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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6 ✦
“용서할 줄 모르는 자의 최후”
(마태복음 18장 21~35절)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미국에서 ‘용서’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용서를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94%나 되는 사람들이 ‘용서는 필수적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용서는 그냥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매일 와닿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엄청나게 잘못한 사람이 있어서 그들을 항상 용서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불편한 관계, 꼬인 관계, 내 마음을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거나 내 눈에 보기 좋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내가 가지는 마음을 푸는 것도 용서입니다.
지금 세계 이곳저곳에서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전쟁은 탐욕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용서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고대에는 왕이 소위 ‘열 받으면’ 전쟁하는 겁니다. 왕의 자존심이 상해서 전쟁을 벌여 자기 자존심을 상하게 한 나라를 공격한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교회들도 왜 하나 되지 못하고 나누어지며 서로 사랑하지 못합니까? 큰 이유는 서로 용서하지 못해서입니다. 부부간에도 용서하지 못해서 각방을 쓰는 경우가 있고, 부모와 자녀 간에 소리를 지르거나 서로 독한 말을 하고 저주하는 것도 용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것 역시 용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용서라는 주제를 빼놓고서 관계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목을 잡으면 재미없는(?) 것 같아서 ‘용서할 줄 모르는 자의 최후’라고 했습니다. 요즘 ‘OOO의 최후’라는 제목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난폭 운전 트럭 운전사의 최후’, ‘나 잡아봐라 조롱하던 폭주족의 최후’라는 것이 유튜브에 나와 있습니다.
또 설교 제목도 ‘교만한 자의 최후’, ‘잔인한 자의 최후’, ‘추악한 자의 최후’, ‘자신을 과신한 자의 최후’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용서할 줄 모르는 자의 최후’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인 용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비유의 결론은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35절)
이 말씀대로 살면 정의가 무너지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무조건 용서해 주라고 하니까 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는 18장 전체를 보면 금방 풀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 나라 시민들의 공동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1~14절을 보면, 아무리 시시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공동체 생활의 첫 출발점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주변의 시시해 보이는 형제자매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할 바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아주 귀하게 보아야 한다는 말씀에서 공동체가 출발합니다.
그런데 15~2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그렇게 귀한 영혼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범한 경우에는 죄를 분명히 처리하라는 말씀이 또한 주어져 있습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무조건 귀하게 여기고 넘어가 주는 게 아니라, 죄는 죄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 가서 잘못된 것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고, 그래도 계속 듣지 않으면 징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죄를 무조건 묵인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이 나오고 그다음에 오늘 본문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절대로 죄를 묵인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는 죄대로 처리해야 하지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자매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1절)
베드로의 질문을 보면 그는 대단히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랍비들의 법에 따르면, 사람들이 죄를 짓고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 번째는 절대로 용서해 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랍비들의 법에 비해서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말했기 때문에 상당히 너그러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다음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2절)
누군가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괴롭혔는데 그런 사람을 일곱 번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 번까지는 어찌어찌 용서해 주겠는데, 또 잘못하면 용서가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두 번 당하면 끊어버립니다. ‘너는 아웃!’이라고 하며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곱 번을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상당히 너그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그러니까 7X70=490인데, 그럼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까?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사실 490번까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무한하게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용서하는 데 아주 인색합니다. 다른 사람이 9번 잘하다가도 1번 잘못하면 그것이 마음에 딱 걸리고, 속이 얹힌 것 같이 느껴지가도 합니다. 그러면서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그러면서 단절해 버립니다. 평소에 괜찮다가도 다툼이 벌어지면 10년 전에 상대가 한 말을 끄집어내면서 싸웁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한히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는 선택사항(option)이 아닙니다.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거나 내가 알아서 하면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용서를 가르칩니다. 유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도 용서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용서는 대부분 원수가 와서 잘못했다고 빌고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용서를 구하든 안 구하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3절)
이 비유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라고 불리는데, 이 비유는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천국은...”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천국에 갔는데 서로 용서하지 않고 싸우는 천국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천국은 사랑이 가득한 곳이지, 서로 싸우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싸우면 그게 지옥이지, 어디 천국이겠습니까?
여전히 미워하고 다투고 견제하고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미워하고 다투고 견제하고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정말로 믿는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한 교인이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아니까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야 함을 알면서도 속으로는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고, 용서했다고 말은 하지만 다른 데 가면 입에서는 자꾸 그 사람을 비난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루는 밤에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안 왔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네가 멱살 잡은 것을 놓아라.”
그래서 그분은 깜짝 놀라 “아니, 하나님, 제가 누구의 멱살을 잡았다는 겁니까?”라고 했는데, 하루 종일 자기가 비난했던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멱살을 놓으라는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도대체 그런 말씀이 성경에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바로 오늘 본문에 그 말씀이 있었습니다.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28-30절)
28절에서 “붙들어 목을 잡고”라는 부분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멱살을 잡고”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천국을 만들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정말 원하십니까? 그러면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용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이 비유의 결과를 보십시오.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1-34절)
주인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뭐라고 부릅니까? 그저 조금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종아”(32)이라고 부릅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주인은 노하면서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기”는데(34), 헬라어 원어로 보면 ‘옥졸’은 전문적으로 ‘고문하는 사람(torturer)’입니다.
고대사회에는 전문적으로 고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채찍질을 당하셨는데, 빌라도가 예수를 채찍질하라고 하여 그렇게 한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영화에 보면 두 명이 나옵니다. 그들은 짐승 뼛조각과 쇳조각이 달린 가죽 채찍을 가지고 예수님의 맨 등을 때립니다. 그러니까 뼛조각과 쇳조각이 등에 박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당기니까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옥졸’, 즉 전문 고문자입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런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마치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고문당하는 것처럼 너무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실 자기가 만든 감옥 속에 자기를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내 집에 따라 들어옵니다. 내 방에 따라 들어옵니다. 그리고 나와 늘 대화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기분을 조종해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배우자나 자녀에게 화를 내게 만들어 버립니다. 미움의 불이 항상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의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런 경우 우리 몸에서 엔도르핀이 나오지 않고 아드레날린이 나오기 때문에, 티(T)-임파구가 약화되어서 병균 세포를 격퇴할 수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몸도 약해집니다. 의학적으로 증거가 나와 있습니다. 몸이 약해지니까 면역 체계(immune systme)가 약해져서 병에 쉽게 걸립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굉장히 불편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감기에 걸리거나 아픈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 영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아주 무서운 벌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고문하는 사람이 나에게 고문하는데, 고문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가 구원받는 조건은 아닙니다. 용서해야만 구원받고 천국 가고 영생을 얻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큰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용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십자가에서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용서할 줄 압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고 애쓰며 어떻게든 용서해 보려고 하며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금방 한 번에 되지는 않지만, 계속 갈등하고 고민하며 기도하면서 용서하고 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비유가 지적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열지 않고 자비로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진정으로 마음이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비를 베풀 줄 모른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비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용서만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증거는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느냐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 줍니다. 영어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The forgiven will forgive.”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용서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용서해야겠는데 용서가 무엇입니까? “나는 저 사람이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가 뭔지를 알고 용서가 안 된다고 하십니까? 용서가 뭔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4-26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다 웃었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다 비웃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사람이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빚을 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유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사람이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액수를 말씀하시기 위해 만 달란트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1)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7절)
무엇보다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그저 ‘쯧쯧’ 하는 정도가 아니라, ‘몸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장기들이 뒤틀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은 몸속의 장기들이 뒤틀리면서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마음이 확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합니까?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보다 더 권리가 있다. 내가 너보다 더 옳고, 네가 나보다 잘못했으니까 그렇다.’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분노하게 됩니다. 화가 납니다. ‘감히 네가?’라고 됩니다. 왜냐하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나에게 뭐라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내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동등한 위치에서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려는 노력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 3:10)라고 선언합니다. 의로워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도 죄인이고, 나도 불완전한 죄인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판단할 수 있는데, 그런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삶은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었고 형제들도 많았는데, 형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10대와 20대라는 인생의 황금기를 노예로 살았습니다. 17세에 팔려 가서 30세까지 그랬는데, 10대 후반과 20대가 얼마나 황금기입니까? 지금 20대 청년이 노예가 되었다면 그 인생은 끝난 게 아닙니까?
요셉이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노예로 팔려 가 주인 집에서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자기 주인의 아내가 모함해서 감옥에 갇혀 인생을 허비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노예로 팔려 간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자기가 한 일도 아닌 것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으니까 인생이 진짜로 끝난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 요셉은 자기를 모함한 주인의 아내를 원망할 수도 있었고, 자기를 감옥에 쳐 넣은 주인을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여기에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을 계속 원망하며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놀랍게 길을 열어주셔서 바로의 꿈을 해몽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고 하니까 자기를 팔았던 형들이 거기 나타납니다. 형들은 자기를 못 알아보지만 자기는 알아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떼굴떼굴 굴릴 겁니다. 그리고 남들 모르게 보복할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리인데 왜 그렇게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놀랍게도 형들을 용서합니다. 형들을 조금 테스트 해보다가 결국 용서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선포하며 용서합니다. 자기를 팔아버린 것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모든 가족을 이집트로 데려와서 온 가족이 잘 지냅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그때 형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요셉이 보복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머리를 굴려 선수를 칩니다. ‘동생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형들을 용서해 주라고. 그러니 우리를 용서해다오.’ 하고 와서 엎드려 절합니다.
그때 요셉은 ‘이제 때는 왔다.’라고 하지 않고 형들 앞에서 웁니다. 왜 웁니까? 자기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오해하며 두려워하는 저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나를 이해해지 못하나?’ 하고 억울해서 운다기보다는, 아직도 자기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두려움이라는 감옥에 갇혀 떠는 것을 보니까 안타까웠던 겁니다. 그때 그는 아주 아름다운 말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창 50:19, 새번역)
이 말에서 요셉은 용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정의해 줍니다. 용서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용서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위에 있는 자리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 앉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요셉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을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내가 자꾸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안 되는 사람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아야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2) 용서는 빚을 없애주는 것이다
둘째로, 용서는 공감하는 것뿐 아니라 빚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7절)
주인이 불쌍히 여겼고 또 빚을 탕감하여 줍니다. 빚을 기억하고 붙잡는 것이 아니라 빚을 그냥 없애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안 갚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빚이 얼마였습니까? 10,000달란트였습니다. 뒤에 보면 그에게 빚진 자는 100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숫자를 계산해 보면 이렇습니다.
1달란트 = 6천 데나리온
1데나리온 = 노동자의 하루 품삯
6천 데나리온 = 6,000일 일한 품삯 = 대략 20년 일한 품삯
1달란트 = 20년 치 연봉 = 5만 달러 x 20년 = 100만 달러
10,000달란트 = 20만 년 치 연봉 = 100억 달러 ($10 billion)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개인이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 갚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비유라서 이런 액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이었는데 로마로 귀화한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에 나오는 4세기경 로마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 이두메, 사마리아, 갈릴리, 베레아 등 이스라엘 지역 전체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다 합쳐도 800달란트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8%밖에 되지 않습니다. 전 지역을 다 합쳐도 800달란트인데, 한 사람이 10,000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빚은 엄청난 빚인데,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줍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겨’에 초점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서 전액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 아픔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액수는 그냥 없어진 게 아닙니다. 주인이 그 액수를 짊어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스마트폰이 있어서 내가 쓰고 있는데 누가 나를 탁 쳐서 이것이 떨어져서 완전히 깨져 쓸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람에게 값을 물어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왜 자기가 물어내느냐고 하며 도망가 버리면 찾을 수 없고, 그러면 내가 그만큼 돈을 써서 사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 아픔을 당하고 용서해주는 사람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아니, 내 잘못도 아니고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건데, 왜 내가 그 아픔을 감당해야 합니까?’라고 당연히 질문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짓지도 않으신 죄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죄를 갚아주시려고 그러셨습니다.
내가 그 아픔을 감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스마트폰이야 돈을 조금 들이면 사지만, 비싼 자동차나 집을 누가 와서 부수고 가면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을 찾아내야 하니까 사람을 고용해서 찾아내고, 나도 보복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 사람에게 뭔가 고통을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직장생활을 하면 그 직장에 고발해서 이런 사람이라고 알리거나,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쪽에서도 또 반응하며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삶에는 고통이 계속 일어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얼굴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십시오. 얼굴표정이 평화롭고 아름답고 상대방을 향해 온화하겠습니까? 찡그리면서 어떻게든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표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떡 앉아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하게 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보복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당연히 보복할 권리가 있으시지만, 용서하심으로 끊으셨습니다.
‘용서하려고 해도 마음이 안 따라줍니다. 마음이 가야 진정한 용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닙니다. 물론 감정이 따를 수 있지만, 감정으로 느끼기 전에 먼저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따르더라도 그냥 먼저 주면, 감정이 따라옵니다.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자비를 베푼 감격이 따라옵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면 감정은 따라오게 됩니다.
하지만 용서는 결과까지 덮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힘든 일입니다. 용서는 해야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면 잘못된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자녀를 학대했다면, 학대한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학대받은 사람이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을 실제로 봤습니다. 그렇게 용서해야 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한다고 해서 계속 학대하고 또 그것을 그냥 놓아두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라도 그 죄가 멈추게 해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결과까지 덮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3. 용서의 비결 - 불쌍히 여기는 마음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것이 용서의 비결입니다. 불쌍히 여길 때만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끔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나를 해치는 그 사람을 한 인간으로, 한 인격체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체로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존재로 창조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녀가, 내 부모가, 내 시부모가, 내 장인 장모가, 교회의 다른 교우가 아무리 나에게 잘못한 게 있고 불편하게 굴어도, 인간적으로 보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의 심령에 묻으면 그도 믿음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변화될 수 있다고 여기고 기도해 주며 기다려 줄줄 아는 마음,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바로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보통 악한 사람들을 보면서 ‘저거 구제 불능이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제 불능의 인간은 없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그 사람에 대해서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해코지하지 않고 기도는 해준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저 사람은 안 변할 거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교만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저 사람은 안 변해.’라고 할 때, 그 ‘아무리’가 도대체 얼마나 많이 기도해본 겁니까? 솔직히 별로 안 해봤을 겁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던데?’라고 하는 사람 치고 많이 기도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몇 년을 기도해 보았습니까? 10년, 20년 해봤습니까? 대개는 조금 하다가 관두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이 역사하시면 변화됩니다. 나도 변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우리 각자가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그 사람을 악마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하신 영혼으로 보는 것,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불쌍히 여길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나에게 잘못했다고 해도, 내가 하나님에게 지은 죄에 비하면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정도밖에는 안 됩니다. 굉장히 적은 액수이고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액수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계십니까?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시부모, 장인 장모, 다른 교우, 목장 식구, 직장 상사, 부하직원, 사업체 손님? 이 말씀에 근거하여 멱살을 잡은 것을 놓아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알아도 실제 삶 속에서 용서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그 사람을 보면 속에서 아주 불이 납니다. 그때 이런 식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 사람을 용서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셨으므로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제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이 마음을 받아주시고, 이 마음이 실제로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데까지 연결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솔직히 기도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자기 기분을 의지하지 말고 말씀을 의지해서 용서해 보십시오. 놀라운 역사가 바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용서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용서하는 사람에게 놀라운 평안을 줍니다.
깨진 관계 속에서 용서하지 않고 살면 자기는 과거의 감옥에 계속 갇혀 살게 됩니다. 그것이 본문의 ‘옥졸들’입니다. 옥졸들이 나를 감옥에 가둬놓고 계속 고문하는 것처럼 고문당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상처를 받았다고 계속 상대방을 원망하고 미워하면 괴롭고 답답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 사람은 별다른 고통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잘 돌아다니고 잘사는데, 나는 그 아픈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잠도 잘 못 자고, 가고 싶은 곳도 그 사람이 온다고 하면 못 가는 등 최대의 피해자는 결국 나 자신이 됩니다.
해결책은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즉 보족하지 않겠다고 하며 계속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아픈 상처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리고 고통의 감옥에서부터 풀려나게 됩니다. 용서로 인해 자유를 얻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나가는 말]
지난 2014년 성탄절쯤 상영되었던 <Unbroke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책 제목인데, 그것을 영화화했습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루이 잼퍼리니(Louis Zamperini) 이야기입니다. LA 근교의 토랜스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문제아로 찍혔지만, 달리기라는 운동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너무 잘 뛰어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뽑히는데, 대표 선수 중 최연소 선수로 뽑혔습니다. 거기서 히틀러의 손을 잡고 악수까지 했습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공군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비행기가 추락하여 태평양에서 47일을 표류하며 상어와 굶주림과 목마름과 싸우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그를 구조해준 배가 하필 일본군 배였고, 결국 2년 동안 일본 포로수용소에서 혹독한 학대를 받고 실험 대상이 되기도 하다가 결국 살아남아 돌아온 인간 승리의 표본이 된 인물입니다. 이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에 97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책 제목과 영화 제목이 같습니다. <Unbroken>. ‘무너지지 않은’, ‘깨지지 않은’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사실 좋은 제목이 아닙니다.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영웅으로 돌아왔지만, 2년 동안 매일밤마다 악몽에 시달려 잠을 한 번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너지지 않고 망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내면과 가정은 자기의 분노와 고통 때문에 고난과 두려움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래서 이혼 직전까지 갔는데, 그의 삶이 변화된 것은 1949년 유명한 전도자인 빌리 그래햄(Billy Graham)의 집회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그의 아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음 날 강제로 루이스 잼퍼리니를 참석하게 해서 그가 거기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고 가정도 회복되고 술 중독도 해결되고, 결국 악몽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는 놀랍게도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토록 학대했던 일본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용서합니다. 가장 자기를 힘들게 했던 일본 장교가 있었는데, 그는 끝까지 만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만나지 못하여 편지를 써서 ‘내가 이런 사람이 되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한다.’라고 썼습니다. 결국 그 편지가 전해지고, 그의 삶은 진정한 승리가 되었습니다.
‘Unbroken’이 멋진 제목이긴 하지만, 사실 ‘Forgiven and Forgive’, 즉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한다’라는 제목이 더 맞는 제목이라고 봅니다. 그러한 삶이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고문을 가하는 철천지원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마음에 거북한 사람이 있습니까? 분노를 품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 마음에 안 들게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평소에 뒤에서 성토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과 안 좋은 말을 합니까? 그렇다면 바로 그 사람이 나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고, 내가 지금 멱살을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지금 내가 멱살을 놓고 용서해야 할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향해 걸어둔 마음의 빗장을 풀고 멱살을 놓는 역사, 용서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 살벌한 이 땅에서 주님의 평화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