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MwM1xKuatEQ?si=oc9rqHrKFz_f2Bvx&t=140
2024년 3월 17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10 ✦
“청함을 받은 자인가, 택함을 입은 자인가”
(마태복음 22장 1~14절)
[들어가는 말]
우리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분노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그처럼 엄청나게 분노한 때가 있으셨습니까? 화가 정말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고 느낄 때가 있으셨습니까? 그리고 그럴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때 영상을 찍어 놓고 나중에 보면 당장 지우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화를 그렇게 많이 내지 않는 편인데, 그래도 집에서 가끔 가족들에게 화를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공장소나 또 우리 교회 같은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공장소에서 너무 화가 나서 큰소리치며 분노했던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1998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Miami, FL)로 이사해서 운전면허증을 바꿔야 했습니다. Driver's License(운전면허증)를 바꾸러 갔을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BMV에 가보니까 직원들이 자기들끼리 크게 떠들고 초콜릿이나 간식을 먹으면서 시끄럽고 산만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약간 걱정되었지만 일단 번호표를 뽑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 차례가 되었는데도 제 번호를 건너뛰어 다음 번호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부르겠지’ 하고 기다리는데 계속 뒤 번호만 부르기에, 가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곧 부르겠다고 하며 기다리라고 해서, 처음부터 기분이 약간 나빴지만 가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후 저를 불러서 창구로 갔고 절차대로 진행하여 다 잘 끝났습니다. 몇 분 후 운전면허증이 다 되었으니 찾아가라고 이름을 불러서 받아보니까, 제 주소가 잘못 나와 있는 겁니다. 도시가 North Miami인데 North Miami Beach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North Miami Beach에서 Beach를 빼고 North Miami로 해야 한다고 하니까 직원이 다시 가서 만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엉뚱하게도 Beach가 아니라 North를 빼서 Miami Beach로 해왔습니다.
그곳에는 도시가 Miami도 있고 Miami Beach도 있고, North Miami도 있고, North Miami Beach도 있기 때문에, 나중에 행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이름이 정확해야 합니다. 정확히 이름이 North Miami가 되어야 하는데 자꾸 잘못 만드니까 상당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꾹 참으면서 다시 해달라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조금 후 다시 만들어와서 ‘이제는 제대로 했겠지’ 하고 받아보니까, 이번에는 North와 Beach를 둘 다 빼고 Miami로 해왔습니다. 정말 이때까지 그렇게 화가 났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며 매니저를 불러오라고 했더니 매니저가 와서 쩔쩔매며 사과했습니다.
매니저가 뭐라고 해서 그런지, 마침내 네 번째 만에 제대로 만들어왔습니다. 면허증을 만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했는데, 이번에는 정확히 North Miami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왔기에 분노를 가라앉히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또다시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 앞에 선 직원이 갑자기 당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필름(Film)이 떨어졌다고 하는 겁니다(지금은 디지털로 하지만, 그 당시는 필름으로 찍었음). 그래서 결국 필름을 사러 갔다 오느라, 운전면허증을 만드는 데 무려 3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이처럼 별문제가 없고 잘할 것이라고 믿고 있을 때, 당연히 문제가 없어야 할 때, 그런데도 이처럼 어이없이 기대에 못 미칠 때, 우리는 화가 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마음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당연히 잘할 것을 기대하시고 당연히 열매 맺을 것을 기대하셨는데 못했습니다. 그것도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기대하셨는데,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비유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천국 잔치에 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당연히 올바른 삶을 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로 살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1. 혼인 잔치와 같은 천국 (1~2절)
마태복음 21~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교활한 질문에 대해 답하시면서 비유로 가르치시는데, 지난 두 주 동안 살펴본 ‘두 아들 비유’(21:28-32)와 ‘악한 농부들 비유’(21:33-44)에 이어서 오늘 본문의 ‘혼인 잔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볼 때 정확히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첫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잔치(축제)에 비유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잔치는 보통 잔치가 아니라, 왕이 자기 아들 왕자를 위해 베푼 엄청난 결혼 피로연입니다. 영국 왕실의 결혼식을 보십시오. 얼마나 화려합니까? 격식도 대단하고 아주 웅장하며 정말 화려합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거기 다 와 있습니다. 왕실이 아니더라도 유명 연예인들의 결혼식을 보면 정말 화려합니다.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1-2절)
이것은 혼인 잔치(wedding banquet)입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는 혼인 잔치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천국이 어떤 특정한 때에만 잔치 같다고 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혼인 잔치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처럼 아주 기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의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금식하고 슬퍼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때로는 울며 애통해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저번에 살펴본 산상설교에서 마태복음 5장 앞부분을 팔복부터 시작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3-4)
가난한 심령으로 이제는 주님밖에 의지할 곳이 아무도 없다고 고백하며 나아오는 사람, 자기 죄를 보며 애통해하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고 우는 사람은 천국을 선물로 받고 위로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로 인해 큰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 기본적으로 기쁨의 사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를 보며 무서운 죄인인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슬퍼하며 애통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토록 비참한 죄인이었던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실로 기뻐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왜 예배당에 모여 주님께 찬송과 기도와 예배를 드립니까? 죽을 수밖에 없던 내 안의 죄를 발견하고 울며 애통해하고, 또 용서함을 받은 감격과 감사로 인하여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영어로 번역되지 안 되는 정서가 있는데 바로 ‘한’입니다. 번역이 안 되기 때문에 세계의학백과사전에도 그냥 ‘Ha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게 있어서 그런지, 우리가 부활의 기쁨보다는 십자가의 고난을 더 많이 품고 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는 사순절은 주일 빼고 40일인데, 부활절은 우리가 부활주일 한번 하고 끝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부활절기가 사순절보다 깁니다. 부활절기는 부활주일부터 시작해서 성령강림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6주 반 정도 되는데, 부활절은 7주로 사순절보다 더 깁니다.물론 십자가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슬픔이 없이는 기쁨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눈물을 흘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그저 마냥 슬퍼서, 좌절해서, 또는 내 감정이 복받쳐서 흘리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무서운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감격으로 흘리는 눈물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에는 감사와 감격이 넘쳐야 하고, 용서의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잔치와 같이, 축제와 같이 드려야 합니다. 물론 우리 장로교 스타일의 예배는 경건한 스타일로 조용한 것이 보통입니다. 진짜 장로교식 예전적 예배에 가보시면 굉장히 엄숙합니다. 가톨릭 성당 미사를 가봐도 얼마나 엄숙합니까? 굉장히 엄숙하고 경건하고 또 격식이 탁탁 짜여져 있습니다.
예배에는 형식도 많이 있습니다. 예배로의 부름도 있고, 찬송, 신앙고백(사도신경), 찬양, 대표기도, 축복의 인사, 찬양대, 성경봉독, 설교, 봉헌, 축도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의 예배 스타일은 완전히 장로교의 예전적인 형식이 아니고 절충 형식(blended style)입니다. 많은 한국 교회들은 이렇게 섞인 형식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장로교나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등의 미국 교회를 가보시면 그 순서가 엄청나게 복잡하고 형식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이 어떻든 상관없이, 우리가 온 마음을 드려 하나님께 예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체험하며 그 결과로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예배의 스타일이 아니라 예배의 정신이며 우리의 마음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원하시는 스타일이 딱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면, 다른 모든 스타일은 틀린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에는 크게 천주교와 개신교가 있고, 개신교 안에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 성결교, 초교파 등 많이 있는데, 그중 어느 스타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스타일입니까?
아무리 예배순서에 형식이 많고 경건하게 진행하며 신학적으로 완벽해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는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래도 형식이 많다 보면 순서를 진행하는데 정신이 집중되어서 정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자꾸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반면 형식은 별로 없어도, 영과 진리로(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나 1부 영어 예배나 수요예배처럼 형식이 자유롭고 요즘 나온 찬양곡들을 주로 부른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감정 해소나 그런 음악 스타일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장로교 형식만 옳다면, 침례교나 순복음이나 초교파 교회는 틀렸습니까? 반대로 침례교나 순복음 스타일만 옳다면, 우리 장로교는 틀렸습니까? 또한 어른들이 하는 방식만 옳다면, Youth나 어린이들이 부르는 찬양과 형식은 틀렸고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 겁니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형식은 본질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형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담는 그릇이 형식입니다. 그 순서가 바뀌면 형식주의가 됩니다. 형식이 본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형식이 본질을 바꾸면 잘못됩니다. 그렇게 된 것이 율법주의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계속 지적하셨던 바리새인들의 외식(위선)이었습니다. 그들은 형식만 가진 것이 아니라, 형식이 더 중요한 형식주의로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드리든지, 예배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고 있는가, 그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그런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왕의 초청과 사람들의 거부 (3~7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결혼 이전에 두 남녀가 정혼하고 이제 곧 가까운 미래에 혼인예식이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해야 할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정혼으로부터 결혼까지의 기간은 대개 1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초대받은 손님들은 혼인 잔치에 참여할 준비를 할 만큼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있었고, 그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3절)
한 왕이 자기 아들의 결혼을 위해 잔치를 베풀면서 자기 종들을 손님들에게 보내서 혼인 잔치에 오라고 초청합니다. 그러니까 왕은 이미 혼인 잔치를 하기 1년 전쯤에 사람들을 초청했고, 그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서 이제 두 번째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혼인 잔치의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대략 1년 후에 있을 것은 미리 알렸고, 이제 때가 되어 몇 월 며칠에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두 번째로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혼 후에 이미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혼인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오기가 싫어서 초청을 거부합니다.
오래전 동생이 한국에서 결혼할 때 부모님께서는 많은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하셨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동생의 결혼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친척 중 몇 명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습니다. 미리 못 온다고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부모님께 큰 실망을 안겨주었고 오랫동안 그것 때문에 씁쓸해하셨습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임금의 마음은 더욱 그랬을 것인데, 그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는 이 세상의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천국 잔치를 말합니다. 이미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메시아를 통한 평화와 의의 나라를 약속해주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4절)
요청이 한 차례 거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청함을 받은 손님들이 두 번째 초청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자비로운 생각에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이제는 이미 정혼 때 청함을 받은 손님들이 와서 이 혼인 잔치를 즐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사실 이것이 보통 혼인 잔치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문화에서는 동네에서 혼인 잔치가 벌어져도 엄청난 축제를 벌이는데, 왕의 아들이 결혼하니까 혼인 잔치에 초청해서 엄청난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5-6절)
이번에는 아예 초청을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사람은 수확을 많이 거두어서 돈을 벌려면 지금 일해야 하니까 왕의 초청을 거부하고 밭으로 일하러 나갑니다(5). 다른 사람은 잔치에 참여하게 되면 사업에 지장이 있게 되어서 원하는 만큼의 수입을 얻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을 진행하러 나갑니다(5).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자꾸 와서 종들이 귀찮게 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이번에 온 왕의 종들을 잡아 모욕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6). 그러자 왕은 어떻게 합니까?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7절)
왕은 분노하며 군대를 보내서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동네를 불사릅니다. 자신의 초청을 두 번씩이나 거부하고 종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은 곧 왕인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왕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여기서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 왕이 처음 청한 사람들을 두 번째로 초청했는데 거부했다는 말에 ‘어? 그럴 수가 있나?’라고 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또다시 다른 종을 보냈을 때는 아예 돌아보지도 않고 일하러 가거나 사업하러 가거나 아예 종들을 죽였다는 것을 듣고 입을 막으면서 깜짝 놀랐을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러면서 왕이 다 그들을 진멸할 때 고개를 끄덕끄덕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당시에는 동네 어른이 초청한 잔치에도 당연히 가는 것인데, 왕이 초청한 잔치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심지어 왕이 보낸 종들을 죽였다면 이것은 진짜로 반역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굉장한 일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이 실제로 멸망 당했는데, 그것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로마 장군 티투스(후에 황제가 된 사람)에 의해 150만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예루살렘 성은 전부 불타고 성전도 전부 파괴되는 무서운 사건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왕의 초청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어떤 비윤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일을 하거나 무슨 악한 일을 하기 위해서 왕의 초청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성적으로 문란한 파티를 하거나 마약이 난무하는 광란의 파티를 벌이거나 거기 가기 위해서 왕의 초청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이 매일 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 왕의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자기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서 왕의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굉장히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그들이 초청에 응하지 않은 것은 사실 나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이유 때문입니다. 수확을 잘 거두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사업을 열심히 잘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그러나 그들은 왕의 잔치에 초청받은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동네 어른이 ‘내 아들이 결혼하니 다 와라.’ 하면 다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왕이 초청했는데도 안 가고 거부하며 심지어 종들을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진짜로 반역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왕의 초청을 거부하고 그들이 한 일들을 보십시오. 사실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물론 자기 스케줄이 중요하다고 해도, 왕의 잔치 때만 갔다가 와서 또 일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자신들의 관심 때문에, 아니면 그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최고의 자리에 오는 것을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계속 말씀드리지만,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일 중 하나는 좋은 것을 하다가 최고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좋은 것들이 나와 하나님 사이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을 무너뜨리고 우리 삶을 파멸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못하게 막고, 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의 구원을 자기가 취소할 수 없으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 천국의 삶을 맛보지 못하고 계속 괴로움과 염려와 불안과 걱정 속에 살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사탄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아주 교활하고 영리합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똑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고의 것을 하지 못하도록 수많은 좋은 것들을 우리 삶에 계속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계속 염려와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게 하고 또 넘어지게 만듭니다.
제가 마이애미 전에는 시애틀 지역에 살았는데, 거기는 가을부터 봄까지는 비가 계속 부슬부슬 옵니다. 그런데 여름만 되면 정말 구름 한 점 없이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굉장히 쾌청하고 선선합니다. 그래서 여름마다 교회가 날씨와의 전쟁을 벌입니다. 아무래도 여름에 날씨가 좋으니까 주일날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는 수가 줄어듭니다. 거기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호수도 있고 자연이 좋으니까 즐기기 위해 가는 겁니다. ‘우리는 초원교회에 갑니다.’라고 하면서 골프를 치러 가거나, 캠핑 가거나, 등산하거나, 피크닉과 낚시 등 레저 활동을 즐깁니다.
또 전에 캘리포니아로 이사 간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을 들은 사람이 저에게 해준 말을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미시건 쪽에 살다가 LA 쪽으로 이사 가서 딱 보니까, 날씨도 좋고 너무 갈 때도 많아서 좋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막 놀러 다녔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아니, 왜 교회에 안 오고 그렇게 자꾸 놀러만 다니세요?”라고 그랬더니 그분의 답이 굉장히 걸작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자연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 자연을 방문하지 않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을 방문하러 다닙니다.” 이것은 궤변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더 많아졌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활동들이 나쁜 겁니까? 사실은 나쁜 것들이 아니라 좋은 일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활동들을 하게 함으로써 정작 최고의 것인 예배를 소홀하게 만드는 겁니다. Memorial Day weekend라든지 Labor Day weekend 때 그러는데, 가서도 가족끼리 같이 예배하거나 근처에 있는 교회에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놀러 갔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탄의 유혹이 좋은 일들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뭔가를 하면 막 괴롭고 힘들어진다면 누가 그것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급한 일들과 좋은 일들을 하라고 자꾸 부추긴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유혹은, 좋은 것들 때문에 최고의 것을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하면 되지, 뭐 꼭 최고의 것을 해야 하느냐?’라고 속삭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유혹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최고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님과 매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는 것은 최고의 일입니다. 교회에서 함께 교제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도 다 최고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자녀입니까? 인생을 즐기는 것입니까? 그러한 일들이 물론 좋은 것이긴 하지만, 최고의 것,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관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또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을 따라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마 많이 아마 들어보셨을 텐데, 인도네시아나 동남아에서 숲에 있는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습니다. 원숭이들이 잘 다니는 길목에 호리병 모양의 병들을 쫙 놓고 그 안에 쌀을 넣어 놓어 놓고 뒤에 가서 숨어 있으면, 원숭이들이 숲에서 슬슬 나옵니다. 그 안에 있는 쌀을 꺼내 먹으려고 손을 넣습니다. 그런데 쌀을 손에 잡으려고 주먹을 쥐고 있기 때문에 호리병에서 손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끙끙거리는데, 쌀은 먹고 싶고 손은 안 빠지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고 있는데, 그때 사람들이 와서 원숭이들을 잡아간다는 겁니다.
쌀이 중요합니까, 자기 생명이 중요합니까? 쌀은 다음에 또 얻을 수도 있는데, 그걸 포기하지 못해서 계속 붙들고 ‘이거 어떡하지?’ 하고 있다가 결국 잡혀서 죽임을 당하니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인생이 바로 그런 원숭이들처럼 좋은 것을 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다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멸망의 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습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손에 꼭 쥐고 있던 쌀을 빨리 놓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쌀이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쌀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쌀을 손에 꽉 쥔 채로 잡혀서 죽임당하는 원숭이들의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의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좋은 것 때문에 최고의 것을 놓쳐버리고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이 없어져야겠습니다.
3.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8~14절)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8-10절)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진멸한 뒤, 왕은 그의 종들에게 사거리 길에 가서 누구를 만나든지 다 초청해 오라고 명령합니다(8). 그 명령에 순종하여 왕의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옵니다(10). 그런데 왕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채 와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1-12절)
왕은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하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는 변명할 여지가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왕은 그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3절)
왕은 그를 묶어 혼인 잔치에서 쫓아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지금 왕은 종들에게 명령해서 아무나 발견하는 대로 다 데리고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종들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 아무나 데려오라고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예복을 안 입고 왔다고 왜 결박하여 밖으로 내던져 버립니까?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가 그 당시 문화를 알아야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잘못 해석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적절한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잔치에 초청한 주인을 의도적으로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그를 거부하고 조롱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왕이 그에게 친절하게 “친구여”(12)라고 부르면서 물어봐도 그가 아무 말도 답하지 못한 이유는 그도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문맥을 살펴볼 때, 이 사람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아주 의도적으로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초청에는 응하여 잔치 자리에 와 있으면서도 잔치를 즐기고 왕과 아들에게 축하하러 온 게 아니라 ‘네까짓 게 무슨 우리 왕이냐?’ 하는 식으로 왕의 권위에 도전하고 저항하러 온 것입니다. 그러한 멸시와 거부의 마음이 예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내 삶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시게 할 때 내 삶이 천국이 됩니다. 우리가 아까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라고 찬양도 불렀지만, 내 마음대로 할 때,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하고,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며 내가 알아서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삶은 지옥이 되고 맙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천국)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천국에 맞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14절)
많은 사람이 천국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초청을 거부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잔치 자리에 오기는 왔지만, 천국의 법,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자기 방법과 자기 규칙만을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되어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자격도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잔치에 참여하게 되고 천국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며 영원히 그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천국 잔치에 모든 사람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다 봐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고 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기는 왔다고 하는데 진짜 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계속 자기 방식대로 살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나온 우리는 바로 이 천국 잔치에 들어와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세상의 종말 때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이 땅에서 미리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단순히 믿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믿고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속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believing만 있는 게 아니라 belonging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는 것,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believe) 사람인 동시에 예수님의 몸에 속한(belong)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과도 같은 태도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왕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기쁨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이 나라에 합당한 예복을 입고 있는지를 늘 점검해야겠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에 자신을 복종시키며 살고 있느냐는 겁니다. 아니면 아직도 내 방법과 내 생각을 고집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아직도 자기의 법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돌아보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은 청함을 받은 자인가, 아니면 택함을 입은 자인가? 다시 말해, 나는 단지 청함만 받고 응하지 않는 자입니까, 아니면 청함을 받은 것에 감사하며 택함을 입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이 순간에도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교회라면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약 천국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내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잔치에 어울리지 않게 예복을 입지 않고 그냥 와 있는 채로 반항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를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천국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을 입었는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인가, 또 그러한 교회인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천국 잔치가 되어야겠습니다. 축제가 되어야겠습니다. 죄인들이 와서 주님의 용서하심의 은혜와 주님의 영광을 맛보며 감격과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그러한 천국 잔치가 벌어지며 하나님께 진정한 기쁨을 드리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