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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4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10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3~16절)
[들어가는 말]
거의 30년 전쯤 제가 뉴저지에서 공부할 때 손님이 와서 같이 뉴욕 맨해튼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근처 한인타운에 있던 한 설렁탕 전문 식당에서 식사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왜냐하면 그때 먹었던 설렁탕 맛이 지금까지 먹어본 어느 설렁탕보다도 더 맛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그런 데가 많지만, 당시 설렁탕과 함께 커다란 무로 만든 시뻘건 깍두기가 나오고 그것을 직원이 그 자리에서 가위로 척척 썰어 주는데,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습니다. 한 조각 먹었을 때는 ‘와, 역시!’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그 깍두기를 먹는 동시에 아주 맛있어 보이는 설렁탕 국물을 한 숟갈 척 떠서 입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아무 맛도 안 나고 싱거웠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소금을 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적당히 넣고서 먹었던 그 설렁탕 맛은 정말이지 언제 다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맨해튼에 다시 갔을 때 바로 그 식당에서 똑같이 설렁탕을 시켜 먹었는데, 그때는 그 전처럼 맛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맛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늘 함께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상의 소금 (13절)
먼저 소금에 대해 생각해 보면, 소금은 어떤 기능을 합니까? 무엇보다도 음식이 썩는 것을 방지해 줍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때에는 당연히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소금은 음식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되었고, 아직도 소금을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소금은 음식 맛을 좋게 하기 위해서도 사용됩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소금이 사용된 것에 대해서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출 30:35)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 2:13)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겔 43:24)
그러니까 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소금을 안 치면 싱거워서 드실 수 없으니까 먹기 좋게 소금을 치라는 게 당연히 아닙니다. 이것은 정결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향과 제물을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소금이 사용됐습니다. 소금은 이처럼 다양하게 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3절에서 약간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3절)
여러분, 짜지 않은 소금을 드셔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게 무슨 소금입니까? 그러니까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소금이 짜지 않으면 그것은 소금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버려져 밟힙니다. 설탕은 달아야 하고, 소금은 짜야 합니다. 그러니까 소금에게 짠맛은 있어도 그만이거나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이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소금이 짠맛을 잃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 고대 시대에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면 이 말씀이 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 당시 소금은 소금인데 짜지 않은 소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금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물질들이 들어와 섞였습니다. 그렇게 이물질이 들어왔을 때 소금이 만들어져도 짠맛이 나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소금이 다른 물질들과 섞임으로써 소금 특유의 짠맛이 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소금인 우리가 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과 너무나 섞여 버리고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섞여 버려서 짠맛을 잃고 아무 소용이 없게 되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닷물 맛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정말 짭니다. 바닷물에 포함된 소금의 양이 얼마나 되기에 바닷물이 그렇게 짭니까? 몇 % 정도 되는 것 같으십니까? 50% 30%? 20%? 그렇지 않습니다. 단 3.5%입니다. 바닷물에서 평균적으로 염분이 3.5%밖에 안 되는대도 그렇게 짭니다.
2022년 통계를 보면 한국에는 개신교인이 20%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라고 했을 때 ‘개신교’라고 답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지, 꾸준히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습니다. 미국은 2020년 기준으로 63%인데, 그것도 설문조사에서 기독교라고 답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지,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40%가 안 됩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아주 깨끗합니까? 15%, 20%라도 굉장히 많은 숫자인데, 그러면 썩지 않고 좋아지고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좋아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생활이 아주 편해졌습니다. 요즘은 가만히 앉아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파악하고 이것저것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세상은 굉장히 악하고,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끔찍한 살인사건, 그것도 토막살인사건,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갑자기 길거리에서 흉기를 휘두르는 ‘묻지마’ 살인이나 폭행도 있습니다. 심심해서 죽여봤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부정부패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교묘한 범죄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타락해 있다는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좋아져야 하는데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숫자가 더 늘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더 악해진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서 이 세상의 타락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주변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책임질 것이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 뉴스에 나오면 ‘어떻게 저리도 악할 수 있나?’ 하며 흥분합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잔인한 테러리스트나 살인자를 볼 때 우리가 분노하고 비난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그런 일을 접할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는가’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회피하고 나 자신만 돌아보라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을 때 정죄하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은 저 사람과 똑같지 않은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형제자매에게 화내고 미워하는 것, 또 욕을 하는 것은 살인과도 같고 지옥에 떨어질 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21-22).
혹시 혈압이 낮으신 분들은 혈압을 높일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한국 정치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혈압이 높아집니다. 요즘 사기를 치는 경우가 너무 많고, 공금 횡령이나 빼돌리는 일들, 또 권력을 이용해서 불공정한 특혜를 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요즘 청년들은 공정의 문제에 아주 민감한데, 다른 청년들이 자기 부모의 지위를 이용해서 미리 정보를 알거나 어떤 특혜를 누렸다면 분노하게 됩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의분을 내는 것은 좋지만,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나에게는 그런 이중성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에 와서 소위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겪어보셨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크게 겪은 적은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은 그런 것을 더 느끼실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인종차별이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종적으로 그릇된 우월주의자들을 볼 때 경계하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종차별이 나쁘다고 하고 백인 등 다른 인종에게 인종차별을 당할 때 분개하면서도 다른 인종에 대해 무시하고 깔보는 일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은 분개하면서 내가 다른 인종을 은근히 무시하고 차별하는 일은 없는지 잘 살피며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인종을 가리키며 비하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또 다 큰 어른인데도 ‘멕시칸 애들’이라고 부릅니다. 30대, 40대인데도 자기 밑에서 일한다고 ‘애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비하하는 표현이 다 인종차별입니다. 내가 당하는 것은 분개하는데 내가 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한국 사람끼리 인간차별을 하는 것은 더 심합니다. 계층을 나누어 자기가 위에 있다고 갑질하는 것이 인간차별을 하는 것입니다. 재산 정도에 따라 ‘나는 이 정도인데 너는 고것밖에 안 되니까 내가 무시해도 된다.’라고 하는 마음, 교육 정도에 따라 ‘나는 이렇게 많이 배웠고 너는 못 배웠으니까 나는 너를 무시해도 된다.’라고 하는 마음이 다 인간차별입니다. 내가 당하는 것은 분개하면서 내가 하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들에게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이러한 이중적, 위선적 태도입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뜨겁게 예배하고 거룩하게 있는데, 집에 오면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비판과 비난만 하는 것을 자녀가 다 보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직분자인 부모님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회의를 느끼며 신앙을 떠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이 말을 하고 다른 데 가서 저 말을 하는 것이 자녀 교육에 가장 나쁩니다. 이전에 다른 교회에서 사역할 때 그런 부모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아이들이 똑같이 닮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이 말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을 하는 것이 어떻게 그리도 똑같은 제가 너무 놀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예민하고 크게 보는 경향이 누구나 있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전문용어(?)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바로 ‘내로남불’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똑같은 것인데도 자기에게는 너무 관대하고 남에게는 너무 예민합니다.
이 세상이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뭐라고 합니까? “아, 큰일 났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말세야, 말세.”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를 지을 때 큰일이라고 하거나 말세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니 화가 난다는 태도가 대부분 아닙니까? 이것은 아주 무서운 교만입니다. 주님은 교만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금인 우리에게는 어떠한 자세가 필요합니까? 다른 사람들의 죄와 실수를 지적하고 비난하기 이전에, “어떻게 저 사람이 그럴 수가?”, “우째 이런 일이?”라고 하기 전에, 이 세상이 이토록 타락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내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반성과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뒤에 보면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온전(완전, perfect)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온전하다’라는 말은 ‘다르다, 구별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온전하라는 것은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이 들어오면 살 수 없는, 그렇게 될 때 못 견디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호수나 바다에 가보면 배들이 물 위에 떠 있습니다. 물 위에 배가 떠 있는데, 배는 분명히 물 안에 있지만 물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배가 물에 속하면 어떻게 됩니까? 즉, 배에 물이 들어오면, 물과 하나가 되면 가라앉습니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 그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니까 물 안에 있지만 물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물이 들어와 합쳐져서 가라앉아 버리면, 모양은 분명히 배이지만 더 이상 배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소금이 다른 물질들과 섞이면 짠맛을 내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기준대로 살면 소금의 짠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짜지 않으면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소금의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버려져 밟힐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짜야 합니다. 달라야 합니다. 그럴 때 전도도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자기들과 타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같이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하고 재미있게 놀자.” “나는 교회 다니니까 그런 것 안 해.” “에이, 괜찮아, 한 번만 하자. 한 번은 괜찮아.” 그러면 다들 재미있게 노는데 자기가 괜히 분위기를 깨는 것 같으니까 같이 놀게 되면, 겉으로는 막 좋아하지만 돌아서면 “저 사람 가짜야.”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기 원하지 똑같은 모습을 보기 원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셔야겠습니다.” “아니, 술집을 왜 가세요? 집사님인데 가지 마셔야죠.” “아니, 내 친구가 술을 좋아하니까 같이 술을 좀 마셔주면서 전도해야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0년은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전도가 안 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쓰는 방법을 똑같이 쓰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하면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짜야 합니다. 달라야 합니다. 다르게 살면 그때는 비난하고 뭐라 하지만 돌아서서는 “저 사람 진짜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하면 좋아하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저 사람 가짜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짜야지, 짠맛을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 세상의 빛 (14~16절)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4-15절)
예수님은 등불(lamp)에 대해 말씀하시면서(15), 등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대) 위에 둔다고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등은 밑이 아니라 위에 둔다는 것입니다. 빛의 주된 역할은 사물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특히 어두울 때 빛이 비추어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면서,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등불은 자기를 위해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추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들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어둡습니다. 세상이 어둡다는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그래서 어두운 이 세상은 밝게 비추는 빛인 예수님의 제자들, 즉 바로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밝게 비춤으로써 사람들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보고 찾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두우니까 우리가 빛을 비추어서 보게 해줘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6절)
빛을 비춘다는 게 뭡니까?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선을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착한 행실의 목적은 그냥 ‘저 사람은 참 착한 사람이네.’라고 칭찬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조금 돕는 선행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함으로써, 즉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목적대로 살아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그러한 삶을 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며, 더 나아가 그들이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어보고 싶다.’라고 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역사가 일어나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안 믿는 분들이 계십니까? 요즘에는 그런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40대 중반 이상 되는 분들은 그래도 어릴 때 한두 번은 교회에 다녀본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오는 20대, 30대를 보면 교회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생전 처음 왔다는 분들이 요즘 많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교회에 나가는 사람의 수가 많이 줄어든 겁니다.
주변에 예수 안 믿는 가족, 친척, 친구, 직장 사람들이 있는데 혹시 그들이 나를 보며 ‘이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는 별로 믿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이 다니는 교회라면 절대 가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들도록 살고 있다면 우리는 믿음 생활에 실패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친구들이나 친척들이나 이웃들이나 직장 동료들이 내가 주님 안에서 평안하고 기쁜 삶을 살며 선을 행하고 신실하게 사는 것을 보면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보며 ‘이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어볼까? 이 사람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도 한 번 가볼까?’라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들을 구원의 길로 이끈다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 당시 등불이라는 것은 대개 기름으로 태우는 등불이었습니다. 아무리 등이 값비싼 골동품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기름이 없으면 빛을 내지 못합니다. 또 아무리 기름이 많아도 불을 붙여서 태우지 않으면 빛을 내지 못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를 태우는 희생이 있을 때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기름(힘)을 공급받아야 빛을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하고 다양한 신앙경력이 있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야 빛을 발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주님으로부터 기름(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기만 하고서 끝나면 안 되고, 받은 기름에 불을 붙여 사용해야 합니다. 태워야 합니다. 자기가 타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다른 교회에서 청년 사역을 할 때 하루는 한 청년 하나를 차로 데려다 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녁 모임이 끝나고 데려다준 것인데, 제 차에 타자마자 대뜸 묻는 말이 “저녁으로 뭘 드셨어요?” 그랬습니다. “왜요?” “된장찌개 드셨어요?” 집에서 된장찌개를 먹고 왔기 때문에 그 냄새가 많이 났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된장찌개를 먹으면 된장 냄새가 납니다. 특히, 청국장은 심합니다. 카레를 먹으면 카레 냄새가 납니다.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화장실 냄새가 납니다. Fan이 망가지면 더 심합니다. 숯불로 갈비를 구우면 어떻게 됩니까? 숯불갈비 냄새가 온몸에서 진동하게 됩니다. 커피집에 들어가서 오래 머물다 나오면 커피 냄새가 나게 됩니다. 내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그 냄새가 몸에 붙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애틀랜타, 애팔래치아산맥, 아프리카, 헝가리, 중미 그룹이 있었는데, 저는 중미 그룹이었고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과테말라를 방문했습니다. 과테말라가 그중 가장 가난하다고 했는데도 과테말라의 수도인 과테말라시티(Guatemala City)는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수도 중심에 놀랍게도 엄청나게 큰 쓰레기 처리장이 있었습니다. 사실 처리장이 아니라 쓰레기를 쌓아놓는 곳이었습니다. 도시 한복판에 그런 게 있다는 게 놀라웠는데, 사람들이 움막을 치고 그 안에 살았습니다. 쓰레기에서 먹을 게 많이 나오다 보니까 다른 데 있는 개들은 말랐는데 그 안에 사는 개들은 배가 땅에 닿을 정도로 뚱뚱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는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도시 한가운데 이런 게 있는가?’ 빈민들이 거기 사는 것도 충격이었습니다. 한 시간쯤 그 안에 들어갔다 나오니까 저희를 데리고 다니던 미니버스 운전기사가 말했습니다. “You guys smell garbage(당신들에게서 쓰레기 냄새가 납니다).” 쓰레기장에 오래 있으면 쓰레기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 나는 주로 시간을 어디에 보내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시간을 오래 보내는 바로 그것의 냄새를 풍기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나 좋지 않은 것에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나에게서는 그런 것들의 고약한 냄새밖에 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만 시간을 보낸다면, 나에게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힘쓰며 나아간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통해 주님의 거룩한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과는 다른 나의 모습 때문에 주님을 모르던 사람도 나를 보고 주님께로 나아오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조금 더 생각해 볼 점들
1) 너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시거나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조금만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어.’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지, 소금과 빛이 되려고 애쓰는 게 아닙니다. 소금과 빛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너희’라는 단어를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칭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너희들, 나를 믿고 따르는 제자인 너희들만이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희만이 그러하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만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다른 종교인이나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소금과 빛일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우리만이 소금과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이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기관이 바로 교회입니다. 비록 교회의 모습이 불완전하고, 문제가 많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교회를 사용해서 이 세상을 바꾸길 원하시는 주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교회는 보이는 건물이나 장소가 아닙니다. 성도의 모임,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강한 나라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것은, 그렇게 위대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겠습니다.
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착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소금과 빛입니다.”라고 합니다.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지, 신자의 소금과 빛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금과 빛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실수해서 “우리는 주님의 소금과 빛입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더러워졌고, 너무나 어둡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더럽고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쓰임 받는 사람들입니다.
소금과 빛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둘 다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됩니다. 소금은 물에 녹아야만 짠맛을 냅니다. 등불도 기름이 불에 탈 때 빛을 냅니다.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더러워지고 어두워진 세상, 그러나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 주님의 제자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 왜 빛을 비춥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만일 우리 때문에 세상이 복을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모여서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니까, 흥분한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움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삽시다.”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만 좋은 “여기가 좋사오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가 좋기는 좋지만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때문에 이 세상이 유익을 얻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복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거기 있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구원의 선물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이 우리 가정, 우리 주변, 이 사회, 이 나라, 더 나아가 땅끝까지 전파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나가는 말]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 중에 하루는 알렉산더가 잠이 오지 않아서 군대 막사 사이를 돌아보고 있었는데, 보초를 서던 한 젊은 군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상한 알렉산더 대왕은 그 젊은 군인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깜짝 놀라 깨서 보니 자기 앞에 대왕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 놀라 벌벌 떨었습니다.
그렇게 떠는 군인에게 알렉산더는 이름을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네. 자네 정말 이름이 무엇인가?” “예,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이 친구가 나를 놀리나? 잠이 덜 깼나? 내 이름 말고 자네 이름이 뭐냐고?” “알렉..산..더..인데요...” 그러자 정색을 하며 알렉산더 대왕이 그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자네가 정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면 당장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자네의 그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냐?” “예, 저는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제자입니다. 크리스천입니다.” “정말이냐? 네 이름이 정말로 무엇이냐?” “크리스천인데요. 주님의 제자인데요.” “그렇다면,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의 삶의 태도를 바꿔라!”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참된 소금과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주님이 정말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