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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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9 ✦
“순종으로 인한 고난은 실패가 아니다”
(마태복음 21장 33~46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의 집에는 성경이 몇 권이나 있습니까? 저는 다 세보지 않았지만, 영어 성경까지 해서 교회 목양실과 집에 있는 성경을 다 합치면 20권이 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여러분이 실제로 사용하는 성경은 몇 권입니까? 대개는 한 권인데, 이 시대에는 0권입니다. 한 권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부 전화기 같은 것을 사용하니까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교회 올 때 어른들도 종종 그렇지만, 특히 젊은이들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청년들은 <생명의 삶>을 듣는 청년들입니다.
영원한 베스트셀러인 성경은 가장 세상에 많이 있는 책이면서 동시에 가장 안 읽는 책이기도 합니다. 가장 많은데 가장 읽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장 익숙한 책이면서도 가장 생소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해야 하는데에,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장 읽지 않는 책이 성경입니다. 요즘은 성경의 경쟁자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다른 책들이었는데, 이제는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입니다.
<말씀의 삶> 공부를 해보면 그것을 느낍니다. 성경을 안 읽는 것은 시간이 없거나 바빠서가 아니라, 사실은 우선순위를 거기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말씀의 삶>은 숙제가 성경을 읽는 것인데, 그 양이 많습니다. 하루에 7, 8장 내지 열 장 이상 읽어야 90일에서 100일 사이에 한 번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기 참여하는 분들이 다 읽으십니다. 이제 갓 예수님을 믿은 아주 초신자, VIP에서 막 벗어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금방 받은 분들도 끝까지 다 읽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정말 읽으려고 작정만 했으면 이전에도 충분히 읽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성경 안에는 정말로 뭐가 들어 있습니까? 두꺼운 성경이지만 그 내용은 딱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계’입니다. 성경은 ‘관계의 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졌고, 따라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도 깨어졌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이토록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바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통해 깨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 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뭔지 알지 못하면 자기 마음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며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교도 하는 것이고, 삶 공부도 하는 것이고, 매일 개인적 말씀 묵상도 하는 것입니다.
1. 열매를 원하시는 하나님 (33절)
오늘의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지금 우리 식으로 읽어서 안 됩니다 그러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 21세기에 눈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잘못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당시 상황 속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장 처음 성경을 받아서 읽은 사람들은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아니고 오래전 2천 년, 3천 년 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당시 상황을 알고 그 상황 속에서 왜 이 말씀이 주어졌는지 연구해야 그 뜻을 바로 깨닫게 됩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말씀 중에 특히 당시 멀리 타국으로 여행을 떠난 주인과 그가 고용한 농부들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요단강 북쪽의 땅과 갈릴리 산지 대부분을 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 주인들과 그들 밑에서 일하는 현지인 농부들 간에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외국인이고 일하는 사람은 현지 유대인입니다. 그들 사이의 갈등은 어쩌다 가끔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매일 일어날 정도로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3절)
예수님이 지난주 바로 앞에 있는 본문에서 두 아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어서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여기 보면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타리를 칩니다.
이렇게 울타리를 치는 것은 산에서 여우나 멧돼지 같은 들짐승들로부터 포도원을 보호하고, 또 자기 포도원의 포도나무 가지들이 남의 땅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지가 남의 땅에 넘어가면 그 사람에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자기 포도 가지가 그리로 넘어가서 포도 열매가 그쪽에서 열리면 그냥 따가도 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포도원 안에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만들고, 망을 보며 그 안에서 지낼 수도 있는 망대도 지어 세웁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사실 그 당시 지주가 이처럼 새로운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인 농부들에게 주는 것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을 만들었다고 당장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만든 후 최소한 4년은 기다려야 하고 5년째가 되어서야 첫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포도원을 만들어 세를 주고 떠난 주인의 행동들을 보면, 자신의 포도원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나서 그것을 거둘 수 있다는 그의 기대감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열매를 찾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5장을 보면 소위 ‘포도원 노래’라는 것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가리켜 포도원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포도원을 만들고 땅을 파서 돌을 없애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망대도 세우고 틀도 만듭니다. 더 이상 잘해줄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환경을 갖추어주신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당연히 좋은 포도 열매를 맺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은 그렇게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포도가 아니라 들 포도를 맺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사 5:7, 새번역)
하나님은 그들이 사랑과 공의로 잘 살기를 바라셨는데, 악만 행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남들을 희생시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좋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셨지만, 그들은 그러한 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악한 짓만 일삼다가 실패하고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통해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로부터 좋은 열매를 거두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멋지고 거룩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아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하나님은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것을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잎은 무성하지만 정작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열매를 맺길 원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삶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장소 개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을 뜻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열매라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말합니다. 내 생각에 좋은 열매나 내가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열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나의 삶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내 삶을 보시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슬퍼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점검해야겠습니다.
19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불리는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 목사에게 교인 하나가 와서 성지 순례를 간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지에 가면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큰 소리로 십계명을 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하면 목사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브룩스 목사는 의외로 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러십니까? 저에게는 그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 교인은 “그게 뭔가요? 목사님, 더 좋은 게 뭐라는 말씀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브룩스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수천 마일 여행 가서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모세가 거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십계명을 읽는 것보다, 여기 집에 있으면서 십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고 하는 그 장소에서 십계명을 읽는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의미가 있는 일입니까?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삶 속에서 말씀대로 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라는 말입니다. 시내산 꼭대기에 가서 십계명을 읽어놓고는 그 십계명 내용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 우상을 두지 말라는 것 외에도,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웃의 것을 늘 탐내고 살면서 십계명만 줄줄 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에 관해서 연구하고 책을 읽으며 사랑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강의하는 것도 좋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물 한 잔 가져다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곡을 뛰어난 음악 실력으로 아름답게 부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그것이 마음에 와닿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는 것이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전도에 대해, 선교에 대해, 기도에 대해, 예배에 대해 세미나를 하고 공부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단순히 자기 삶을 이웃과 나누는 것, 단순히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한두 마디 기도하는 것을 더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천에게 ‘섬김’이 중요합니다. 섬김을 외치며 강조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단순히 자기 가정을 오픈하여 목장 모임을 하거나, 안 믿는 VIP를 초대하여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 주님이 더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좋아하는 열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할 수 있을 때만 하고 할 수 없을 때는 안 하는 등 나에게 달린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또 그 열매를 우리에게서 찾으십니다.
2. 하나님의 심판 (34~41절)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4절)
포도원을 다 꾸민 다음 농부들에게 그것을 맡기고 여행을 떠난 주인은, 이제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서 농부들에게 자기 열매를 달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주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주인의 권리입니다. 듣던 사람들도 ‘당연하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5절)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서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칩니다. 아주 극악무도한 짓을 벌인 겁니다. 이러한 악한 행위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세를 얻은 농부로서 당연히 주인에게 속한 열매를 바쳐야 했지만, 하나도 바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까운 겁니다. 전부 다 자기들이 갖기를 원합니다. 물론 자기들도 일하고 대가를 받지만, 기본적으로 포도원에서 나는 모든 열매는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포도원이 마치 자기 것인 양 행동합니다.
이 주인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그 악한 농부들을 요절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인내를 가지고 또 다른 종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6절)
그 정도로 악하게 했으면 당장 군사를 보내서 이 농부들을 다 죽여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그러자 이 악한 농부들은 이번에도 똑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칩니다. 그러자 주인이 이번에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다 진멸합니까?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37-39절)
주인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자기 아들은 존중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그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아예 죽여버립니다. 그들은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을 보니까 주인이 죽었을지 모른다고 짐작하면서, 그 땅을 물려받을 유일한 상속인인 이 아들을 죽이면 그 땅이 자기들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죽입니다.
그 당시 법은 상속인이 없는 땅을 주인 없는 땅이라고 표시해 두어서, 일정 기간이 지났는데 아무도 찾지 않으면 그 땅은 누구든지 먼저 차지한 사람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농부들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주인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38절에서 그들은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 땅이 분명히 주인의 땅임을 알고 있고 주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의 소유가 될 것임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들을 죽입니다. 즉, 반역하고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0-41절)
세를 얻은 농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주인에게 열매를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에게 반역하여 열매를 주지 않았고, 심지어 주인이 열매를 달라고 보낸 종들을 때리거나 죽이고 마지막에는 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되며, 포도원은 세를 잘 바칠만한 다른 사람들이 새롭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것처럼, 이제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곧 죽이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자신을 거부하다가 마침내 죽이기까지 한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임을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이 마지막으로 보낸 것이었듯,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시는 마지막 메신저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말도 안 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당신의 종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계속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인내는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반역을 저지를 경우 당장 가서 다 물리치고 해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계속 종을 보내고 또 보내다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보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그 인내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으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참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직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분명히 심판의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악함과 실수를 다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인내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돌이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게 다 끝나고 천국 가면 좋겠다. 이 세상이 너무 힘든데 빨리 천국 가면 좋겠다.’ 또 악이 날뛰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걸 보면 ‘하나님은 저런 사람들 왜 그냥 두시나? 당장 심판하시고 끝내시지 왜 저렇게 그냥 두시나?’라는 생각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무기력하거나 능력이 없거나 어쩔 수 없어서 가만히 계시는 게 아닙니다. 지금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별로 하는 것도 없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안 하고, 예배도 가끔 빠지고,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 하고,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릴 때부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 다닌 모태 신앙인들이나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 중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벌 받을까 봐 교회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 중에 교회 빠지면 벌 받을까 봐 지금 교회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얼마나 짐스럽습니까? 그것은 정말 부담이 됩니다. 얼마나 부담스럽고 괴롭습니까?
사실 교회를 어릴 때부터 다닌 사람은 교회를 빠지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번 빠지게 되면 ‘혹시 벌 받는 게 아닌가?’ 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빠져 봅니다. 역시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몇 번 해보니까 ‘아, 별거 없구나. 안 해도 상관없구나. 안 해도 괜찮은 거구나.’라고 생각하는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즉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세 계명을 주셨는데 사랑은커녕 미워하고 불편해하고 멀리하는 삶을 살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벌 받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 괜찮은가 보다.’라고 착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 그것은 괜찮은 게 아닙니다. 지금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인내하고 계십니다.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빨리 회개하고 정신 차리고 깨어나기를 지금 기다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기다리지는 않으십니다. 분명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무조건 죽이고, 따르지 않으면 다 멸망시키는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하는데, 잘 읽어 보십시오.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을 제대로 안 읽으니까 그런 하나님의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죄인이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안 한다고 하며 돌이키지 않다가 마침내 때가 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주님의 뜻대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주변에 믿지 않는 가족, 친구, 이웃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로 놀란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국에 들어갔더니 ‘어, 저 사람이 와 있네?’ 하고 깜짝 놀랍니다. 또 ‘어, 그 사람은 왜 없지?’ 하며 두 번째로 놀랍니다. 세 번째로, ‘내가 와 있네!’ 하고 놀랍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연히 가 있을 줄 알았는데, 가서 보니까 없다면 이게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며 훌륭한 삶을 살았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가 나와 함께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영원의 결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달려있다 (42~46절)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2-43절)
‘너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입니다. 여기서 직접적으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즉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 즉 자기 마음대로 사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42절은 시편 118편 22-23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바로 며칠 전인 고난주간이었습니다. 그때는 수많은 사람이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편 118편을 유월절마다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인용하신 이 구절은 그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된 것처럼, 유대인들이 끝까지 자신을 거부하지만 자신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중심이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래전 제가 플로리다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하루는 사무실에 나와 있는데 담임목사님이 어떤 청년 하나를 데려오셨습니다. 한국계 청년인데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영어만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어릴 때 백인 가정에 입양된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목사님이 보시고 말을 걸다가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알고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에 대해 아주 큰 분노를 갖고 있었습니다. ‘왜 나는 원래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아야 했는가?’ 하며 굉장히 분노했고, 미국으로 입양된 후 입양한 부모가 자기를 농장에서 학대하면서 부려 먹었다는 겁니다. 학교도 안 보내고 아주 어릴 때부터 농장 일을 시키는 등, 학대하면서 일만 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왜 내 인생은 이래야만 하는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 계신 건가?’ 그러면서 막 분노했습니다.
그러던 중 결국 12살인가 13살 때 집을 뛰쳐나와서 10년 이상 홈레스(homeless)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콜로라도에 입양이 됐던 것 같은데, 그때 떠돌다가 플로리다까지 온 겁니다. 20대 청년이었으니 10년 이상 지난 때였습니다.
그는 자기 삶이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냐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와 대화하는 가운데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해도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사실은 그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풀어줄지 고민하고 있는데, 목사님 댁에서 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뭔가를 훔쳐서 도망갔습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 생각이 가끔 나는데 굉장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생각날 때 기도해주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에서 그 청년처럼 자기에게 선택권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사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태어나고 보니까 이분이 아빠이고 이분이 엄마인 겁니다. 또 태어났는데 부모가 없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기를 버리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집안도 자기가 선택해서 된 게 아닙니다. 태어나고 보니까 그냥 그 집안 사람이 된 겁니다. 혈통도 그렇고 또 인종도 그렇고,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태어나고 보니까 한국 사람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났든, 중국에서 태어났든, 미국에서 태어났든,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그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물론 장로교 신학에 의하면, 그것도 자기가 한 것 같은데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영원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4절)
우리 각자는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자신을 가루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는 어리석은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따르느냐, 아니면 거부한 채 계속 자기 마음대로 주인이 되어 살 것이냐 하는 것은 영원한 미래를 결정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각 사람이 선택해야 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강요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옆에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라고 한다고 그런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믿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믿음의 선택일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손자 손녀가 없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어떤 분이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각자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는 교회이고, 그것이 천국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다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저의 아버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셨고, 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제 아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으면, 그 아들은 할아버지라고 하고, 아들의 아들은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각 사람이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하여 이처럼 바른 선택을 하기만 하면, 혹시 그동안 수만 가지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도, 그동안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이 없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이 그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에게는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결국 깨지고 가루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없고 환경 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하나님은 오래 참으며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4. 종들과 아들의 죽음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선지자들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종들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세례요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모두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점에서 이 비유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이 종들은 자기가 다치거나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심지어 죽을 것을 알고도 간 것입니까? 주인이 종들을 보냈더니 죽이고 돌로 치고 때렸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종들을 또 보냅니다. 그러면 그 종들 입장에서는 ‘앞에 갔던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우리도 가면 죽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갑니다.
왜 바보 같이 고지식하게 가서 또 죽임을 당합니까?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죽음은 쓸데없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안 죽어도 되는데, 괜히 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음의 길을 가는 순종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그들의 죽음은 실패인 것 같고, 헛된 것 같고, 바보 같아 보입니다. ‘아니, 왜 저렇게 가서 죽나?’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바보 같고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보다 더 참혹하게 고난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높여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시고 높여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쩌면 너무 바보 같이 보이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면 고난당하게 되고 그것이 죽음의 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순종하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상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순종으로 인한 고난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성공입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미국 전 대통령이 쓴 <살아있는 신앙>이라는 책에는 그가 자기 신앙생활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중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보다 높은 삶의 표준과 기대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복음서를 통해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원칙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자진해서 때로는 억지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탁월한 삶, 그것은 율법을 순종하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치관, 그 가치관의 실현을 위해서 드려지는 최선의 삶, 우리는 그 이하로 살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지미 카터가 이러한 삶의 좌우명을 갖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하기 전에 해군 제독과 면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독은 젊은 장교인 카터에게 전술과 전략에서부터 군인의 자세, 태도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카터는 땀을 흘리면서 대답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독이 화제를 돌려서 “자네, 해군사관학교 시절에 어떻게 살았나? 어떻게 공부했나?” 하고 물었습니다. 또한 웃으면서 성적은 어떠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카터는 성적에는 자신이 있어서 점수와 등수를 대답했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그 질문에 카터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최고의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지요.” 그때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면서 다시 질문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때 지미 카터는 더 이상 답을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카터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인생을 다 살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이 제독이 던진 것과 비슷한 질문을 나에게 던지실지 모른다.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똑같이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그래서 그는 그날 인생의 좌우명을 이렇게 세웠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뭘 하든지 이 질문을 하면서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할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선을 다해 실천하고, 함께 힘을 모아 교회에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살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바로 나의 그런 순종과 헌신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압니까? 혹시 그렇게 살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지 않고, 오히려 “너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