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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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Ld-kxIv-DlQ?si=rAzp7UtytfdawtmI&t=155
2024년 4월 7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11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장 25~37절)
[들어가는 말]
우리 중에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을 즐겨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유튜브를 보면 한국을 칭송하는 영상들이 상당수 올라와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너무 좋아한다는 내용이 많고, 특히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이 너무 좋아서 충격을 받았다는 식의 내용이 많습니다.
제목만 봐도 웃기는 것들이 많습니다. ‘헐리웃 유명 배우가 딸이 한국 간 썰 풀자 충격받는 진행자들’, ‘이것도 한국에서 만든 거예요? 미국 방송에 공개되자 난리 난 한국 음식’, ‘한국 여행 온 남미 스타가 새벽 1시 한국 골목길에서 라이브 방송 켠 이유’, ‘예의라곤 모르던 미국 명문 대학생들 한순간에 모두 기립하게 만든 한국인’, ‘한국 밤거리 거닐던 LA 다저스 선수단 눈 돌아간 영상 하나에 난리 난 미국 반응’ 등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실 과장된 자화자찬이 대부분입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으나 금방 지나간 것을 가지고 부풀려서 내용을 만듭니다. 그런 영상들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AI(인공지능)가 읽는다는 점입니다.
몇 년 전 실제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장단점을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한국인의 장점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단결력이었습니다. 평소엔 안 그런 것 같은데 위기 상황이 닥치면 전 나라가 단결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IMF와 같은 나라의 위기 상황에 사람들이 다 금을 가지고 와서 나라에 바쳤습니다. 또 월드컵 축구 대회같이 나라의 중요한 순간에 온 국민이 단결해서 응원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은 가족주의에 바탕을 둔 단결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족주의적인 단결력은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이 가족관이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 민족주의로 가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집에 있는 물건들은 아끼고 소중히 다루는데, 거리나 학교나 직장이나 교회의 물건들과 시설들은 자기 집에 비하면 소홀히 다루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족주의에 근거한 것입니다. 자기 집에서는 쓰레기를 아무 데나 막 버리지 않을 텐데, 밖에서는 아무 데나 버립니다. 집에서 거실에 침을 탁 뱉겠습니까? 그런데 거리에서는 침을 뱉습니다. 자기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쓰레기를 버리고도 전혀 주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는 행동의 밑바닥에는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니까’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때로는 무례하고 거칠게 대할 때가 있는데, ‘이 사람은 내 가족이 아니니까.’라는 마음이 밑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자고 하는데, 영혼 구원을 하는 것뿐 아니라 각자 21세기에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특히 우리 자녀들이 성공하는 인물이 되려면,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개념, 이웃에 대한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21세기의 과제 중 하나는 이웃을 올바로 바라보며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이기도 합니다. 먼저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1.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죄다
교회에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면 어떤 분들은 ‘내가 왜 죄인인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는 범죄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 간음, 강간, 폭력, 도둑질, 거짓말, 사기 치는 것 등을 하면 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범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죄로 생각하지 못하는데, 그것도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첫째는 sin of commission, 즉 범하는 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죄입니다. 또한 sin of omission이 있습니다. 빠뜨리는 죄, 즉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죄입니다. 보통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았으니 죄인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을 다 했습니까? 그런데도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sin of commission(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죄)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죄가 더 심각합니다. 마땅히 행해야 하는 줄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분명히 성경의 핵심이며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지만, 지키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명령은 안 지키면 죄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이 명령을 지키지 않거나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야, 나를 사랑해!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해! 하나 안 하나 보자. 이것 봐, 너 안 했어! 너 죄 지은 거야.’ 하고 정죄하시며 벌을 주려고 하시는 게 아니고, 사실은 우리를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너, 나를 정말 사랑해 봐.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 네 이웃을 사랑해 봐. 최고의 삶을 살 수 있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사니까 삶이 괴롭고 불행하고 삶이 꼬이고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안타까워하시며 ‘제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봐라. 그러면 정말 행복하고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다.’라고 하시는 것이지, 안 했으니 벌주시려고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시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명령을 지키지 않거니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죄이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웃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것도 자기와 같이 사랑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소위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웃 사랑과 관련하여 오늘은 이 비유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 배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는데, 어떤 죄입니까?
1) 주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에 불순종하는 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율법교사로부터 질문을 받으시고는, 그의 질문에 대해 질문으로 답을 하십니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5-26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아주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절)
정말 놀라운 대답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의 핵심을 정확히 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명기 6:5의 인용이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19:18의 말씀으로서, 전체 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전체 성경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대답하시자, 그 율법 교사가 다시 질문합니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28-29절)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 이웃이 누구라는 말씀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내 이웃은 꼭 내 옆에 사는 사람이나 내가 아는 사람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옆집 사람, 내 가족, 친구, 친척, 교인, 늘 어울리는 사람만 내 이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사람은 서로 전혀 모르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나의 도움과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상황에서 내가 마주친 그 사람이 바로 내 이웃이라는 것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계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도 이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같습니까? 하나님 사랑과 중요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라는 순서는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 되어야만 이웃 사랑이 가능해지지만, 중요도에 있어서는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이웃 사랑은 둘째니까 덜 중요하고 하나님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똑같이 중요한 계명입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도 강조하지만,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관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인데,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성경의 결론이고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된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별명이 붙은 장들이 있는데 ‘사랑 장’이라고 하면 어디를 말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그런데 엄격히 따져 보면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13장이 있는데, 12장과 14장은 성령의 은사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12장과 14장을 소위 ‘은사 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는데,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기 위하여 각자 받은 은사를 사용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은사를 사용할 때는 ‘내가 이런 은사가 있다.’라고 하며 으스대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태도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13장 말씀입니다. 그래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의도는 영적 은사를 바로 사용하도록 교훈하기 위해서 사랑을 강조한 것이 13장 내용입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진짜 사랑 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그게 어디입니까? 바로 요한일서 4장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위대한 선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9-10, 새번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 자기를 넘어서는 사랑, 생명까지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는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모범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참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놓는 것은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 4:11, 새번역)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셨다면, 논리적으로 어떻게 나와야 합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하나님께 생명을 내어드립시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핵심을 확실히 깨달은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으니까, 우리도 서로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우리도 서로를 향해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을 너무나 잘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 사랑, 형제자매 사랑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요일 4:20-21, 새번역)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 자기를 넘어서는 사랑, 희생적이고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경험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에게 나타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웃에게, 형제자매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때로 그렇게 하는 일은 나에게 희생과 양보를 요구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하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나도 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먼저는 하나님 사랑이고 그다음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하나님의 가장 큰 기대가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와는 상관없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죄
둘째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죄가 됩니다. 오늘 본문이 어떤 이야기로 시작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0절)
한국에 교도소 사역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중 어떤 목사님이 교도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재소자들과 상담도 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떠셨느냐고 누가 물어보니까 자기가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뭡니까?”라고 물으니까 “죄를 지어서 들어온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라고 했습니다. 죄수들에게 물어보면 자기는 억울하게 잡혀 왔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강도도 그런 이유를 댈지 모릅니다. ‘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강도질을 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데 돈이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그 사람에게 돈 좀 달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공격해 와서, 나도 방어 차원에서 때렸는데 뻗었습니다.’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강도에게 아무리 고상한 명분과 이유가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을 때려 거의 죽게 만든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목적이 있더라도 수단과 방법과 과정이 잘못되었으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자기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 자리에 나오신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드린다고 할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외적 증거 중 하나가 예배드리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읽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짐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예배하십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예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데,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정신은 그 가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worth, worthy’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가치, 가치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합니까? 하나님은 예배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신 분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가치를 지니신 분임을 알기에 시간을 내서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 때 어떻게 그 사랑이 나타나야겠습니까? 물론 이웃에 대한 예배로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존귀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길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내 이웃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고 존중히 여김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실패자, 길바닥에 버려진 사람을 보면서 손가락질할지 몰라도, 그런 사람조차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하나님이 만드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내 옆에 있는 분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내 이웃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고귀한 존재이기에, 죄에 빠져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죄에 빠져 허덕거린다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은 너무 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건져내기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셨던 존귀한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가 바로 그런 존재이고, 옆에 있는 분들이 그런 존재이고, 또 우리 이웃이 그런 존재입니다. 이런 놀라운 가치를 지닌 존재이기에 우리가 그런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게 귀한 이웃을 어떻게 미워하거나 이용하거나 해치겠습니까? 그렇게 놀라운 가치를 지닌 내 이웃, 하나님이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셔서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그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니 오히려 미워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죄가 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위해 부르신 그 목적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하는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즉 존중히 여기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이웃을 존중히 여기는 일은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것을 우습게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바로 옆의 형제자매에 대해 험담하거나, 미워해서 인사도 안 받거나, 눈도 안 마주치고 슬슬 피하며 멀리 돌아가고 멀리 떨어져 앉는 것은, 단지 불편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거부하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 목적 자체를 포기하거나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됩니다.
3) 그리스도인으로서 직무유기죄
셋째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직무유기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을 다시 주목해서 보십시오.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1-32절)
예수님은 이 장면을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자기의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지나쳤을 겁니다. 그것도 거룩한 제사나 영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니까 그것을 하기 위해서 빨리 가야 했기에 그랬을 겁니다.
솔직히 저도 이 부분에서 찔림이 있습니다. ‘내가 이 제사장이라면, 이 레위인이라면, 나는 멈춰서 도와주었을까?’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주일 아침에 예배를 인도하러 오는데 보니까 길에서 교통사고가 났고 사람이 땅에 누워 피를 철철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면 그 사람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을까요? ‘참 안 됐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교회로 왔을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해야 하니까. 목사가 예배에 늦으면 어떡합니까?
제사장도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일이 있었겠고, 레위인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으면 빨리 전화해서 911을 부르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 살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 내가 여기 숨을 쉬고 살아 있는 이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고 아직 살고 있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보통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지겨운 하루가 또 시작됐네.’라고 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아,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내 생명을 연장해 주셨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할 목적이 없다면 우리는 이 땅에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왜 제사장과 레위인을 예로 드셨겠습니까? 가장 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제일 믿음 좋은 사람들, 제일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 나의 참여를 기다리는 모임, 나의 돈을 필요로 하는 재난 지역, 나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봉사 활동 등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2.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발견한 이웃을 사랑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발견한 이웃’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자고 하면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도와줘야 할 곳이 한두 군데인가? 얼마나 많은데!’
실제로 우크라이나도 그렇고, 지금 팔레스타인도 그렇고, 도움이 필요한 곳들이 많습니다. 튀르키예(지진 지역), 아프리카 여러 지역, 아이티 등등 그런 곳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곳이 너무 많은데 나 하나 돕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내가 이걸 한다고 세상이 바뀌나?’ ‘나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나?’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내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다 책임지겠습니까? 불쌍한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다니면서 돕고 구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 여리고로 내려가는 여리고 길은 사람들이 늘 가던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내가 가는 인생길에서, 내가 늘 걷는 그 길에서 어느 날 마주친 사람, 그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사랑을 실천해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연하게 만났는데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봤습니다. 그렇다면 외면하지 말고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라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다 돕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을 내 눈앞에 보이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발견한 이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3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불쌍히 여겨”입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본 척하고 지나갈 것입니다. 제사장도 분명히 이 쓰러진 사람을 보았고, 레위인도 보았고, 이 사마리아 사람도 보았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 나서도 그냥 갔습니다.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를 보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4-35절)
“가까이 가서”(34), 이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34)를 보면, 없는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했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34)를 봐도, 남의 짐승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 데리고 있는 나귀에 태웠습니다. 내 짐승, 내 자원,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또 2데나리온을 주면서 돌봐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이틀치 일한 액수 정도이니까 아주 큰 액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액수인데, 혹시 모자라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합니다. 자기가 있는 것에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없는 자원까지 동원해서, 빚을 내어 꿔서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갈 수 없는 지역까지 찾아가 구제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에 가서 도울 수 있으면 가야 하지만, 못 가도 괜찮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 내 인생길에서 발견한 이웃만이라도 책임지고 섬겨보라 하십니다.
이 비유에 대해 지금까지 설교자들이 영적인 해석, 소위 ‘알레고리적인 해석’, 즉 은유적인 해석을 많이 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오리게네스라는 교부입니다. 굉장히 진보적인 사상을 많이 이야기했고,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그는 이 비유를 이런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이고, 여리고는 세상이고,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은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는 사람이고, 강도는 사탄과 악한 영들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교회로 되돌아오게 하는 신자다.”
이것은 너무나 영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6-37절)
예수님의 결론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질문을 던졌던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마치십니다. 누군가 딱한 형편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를 돌봐주라는 것입니다. 아주 분명한 말씀입니다. 다른 해석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집으로 가 버리거나,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는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아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험하고 힘든 일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내 마음은 너무 괴롭고 찢어진다.’ 그러나 거기서 끝납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이 특별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뭐라고 부르십니까? “어떤 사마리아 사람”(33)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피가 섞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혼합주의적이었던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이때는 율법을 그토록 잘 아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피해 지나간 다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구약성경의 핵심인 이 계명을 실행합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심지어 자기 돈까지 남겨 놓고 자기 볼일을 보러 길을 떠나는데, 모자라면 돌아와 갚겠다고까지 말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을 한 것뿐인 이 사람이 선하다면, 우리는 모두 악한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한 사람이 선하다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행한 사람이 선하다면,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것을 돕겠다고 나와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이 “저분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까 “저분은 참 좋은 집사님이십니다.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시죠.” “아 그렇습니까? 저분이 어떻게 훌륭한 신앙인인 겁니까?” “그야 저분은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도 신실하게 내고, 이렇게 교회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나와서 저렇게 열심히 봉사하시기 때문이죠.”
여러분, 이상하게 듣지 마시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을 가리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굉장히 좋은 집사님이십니다. 훌륭한 크리스천이십니다.”라고 했지만, 그분은 사실 ‘좋은 집사’나 ‘훌륭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냥 집사이고 그냥 크리스천입니다. 아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아주 훌륭한 분, 아주 모범적인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금 열심히 일했다고 훌륭한 교인이고 모범적인 크리스천이 되는 겁니까?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9-10)
종은 시킨 대로 했으면 당연한 겁니다. 훌륭한 종인 게 아닙니다. 당연한 겁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정상적인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고 신앙인인 것이지, 훌륭한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것을 하도 안 하다 보니까 조금만 하면 훌륭하다고 하는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훌륭하다고 칭찬받고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얼마나 슬픈 현실입니까?
[나가는 말]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실 끝을 묶지 않고 바느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바느질할 때 실이 없이 해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열심히 합니다.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기술이 좋습니다. 그러나 결과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들어갔다 나온 자국만 있지, 전혀 꿰매어지지 않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 결과도 없습니다.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이 묶이지 않은 채 바늘을 가지고 계속 바느질하면, 꿰매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구멍들만 남을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네 이웃들을 다 사랑하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네 이웃’도 단수이고, ‘네 자신’도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한 번에 한 사람, 내 눈에 발견된 그 사람, 나의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또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문제들과 어려움을 살펴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시간을 내어 친절을 베풀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그래서 나도 사랑합니다.’라는 것을 느끼게 도와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일이고, 이것을 열심히 해보자고 목장으로 모여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지금이 나의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야만 합니다. 지금 내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