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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1일 주일예배

예수님의 비유 13

똑똑하게 보이지만 어리석은 자

(누가복음 1213~21)

 

[들어가는 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낚시를 하던 낚시꾼이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았는데 아주 이상한 물고기였습니다. 그 물고기는 찬란한 금빛을 띠고 있었고, 놀랍게도 물고기가 낚시꾼에게 말을 했습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면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낚시꾼은 깜짝 놀랐는데 신비한 느낌이 들면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물고기가 하도 애원하기에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세 가지? 아니, 소원 열 가지를 들어주면 너를 살려주지.” 그 말을 들은 물고기는 서글프게 말합니다. “저는 세 가지 소원밖에 들어줄 수 없어요.” 낚시꾼이 또 말합니다. “그럼, 반 뚝 잘라서 다섯 가지만 들어줘.” 물고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합니다. “세 가지밖에는” “좋다. 그럼, 네 가지만 들어다오.” 그러나 물고기는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런 좋은 기회를 얻고도 계속 흥정하다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물고기가 죽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것이 탐심(탐욕)입니다. 탐심은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욕심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더 움켜쥔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탐심은 모든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도 탐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도,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아무리 나쁜 사람도, 아무리 선한 사람도, 다 탐심이 있습니다.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탐심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이 탐심의 문제에 관하여 가르쳐주시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드시는데, 이 비유를 소위 어리석은 부자 비유라고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도 다 있는 탐심의 문제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탐심의 정체 (13~15)

 

이 말씀을 하시던 당시 예수님은 엄청난 인기를 끌고 계셨는데, 121절에 보면 그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 한 가지를 요청합니다. 그 수많은 무리를 뚫고 나왔으니 대단한 사람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3)

 

이 사람에게는 형이 있는데, 그들의 부모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돌아갈 유산까지 형이 다 가로채서 화가 난 동생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구약의 모세 율법에 따르면, 재산을 분배할 때 장남은 항상 다른 형제들의 두 배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아홉 명이면 재산을 10등분 해서, 장남이 두 몫을 가지고 나머지 여덟 명은 한몫씩 받는 것입니다. 본문처럼 형제가 둘이라면 형이 2/3를 받고, 동생이 1/3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형이 자기 몫까지 전부 다 가로채서 화가 난 것입니다. 재산이 조금이었으면 예수님에게까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 꽤 많은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이 사람은 형에게 빼앗긴 것이 분해서 예수님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 와서 유산을 제대로 나누도록 형에게 명령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약간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4)

 

이 말씀을 그냥 보면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문제에 관심이 없으신 것으로 보이고, 오히려 그를 나무라시는 것이나 짜증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지금 재산을 나누는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돈 문제를 해결하고 끝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돈 문제, 유산 문제만 해결해주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5)

 

예수님은 재산을 가로챈 형을 고발하는 동생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십니다. 형이 물론 잘못했지만, 동생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니까 동생의 몫을 가로챈 그의 형에게는 탐심이라는 죄가 있는데, 빼앗겨서 억울해하는 동생의 마음속에도 그에 못지않은 탐심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동생이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까지 형에게 빼앗겼다는 말은 형이 굉장히 치밀하게 작업을 해서 동생에게 돌아갈 것까지 다 가로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도 형과 유산을 놓고 싸우는 중에 자기의 작전이 밀려서 패배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동생에게도 탐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탐심은 돈이 많은 부자들에게나 있는 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자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에도 탐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온갖 탐욕을 멀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어서 뭐라고 하십니까? “사람의 생명의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린 게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람이 돈으로 생명을 살 수가 있습니까? 물론 돈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좋은 의료 혜택을 받으면서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zoe/조에)는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질적인 삶’, 즉 의미 있고 보람 있고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사람에게 돈이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질적으로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행복한 인생이란 단순히 소유가 많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바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점점 더 물질만능주의가 되어 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만 이러한 시대에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문이나 뉴스를 조금만 보아도 매일 빠지지 않고 나오는 뉴스가 돈에 대한 뉴스입니다. 지금 주식 시장이 어떻게 됐다, 환율이 어떻다, 또 비트코인 가격이 올랐다 또는 내렸다, 지금 사야 한다, 팔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전문가를 모셔다가 의견을 듣는다... 전부 돈 얘기로 가득합니다.

 

지금 돈 자체가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돈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탐심과 탐욕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주님의 뜻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갑자기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공해도 갑자기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탐심의 문제를 정확히 가르쳐주시고,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탐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도 보여주십니다.

 

 

2.   탐심의 특징 (16~19)

 

탐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탐심은 이기심을 키우는 죄악이다

 

사실 이기심에서 나왔지만, 탐심은 이기심을 더 키우는 죄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6-19)

 

이 내용을 보면, 이 부자는 스스로 자기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이 정도로 큰 소출을 거두었는데 부자가 심중에 생각했다는 것, 즉 자기 혼자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혼자 생각하거나, 아니면 나눌 사람이 없어서 자기 혼자 이런 생각을 한다는 그 자체가 굉장히 불행한 삶이라는 겁니다. 당시 1세기 이스라엘 고대사회에서 이런 문제를 혼자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벌써 이 사람이 불행한 사람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보면 특히 그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자기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는 암시를 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여기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 그렇습니다. 바로 라는 말입니다.

 

- 17: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나는) 어찌할까?”

- 18: “내가”, “내 곳간”, “내 모든 곡식과 물건

- 19: “내가 내 영혼에게

 

이처럼 이 부자가 하는 말마다 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부자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자기만위하는 삶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 위하는 삶을 삽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갈등으로 나가면 가족끼리도 싸우고 심지어 살인도 납니다. 자기만 위하는 삶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밖에 모른다면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만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는 오직 자기만을 위해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만을 위해 살면 이익이 되고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자기만 위해 살면 탐심의 늪에 빠져서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것을 모릅니다.

 

자기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아까 부른 찬양곡에서 내가 주인 삼은 모든것 내려놓고라는 것처럼 사실은 그것들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데 그걸 모릅니다. 자기가 주인인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은 탐심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탐심이 자기를 지배합니다. 자기가 돈을 소유한 것 같지만, 돈이 자기를 소유해 버립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되면 치유되기 힘들 정도로 병적인 이기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병적인 이기주의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차를 운전할 때 언덕을 내려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언덕을 내려가는 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동차와 병적인 이기주의자가 아주 흡사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으니까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언덕길인데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멈추지 않습니다. 미친 듯한 속도로 언덕 아래쪽을 향해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쾅 부딪쳐서 크게 사고가 나고, 그래서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됩니다. 자기 혼자 부딪치면 모르겠지만 다른 차나 사람이나 건물을 부딪치면 자기만 해를 입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큰 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것이 병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입니다.

 

탐심의 지배를 받아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위험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병적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입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8)

 

자주 사용하는 예화이지만, 미국의 유명한 부호였던 존 록펠러(John Rockefeller)가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돈을 벌어야 충분히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실 겁니까?” 그랬더니 그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Just a little bit more(조금만 더).” 지금도 많은데 지금보다 조금만 더 벌어야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는 한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입니까상황마다 사람마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제가 이민을 온 1980년대에는 대개 이랬습니다. 일단 미국에 오면 아무 차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다가, 차가 생기니까 작은 차라도 중고차 말고 새 차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새 차를 사게 되니까 이것보다 조금 더 큰 차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큰 차가 생기니까 조금 더 고급 차를 사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또 차를 사고 보니까 옵션을 이것 넣고 저것 넣고 좀 더 많으면 좋겠다.’

 

집도 처음에 와서 스튜디오 아파트에 사는데, 조금 지나면 방이 하나 따로 있으면 좋겠다.’ 방 하나짜리로 들어가니까 조금 후에는 방 두 개짜리면 좋겠다.’ 그다음에 또 이제 작은 콘도미니엄을 하나 사야겠다.’ 그러다가 작더라도 집을 사야겠다.’ 처음에는 화장실 하나만 있어도 감사했는데 조금 지나면 화장실이 두 개는 되어야겠다.’ 그 후에 조금 있으면 방이 세 개는 되어야겠다.’

 

이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하며 만족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는 생각이 마음에 올라올 때 탐심이라는 죄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탐심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을 키우는 죄악입니다.

 

 

2)  탐심은 이웃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죄악이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언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조금이라도 이웃을 언급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많은 소출을 얻었으니 우리 동네 사람들과 같이 나눠야지.’라는 마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내 것, 내 것, 내 것, , 내가밖에 없습니다. 철저히 자기만의 세계, 이웃이 없는 혼자만의 삶,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 아닙니까?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관계의 존재입니다. 사실 이 부자가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주변 사람의 도움이 있었겠습니까? 솔직히 혼자만 잘나서 성공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고대사회는 사회가 단순하니까 어느 정도는 그게 가능했지만, 산업사회 이후에 자수성가한 사람 중에서 자기 혼자 힘으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업을 해서 엄청나게 성공하신 분들이 가끔 있는데, ‘내가 지혜가 많아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투자의 귀재라서 성공했다. 나 혼자 성공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함께하거나 동업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혼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승승장구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 최고 일류로 나오고,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박사도 하고 굉장히 잘 나가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국 최고 기업이라고 하는 S 기업의 사장도 되고 나중에는 장관까지 됐습니다.

 

이곳에 이사 와서 그렇게 오래 안 됐을 때였는데,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위한 활동이 있어서 워딩턴 도서관(Worthington Library)에 갔는데, 거기 놀랍게도 한국 책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밌을 것 같아서 몇 권 빌려 봤습니다. 그중 하나가 그분이 쓴 책이었는데, 한국 사회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성공한 사람이지만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보고 제가 놀랐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성공하기까지 자기가 굉장히 열심히 노력한 것은 맞지만 자기 혼자 힘으로 이렇게 되지 않은 것을 자기는 잘 알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봤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가톨릭 신자인데 엉터리 신자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기는 정말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계셔서 자기를 순간순간 이렇게 인도해주셨다고 고백하는 걸 봤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혼자 힘으로 성공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런 분은 정말 솔직한 분입니다. 그런데 나 혼자 성공했다. 내가 잘나서 성공했다.’라고 하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지금도 자기 혼자 잘나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만, 고대사회에도 비슷했습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씨앗을 뿌려야 되고 또 농기구와 가축을 사용했을 것인데, 그것들을 보급해 준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있었으니까 가능한 게 아닙니까?

 

씨를 뿌리기 위해 씨를 가져오려고 하는데 지금 씨가 없습니다.’라고 하면 어디서 가져오겠습니까? 농기구와 가축을 사용해야 하는데 어디서 구해오지 못하거나 누군가가 팔지 않으면, 또 가축도 사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걸 보급해 준 사람들의 손길이 다 있는 겁니다.

 

게다가 순간순간마다 도움의 손길이 다 있었습니다. 자기 혼자 농사를 짓겠습니까? 농사를 위한 일꾼들을 데려다가 했을 텐데, 농장을 확장하고 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소출을 거둔 겁니다. 엄청난 풍년이 되었는데, 풍년만 된 게 아니라 이 사람이 특별히 많이 거둔 겁니다.

 

그럼에도 이 부자는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다. 이제 나와 내 가족만 잘 살면 그만이다. 이웃이 굶든지 병들든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자기들이 제대로 못 살아서 그런 거지.’

 

요한계시록을 보면, 최후의 심판 장면이 나옵니다. 18장에서 종말을 이야기하며 특별히 바벨론이 무너진다고 하는데, 왜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강대국 중 하필 바벨론이라고 합니까? 물론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당시 로마제국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지만, 더 나아가 바벨론이란 물질주의에 물든 이 세상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핵심 가치가 되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세상에 가득한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돈이 가장 최고의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전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까?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까?’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물질주의 세상, 쾌락주의 세상이 요한계시록에는 바벨론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의 부유한 사람들은 고운 모시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으로 된 당시 최고급 명품 옷을 걸치고 금과 보석과 진주 등의 최고급 보물로 자기를 치장했는데, 그런 부가 한순간에 다 없어지고 망하는 모습을 요한계시록이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 물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바벨론 성의 마지막을 경고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런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면 안 된다.’ 하고 경고하며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보면 어떻습니까? 점점 더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80억이 넘었습니다. 80억 인구 중에서 10억 정도 되는 사람들이 매일 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 10명 중 4명이 영양실조로 장애아가 됩니다. 세계에서 8억 명이 기아에 시달리며, 매일 25천 명이 먹을 게 없어 죽는다고 합니다. 매일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습니다. 그런데도 나만 잘 먹고 잘살며 내 가족만 편안하게 지내면 하나님이 괜찮아.’라고 하시겠습니까? 만일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뭐라고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나중에 우리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설 텐데, 여기 이 세상에서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100% 다 죽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그 전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반드시 섭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약시대부터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바로 그런 탐욕을 물리치는 방법으로서 헌금과 십일조의 원리를 가르쳐준 것입니다.

 

제가 전에 한국에 갔을 때 제가 다니던 교회 사람들과 함께 모였는데, 목사는 저와 또 다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 한 명이 말했습니다. “여기 목사님 두 분이 계시네. 두 가지 부탁을 좀 하자. 첫째, 헌금 설교 좀 하지 마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헌금 설교를 해야 합니다. 사실 저는 별로 헌금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한국 교회는 이 헌금, 저 헌금 등 헌금하라는 설교가 정말 많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헌금을 많이 내라고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성경의 원리를 알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십일조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회식의 십일조가 있었는데, 다 같이 돈을 내고 다 같이 먹는 겁니다. 왜 다 같이 돈 내고 다 같이 먹으라는 겁니까? 거기서 같이 사랑을 나누라는 겁니다. 혼자만 따로 떨어져서 본문의 부자처럼 혼자 살지 말고, 같이 공동체로 사랑을 나누며 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십일조 중 중요한 게 구제의 십일조였습니다. 이것은 3년에 한 번씩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나눔의 의무를 강조하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안 내면 하나님이 벌 주시니까 내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일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탐심은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3)  탐심은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인이심을 잊어버리게 하는 죄악이다

 

그렇다고 성경이 물질의 필요를 부정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돈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하지 않고 돈을 사랑함(탐욕)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헌금, 저런 헌금, 십일조 헌금 등 무조건 바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1-33)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다만 우선권을 분명히 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경고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적 재물관의 출발점이 여기 있습니다. 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관리하는 삶을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탐심의 노예가 되는 순간 참 주인을 잊어버린다는 점입니다. 탐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삶이 복잡해지고, 평생 염려의 문제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평생 염려, 불안, 두려움, 조급함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주인을 할 자격이 안 되는데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불완전합니까?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완전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그 배우자에게 물어보십시오. 약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기 주인이 되어서 그 삶을 이끌어 가니 얼마나 문제가 많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5)

 

탐심의 지배를 받으면 내가 원하는 그것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데, 바로 그게 우상 숭배라는 겁니다.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우상숭배자의 인생이 망가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멀리하라고 가르칩니다. 탐심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망각하게 만드는 죄이고, 우리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3.   탐심을 제거하는 길 (20~21)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탐심의 죄악에서 해방되어 우리가 참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1)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날마다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의 절정 부분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0)

 

부자는 어떤 말을 강조했습니까? ‘내 곳간, 내 곡식, 내 물건, 내 영혼이라고 하면서 자기 생명도 자기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은 이 정도가 안 되는데 이 사람은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다면 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까? 굉장히 스마트하고 남들보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곡식을 쌓아 놓기 위해서 지금 헌 곳간을 헐고 세 곳간을 크게 짓겠다며 투자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게 뭐가 나쁩니까? 그렇게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일하며 그 결과로 자기가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겠다는데, 얼마나 좋은 계획입니까? 정말 똑똑하고 정말 스마트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똑똑해 보이고 스마트해 보이는 이 부자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우리가 볼 때는 똑똑한 사람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네 영혼을 오늘 밤 내가 찾을 텐데, 그러면 네가 준비한 이 모든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지금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했는데, 자기 생명은 자기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내 것을 내가 찾겠다.’ 하시는 겁니다. ‘네 것인 줄 알았지? 네 것이 아니야. 내 거야. 내가 찾을게. 그러면 이게 다 누구 것이 되냐?’라는 겁니다.

 

이 부자는 기존의 창고로는 안 될 만큼 소출이 많아서 새 창고를 짓고 거기 쌓으려 합니다. 그런데 농사라는 게 아무리 풍년이라도 예년의 두세 배나 열 배가 나는 게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기껏해야 10~20% 더 많이 나오면 풍년이라고 하며 기뻐했는데, 이 부자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힘으로 된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엄청난 소출을 거두도록 부어주신 겁니다. 그런데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내 영혼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얼마든지 먹고 마실 수 있다. 이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시면서 즐기자.”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부자가 창고를 새로 크게 지어야 할 만큼 초자연적인 결과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혼자만 움켜쥐고 자기 혼자만 즐기겠다고 하니, 하나님 보시기에 이보다 더 큰일 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생명을 취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그가 보통 사람보다 100배를 더 벌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혼자 그것을 다 쓰면 어떻게 됩니까? 100명이 있으면 99명이 굶어 죽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100배의 수확을 거뒀는데 100명이 할 것을 자기가 다 가져갔으니 나머지 99명은 굶는 겁니다. 그럼 이 사람이 없어지면 나머지 99명이 그 혜택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하나님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가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네 영혼을 오늘 밤 찾는다면 이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나는 네 영혼을 오늘 밤 데려갈 것이다.”라고 아예 선포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죽어야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많이 움켜쥐는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조금 과장법을 더하셔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가 되면 무조건 하나님이 생명을 가져가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정도로 탐욕이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죄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이런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꿈입니다. 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고, 좋은 학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좋은 직장을 잡으려고 애씁니까?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 그것으로 자기만을 위해 쓰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날 밤에 당장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탐욕을 따라 사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때이고 우리에게 너 이제 거기서 그만 살고 이리 와.”라고 하시면 다 놓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찾으시는 순간, 내 소유가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내 소유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인생도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보십시오. 내 몸을 내가 맘대로 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내 몸인데 머리가 하얘지고 빠지는 것을 내가 원하지 않지만 그렇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빠지고 하얘집니다. 이것은 내 몸조차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느 재벌이 죽었을 때 한 기자가 재벌의 아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부친께서 재산을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아들이 대답합니다. “다 남기셨습니다.” 참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다 남기고 갑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1센트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중에는 그것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확인해야 합니다.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이 규칙적인 예배 생활이고 또한 탐심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주신 제도가 헌금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각자 어떻게 내야 하느냐, 얼마나 내야 하느냐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십일조와 헌금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모든 헌금이 다 그렇지만, 특히 십일조라는 것이 무슨 율법의 계명이거나 부담이거나 강요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내 모든 소유, 심지어 내 생명도 하나님 것입니다.’ 하고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규칙적으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특히 십일조를 할 때마다 이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1/10만 하나님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전부 다 하나님 것이지만 그중에서 1/10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통해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신앙의 고백이자 사랑의 표현입니다. 특히 십일조가 그렇습니다.

 

십일조 이야기를 하면 꼭 이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택스 전으로 내야 해요, 택스 후로 내야 해요?” 그런 것을 몇 센트까지 따져가면서 하지 마시고,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믿음을 가진 만큼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10%를 정확히 센트까지 따져가면서 내느냐 안 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믿음으로,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것이 결국 나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내가 탐심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망치지 않도록 지켜 주는 것이 십일조와 헌금입니다.

 

여러분, 지금 노후 대책으로 연금을 붓거나 투자를 하는 분들이 계실 텐데, 주식 투자를 하거나 401K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받는 샐러리에서 몇 퍼센트를 그리로 미리 넣어 놓는 겁니다. 월급에서 떼어서 넣습니다. 떼어서 넣으면 그 돈이 없어집니까? 내가 은퇴한 다음에 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습니까?

 

가끔 보면 십일조에 대해 택스를 뗀다고 하며 세금 내는 것처럼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은 택스가 아니고 투자입니다. 사실 노후 대책을 위해 그렇게 투자해 놓으면, 연금이나 주식에 투자해 놓으면, 은퇴한 다음에 얼마나 갑니까? 예를 들어, 65세에 은퇴해서 100세까지 산다고 하면 35년을 위해서 투자해 놓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투자는 20, 30, 40년을 위한 투자가 아닙니다. 영원한 시간을 위한 투자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감이 안 잡히는 그런 기간입니다.

 

그렇다고 돈이 없는 사람을 막 쥐어 짜내면서 너 십일조 내야 돼!’라고 하나님이 그러시겠습니까? 우리가 100만불, 200만불을 헌금해도 하나님께는 푼돈입니다.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런 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고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기를 원하셔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탐심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한 다음 끝나고 버려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기억하고 기록해 놓으십니다. ‘얘가 이런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했다.’라고 기록해 놓으시고, 지금 천국에 내 집을 지을 재료로 그것을 사용해 주십니다.

 

여러분, 저 천국에 가서 어마어마한 큰 집에 살 자신이 있으십니까?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 있으십니까? 그것을 미리 보내 놓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인색하게 굴면 전혀 영원한 천국을 위한 투자를 안 하는 게 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래서 어리석은 자여라고 하시는 겁니다.

 

 

2)  (탐심에서 해방되어 참 기쁨을 누리려면)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 성경은 결론적으로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21)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와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진정한 부자는 다른 것을 원하지 않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1)

 

다윗은 돈만 많았던 게 아니라 진짜 부자였습니다. 마음의 부자였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다른 교회 설교를 부탁받아서, 그 교회 행정 간사가 주보 때문에 설교 본문과 제목을 여쭤보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설명하기를 , 본문은 시편 23편이고요,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거기까지 말하고 통화가 끊어졌습니다. 시골 지역에 있어서 전화 연결이 잘되지 않아 다시 물어보기를 두어 차례 하다가 결국 잘 안 되니까 목사님은 짜증이 나서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주일에 설교를 위해 그 교회에 가서 주보를 본 강사 목사님은 어이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보에 나온 설교 제목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그런데 바로 이것이 진짜 부자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게 있으면서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입니까?

 

일반 철학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 키케로(BC 1세기 로마 정치인, 변호사, 작가): “검소함에는 다른 모든 덕이 포함된다.”

 

- 세네카(AD 1세기, 로마 스토아 학파 철학자): “가난한 사람이란 너무 조금 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 많이 갈망하는 사람이다.”

 

- 에픽테토스(AD 1세기 말~2세기 초, 그리스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 “부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적게 원하는 데 있다.”

 

 

[나가는 말]

 

테레사 수녀가 미국에서 순회 집회를 할 때, 하루는 미국의 엄청난 부호와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가장 필요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그는 큰 기부를 할 마음으로 질문했던 것입니다. 엄청난 기부금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이요? 제게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이런 것을 우문현답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탐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계속 채우면 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리스도로 가득 차서 그리스도가 내 모든 것이 되시면, 이 세상에서 조금 부족한 것이 있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불편할 뿐이지 별 지장이 없습니다.

 

탐심으로부터의 자유와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주인이 되신 삶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매 순간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아 최고의 행복을 누리며 주님께 인정받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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