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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30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18 ✦
“잘못된 기도와 바른 기도”
(마태복음 6장 5~8절)
[들어가는 말]
‘기도’라고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축구를 아주 좋아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월드컵 축구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이 이란에 원정 경기를 하는 것을 흑백 티브이로 봤습니다. 그때 한국이 이기고 있었는데 이란이 프리킥을 차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굉장한 위기의식을 느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 프리킥이 안 들어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자마자 바로 골이 들어가서 2대2로 비겼습니다.
원정 가서 비긴 것이니 못한 건 아니지만 그때 제가 상당히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것은 기도를 안 하다가 골이 안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는데 바로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아니, 기도하면 안 들어주시고 반대로 하시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몇십 년 전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면, 그때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 제가 응원하는 팀이 이겼는데, 끝나고 몇몇 선수들이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보니까 상대 팀 선수들도 몇 명이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긴 팀이나 진 팀 선수들 모두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한 팀은 이기게 해주시고 다른 팀은 지게 하신 것입니까? 어릴 때는 그런 것을 보면서 잘 이해가 안 갔습니다.
기도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기도 생활을 잘하고 계십니까? 교회를 다니고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생활하면서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하나가 기도인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기도생활이 식사 기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식사 기도도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사 기도가 몇 분 정도 될 것 같으십니까? 사실 몇 초도 안 됩니다. 그저 잠깐 ‘하나님, 감사합니다. 잘 먹고 건강하게 해주세요.’ 이게 기도 생활의 전부인 교인들이 굉장히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밥을 안 먹거나 기도를 안 하고 밥 먹으면 기도 시간은 더더욱 줄어듭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한 5분만 기도하면 기도할 게 없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십니까? 5분 정도 기도하면 더 이상 기도할 게 없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기도가 곧 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기도는 간구도 포함하지만, 기도는 간구만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할 제목들, 즉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직장, 사업, 공부가 잘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부모님, 자녀,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 5분도 안 걸립니다.
그런데 기도를 몇 시간씩 한다는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기도를 몇 시간씩 하나? 나는 5분도 하기 힘든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을 구하는 것만이 기도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기도하면 더 할 게 없는 겁니다.
기도를 길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나를 위해서 구하는 것은 ‘간구’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면 할 게 별로 없지만, 중보기도를 할 것은 정말 많습니다. 이 세상에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까운 이웃, 같은 교회 성도, 우리 목장 식구, 선교사님, 교회의 여러 기도 제목, 주변 이웃이라든가 한국 또는 타주에 계신 친지들 특히 부모님, 또 떨어져 있는 자녀 등 기도 제목은 끝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천재지변과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당한 사람의 뉴스를 볼 때 그냥 ‘아이고, 안 됐네.’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저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기도 제목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5분이 아니라 5시간을 해도 한이 없는 겁니다.
그래도 기도가 힘들다고 느껴지시면 기도는 대화라고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우리 중 대화를 못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특히 요즘 시대에 카톡을 안 쓰시는 분이 없습니다. 카톡을 할 줄 알면 기도도 다 할 줄 아는 겁니다.
몇 년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제가 지난 가을 8년 만에 한국에 갔더니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행복해졌다는 걸 느꼈습니다. 오래전에 한국을 가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의 표정이 굉장히 안 좋았는데, 요즘에는 가보면 한국 사람들 얼굴이 굉장히 밝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전부 폰을 들여다보면서 대화하든지 뭔가 재밌는 것을 보니까 얼굴이 확 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친구와 대화하거나 카톡 또는 문자를 주고받을 때 재미있는 게 오거나 좋은 말이 오면 표정이 풀어지는 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대화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누구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1.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
지난주 구제에 대한 본문과 함께 오늘 본문의 기도와 다음에 나오는 금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귀한 일입니다. 신앙 훈련에서 구제, 기도, 금식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 즉 위선적인 태도를 지적하신 후 올바른 신앙에 기초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쁘고 분주하게 살면서 기도 시간을 갖는 것부터가 힘든 이 시대에 기도한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굉장히 칭찬할 만한 일인데, 성경은 기도한다고 다 응답받는 것이 아니며, 또 바르지 못한 기도도 있다고 알려줍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구제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미 없는 잘못된 구제가 있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바른 구제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뒤에 가면 금식도 그렇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은 계속되는 말씀을 통해 스스로 ‘내가 이렇게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이 어디냐? 이 정도면 나는 아주 괜찮은 신앙인이다.’라고 생각하며 마치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처럼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라고 하십니다.
교회에 많은 교인이 있음에도 사회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귀한 진리를 믿으면서도 이방 종교를 믿는 것과 비슷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무신론자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매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기도의 형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절)
밖에 나가서 식사하는 외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위선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기도의 첫 번째 모습은 외식하는(위선적인) 기도입니다. 겉만 보기 좋게 꾸며 나타내는 것이 외식의 핵심인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자기를 볼 때 ‘저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야.’라고 봐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도는 바른 기도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 가장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생활에 굉장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기도 시간을 잘 지키고,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십일조에 철저했습니다. 심지어 식물에 대한 십일조까지 바칠 정도로 철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십니다.
남들에게 보이려는 사람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기도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회당과 길거리에 서서 기도합니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을 택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규칙적으로 정한 기도 시간이 되어 길가에서 기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무릎을 구부리고 기도하다가 서서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길거리에서 기도했느냐 또는 시장에서 기도했느냐, 사람이 많은 데서 기도했느냐 아니면 적은 데서 했느냐, 앉아서 기도했느냐 또는 서서 했느냐 아니면 무릎 꿇고 했느냐가 아닙니다. 기도로 나아가면서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고 기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렇게 기도하면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저 사람 좀 봐. 길을 가다가 기도 시간이 되니까 그냥 서서 기도하는 것 좀 봐.”라고 합니다. 가다가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면 얼마나 경건해 보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존경했습니다. “저 사람은 정말 기도의 사람이다. 참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바로 그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또 가끔 우리도 그런 말을 합니다. “아까 기도하신 것이 정말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런 말을 듣기를 노리고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1세기 당시 바리새인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초점을 하나님께 맞춰야 하는데, 기도하는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혼자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건 기도가 아니라고 느끼며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기도하는 나를 사람들이 보면서 ‘저 사람은 기도를 정말 많이 하는 경건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참 은혜롭게 기도를 해.’라는 인정과 칭찬을 듣고 싶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인 기도를 하면서도 정작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온통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의 시건을 의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기도했다.’라고 스스로 만족하는 겁니다. ‘오늘은 한 시간 했다.’ ‘오늘은 두 시간 했다.’ ‘오늘은 세 시간 했다.’라고 자랑하게 됩니다. ‘내가 봐도 나는 참 기특하다. 다들 새벽에 아무도 안 왔는데, 나는 이렇게 혼자 와서 기도하니 얼마나 경건한가.’ 하고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는 결과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복된 자리가 자기를 과시하는 현장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기도를 잘못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합니다. 바르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텐데, 자기만족과 자기과시를 동시에 추구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미 네 상을 다 받았다!”라고 말씀하시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그 귀한 자리에서조차 우리는 그렇게 잘못된 일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이것이지만, 사실 이렇게 되는 경우도 별로 없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외식으로 즉 위선적으로 되는 것조차 없다는 겁니다. 너무 기도를 안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요즘 크리스천들의 문제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은데, 특히 한국에 가보십시오. 상상을 초월합니다. 옛날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요즘 대학생 이상 청년 중에는 2-3%밖에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청소년도 비슷합니다. 어린이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어린이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많습니다. 큰 교회에는 바글바글하고 청년, 청소년, 어린이가 많다고 느껴지지만 몇몇 교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른 데서 잘하는 데로 옮겨와서 그렇게 된 겁니다.
교회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안 좋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불순물이 너무 많이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하나님을 찾으며 나아가야 하는데, 기름기가 많이 끼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얌체 같고 얄미운 행동을 많이 하니까 본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나 예배처럼 복된 시간을 주님께 드리면서도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만족을 구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를 보면 이전에는 호의적이었는데 지금은 역겨워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상하니까 상종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벌써 오래 전부터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저 멀리 갈 것 없이 나 자신의 신앙을 봐야 합니다. 혹시 주변의 믿지 않는 분들이 나를 보며 그렇게 느끼는 것은 없는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지 점검해야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절)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응답해주십니다. 기도는 약속이 있는 귀한 복입니다. 분명히 응답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상을 다 받는 방식으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골방에 들어가서도 ‘나 여기 골방에 들어와서 기도해. 나는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야.’라고 자랑하는 마음이 드니까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그렇다면 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나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나의 마음을 분산시키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차단하고 기도에 잡즁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 나를 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 내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떠나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끼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와 카페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는데, 아는 사람이 지나가다 보고 나에게 와서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라고 하며 그 사람과 5분, 10분, 20분을 계속 이야기한다고 해보십시오. 만나서 대화하던 사람에게 예의가 아닙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도하다 이 생각을 하고 저 생각을 하고, 폰을 보고, 딴짓하면, 하나님께 집중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복을 누린다는 것을 하나님은 온갖 형태로 약속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한국어 성경에는 “너”라는 이인칭 단수가 4번만 나오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너”라는 이인칭 단수가 8번 나옵니다. “너” 한 사람이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나님 앞에 서서 그 하나님과 “너” 개인이 일대일로 만나,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그 하나님께 “너”의 마음을 올려드리며 정직하게 아뢰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보시고 “너” 개인을 향해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기도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핵심은 하나님께 집중하며 나아가라는 것이지, 남들 앞에서는 절대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게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교회에 모여 함께 기도합니다. 대표 기도도 합니다. 특히 기도회로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 때도 기도합니다. 조용히 묵상기도도 하고 통성기도도 하고 여러 형태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절대 기도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외식을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신경 쓰지 말고, 사람들에게 보이려 기도하지 말고,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 한 분께 맞추어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은밀하게 기도하는 동시에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인격적인 대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은밀”도 강조하지만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시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데, 그 아버지께 기도하면 갚아주신다는 겁니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있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같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주문과 같습니다. 그래서 명상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혼자 생각하며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입니다.
그러니까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맺어져 있어야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에 왜 자꾸 자신이 없습니까? ‘나는 기도에 자신이 없다. 기도하기가 힘들다.’라고 하신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가? 아버지와 딸의 관계인가?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신가?’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까?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다른 어떤 길도 이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직 나를 통해서만 아버지께 갈 수 있다.”라고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열리려면 예수님을 통해서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는 부모님께 뭐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자녀가 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배우자를 초청해야 하니까 주한 미국 대사관에 갔습니다. 그 당시 30년 전만 해도 기다리는 줄이 엄청나게 길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서 그냥 프리패스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국 여권을 보여주니까 그냥 통과했습니다. 기다리는 게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저를 째려봤습니다. ‘저 사람, 뭐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기분이 나빴겠지만, 저는 신분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신분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정말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입니다. 남들이 못 들어가는 곳, 우리 하나님 나라를 프리패스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왜? 자격이 주어졌으니까.
솔직히 저 자신만 놓고 볼 때, 인간적으로 보면 거기 줄 서 있는 사람 중에 저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보다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기고 능력이 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거기서 한참 기다려야 간신히 들어갑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들어갑니다. 신분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저 사람은 우리 크리스천보다 훨씬 더 착하고 잘났고 능력이 많고 돈이 많을 수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신분이 뭔가? 하나님 자녀인가?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의 특권 중 하나가 바로 뭐든지 아버지께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격을 얻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합니까? 물론 미국 분들은 기도할 때 가끔 끝에 그냥 ‘아멘’ 하고 끝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빽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할 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닫혔던 천국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자상하신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만이 아니십니다. 우리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라는 말 자체가 기도로 초청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아이가 아빠에게 ‘아빠, 이거 사줘. 저거 사줘.’라고 마음껏 말할 수 있듯이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기도할 때는 너무 격식을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대표기도는 어느 정도 형식을 따져서 합니다. 찬양의 기도가 있고, 또한 감사, 회개, 간구, 중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걸 그냥 말씀드리면 됩니다. 너무 격식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1세기 당시 격식을 철저히 따져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위선적이게 속으로는 안 그러면서 겉으로는 다 형식을 따져서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위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자리에까지 이런 위선이 파고들어 온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고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헛된 기도이고 잘못된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파고들어 오지 못하도록 회당과 큰 거리 어귀처럼 잘 보이는 데서 기도하지 말고 아무도 없는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것도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파고들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골방문을 닫으면 그 안에서 우리가 뭘 하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거기서 진실한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이들 중에 ‘나는 아빠랑 대화를 이렇게 많이 한다.’라고 자랑하는 게 있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한 건데 뭘 자랑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로 대화한다는 것을 자랑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나, 이렇게 몇 시간씩 기도해.’라는 게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냥 나아가면 되는 것이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첫 번째 잘못된 기도에 대해서 바른 기도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2. 중언부언하지 말라
두 번째 잘못된 기도로서 이방인의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7절)
이방인들의 신관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방인,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 사람들이 모두 이방인인데, 그들이 갖고 있던 신관은 다신교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에게 무관심하고 노하기를 잘하는 아주 이기적인 신이 고대인들이 가졌던 신관입니다. 어떤 소원을 들어주더라도 그냥 들어주는 법이 없고 항상 애를 태울 대로 다 태우고 나서 나중에 마지못해 들어주는 그런 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신 앞에 잘 보여야 되고, 그러니까 온갖 재물을 다 갖다 바치고 뱅뱅 돌고 이상한 춤을 추고 온갖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도 그렇습니다. 굿을 하는 경우가 그런 겁니다. 신을 만족시켜 줘야 하는데 이 신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렇게 난리를 치는 겁니다. 그래서 고대 이방인들은 응답받으려면 어느 정도 정성이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해서는 신이 들어주지 않으니까, 기도문을 계속 외우고 또 외워서 주문을 줄줄 외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어로는 ‘babbling’이라고 되어 있는데, 말을 더듬는다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말을 더듬으면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그 당시 묵주 같은 것을 사용했습니다. 같은 기도문을 몇 번 외웠는지를 헤아리기 위함입니다. 또 작은 것들 사이에 큰 것을 넣어서 큰 걸 하면 ‘이게 100번 됐다’라고 하고, 또 그 다음 것을 하면 ‘200번 됐다’라는 식으로 센 겁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신의 개념이 바로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갖고 있던 미신은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왔는데, 사탄이 자기 이미지를 신들 속에 넣어서 잘못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관심한 분이시다. 웬만해선 안 들어주신다. 엄청나게 노력해야 들어주신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잘못된 개념을 심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주일의 황금 같은 시간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시지만, 혹시라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드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게 짐이 되진 않으십니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리스천들, 특히 교회에서 자란 저 같은 모태신앙 가운데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중간에 믿은 분들은 그런 것이 좀 약한데, 처음 태어날 때부터 나와 보니까
교회를 다니고 있는 이런 사람은 ‘교회를 떠나면 혹시 내가 벌 받는 거 아닌가?’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라도 그냥 와야지, 안 오면 괜히 벌 받을 수도 있으니까 벌을 안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중에 계속하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이 짐이 되는 겁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도 그런 식으로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쩔 수 없어서 기도하면서 의미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피하라고 하십니다.
보통은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기도하지 않습니까? ‘요즘 기도하세요?’라고 하면 ‘저는 요즘 별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고, 문제가 없으면 기도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기도는 문제가 있을 때만 하는 것이라고 아주 잘못된 기도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대화할 때 문제가 있을 때만 연락을 해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관계가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얘는 문제가 있을 때만 연락하네. 평소에는 하나도 연락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그러더니, 꼭 문제가 있고 돈이 필요하면 연락하네.’라고 하면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문제가 없으면 내 맘대로 살면,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안타까우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는 수준이 아닙니다. 병이 낫게 해주시고, 좋은 직장, 좋은 사업을 통해 돈 많이 벌고, 잘 살게 해달라는, 소원 성취를 위한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사실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꼭 기억할 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때 우리는 못 보지만 하나님의 보호막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기도해도 안 되네. 해 봤자 소용없네. 믿어봤자 소용없네.’라고 하며 자기 마음대로 나아가면 큰일 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그 보호막을 싹 걷으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막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냥 단순히 소원 성취를 위해 기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은 정말 전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호해 주시고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8절)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이 제일 은혜받는 구절이 이것이라 많이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데 뭐하러 기도하느냐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아주 깊은 관심이 있으십니다. ‘얘가 지금 결정을 내릴 때 이렇게 결정하려나, 저렇게 결정을 하려나?’ 하며 관심 있게 지켜보십니다. ‘얘가 지금 제대로 하려나, 잘 못하려나? 넘어지려나?’ 하고 굉장히 관심 있게 보십니다.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 필요가 뭔지를 다 아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못 생각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필요를 다 아시는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보다 첫째로, 나의 것을 버리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냥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 이거 원해요. 해주세요.’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기도에 포함되지만, 그러한 간구만이 기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나의 잘못된 것들이 포기가 되는 겁니다. 우리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뭘 구합니까? 필요 없는 걸 구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잘 살펴보십시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하는가, 아니면 그냥 내가 원하는 걸 구하는가? 많은 경우 필요한 것보다는 원하는 걸 구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가 아니라, ‘너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욕심으로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 보면 ‘아, 이것은 내 욕심이고,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 아시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더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내 욕심을 포기하게 됩니다. 기도하다 보면 ‘아, 이게 아니구나. 잘못되었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라면 그 자녀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아직도 잘못된 세계관과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의 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특히 중요한 게 중보기도입니다. 나의 필요, 내가 원하는 것만 기도하는 게 아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사랑하니까 기도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정말 케어하면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거기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며 사람이 참 많이 힘들구나 하고 느끼는데 기도를 안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관심이 있고 사랑하는 관계라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저분을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구하게 됩니다. 중보기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든, 세계를 위해 기도하든, 일단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한번 관계가 열렸다고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아버지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를 계속 빚어져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세 번째로는, 우리가 성령 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 험합니다. 이전에 그런 책 제목이 있었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입니다. 영어 원제가 <Too Busy Not to Play>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기에는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뭐라고 얘기합니까? ‘아,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예배할 시간이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지금 성경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쁠수록 믿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그런 제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분주하고 정말 힘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않은 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않고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야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즉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조용하게 정말 우리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케어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가장 잘 돌보기를 원하시며 또 능력이 있으신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조용히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그런 곳에서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나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머릿속으로 계속 주문을 돌리는 그런 식으로 기도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에게 인격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의 잘못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성령 충만을 입을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장소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또 시간을 꼭 길게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 같으면 기도원이나 교회당에서만 기도하는 것은 아니고, 기도해야만 들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서나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희생이 들어간 기도를 특히 잘 응답해주십니다. 함께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며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함께 하지 않는 이유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게 불편하거나 귀찮으니까 그냥 나는 혼자 한다 이런 차원으로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중에 이제 바쁘니까 각자 있는 곳에서 다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할 때 큰 역사가 일어난 것이 성경에도 또 교회 역사에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이렇게 기도하고, 특히 평소 주중에는 자기가 혼자 있으면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다가 혹시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응답해주지 않으셨다고,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하나님이 결코 나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길이 막혔다면 다른 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 길을 가려 하느냐? 이것이 지금 맞는 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발견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하며 나갈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을 분명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의 사람들로서 매일매일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