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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6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16 ✦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5장 43~48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 제가 청소년 사역을 할 때 교회에 새로운 가정이 왔는데, 10학년과 8학년 남자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인도하던 청소년 예배에 들어오고 있었는데, 보니까 예배 직전에 큰아들이 엄마에게 큰소리로 여기 오기 싫다는데 왜 끌고 왔느냐고 막 대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상이 별로 안 좋기에 약간 경계심을 품게 됐는데, 예배 때 아니나 다를까 예배 내내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매주 오면서 친구도 사귀고 점점 마음을 열더니 열심히 교회 예배와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이 아이의 얼굴이 아주 환해지고 밝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인상이 안 좋았는데 표정이 점점 펴지더니 환해졌고, 심지어 단기선교도 갔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아주 잘 따르고 좋아해서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성경도 열심히 읽게 된 그 아이가 하루는 질문을 했습니다. “전도사님, 성경을 읽어보니까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성경 또 다른 데를 보면 우리의 원수는 사탄이잖아요. 그럼 우리가 사탄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참, 너다운 질문을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사실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상당히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제일 큰 원수는 사탄이다. 그럼 사탄을 사랑하라?’ 상당히 논리적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연히 그런 뜻이 아니고,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설명해준 기억이 납니다.
교회에서는 사랑을 가르친다는 것을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도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바로 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합니까?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상당히 지키기 힘든 말씀, 아주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맹세(33-37절)와 보복(38-42절)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증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나온 ‘살인’과 ‘간음’이 다른 사람의 생명권에 대한 것이라면, ‘맹세’와 ‘보복’과 ‘증오’는 사회적, 관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적인 일들에 대해서 ‘맹세 금지 – 보복 금지 – 원수 사랑’의 순으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점점 세기가 강해지는 구조를 가집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는 복수 금지에서 더 나아가,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단계에 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랑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가끔 갈등이 있긴 하지만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원수도 사랑하라, 나를 해하려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은 최고 단계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본래 뜻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바로 그 더 나은 의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을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또 내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3절)
성경의 주를 보면 이 말씀이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 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실 때 그 이웃 사랑에 대해 인용하신 말씀이 바로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입니다. 정확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여기서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시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앞에 “원수를 갚지 말라”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생략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식으로 유대인 랍비들이 말씀을 바꿔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OOO라고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주신 말씀을 유대인 랍비들이 살짝 바꿔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원래는 “원수를 갚지 말며”라고 되어 있는 것을 “원수를 미워하라”로 바꿔 놓은 겁니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과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유대인 랍비들, 율법 교사들이 그런 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성경을 직접 그대로 인용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랍비들이 바꿔버린 말씀에 대해서 지금 지적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대로 성경의 한 부분을 빼내고 또 한 부분을 추가해 넣는 그러한 일을 한 겁니다.
이 말 그대로 하면 한마디로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 사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부담스럽고 지키기가 힘듭니다. 원수를 어떻게 안 갚습니까? 그래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으로 유대인 선생들이 바꿨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좋은 관계인 사람을 사랑하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를 해코지하고 막 못되게 굴고 나와 원수지간에 있는 사람은 미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본능입니다. 그런데 본능이 항상 옳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본능은 이성의 통제를 받고 영성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전부 다 자기 본능대로 살아가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은 동물의 왕국이 됩니다. 전부 짐승과 같은 그러한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가 있는데 그러한 욕구는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과 혼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영을 주셨을 뿐 아니라 혼을 주셔서 ‘지정의’, 즉 우리가 알고 느끼고 또 의지적으로 원하며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자기 욕구대로만, 본능대로만 살아가면 정말 인간은 짐승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인간의 욕망은 절대 선하지 않다는 것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성숙은 욕구를 통제하고 때로는 본능을 거슬러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많은 철학자들이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이성으로 절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 그들의 삶을 보면 본능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단순한 지성이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우리 이성으로 이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냥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식으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명히 뭔가를 사러 갈 때, 특히 자동차를 사러 갈 때 머리로는 ‘내가 이 금액 이상으로는 사지 말아야지.’라고 했다가 정작 가서 보면 그냥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성이 항상 우리 본능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본능과 본성을 통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 그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의 그런 가르침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반대의 말씀을 제시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4절)
원래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는데, 유대인 랍비들이 그것을 살짝 반대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새로운 것을 주시는 게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의 뜻을 바로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최상급 계명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는 것은 성도가 제일 성도다워질 때입니다. 크리스천이 제일 크리스천다울 때가 바로 사랑할 때이고, 특히 원수를 사랑할 때라는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을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솔직히 어떻게 원수를 사랑합니까? 여러분, 나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 나에게 막 이상한 욕을 해대는 사람, 나에게 분노하는데 그것도 타당한 분노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 심지어 나를 물리적으로 해하려 하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가능합니까? 사실 우리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여기서 알려주십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능력을 주고, 특히 우리의 이성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는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여러분, 지금 중보기도실에서 중보기도 헌신자들이 기도하고 계시고, 목장에서도 서로 기도하고,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는 서로 기도 제목을 내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까? 어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약속도 합니다. 사실 관심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기도할 마음이 안 생깁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기도하겠다는 겁니다.
기도는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I love you. I love you.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위대하시며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을 맡기는 기도를 안 할 때, 어떻게 그것이 사랑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별 사랑의 마음이 없어도 일단 기도하면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그게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에이, 말이 안 된다.’라고 하는 분이 계시면, 기도를 안 해보신 분입니다. 해보신 분들은 다 압니다.
‘정말 기도하기 싫다. 이 사람을 왜 기도하나?’라는 마음이 들어도, 어쩔 수 없이 그냥 해보자고 하며 그냥 이름만 살짝 부르거나, ‘아이고 하나님, 이 사람을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사실 이 기도는 그냥 뭐 들어주셔도 되고 적당히 안 들어 주셔도 되고...’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내 마음이 바뀌는 겁니다.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이 자꾸 측은하게 여겨지고 불쌍하게 여겨지는 겁니다.
기도하다 보면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일단 내 시간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시간을 들여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또 나의 에너지를 써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의 희생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특히 새벽에 나와서 기도할 때 그것은 예배당까지 오는 수고와 나의 희생이 들어간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벽 기도를 정말 잘 들어주십니다. 희생이 들어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처음에 내 마음이 별로였는데도 마음을 바꿔 주셔서 사랑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원수나 나를 박해한 사람,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본성이 시키는 대로 그냥 미워하고 증오하거나 그냥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게 필요합니다. 내가 정말 미워하는 사람, 나를 정말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내 마음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그 사람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혹시 지금 원수가 있으십니까? 진짜 우리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그런 원수가 있는 우는 거의 없지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관계 속에서, 또 이웃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원수는 그렇게 큰 게 아닙니다. 무슨 테러리스트나 독재자 같은 사람들이 원수가 아니라, 바로 내 이웃에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옆집이 계속 소음을 내고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하는 것도 원수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사실은 불편한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껄끄러운 사람이 다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같은 교회를 다녀도 껄끄러워서 이 끝과 저 끝에 멀리 떨어져 앉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나 확인한 다음에 가장 멀리 앉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이 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원수입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 보십시오. 정말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 가면서 해보십시오. 혼자 기도하기가 힘듭니까? 그러면 중보기도를 요청해 보십시오. 중보기도실에 기도카드를 내십시오. 비밀을 보장하고 기도해 드립니다. 그렇게 기도로 우리는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 아닙니까? 믿는 사람이 뭐가 다릅니까? 바로 이런 게 다른 겁니다.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하면 그게 무슨 믿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때 놀랍게도 그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그 사람도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인 시편 109편에 보면, 이상하게 다윗을 그냥 미워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4)
‘내가 아무리 사랑으로 해도 저쪽에서는 악하게 나오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다.’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는 기도가 해답입니다. 기도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계신데, 사실 기도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 내 마음을 아뢰는 겁니다. 대화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도 혹시 미운 사람이 있으십니까? 적당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너무나 미운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미울 때마다 기도를 더 하십시오. 기도가 미움을 태워 버립니다. 미움을 태우는 길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인간관계의 최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뭐라고 할 때 거기 가서 맞서서 말하거나 싸우면 해결이 됩니까? 더 안 좋아집니다. 그런데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면 그쪽으로 갈 게 아니라 하나님께 가는 겁니다. ‘하나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 저 사람의 마음 좀 바꿔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해주십니다.
보복하지 말라는 것은 사랑의 소극적 표현인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아주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저 적당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그 정도로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원수에게 사랑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원수에게 사랑을 보이는 가장 첫걸음이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원수, 즉 나를 미워하고 독하게 말하고 해코지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지금 사랑을 받을 필요가 가장 많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악하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 그런 사람이 나에게 생겼다면 ‘아, 내가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살아서 사랑을 실천하고 살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구나.’ 하고 깨닫고 그 사람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놀랍게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하늘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마태복음 22장에 나와 있는데, 누가복음 10장에도 그와 똑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율법 학자 하나가 와서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잘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말은 이웃이 있고, 그냥 타인이 있고, 그다음에 원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구별해서 사랑을 베푸는 대상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까, 그럼 내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이웃이 누구인지, 그 이웃만 사랑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원수를 향한 미움을 합리화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의 개념을 최대한으로 확장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 거룩한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또 종교적인 일을 맡아서 하던 레위인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멈춰 서서 돌봐주고 그를 여관에 맡기고 돈까지 지불한 후 갔다는 겁니다.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냐?”라고 하셨을 때 돌봐준 사람이라고 대답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너도 가서 이웃이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우리의 이웃이 아닌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딱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이웃이고, 이웃이 아닌 사람은 타인이고, 또 미워하는 사람은 원수라는 식으로 구분할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이 술주정뱅이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세리들과 이방인들과 어울리시면서 그들과 똑같이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결코 그들의 죄악 된 행위와 습관이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거기에서 세리나 이방인의 태도는 더 나은 의의 길이 될 수가 없다는 것, 제자의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6-47절)
이들은 상종해서는 안 되는 부류의 인간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의 친일파 순사들이 그렇게 못된 짓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조선 사람인데 자기 동족에게 그렇게 못되게 했습니다. 일본 사람보다 더 악랄하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세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동족 유대인의 피를 빨아먹었습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이 걷어서 돈을 착복하고 쌓아 놓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보통 유대인들은 세리에게 인간 취급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리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사랑한다는 겁니다. 또한 이방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이방인들도 자기 형제자매에게는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좋아해 주는 자기 가족이나 친한 사람에게는 그들도 문안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세리나 이방인의 삶의 방식은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 될 수 없고,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형제자매에게만 문안하는 경향이 요즘 굉장히 많습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게 바로 ‘진영논리’입니다. 자기 쪽 사람은 사랑하고, 상대편은 원수인 겁니다.
요즘 보기에 참 민망하고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SNS나 인터넷 기사 댓글에 이런 말을 쓰는 것을 제가 가장 싫어합니다. 그것은 ‘1찍’, ‘2찍’이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상대방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는 분도 계시고 잘 모르는 분도 계시는 것 같은데, 한국 대통령 선거 때 ‘1번 후보를 찍은 사람’, ‘2번 후보를 찍은 사람’을 말하는데, 서로를 비하하는 표현입니다. 상대방 후보를 찍었다고 해서 ‘그러니까 그 모양이지’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그러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제가 또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굥’과 ‘찢’입니다. 무슨 말인지 신문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이것도 상대방을 경멸하는 아주 안 좋은 표현입니다. 근데 이런 것을 크리스천들도 쓰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이게 딱 세리와 이방인 같은 그런 태도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며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진영논리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면 그런 말을 써도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이렇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실은 이런 것들을 다 포함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5절)
이것이 제자입니다. 그 당시는 남성 위주 사회였기 때문에 여기서 ‘아들’이라고 했지만, 자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인데,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비를 주시고 햇빛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악하다고 안 주시는 게 아닙니다. 악하다고 배척하시면서 ‘내가 좋아하는 애들만 줘야지.’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인이나 불의한 자에게도 좋은 것을 주십니다. 햇빛과 비를 다 주십니다. 이런 것들을 신학적인 용어로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자연과 같은 것들이 다 일반 은총입니다.
아마도 이런 의문을 가진 분들이 계실 겁니다. 나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데 일이 잘 안 풀립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거의 안 나가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 또는 아예 하나님을 안 믿는 불교 신자나 이슬람 신자나 힌두교도 같은 사람들은 아주 잘 나가고 집안도 엄청 돈이 많은 부자라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크게 성공합니다.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 나나 우리 가족이나 다른 교인들은 크게 돈을 벌지도 못하고 별로 성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은 이것이 다 일반 은총 때문에 가능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 자녀만 잘돼야 하고 내 자녀 아닌 사람들은 다 안 돼야 한다.’라고 세상 법칙을 그렇게 정하셨으면 우리만 잘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시고, 자기가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도록 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일반 은총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확실하게 인정하셨습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하셨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세상을 얻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보고 우리가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자기의 노력과 여러 가지 상황이 합쳐서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이지, 믿는 사람만 잘되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세상 원리를 그렇게 정해주셨습니다. 그것이 공평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특별 은총’, 즉 구원이라는 것은 다릅니다. 안 믿어도, 또는 아무 종교나 믿어도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특별 은총입니다. 사실은 그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가야 하는데, 이 세상을 떠나도 함께 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일반적인 은혜는 누구나 다 입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다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햇빛과 비는 생명의 원천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의인이고 나의 형제자매라면 누가 사랑을 베풀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이 원수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원수도 사랑하는 것은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당신을 저주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너희도 그렇게 되어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원수라는 것을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원수가 그 집안 식구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무슨 프로그램을 봤는데, 거기 70대 부부 두 분이 나왔습니다. 문제가 나오면 아내 되시는 분이 설명하고 남편 되시는 분이 답을 말하는 게임이었습니다. 게임이 시작되고 문제가 떴는데 ‘천생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당신하고 나 사이.”라고 하니까 남편이 “원수!”라고 하는 겁니다. 부인이 급 당황하면서 “아니, 그거 말고.” 하니까 이번엔 “철천지원수!”라고 했습니다. “아니, 아니, 네 글자, 네 글자!” 그랬더니 “평생 원수!”라고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족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요즘 들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 가족끼리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옛날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습니다. 사실 남은 안 보고 싶으면 안 봐도 되지만, 가족은 계속 봐야 하는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평생 짊어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원수라고 할 때 북한이나 어느 나라 독재자나 테러리스트 같은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원수를 생각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가까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평생 사명입니다. 이것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가족뿐 아니라 관계가 나빠지는 경우는 다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같은 교회의 성도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친하니까 잘못될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성경적인 신앙과 기독교 복음은 무슨 뜬구름 잡는 게 아닙니다. 지금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생기면 사랑하고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현실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47절에서 세리뿐 아니라 이방인들 이야기를 하시면서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인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와주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 ‘문안’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세리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즉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수준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자기 형제자매에게 문안하는 것은 그렇게 악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다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는 너희는 그 수준을 넘어야 한다. 그보다 훨씬 높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보다 못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세리나 이방인 같은 사람들보다도 못한 경우가 사실 많다는 겁니다. 그러나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십니다. 즉, 남보다 더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리나 주님 모르는 사람과 다른 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는 더하기입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고소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어주어라.” “오 리를 강제로 걸어가게 하는 사람에게 십 리를 가주어라.” 이런 것들을 더 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 성도, 크리스천은 세상과 다를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는 것보다 더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더하는 사람, 사랑의 행위를 더하는 사람, 더 나은 의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보복 의지를 품지 않는 것을 넘어서 사랑의 마음을 품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과정이 사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달려서 돌아가신 것만큼 굉장한 고통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한 인간이 최악의 고통을 제일 오래 당하게 하고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단칼에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이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받다가 죽는 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너무나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고난을 많이 당하셨는데, 고난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이 공회를 불법적으로 밤에 그것도 개인 집에서 열어서 신성모독이라고 판정했는데, 그것이 다 불법입니다. 그렇게 불법적으로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당하셔야만 했던 고난, 한때는 호산나 외치면서 찬양하다 돌변해서 이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고 아우성치는 백성들, 또 조롱하며 침을 뱉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갈대로 때리고 하면서 조롱한 군인들 등 예수님이 분노하실 만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또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남들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네.”라고 하면서 막 조롱하고 놀리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시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분노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야, 내가 힘이 없어서 이런 줄 알아? 한마디만 더 하면 너희들 그냥 끝장이야.’라고 하실 수 있었는데 안 하셨습니다. 이사야 말씀에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된 대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셨습니다.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겟세마네 기도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기 바로 직전까지 기도하셨는데, 예수님은 기도함으로써 원수를 사랑하는 길로 굳건히 나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그렇게 조롱하며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고 기도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 길을 따랐던 초대교회 소위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예수님처럼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그랬기 때문에(행 7:60),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며 상황을 지휘하고 있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거기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후에 결국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 없이는 사도 바울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46절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하셨는데,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면 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의 상’ 또는 ‘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산상수훈에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분명히 상이 있습니다. 천국에 우리를 위한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 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고, 하늘나라에서 받는 상이며, 땅에서 받은 어떤 상보다 더 큰 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엄청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상을 받을 때 얼마나 명예롭습니까? 무슨 스포츠팀이 우승해서 우승 트로피를 드는 것도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금메달을 올림픽에서 따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런데 그런 상보다 훨씬 더 큰 상이 원수를 사랑한 우리를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시며 점점 올라가다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최고점을 찍으십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48절)
이것이 유대인들의 잘못된 율법 해석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앞에서 언급하신 6가지 말씀 주제에 대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삶의 결론입니다.
왜 우리는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텔레이오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텔로스’(목적)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온전하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거룩함이며, 거룩함은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레위기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고, 이것을 베드로도 나중에 자기 편지에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하는 말인데, 곧 목적을 향해 나가라는 말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거룩함, 성결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는 다른 삶,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완벽함(perfection)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같이 너희도 거룩하게 즉 다르게 살아라.’ 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 하면서도 똑같이 살면 그게 무슨 믿고 따르는 거냐?’라는 말씀입니다. 다르게 사는 삶의 최고 정점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가는 말]
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을 해서 화제가 되었던 <Unbroke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루이 잠페리니(Louis “Louie” Zamperini)라는 인물에 관한 책을 영화로 만들어 2014년 성탄절에 개봉했는데, 저도 그때 직접 영화관에 가서 봤습니다. 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토랜스(Torrance)에 Torrance Municipal Airport가 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그 공항을 Zamperini Field라고도 부를 정도로 거기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루이는 어릴 때 문제아였는데,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것 때문에 동네 아이들과 싸우기도 많이 했고, 매일 동네 경찰관이 끌고 집으로 데려가는 게 일상인 소년이었습니다. 육상선수인 형의 추천으로 만 15세 때 학교 육상부에 들어간 후 뛰어난 재능에다 엄청난 훈련을 하여 토랜스 고등학교 재학 중 미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까지 나가게 됩니다. 비록 5000미터 경주에서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마지막에 꼴찌로 달리다가 엄청난 속력을 내며 여러 명을 제쳐서 당시 그 경기를 관전하던 히틀러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이 터지자 루이는 미 육군 장교로 입대하여 B-24 폭격기를 타는데, 어느 날 구출 임무를 나간 비행기가 엔진 고장으로 태평양 한가운데 추락하고, 루이를 비롯하여 3명만이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먹을 것도 물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중 49일째에 드디어 구조되는데 하필 일본 해군의 함정에 의해 구조되고, 그래서 포로로 잡힙니다.
루이는 마셜 제도의 일본 해군 기지에 수용되고 독방에 갇혀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일본군의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 총살당하는 줄 알았지만 웬일인지 도쿄로 옮겨져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일본군 장교에 의해 철저하게 괴롭힘을 당하며 수시로 구타와 고문을 당합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 풀려나 대위 계급장을 달고 고향으로 돌아온 루이는 가족들과 눈물로 재회하고, 몇 년 후에는 결혼도 합니다.
그러나 루이는 전쟁 후유증으로 알코올중독자가 되는데, 어느 날 아내가 빌리 그래햄 전도집회에 가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아내의 인도로 그도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 후 복수가 아닌 용서의 자세로 삶을 살던 루이는 결국 일본에도 방문하여 자기를 고문하고 괴롭혔던 가해자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80세가 되던 1998년 일본 나가노에서 동계올림픽에 열렸는데 일본 올림픽 위원회에서 루이 잠페리니를 성화 봉송 주자 중 한 명으로 초청하여 성화를 들고 뛰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2014년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결국 9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나에게 그냥 조금만 잘못해도 용서를 잘 안 하려고 하는데, 이분은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고 정말 죽고 싶을 정도의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이 자기에게 들어왔기에 ‘나는 이제 복수하지 않겠다. 용서하겠다.’라고 마음만 품은 게 아니라, 직접 일본까지 가서 자기를 괴롭혔던 가해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만나 용서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인생입니까?
바로 이런 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