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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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7 ✦
“천국 상은 자기 공로 때문이 아니다”
(마태복음 20장 1~16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각자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분도 있고, 비즈니스를 하는 분도 있고, 학생도 있습니다. 또 은퇴하신 분들도 있는데, 은퇴해도 여전히 바쁘게 지내지 않습니까? 또 전업 가정주부도 있습니다. 요즘은 아내가 일하고 남편이 전업주부를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아내가 미국에 이민 왔을 때, 어딘가에 가서 서류를 쓰는데 아내 직업란이 있어서 Housewife라고 썼습니다. 그랬더니 거기 있던 분이 그것을 보고 “No, no.”라고 하며 다시 쓰라고 했습니다. Homemaker로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집과 결혼한 게 아니라 가정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설명까지 친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집을 가꾸는 것도 상당히 바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직장에서 일을 하는데, 이제 급여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12시간을 일했고, A라는 사람은 9시간을 일했고, B라는 사람은 6시간을 일했고, C라는 사람은 3시간을 일했고, D라는 사람은 1시간만 일했습니다. 이제 회사에서 각 직원에게 돈을 주는데, 1시간만 일한 D가 $300을 받습니다. 그러자 다들 속으로 깜짝 놀랍니다. ‘야, 한 시간 밖에 일을 안 했는데 많이 받네. 시간당 저렇게 많이 주는구나.’
이제 C가 받을 차례가 되어 속으로 계산합니다. ‘저 사람이 한 시간만 일하고도 $300을 받았는데, 나는 3시간을 일했으니까 3X300 해서 $900을 받겠네.’라고 생각하며 좋아합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준 돈을 보니까 똑같이 $300입니다. 뭔가 불공평하다고 느낍니다. 그다음 6시간을 일한 B에게도 $300을 주고, 9시간을 일한 A에게도 $300을 주고, 12시간을 일한 나에게도 $300을 줍니다.
여러분이 그런 일을 당하셨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불공평하다고 느끼며 화가 날 게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를 ‘포도원 품꾼 비유’라고 하는데, 이 비유가 바로 이런 식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부자 청년 사건과 포도원 품꾼 비유의 관계
이 ‘포도원 품꾼 비유’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와 함께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비유로 평가됩니다. 이 비유의 해석이 어려운 것은, 예수님 당시와 오늘 사이에 약 2천 년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고, 이스라엘과 미국이라는 공간적인 차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차이와 함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비유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의 구절(19:30)과 본문의 가장 마지막 구절(20:16)이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오늘 비유가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형식인데, 비유의 내용을 보면 먼저 온 품꾼들과 나중에 온 품꾼들이 똑같이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씩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 말씀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이 불공평한 분이시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포도원 품꾼 비유로 보면서, 누구나 똑같은 상급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모든 일꾼이 똑같은 액수를 받기 때문입니다.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1-7절)
이것을 읽어보면, 아침 일찍부터 일꾼으로 일한 사람들이 있고, 3시(오전 9시), 6시(낮 12시), 9시(오후 3시), 그리고 11시(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이 일하고 받은 대가가 모두 똑같습니다. 한 데나리온씩 받습니다. 그래서 상급에는 차등이 없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이 비유를 잘 해석하기 위해서는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9장 뒷부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비유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19:27)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뭐라고 합니까? 어떤 부자 청년이 와서 예수님과 대화하는데 그 사람이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예수님은 “계명을 지켜라.”라고 하시면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 십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가 다 지켰다고 하니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다음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여기서 하는 말은 “저 부자 청년은 못 버리고 갔지만 우리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무슨 상을 주시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저 청년은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전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뭘 의미합니까? 자기 공로를 의미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잘했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못 했는데 자기는 잘했다는 겁니다.
사실 저 사람은 돈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버리기 힘든 것이고, 베드로는 가진 게 별로 없으니까 버려도 손해가 없으니까 따른 것인데, ‘저 사람은 못 버렸는데, 나는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무슨 상이 있습니까?“ 하며 자기가 잘했다고 합니다. 자기 공로에 근거한 상을 질문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나온 부자 청년 사건을 살펴봐야 하는데, 19:16을 보면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사람은 부자였고 청년이었고 관원이었습니다. 아주 젊은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젊은데 부자이고, 관직에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딸을 저 사람에게 결혼시키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와서 질문합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9:16) 그러자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십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9:18-19). 주로 십계명의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19:20)라고 말합니다. 어릴 때부터 다 지키면서 자라 왔지만 뭔가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던 겁니다. 다 하기는 했는데 ‘내가 과연 구원받았을까? 영생을 얻었을까?’ 확신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 부족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19:21, 새번역)
이 말씀을 듣고 그는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재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돈이 우상이었습니다. 다른 계명은 다 지켰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1~4계명)은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고 하신 제1계명을 비롯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는 열심히 지킨다고 지켰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의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세워지지 않은 채 그저 이웃에게 잘하는 도덕적, 윤리적인 삶만 살았던 겁니다.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돈이 하나님이었습니다. 돈이 우상이었고 신이었습니다. 영생을 얻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돈이 딱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못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거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며, 그래서 다 팔아 나누어주고 와서 따르라고 해결책을 제시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다 처분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돈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에 그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는 그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본 예수님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19:23-24, 새번역)
낙타는 엄청나게 큰데 바늘구멍은 얼마나 작습니까? 어떻게 그리도 큰 낙타가 아주 작은 바늘구멍으로 들어간다고 하십니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중에도 두 가지 반응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어, 큰일 났다. 나는 돈이 많은데.’ 또 하나는 ‘휴, 다행이다. 나는 돈이 없어서.’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돈이 많으냐, 적으냐를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19:25) 당시 통념으로 부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 관원 정도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다 쓸어 담아서 저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복을 받았다고 하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즉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을 듣고서, 조금 전에 읽은 19:27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겁니다. “저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갔지만, 우리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무슨 상을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에 담긴 마음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는 말에서 무엇이 강조됩니까? ‘우리는’, ‘나는’입니다. 저 사람은 못 했는데 우리(나)는 했다.‘라는 자기 공로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라고 하며 자기 공로에 근거한 상에 대해 질문한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9:28)
“무슨 상을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결론부터 말씀하십니다. 그 중간에 고난과 죽음과 순교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론만 말씀하십니다. 특별대우를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그들은 그렇게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절에 보면, 분명히 상에 차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등 상급은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19:29)
자기들(열두 제자)이 무슨 상을 얻겠느냐고 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히 차등 상급이 있다고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엄청난 특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다음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것을 포기한 사람은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9:30)
오늘 본문 맨 뒤의 구절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20:16)
글자는 약간 다르지만 똑같은 내용인데, 똑같은 말씀을 두 군데서 하십니다. 그러니까 19장 뒷부분 말씀의 핵심과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의 핵심이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우리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한 상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 예수님은 일단 “그래, 너희에게는 큰 상, 특별한 상이 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바로 19:30과 20:16에서 ‘그런데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아닙니까? ‘특별한 상을 분명히 받을 것인데, 그 상을 받는 이유는 네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들어 있는 자기 공로 사상이 틀렸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저 청년은 재물을 포기하지 못해서 저렇게 근심하며 갔지만, 우리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일단 자기들과 저 청년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못 했는데 우리는 했네.’
그러면서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저 사람은 틀렸고 우리는 옳다. 저 사람은 잘못했고 우리는 잘했다.’라는 것을 누가 판단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자기가 심판하며 재판하고 있습니다.
자기 기준이 중심입니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 의하면 ‘저 사람은 틀렸고 나는 옳다는 겁니다. 내 생각이 옳다. 저 사람이 잘못했다. 나는 옳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 사회의 문제가 이것 아닙니까?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누구나 그러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복잡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 상황을 계산하면서 자기 의와 자기 공로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주님이 보실 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특별한 상을 받을 것인데, 그 이유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뭔가를 잘해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실수를 할 가능성이 큽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합니다. 저 사람은 별로 열심히 안 하는데 저는 이렇게 열심히 합니다. 저 사람은 별로인데 저는 얼마나 예쁘십니까? 저 사람은 열심도 없고 제대로 하지도 않는데, 저는 이렇게 열심히 충성 봉사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기 공로 사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고쳐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고쳐주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포도원 품꾼 비유입니다.
2. 자기 공로 사상을 버리라
이 비유를 보면, 1~7절까지 말씀은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침 일찍 와 있는 사람, 오전 9시에 온 사람, 낮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 다섯 그룹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와서 일하는 것 자체에는 이상한 것이 없고, 오히려 주인이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계속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왜 놀고 서 있느냐고 묻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에게 돈이 있고 밭이 있는데 놀고 서 있는 사람을 보면 보통 사람은 ‘놀고 있네.’라고 하며 지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이 주인은 왜 놀고 있느냐고 물으며 와서 일하라고 초청했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실업률이 70~80%나 되었는데 일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요즘은 실업률이 5%만 되어도 화들짝 놀라는데, 당시는 그렇게 높았습니다. 그래서 일하게 해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8절부터는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내용입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부터 삯을 먼저 주라고 하시는데, 이것부터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8절)
비유는 보통 이 땅의 여러 인물이나 사건들이나 사실들을 통해 천국의 진리를 전해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개는 비유 하나당 한 가지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것에서 시작하여 가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야기를 확 뒤집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과격하게 방향을 확 트시는 포인트입니다. 이 포인트를 잘 보면서 그다음 무슨 말씀을 하시나 잘 보아야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이 비유에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진리의 핵심입니다.
“9 제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9-10절)
일단 주인은 순서를 뒤바꾸어서 가장 늦게 온 사람부터 삯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지급합니다. 그랬더니 처음 와서 일을 훨씬 오래 한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며 항의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1-12절)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고, 우리는 12시간 일했는데, 9시간 일했는데, 하루 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했다.” 이 결정적인 항의에 대해 주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 대답이 이 비유의 초점입니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3-15절)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악하니까 나를 악하게 보느냐? 나는 악하지 않다. 나는 선한 주인이다. 나는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그러느냐?’ 너무나 맞는 말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의 암적인 자기 공로가 여지없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못 버렸지만 나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는 말은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저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며 자기가 더 낫다고 심판을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고쳐주려고 하십니다. ‘심판하는 존재는 네가 아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지, 네가 하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비유하며 말했습니다.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태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고귀한 향유 속에 들어 있는 죽은 파리와 같다.” 아주 향기가 좋은 향유에 죽은 파리가 빠져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쓰겠습니까? 왕에게 바치는 최고급 식사에서 먼저 맛있고 비싼 수프를 최고의 쉐프가 내놓는데 거기 바퀴벌레가 빠졌다면 그것을 왕에게 드릴 수 있습니까?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과도 같다는 말입니다.
주님께 충성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고 너무나 값진 것이라 주님께서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충성하는 사람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까 상을 달라’라고 자기 의와 자기 공로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향유에 빠진 죽은 파리와도 같고 최고급 수프에 빠진 바퀴벌레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것을 다 망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이 아름다운 향유 속에 빠진 죽은 파리, 최고급 수프 속에 빠진 바퀴벌레와 같은 충성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자기 공로라고 하는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비유는 상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상은 분명히 있지만 상에 대해서 잘못된 태도를 가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은 충성하는 자에게 분명히 상을 내려주십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주님께 마음을 드리며 헌신하고 ‘주님, 저를 받아주십시오.’ 하며 충성하면 분명히 상을 주십니다.
그런데 ‘상’이라고 하니까 잘못 이해하고 얼굴이 굳어지는 분들도 가끔 있습니다. ‘아니, 천국에서 무슨 상을 주고, 그것도 사람마다 상을 차등으로 주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상을 주십니다. 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을 때 천국에서 차등으로 받는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상을 받느냐, 누구는 큰 상을 받고 누구는 작은 상을 받느냐 하는 게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을 받는데, 그것은 절대로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뭘 잘해서, 우리가 잘나서 상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우리를 살려놓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주셨습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을 하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포기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 주님, 내가 미끄러진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 19 내 마음이 번거로울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나를 달래 줍니다.” (시 94:18-19, 새번역)
그렇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붙들아 주셔서 우리가 잘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운전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사고가 안 나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고가 안 나도록 하나님이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사고 날 때 그것을 크게 느낍니다. ‘이렇게 쉽게 사고가 나는데 어떻게 그동안 안전하게 다녔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막아주셨습니다.
저도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어떤 때는 졸기도 하고, 어떤 때는 딴짓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길을 벗어나기도 하는데, 그때 옆에서 차가 왔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아무 차가 오지 않습니다. 이런 게 어떻게 자기 능력으로 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잘나서 사고 없이 다니고, 운전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그런 거라고 어떻게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붙잡아 주셔서 잘살고 있고 작은 선행이라도 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잘나서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며 사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완전 착각입니다. 모든 공로는 주님의 공로이고, 모든 영광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그저 신실하게 충성할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저 작은 일에 순종하는 우리를 너무나 귀하게 보시고 그것에 대해서 상을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인데 상을 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인데도 거기에 대해 상을 주시니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며 섬기는 겁니다.
우리가 봉사하고 예배하고 섬기는 모든 것은,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받았기에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주일 아침 황금 시간에 왜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까?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3.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다
성경을 보면 상에 대해 화려한 묘사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상의 특징입니다. 성경에 상이 무엇인지에 자세히 설명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내용은 있습니다. 그중 몇 구절들을 보면 이렇습니다.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약 1:12, 새번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은 분명히 상을 말합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의의 면류관’이라고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벧전 5:4)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4-25)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등이 구체적으로 이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설명을 해주셔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세종대왕이 살아서 우리에게 왔다고 해보십시오. 우리가 서로 대화하는데 ‘티브이에 보시면 저 사람들이 멘붕에 빠졌고 저 사람들은 깜놀했는데...’ 이렇게 말하면 세종대왕이 알아듣겠습니까? 같은 언어를 하는데도 못 알아듣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은 이런 것이고 저런 것이고...’라고 아무리 설명해 주셔도 우리는 같은 언어라도 그 개념이 없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상급에 대한 말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급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느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100 정도의 일을 했는데, 회사에서 $1,000을 줍니다. 이게 뭐냐고 하니까 $900이 보너스라고 합니다. 그럼 어떤 마음이 듭니까? ‘어, 이래도 되나? 이거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건가?’ 또 $200 정도의 일을 했는데 이번엔 $2,000을 줍니다. 또 보너스라고 합니다. 그러면 ‘야, 이거 정말 이래도 되나?’라고 하면서도 ‘정말 감사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며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1,000 정도의 일을 하니까 $10,000을 줍니다. 10배로 항상 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다음에 내가 2천 불에 해당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 ‘얼마 주실래요? 정말 2만 불 주실래요?’라고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서 잘해주시기 때문에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나는 그냥 맡은 일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엉터리로 하면 안 되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결과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서 잘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그런 고용주보다 훨씬 더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사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뿐인데도 하나님은 지극히 큰 것으로 채워주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채워주실 분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가 한 것에 대한 상이 뭐냐고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상을 주세요. 여기에 맞는 상을 주세요.’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상상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으로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가장 핵심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상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안 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뢰하며 믿을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그와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나고 놀라운 상으로 우리를 채워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나가는 말]
지금으로부터 100년 이상 전에 독일의 오벨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좋은 일을 많이 하던 박애주의자였습니다. 지금은 프랑스영인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 근처에서 엄청난 눈보라 속에 여행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바람 때문에 한 군데 몰려 쌓인 눈구덩이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마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벨린은 마부에게 “선생님, 제가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부는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선생님의 이름이라도 알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마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저에게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러면 제 이름을 알려드릴게요.” “아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마부가 말했습니다. “제 이름도 없습니다.”
이처럼 죽을 사람을 자기가 살려주고도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 못하고 자기 공로 의식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했는데 뭘 주실래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공로 의식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부자 청년과 자기를 비교하며 스스로 평가하고 심판하는 상황에서 자기 의와 자기 공로가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라는 것을 강조하심으로써 인간의 공로 사상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단순히 먼저 믿은 사람이 뒤로 처지고 늦게 믿은 사람이 앞서간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런 뜻도 조금은 있지만,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순서가 뒤바뀐 말씀이 바로 이 비유에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인간의 시각으로 본 순서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저 앞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저 뒤에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분은 정말 훌륭해. 저분은 너무 착해. 저분이 예수님은 믿지 않는데, 저분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야.” 과연 그럴까요? 내 시각으로는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저 사람은 너무 훌륭합니다. 천국에서 최고 상석에 앉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저 사람은 별 볼 일 없다고 하는 사람이 천국에서는 가장 앞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판단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의 관점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그것을 하기 위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바른 평가를 내려주십니다.
물론 충성과 봉사는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평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평가하면 그게 바로 자기 공로에 빠지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 베드로라든지 또 바리새인들 같이 잘못된 사고방식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평가와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주 어릴 때부터,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신앙인들이 계실 줄 압니다. 또 몇십 년 동안, 평생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충성 봉사하며 교회에서 섬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믿거나 열심히 봉사할수록 자칫 잘못하면 베드로가 빠졌던 자기 공로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더욱 겸손히 섬겨야겠습니다.
섬김은 섬김대로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알아주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나의 공로를 주장한다면, 아주 귀한 향유에 빠진 파리 같은 것, 왕께 드리는 최고급 수프에 빠진 바퀴벌레와 같은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직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만 사랑하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