것은 신앙 성장의 토대가 되는 것이지, 그런 것들을 함으로써 신앙이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신앙이 성장합니까? 바로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큐티 해도, 나만 혼자 하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전혀 없고, 나 혼자만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한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관계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살되 우리끼리만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는 우리끼리 서로 사랑해야 하고, 더 나아가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애쓰고 눈물로 기도하며 어떻게 하면 그 영혼을 주님께로 돌릴 수 있을지 늘 섬기고 사랑으로 나아가며 애쓸 그때 우리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할 때 성장하는 것이지, 듣기만 할 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한 영혼을 위해서 열심히 말씀대로 나아갈 때, 그러다 그 영혼을 찾았을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 우리도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보의 안쪽을 보시면 우리 교회의 비전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성도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데.’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그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교회 생활을 하는데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지 않을지 모릅니다. 성도가 행복한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 기뻐하십니까? 그 바로 밑을 보십시오. “영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듦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도 기쁘게 됩니다.

 

우리가 가정교회를 하며 매주 목장으로 모이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매주 서로 보면 할 이야기도 별로 없고, 생활도 비슷한데, 왜 그렇게 매주 모입니까?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 한 영혼은 언제 목장에 올지 모릅니다. 자기가 오고 싶을 때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모이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모여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고, 그 가운데 믿지 않은 분이 평소에 오라고 할 때는 안 오다가 갑자기 오늘은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 오늘은 안 모이는데요.’라고 하면 그다음에는 안 옵니다.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겁니다. 그다음에 다시 올 가능성이 굉장히 낮아집니다.

 

당연히 이미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도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정체되면 안 됩니다. 퇴보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잃어버린 한 영혼,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분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조금 전 언급한 릭 워렌 목사님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가 성장할 때 안에서 밖으로가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성장할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 멤버로부터 시작해서 밖으로 나가며 성장하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로부터 안으로 성장할 것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완전히 기존의 생각을 뒤흔드는 내용입니다.

 

전통적인 교회 개척에 관한 책들을 보면, 먼저 헌신한 자들의 핵심 그룹을 만들고 그 후 점점 밖으로 나가며 지역사회로 접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새들백교회를 비롯해서 소위 부흥한다는 많은 미국 교회들은, 믿는 사람들이 대거 옆에서 옮겨와서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부흥이 아니라 수적 성장입니다. 그런 교회들은 지역사회로 나가서 안 믿는 사람을 데려와 핵심 멤버가 되고 제자가 되도록 키움으로써 성장한 것입니다. 미국에 성장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교인들의 70-80% 이상이 그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의인 99명에 집중해서 훈련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것도 귀중하지만, 하늘에서는 잃어버린 영혼 하나가 돌아오는 것을 의인 즉 이미 믿는 사람 99명이 더 잘 믿게 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신분과 소속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충격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신앙인이나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일수록 이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미 믿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부류인 지역사회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 중 어딘가에 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영혼 하나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그냥 편안하게 쉬운 길로 편안하게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불가능합니다. 힘들고 피곤하지만, 먼저는 당연히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을 훈련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군중에서 등록 교인으로, 헌신한 자로, 또 핵심 멤버(사역자)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바로 우리가 힘을 합쳐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았을 때 우리는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게 됩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엄청난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거는 교회가 될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행복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면 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정말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그런데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내가 삶 공부를 하는데 지금 막 믿어보려고 하는 VIP가 같이 공부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난 수업 시간에 결석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필기한 것을 복사해서 주려고 복사했는데, 복사되어 나온 것을 보니 복사기의 토너가 없어서 그런지 상태가 흐려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우리가 주관식에는 약하기 때문에, 객관식으로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1) “이거 카피 머신이 고물인가? 누가 이것을 맡았는데 이렇게 제대로 관리를 안 해?”

   2) “그래도 자세히 한 번 그 종이를 보세요. 그러면 보이니까 가져가서 잘 읽어보세요.”

   3) “내가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다시 복사해서 드리겠습니다.”

   4) “이것은 제가 쓴 글씨라 저는 알아볼 수 있어요. 이건 흐리니까 저에게 주시고, 원래 제가 쓴 것을 가져가서 보세요.”

 

당연히 4번입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럽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소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게 뭡니까? ‘믿슙니다!’라고 하면 믿음이 좋은 게 아닙니다. 사실 그것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힘들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은 따뜻합니다. 친절합니다.

 

물론 따뜻하고 친절하다고 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신앙이 없어도 친절할 수 있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이 좋다면,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서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쌩쌩 찬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따뜻합니다. 친절합니다. 차가운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영혼을 정말 귀하게 여긴다면 따뜻함으로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됩니다.

 

 

3.   잃은 동전을 찾는 여인 (8~10)

 

두 번째 비유도 첫 번째 비유와 같이 기쁨이라는 주제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잃은 동전을 찾는 기쁨에는 앞 비유와 달리 독특한 면도 있습니다. 첫째로, 즐거워하는 주체가 여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8-9)

 

드라크마은전의 명칭입니다. 이 여자는 열 개의 동전 중 하나를 잃고서 그것을 찾기 위하여 쉴 새 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앞 비유에서 목자가 그랬던 것처럼 잃은 자를 찾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은전의 성격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 이 여자에게 결혼 지참금이었을 수도 있고, 남편이 사랑의 증표로 맡긴 예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가정의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두었을 수도 있고, 유대인들의 축제 시에 사용할 소중한 저축금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 여자가 동전을 찾고 나서 기뻐하는 행동은 곧 잃은 자를 찾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기쁨, 하늘의 기쁨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0)

 

이 여인의 즐거움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비유에서 목자는 양 100마리를 채우기 위해 한 마리를 찾아 헤맸으며, 이 뒤에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온전한 가족을 회복하기 위하여 얼마나 둘째 아들을 기다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15장의 두 번째 비유인 드라크마 비유에서는 이 여자도 앞의 목자나 뒤의 아버지와 같은 열심과 애정으로 10개의 동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잃은 한 개를 부지런히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찾고 있습니까? 8절을 다시 보면, 잃은 동전을 찾기 위해 여인은 3중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불을 밝혀놓고, 집을 쓸며, 동전을 발견할 때까지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떠나는 목자의 노력이나, 또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날마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깨지고 넘어지고 말을 안 들어도 벌하시는 게 아니라 감싸주시는 사랑입니다. 감싸주시면서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배신하고 저주해도 감싸 안아주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하기 때문에, 내가 뭘 잘하면 더 사랑하시고 내가 잘못하면 덜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랑은 똑같습니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좋아질 수도 없고 더 나빠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 목숨을 걸며, 한 영혼을 찾아나서는 개인과 교회가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땅에는 있는데 천국에는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나가자고 하면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듦으로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든다는 게 뭔가 하는 것을 풀어서 주보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 교제, 양육, 봉사, 전도와 선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중에 무엇이 천국에 없겠습니까?

 

일단 천국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없기 때문에 전도가 없습니다. 선교가 없습니다. 다 믿는 사람인데 무슨 전도를 하겠습니까? 우리가 힘쓸 다섯 가지 중에 전도와 선교는 천국에 없습니다. 예배하고 교제하고 섬기는 것은 천국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고,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며 교제할 것이고, 끊임없이 서로를 섬기며 천국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죄인이 없고, 그래서 전도나 선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완벽한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서 왔으니까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선교사님들과 협력해서 선교헌금도 보내고 기도도 하는 그 민족들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에는 없는 죄와 전도 중에 어느 것을 하며 사시겠습니까? 열심히 죄를 지으며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열심히 전도에 힘쓰며 사시겠습니까? 죄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게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 편안과 내 안락을 위해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찾아나섬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인생이 되어야겠습니다. 바로 그러한 우리 각자의 삶과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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