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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9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15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마태복음 5장 38~42절)
[들어가는 말]
요즘은 종종 경찰의 과잉 진압이나 무기 사용에 대한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독재국가야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것이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경찰이 과잉 진압을 함으로써 큰 사태로 번지기도 합니다.
지난 6월 27일 프랑스 파리 외곽 낭테르에서 알제리계 17세 소년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일로 인하여 시위가 일어나서 엄청난 폭력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7월 4일 기준으로 건물 1,100채, 자동차 5,900대가 불에 타거나 망가졌습니다. 지금은 그 피해가 더 커졌을 것입니다. 우파 공화당 소속 시장의 집에 시위대가 급습해 불을 지른 것을 비롯해, 민주 시위가 아닌 폭동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제는 거꾸로 폭력 시위 규탄을 위한 맞불 시위가 열릴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 미국에서도 지난 2020년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관이 용의자였던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8분 가까이 무릎으로 목을 눌러 제압하다가, 결국 그가 질식하여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미니애폴리스는 물론이고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나며 “Black Lives Matter”라는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의 과잉 진압이나 무기 사용으로 용의자가 사망하여 시위가 벌어지고 소송을 벌인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날이 갈수록 범죄가 흉악해지기 때문에 경찰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에 무기를 사용해야 할 때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꼭 사용하지 않아도 될 때 총을 쏴서 용의자를 죽게 하거나 지나가던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법에는 ‘정당방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무기를 사용해서 나를 죽이려 할 때 나를 방어하기 위하여 나도 맞받아 공격해서 상대방이 죽거나 다쳐도 허용하는 법입니다. 결국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경우 어쩔 수 없이라도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악한 자에게서 자기의 것을 지키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특히 자기 생명을 해치려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저항하게 됩니다. 그런데 살인 사건뿐 아니라, 누군가가 부당하게 나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피해를 보상받으려 하고 끝까지 법적 싸움을 통해서라도 나의 권리를 지키려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입었는데 그것을 보상하려 들지 않으려고 하면, 법적 싸움을 통해서라도 보상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보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난주 본문에서는 약속한 것, 헌신과 결단한 것을 지키라는 말씀이었는데, 지난주 약속을 잘 지키셨습니까? 그렇게 서약한 것뿐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잘 지키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것을 잘 지키려고 애쓰셨습니까?
주일에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을 듣고 그래야겠다고 하고는 가서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이 산상수훈은 우리 삶에 피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귀한 말씀이고 훌륭한 말씀이라고 하고는 가서 아무것도 안 하면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힘들더라도 이 말씀 중 한 가지를 잡아서 꼭 실행하겠다는 결단의 마음으로 오늘 함께 말씀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배려가 담겨 있는 계명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8절)
이 말씀은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도 들어본 말씀일 것입니다. 복수해도 된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24, 레위기 24:20, 신명기 19:2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동해복수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손해는 같은 손해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은 어쩌면 너무 잔인해 보이고 야만적인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율법의 다른 말씀처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나도 친절히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에게는 최대한 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갚아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작은 손해를 입혀도 그보다 더 많이 갚아주어야 속이 시원한 것이 우리 본성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본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로 ”라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이야기하면 ‘눈 하나당 눈 하나로, 이빨 하나당 이빨 하나로 갚아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내 눈 하나를 상하게 했으면 나는 상대방의 두 눈을 다 상하게 하거나 아예 목숨을 빼앗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한 것보다 더 크게 갚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해코지했을 때 지나치게 되갚으려 하지 말고, 형벌과 잘못에 동등함과 공평함이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복수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당 하나만 갚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도한 복수를 경계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개인이 아니라 재판관이 시행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나 신명기 관련 본문의 전체 문맥을 읽어보면, 이것은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재판장과 제사장에게 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는 말은 개인이 아니라 재판장이 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한 사람에 대한 형벌을 정할 때 재판장이 ‘저 사람이 눈 하나를 상하게 했으니까 당신도 저 사람의 눈 하나만 상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죄의 형량에 맞도록 형벌을 정해주는 말이 이것입니다. 아무나 복수할 때 쓰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해를 당한 사람이 해를 입힌 사람에게 보복해도 되는 권리가 있고 심지어 의무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보복을 정당화한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을 아주 잘못 이해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사실 이 법은 강자에 의해 약자가 피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약자 보호법입니다. 하나님이 약자를 보호하시기 위해 주신 법이지, 보복해도 괜찮다고 주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생명에는 생명,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발에는 발, 상처에는 상처로 갚도록 한 이 법이 있으니까 두려움 때문에라도 남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볼 때 함부로 대할 수 있는데, 이 법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동해복수법은 몸에 해를 끼친 경우에 그 대신 돈으로 배상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는데 ‘이 돈 먹고 떨어져라.’ 하는 식으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만 유리할 것이기에 그렇게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 하나를 주셔도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랬는지, 특히 얼마나 약자를 보호하시고 배려하셔서 주셨는지, 그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당했으면 갚아도 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규정은 알고 보면 그 당시 아주 훌륭한 취지와 목적을 가진 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한 의를 이루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정도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고, 너희는 더 나은 의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39a절)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따라 개인적인 복수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해코지하고 공격할 때, 나의 본성을 따라 내가 해를 입은 이상으로 되갚으려는 보복 충동에 사로잡혀서 사람들을 대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쪽에서 악을 행했으니 나도 악하게 나간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저쪽에서 악한 방법을 썼으니 나도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는 복수하는 마음으로 불의나 악을 대하면 안 되며, 우리 본성의 되갚아주고 싶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악을 대하거나 바라보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쪽에서도 그랬는데 뭐 어때? 나도 하지.’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아주 잘 이해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내용을 로마서 12장에 써놓았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7)
상대가 해코지하고 의도적으로 악하고 나쁘게 나오더라도 절대 그 악을 또 다른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수 믿는 사람은 늘 손해 보고 당하면서 살아야 하나? 억울하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새번역)
“기록되었으되”라고 하며 인용한 말씀이 신명기 32:35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지금 억울하고 괴롭고 약이 오르고 분통이 터지는 상황인데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이 해주실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복하다 보면 하나를 받았으니 나도 하나를 준다고 하다가 우리의 본성은 거기서 멈추지 못합니다. 두 개, 세 개 이상 더 갚아주고 싶은 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완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바르고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맡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판단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아주 정확하게 판단해주십니다.
우리는 뭔가를 받았을 때 덜 갚으면 분이 터지고, 똑같이 갚아도 만족이 안 되며, 더 갚아주어야 속이 시원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불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울하게 하지 않을 분이심을 믿고 신뢰하라는 겁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거나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에게 직접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갚아주십니다.
2.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성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0)
이것은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내용에 나옵니다. 그 당시에는 불을 굉장히 귀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불이 꺼지면 이웃에게서 불을 구해올 때 도자기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가서 받아왔습니다. 이것은 선을 베풀 수 있을 때, 잘 베풀어주라는 것입니다. 또 불을 꺼뜨려서 이웃에게 불을 빌려온다는 것이 드러나서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도 그렇게 잘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믿는 사람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은 크리스천답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악을 되갚고 싶어 하는 본성이 우리 속에 있지만 그런 본성을 따라 살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같이 귀한 본문을 역사의 훌륭한 인물들이 잘못 해석한 경우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는 이 본문에 근거하여 경찰이나 전쟁, 군부대 같은 것을 다 부정했습니다. 또 재판 제도, 감옥 같은 것을 다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이러한 성경 본문에 근거하여 무저항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모두 본문을 오해한 것입니다.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나라의 법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크리스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지, 나라의 법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해코지하는 사람을 만날 때 한 개인으로서 보복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의 시민으로서 불의한 자가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고 해를 입히는 것을 보면서도 이 말씀에 근거하여 그런 사람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라는 겁니다. 가끔 미국에도 그런 일이 뉴스에 나왔는데, 디트로이트와 뉴욕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긴 다리 위에서 어떤 사람이 폭행당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그 많은 차들 중에 멈추고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폭행당하고 있는데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냥 가야겠다.’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이익과 관계될 때는 악을 악으로 대응하거나 보복하려 하면 안 되지만, 불의한 자가 사회에서 선량한 시민을 다치게 할 때는 나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불의한 자를 제압하여 더 이상 악한 일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군인으로, 때로는 경찰로, 때로는 법관으로 국가의 질서와 권위를 가지고 죄를 범하는 자를 재판하고, 그런 사람에게 맞는 형벌을 내려 감옥에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을 혼동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가운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점에 있어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주십니다.
1) 오른뺨을 맞게 될 때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39b절)
예수님은 그냥 뺨을 치면 돌려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오른편 뺨을 맞으려면 왼손으로 맞든지 오른쪽 손등으로 맞아야 합니다. 당시 왼손으로 폭행당하는 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손등으로, 즉 백핸드로 친다는 것은 더더욱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굉장한 굴욕감을 안겨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른쪽을 맞으면 왼쪽도 있다고 하라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오른뺨을 맞을 때 왼뺨을 또 맞아도 되는 것처럼 반응하라고 하시는 것의 핵심은, 진짜로 문자 그대로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성 모독이라고 불법적인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공회가 불법적으로 밤에, 그것도 대제사장 개인의 집에서 열린 공회에서 불법 재판을 받으셨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예수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다른 쪽 뺨도 돌려대며 때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이야기하라. 왜 나를 때리느냐?’ 하고 항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뺨을 돌려대라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아를 존중하고 자기에게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받으면 악으로 나오고 똑같이 보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특히 오른편 뺨을 맞는다는 것은 엄청난 인격적 모독인데, 그렇게 인격적 모독을 당하고 멸시당하고 인간 취급을 못 받고 굴욕적인 취급을 받을 때 똑같이 되갚아주려 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해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알코올중독자나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오른뺨을 때렸을 때 “여기 왼뺨도 있습니다.”라고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마음의 본성에 들어 있는 자기 보호, 자기방어, 자기 높임, 이기심, 특히 내가 받은 대로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여러분, 인격적 모독을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한국어에는 존댓말과 반말이 있기에 본 지도 얼마 안 되는 사람이 반말을 하며 무시하면 얼마나 마음이 상합니까?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막말하는 경우, 권력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갑질하며 인격 모독을 하는 경우가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인격 모독을 당했을 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받았을 때 똑같이 복수하겠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 속옷을 요구받을 때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0절)
누군가 속옷을 달라고 법으로 고발했을 때 겉옷까지 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속옷과 겉옷에 굉장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겉옷은 아주 특별한 옷입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겉옷이 한 벌이었습니다. 겉옷은 일교차가 심한 유대 땅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침낭이나 이불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낮에는 두르고 다니고, 밤에는 그것을 덮고 잤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는 겉옷을 저당 잡았을 경우,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말씀합니다. 겉옷은 해가 졌을 때 극심한 일교차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이불이나 침낭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겉옷은 그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생존권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어떤 사람이 겉옷이 아니라 속옷을 달라고 했다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여벌이 있는 옷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아낌없이 겉옷까지 벗어주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밉다고 그 사람이 입은 더러운 속옷을 갖겠다고 소송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까? 줘도 안 가질 텐데, 그것을 갖겠다고 소송을 합니까? 지금도 더럽지만 옛날 위생이 안 좋을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기서 일종의 과장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진짜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이 뭡니까? 법적으로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정당한 권리가 겉옷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겉옷을 달라고 송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속옷은 혹시 고소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겉옷을 달라고 고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일이었고, 모두가 받아들일 수 없는 대표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상대적으로 작은 것을 가지고 재판을 걸어 나를 괴롭히고 나의 작은 소유나 권리를 침해하려 드는 사람들을 향해, 겉옷이라는 더 크고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권리까지 포기하고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정말 발전했습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한국 드라마 보려면 한국 가게에 가서 비디오테이프 두꺼운 것을 빌려다 봐야 했습니다. 요즘은 누가 그런 것으로 봅니까? 지금은 실시간 스트리밍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살 만한 시대가 되었는데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권리에 얼마나 민감한지 모릅니다. 이토록 자기 것, 자기 권리를 챙기는 시대입니다. 요즘 소송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한국도 소송이 굉장히 많아져서 정말 변호사 천국(?)입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요즘 그렇게 굉장히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데, 동시에 굉장히 편리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전화기 하나만 보아도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만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천 달러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9천 달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둘 중 누가 더 만족스러운 것 같으십니까? 9천 달러 가진 사람이 의외로 더 불만족스럽습니다. 더 마음에 걱정이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천 달러를 더 벌어서 만 달러를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느라 더 행복하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천 달러로 만족했는데 이제는 9천 달러가 있어도 만족하지를 못하는 시대입니다. 조금 더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9천 달러가 있으면 천 달러를 쓰십시오. 그러면 8천 달러가 됩니다. 거기서 또 천 달러를 쓰십시오. 그러면 7천 달러가 됩니다. 그러면 만 달러를 채워야겠다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진짜입니다. 해보십시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인간적인 방편이고, 진짜 방법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의무에는 둔감하고 자신의 권리에는 민감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기득권을 조금도 잃지 않으려 하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권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누리려 하다 보니까, 그래서 각자 다 자기 권리만 찾아보니까, 세상이 시끄럽고 어려운 것입니다. 다들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주장만 하는 세상에서 마치 아무 권리가 없는 사람처럼, 겉옷과 같이 그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핵심적인 권리조차 언제든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처럼 사는 것이 성도가 세상을 사는 법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권리도 때로는 포기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바보 같은 삶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른 채 당하면서 살라는 게 아닙니다. 알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내 권리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때 놀랍게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안 해본 사람은 이해를 못합니다. 해본 사람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계속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권리조차 자발적으로 포기하며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하십니다.
3) 억지로 5리를 가야 할 때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1절)
여기서 “억지로”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데, 왜 이 말씀을 넣으셨을까요? 그 당시 로마 제국은 피정복민들에게 억지로 5리를 가도록 명령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5리는 1.5킬로미터(약 1마일) 정도의 거리입니다. 쉽게 말해서 1마일 가자고 하면 2마일을 동행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그 전에 이미 심한 고문을 받으시고 피를 많이 흘리셨기 때문에 자꾸 쓰러지셨습니다. 그때 로마 군인이 거기 있던 사람들 중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불러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명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뿐만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기꺼이 할 각오를 갖고 임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하기 싫지만 나는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이니까 5리만 딱 채우고 말아야지.’라고 노예 정신으로 최소한의 기준만 채우지 말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넉넉하게 초과해서 10리까지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니까 ‘야, 진짜 예수님의 제자 되기가 정말 힘드네. 예수님을 믿는 게 힘드네. 숨이 막힌다.’ 그런 느낌이 드십니까?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일터에서 정해진 최소한만 채우고 해야 할 것만 형식적으로 마무리하고 손을 털며 퇴근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이 시간 되었다고 집에 가는 시간에 스스로 자원함으로 더 마무리를 하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가정에서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바쁘고 힘드니까 “얘야, 이것 좀 와서 도와줘.”라고 아무리 불러도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 빨리 와서 도와달라니까!”라고 하면 “I’m coming. I’m coming(오고 있다).”라고 합니다. 부모는 속이 타 죽겠는데 아이는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옵니다. 그렇다고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폰을 들여다보며 낄낄거리다가 남는 시간에 어기적거리며 와서 뭐 해야 되냐고 합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을 시켰더니 금방 하고서 “또 제가 할 것 없어요?”라고 하는 아이,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즐거워하면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충성스럽고 기쁘게 감당할 뿐 아니라 자기가 또 뭘 해야 하느나고 하는 아이라면 부모로서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기쁘겠습니까?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최소한만 하고 있는가, 최대로 하고 있는가?’ 최소한만 하는 교인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건 정말 안 하면 안 되는 최소한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교인들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사실은 억지로 하면 더 힘듭니다. 억지로 5리를 가게 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자발적으로 ‘제가 10리를 가겠습니다.’ 하고 자원하면 오히려 힘들지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억지로, 억지로 하고 최소한만 하면서, 이것을 안 하면 괜히 벌 받을 것 같으니까 이건 해야겠다고 합니다. 더 할 수도 있는데 거기까지만, 최대한을 할 수 있는데도 거기까지만 합니다. 이렇게 하면 누구에게 가장 손해이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하는 본인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생활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이런 게 신앙생활이면 대충 하면 되지.’라고 하게 되어 신앙의 진짜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기꺼움과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자원봉사라는 말이 사실 크리스천들에게서 나온 겁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준보다 더 많이 하면서 살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남을 도울 때도, 최소한으로 하지 말고 최대한으로 해주라는 겁니다. 특히 남이 부탁했을 때 어쩔 수 없이 간신히 하지 말고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더 해주라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그렇게 해주는 내가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됩니다.
4)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2절)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개인 소유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자기 소유, 자신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돈이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자기가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지금 굉장히 발달한 것이 금융 자본주의인데, 금융 산업이 발달하여 자본을 가지고 부를 축적하는 사회가 될수록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게 됩니다.
지금 주식 투자, 코인 투자로 돈 버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면에 빈곤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은 “‘내 것’이라고 끌어안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을 흘려보내어 양극화의 차이를 메워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여 번 것이고, 내 것을 주면 불편하고 어려워지는데, 왜 줘야 하나?’라고 말하지 말고, 누구든 필요를 가진 사람이 보이면 외면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직업적인 거지나 술주정뱅이에게 돈을 퍼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구걸하고, 여전히 술을 마시려 하고, 마약을 사려 한다면 돈을 안 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서 집사회가 2년 전 물, 치약, 칫솔, 간단한 스택 등을 넣은 패킷을 만들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돈 대신 나눠주었습니다. 어린이부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각 가정에서도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다 도박해서 집이 망했는데, 그 사람에게 돈을 또 빌려주면 또다시 도박에 빠지게 하는 것이 되기에, 돈을 안 주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빌려주라고 말씀합니다. 주기는 주되,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나의 자본을 빌려주었으므로 이자를 받아 이득을 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려받을 기대를 하지 말고, 나누고 흘려보내어 이웃의 필요와 아픔을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주저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렇다고 모른 채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보증 서주었다 망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핵심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공급해주신 재물 가운데 나는 어느 만큼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일정한 정도를 꾸준히 떼어 이웃의 필요를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됩니다. 목사 사례비도 헌금에서 나오고, 사역하는 것도 우리가 한 헌금으로 됩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일부를 드리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고 끝난 게 아닙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통로로서의 헌금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에서 관리합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웃 사랑의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교회인 내가 다니는 교회에 헌금함으로써 이 교회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사역을 하도록 내가 동참하는 의미로 하는 것입니다. 기부 차원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보다 부자가 있습니까? 우리가 몇억 달러를 헌금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위 ‘껌값’입니다. 온 우주를 다 갖고 계신 재벌 중의 재벌 하나님께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게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많이 해도 하나님에게는 큰 액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3. 문제의 핵심은 자아/자존심/에고
오늘 본문은 별명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자아를 올바로 다루라는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모든 말씀은 다른 사람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나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의 에고(ego)/자존심/자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들을 올바로 다룰 때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고, 높이고, 영화롭게 하고, 심지어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앉히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인데, 결국 자아가 문제라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결국 ‘누가 주인이냐?’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뺨을 치며 인격을 모독했을 때, 거기에 발끈해서 자존심 세우며 자아 중심으로 나간다면 결국 자기에게 손해가 됩니다. 그럴 때 오히려 용서하며 사랑을 베풀 때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남들보다 그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더 윤리 도덕적이고, 훌륭하게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인격 모독, 재물에 대한 것, 권리에 대한 것, 그 무엇이든 간에 자아/자존심/에고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이 나의 중심에 들어온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중심이 자아로부터 이웃과 하나님으로 바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크리스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더러운 속옷을 뭐 하러 달라고 하며 소송을 걸어 재판까지 합니까? 자존심 문제입니다. 내 자존심이 상했다는 겁니다.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저것까지 빼앗아야 속이 풀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속옷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자아/에고의 문제입니다.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아가 살아서 펄펄 뛰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아를 다루는 것을 잘 모릅니다. 겉으로는 착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자아를 꽉 붙든 채 자기 방식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판단 기준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절대 내려놓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이 세상에서 좋아 보이는 것들을 붙잡고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는 순간 안 믿는 사람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를 게 없는 겁니다. 그런 교인들이 지금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땅을 살면서 오른뺨을 맞고, 속옷을 요구받고, 5리를 억지로 동행하도록 요구받고, 내가 땀 흘려 번 것인데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아야 하는 삶이 사실은 자아를 내려놓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내려놓은 삶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배 중 부르는 찬양곡을 아무거나 고르는 게 아니라 말씀과 어느 정도 연결된 주제의 곡을 고릅니다. 아까 부른 곡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참 귀하다.” 너무 오글(?)거리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어여쁘고 귀한가? “어느 보석보다 귀하다.” 어떤 보물보다도 귀한 존재로 나를 봐주신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나같이 형편없는 사람을?
“네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 즉 우리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사랑스럽지 않을 때, 즉 죄인이었을 때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너와 함께하려 내가 왔노라.”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형편없을 때 오신 겁니다. 우리가 착해서, 사랑스러워서 오신 게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렇다고 자아를 없애는 게 아닙니다. 자존심/자아/에고는 없애는 게 아니라 은혜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빨리 자아를 없애야지. 빨리 내려놓아야지.’ 할 게 아니라 은혜로 자꾸 채우면 해결됩니다.
그래서 자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기도해야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가? 힘든데 억지로 하라는 게 아니라, 은혜의 자리로 나를 항상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로 채울 때에만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말씀대로 힘을 다해 살아갈 때,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늘의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