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TS5chBZlNQk?t=1889
2021년 4월 18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10 ✦
“안식일을 범한(?)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 5장 9b~18절)
[들어가는 말]
제가 1986년에 이민을 왔는데, 대학교를 한국에서 다니다 와서 미국에 온 다음 대학교에 편입하여 다니게 되었는데, 거기서 몇몇 한인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 싱글들이 같이 모여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성경공부도 하고 교제도 하고 여행도 가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끼리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마침 근처에 있는 신학교에 유학을 오신 목사님을 리더로 모시고 성경공부를 하며 배웠습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끼리 성경공부를 하면서 각자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도를 했습니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한 가지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제가 인도하는 날이었는데, 정확히 어떤 본문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다.’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러자 유학생이던 한 대학원생이 ‘은혜도 은혜이지만, 사실 인간의 노력이 중요한 게 아니냐?’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기껏해야 스물두 살 정도였던 저는 갑자기 한 그 말에 아주 급 당황했고,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모임이 끝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유학생은 한국에서 감리교회를 다녔던 청년이었습니다. 우리 장로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반응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을 더 강조하고, 감리교는 은혜도 물론 중요시하지만 인간의 노력과 믿음의 반응을 더 주목해서 봅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강조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같은 말입니다. 은혜와 믿음 사이에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겠습니까? 둘 다 동시에 있어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하나만 있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도 인간이 그것을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아무리 인간이 해보려고 해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둘 다 은혜와 인간의 반응을 강조하지만, 로마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강조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믿게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야고보서는 이미 믿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기 때문에,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은 ‘나는 은혜로 믿었고 구원받았다.’ 하는 게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받는 구원, 성화의 과정을 이루어가는 게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과 행위 쪽을 강조합니다.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두 가지에 대해 아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이어지는 내용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 또는 ‘율법’이 대조됩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또는 ‘은혜의 집’이라고 했는데, 그 자비의 집에서 무자비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율법이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조금 더 살펴보기 위해, 원래는 6장으로 넘어가려다가 한 주 더 다루기로 생각하고 오늘 그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안식일의 참된 의미 (9b-13절)
지난주 본문에서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중증 장애인으로 살았던 사람은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치유의 전설이 내려오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혹시 물이 움직인다고 해도 그가 자기 힘으로 남들보다 먼저 물에 들어갈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물이 그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사실 나을 수 없는데도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다른 데는 그마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그곳에 오셔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그는 평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몇 살인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38년이나 중풍병에 걸려서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했는데, 일순간에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9b-10절)
여기 ‘이르다’(말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의 시제가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너 이렇게 하면 옳지 않다.’라고 한 것이 한 번만 하고 끝낸 게 아니라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괴롭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그를 끈질기게 추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법(Sabbath Law)을 들이대면서 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이 안식법을 범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를 추궁했습니다. 이때 병이 나은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1절)
병에서 나은 이 사람은 책임을 ‘나를 낫게 한 그’에게 떠넘깁니다. 자기는 그저 하라고 하니까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고 싶어도 이렇게 못했습니다. 어떻게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까? 그런데 자기에게 힘이 주어지는 것이 느껴지면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사실 이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38년 동안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약간 치사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38년 만에 겨우 일어서서 이제 흥분된 마음으로 ‘야, 내가 이제 가족들에게 가보자.’ 생각하고 있는데, 일어서자마자 안식법을 어겼다고 하니 처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얼마나 딱한 처지입니까? 그러니 이해는 갑니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물질과 소유를 주인으로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만이 참된 안식과 자유를 주신다는 믿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지 말라. 돈이든 명예든 사회적 지위든 학벌이든, 그것이 참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준다.’ 하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조건 일하지 말라고 사람을 속박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바쁜 삶 중에서 진정한 쉼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쉼은 다른 데서 얻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집중하면서 이 하루를 구별해서 나에게 집중하며 나에게서 나오는 참 안식을 얻어라.’ 하고 주신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지만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그 안식을 바라보는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하루를 쉬며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의도와 상관없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것에 문자적으로 꽂혀서 안식일에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만 따졌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 그냥 일을 안 하면 되는데, ‘저 사람이 일을 했어, 안 했어?’ 하며 자꾸 남을 정죄하는 쪽으로 간 겁니다. ‘나는 일을 안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일을 해? 저 사람은 죄인이야.’ 하고 손가락질하는 데 이 계명이 오용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만 되어 있으니까 무엇이 일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서른아홉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건 일이라고 정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거주지를 옮기는 것, 즉 이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병자였던 사람은 자기가 누워 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갔기 때문에 거주지를 옮긴 게 되고, 그래서 안식일 법을 범한 죄가 되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9절에서 이날은 안식일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이날만 여기에 있었습니까? 어제도 있었고, 그제도 있었고, 내일도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38년 중에서 긴 시간을 여기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날 안식일을 골라서 고쳐주셨습니까? 38년 동안 아팠던 사람이 갑자기 어디를 간다고 하필 이날 고쳐주셨습니까?
바로 이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일부러 안식일에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그냥 ‘일어나 걸으라’ 하지 않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 하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평생 걸을 수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걷게 되었다면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자기 스스로도 너무 깜짝 놀라고 기쁘고 흥분되어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막 뛰어간 것처럼 이 사람도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제 자기가 나았으니까 흥분해서 막 뛰어 나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것은 안식일에 거주지를 옮기면 안 된다고 유대인들의 만들어놓은 규정을 일부러 어기게 하신 것입니다. 완전히 일부러 그렇게 하셨습니다. 의도적으로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진짜 안식이 뭔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안식이 아니라 진짜 안식이 뭔지를 가르쳐주고 싶다.’ 하시는 것입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를 본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그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이 사람이 스스로 병이 낫게 한 것은 아니니까 안식일에 병이 낫게 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한 일이니 그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몰랐겠습니까? 이 유대인들이 여기에 처음 온 사람들입니까?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들도 있고 사두개인들도 있었을 텐데, 이 사람은 여기 오랫동안 있었던 병자였습니다.
물론 병자들이 거기 많았지만 그는 워낙 오랫동안 여기 있었고 그 중에도 그는 가장 가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38년 동안이나 몸을 못 쓰는 사람이 그렇게 흔했겠습니까? 그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그를 죽이려 하거나 심하게 정죄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어떤 형편이었는지를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망이 없이 그저 가만히 누워 있던 이 불쌍한 사람이 중증 장애인으로 38년이나 지내오다가 갑자기 나았다는 것, 깨끗이 나아서 일어나 걷고 뛰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데 하나도 안 놀랍니다. 거기에는 하나도 놀라지 않고 ‘너, 안식일에 왜 자리를 들고 걸어가? 너, 죄 지은 거야.’라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사랑은 없이 교리와 형식만 남은 전통이 사람을 얼마나 무정하게 대하고 메마르게 하는지, 또 얼마나 잔인하게 희생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너무 몸이 아파서 나가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래도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 예배를 드려야 내가 살겠다.’ 하고 생각하고 나갑니다. 그런데 몸이 아파서 씻지도 못하고 샤워도 못해서 엉망이니까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마스크도 하고 교회에 왔습니다. 옷도 대충 입고 왔습니다. 그러자 딱 보고 ‘어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온 사람이 이 따위 복장으로 오나?’라고 합니다. 지금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겠다고 온 것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내가 볼 때 용납이 안 된다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보다 훨씬 심합니다. 38년 동안이나 앓던 사람이 나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고 하나님을 찬양할 일입니까? 그런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너무 좋겠다. 하나님이 해주셨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것은 전혀 없고 ‘왜 죄를 범하느냐?’라고만 합니다.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디에 관심이 있는 겁니까?
원래 안식법은 할례와 음식법과 함께 유대인을 이방인들과 구분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표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안식일이 특히 더 중요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다른 법보다 유독 안식법을 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만 일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절기 때도 똑같이 안식법을 지켜야 합니다. 안식법을 어기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우 중요한 법이면서도 도대체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율법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일이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일에 해당하는 서른아홉 가지를 만들어낸 겁니다. 또 그러다 보니 서른아홉 개 항목에 각각 여섯 개를 더해 234개나 되는 일에 해당하는 예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낸 법이 예수님 시대에 정리가 되었는데 그것을 ‘미쉬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생각해서 만들어낸 부가적 조항에 불과했습니다.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과 똑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을 율법보다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만든 미쉬나가 율법의 정신을 오히려 훼손할 때가 많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왜 주셨는지, 그 의도를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데스다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원래 의도를 완성하고 성취하러 왔음을 보이시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이를 위해 현재 적용되고 있는 안식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부러 병을 고치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날 하실 수도 있었지만 안식일에 행하심으로 진정한 안식일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2-13절)
이 사람은 누가 자기를 고쳤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래 안식일을 제정하신 뜻이 뭡니까? 출애굽기 20장에 그 유명한 십계명이 나오는데, 열 가지 중에서 제4계명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하나님이 제7일에 쉬셨다는 겁니다. 그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쉬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쉬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쉬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전혀 피곤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처럼 ‘아, 피곤해서 쉬어야겠다.’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또한 사람이 아니라 날을 복되게 하시고,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쉬시면 어떻게 됩니까? 큰일 납니다. 이 세상이 유지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일을 안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말씀하시지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계속 일하십니다. 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엿새 동안 완성하신 피조물, 즉 심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물을 기뻐하시면서 즐거워하셨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을 감상하시며 ‘아, 참 좋구나.’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 때에 약속하신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복이 뭡니까?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죽었고, 1.5세대와 2세대에게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한 고별설교가 신명기입니다. 그 신명기에서 십계명을 다시 이야기하는데, 4계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5)
안식일을 왜 지켜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애굽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어린양의 제사로 계속 거룩한 자로 설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기억하는 날입니다. 자유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실현하는 날입니다.
신명기 5장을 계속 읽어보면 ‘너도 일하지 말고, 가족들도 일하게 하지 말고, 종들도 쉬게 하고, 짐승들도 다 쉬게 하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일만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자기는 쉬면서 남은 일을 시키는 식으로 착취하고 억압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억압을 너희가 이집트에서 당했다. 그런데 내가 구원해주었다. 그렇다면 너희도 그런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일 정신은 속박되어 있고 구속되어 있고 자유가 없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것, 그 사람들이 진정한 안식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은 당연히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안식일 정신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쉼은 기대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스스로 어떻게 진정한 안식을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어떤 좋은 휴양지에 가서 휴식을 취해도, 휴양지에 몸은 가 있지만 내가 두고 온 일터와 가정 등의 문제가 없어진 게 아닙니다. 몸만 잠깐 옮긴 것이지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닙니다. 몸은 쉬고 있어도 마음과 생각은 복잡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진정한 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모인 곳에 진정한 평화(샬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경쟁이 있고 언제나 전쟁이 있고 언제나 다툼이 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이름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었지만 ‘무자비의 집’이었던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있던 환자들이 물만 움직였다 하면 서로 자기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막 다투고 난장판이 되고 지옥이 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인간 사회입니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뭔가 이익이 걸린 일이 생기면 거기 붙어서 싸우고 내가 먼저 차지하겠다고 다툽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의 유익을 위해 애를 쓰면서 진정한 쉼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일주일 중 하루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라. 종들도 쉬게 해주고, 빚도 탕감해주고, 짐승들도 쉬게 해주어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희 스스로 너희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포기하라. 너희는 너희 힘으로 너희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고, 내가 너희 인생과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참 안식을 얻어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줍니까? 그것을 인정하고, 탐욕과 죄와 죽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 불렀던 찬양곡 가사 중에 “어린양 찬양하리. 내 평생 그 하나로 충분해요.”라고 노래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삶이라는 바로 그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안식일 정신입니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을 다 제치고 누르고 밟고 올라가서 내가 꼭대기에 가겠다고 하는, 나만 살아남겠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히려 남을 세워주고 살려주면 나도 산다는 겁니다. 남을 죽이면 나도 죽지만, 남을 살리면 나도 삽니다. 그게 안식일 정신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가만히 놓아두는 게 안식일 정신이 아닙니다. 도리어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고, 땀을 닦아 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아주는 것이 진정한 쉼이고 안식이고 샬롬(평화)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니까 베풀라는 겁니다.
2. 아버지와 동등하신 아들 (14-18절)
이때 이 사람은 고쳐주신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이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4절)
지금 이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셨습니다. 38년 동안 병자였을 때는 그의 성전이 어디였습니까? 베데스다였습니다. ‘어떻게든 저 물이 움직이면 내가 들어가야 할 텐데.’ 바로 옆에 성전이 있는데도 병자니까 못 들어가고, 병자들의 성전인 베데스다에 다른 병자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으니까 진짜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성전 뜰에서 만났을 것입니다. 거기 사람들이 많았을 텐에 예수님이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발견한 게 아니고, 잘 보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만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그 사람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기가 나았으니까 이제는 자기도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집에 가지 않고 성전에 온 것을 보면, 그래도 이 사람에게 뭔가 신앙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갑자기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병과 죄가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더 심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여기에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네가 죄 때문에 병 걸렸는데 이제 나았다. 그런데 죄를 계속 지으면 이전보다 더 건강이 나빠질지 모르니까 죄를 짓지 말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의도가 아니십니다.
문맥을 잘 보면서 읽으면, 예수님이 사실은 병과 죄를 연관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죄를 연결시키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너의 몸이 지금 안식일에 건강해졌다. 내가 너를 안식일에 고쳐주었다. 그 의미를 네가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또 그렇게 해준 내가 누구인지를 네가 알아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병만 낫고 끝나면 인생에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이 그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신 능력의 주님이신 것을 보여준 사건이고, 안식일의 참뜻이 뭔지를 이룬 사건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몸이 건강해졌더라도,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더 심한 것이 생긴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지금 예수님에게서 병만 낫고 가면, 몸은 나았지만 그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결국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 살면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더 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자신을 고쳐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자마자 곧장 유대인들을 찾아가서 그 사실을 알립니다. 예수님이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는데 곧장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몸만 치유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과 아주 대조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데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낫게 한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5절)
그는 예수님이 주신 영적 해방보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정죄하는 안식법을 어긴 것이 더 두려웠던 겁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보다 저들에게 고발당하고 정죄당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38년 동안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6절)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박해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괴롭히며 ‘너는 율법을 어긴 자다.’ 하며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7절)
예수님이 이때 이 말씀을 하시면 유대인들이 ‘아주 좋습니다.’ 하고 나올까요, 아니면 더 화가 날까요? 당연히 더 화가 납니다. 그런데 왜 긁어 부스럼 식의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냥 조용히 넘어가거나 피하시지, 왜 한술 더 떠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시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셔서 신성모독죄까지 받을 수 있도록 오히려 길을 열어가십니까?
유대인 랍비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도 여전히 아이들이 태어나고 사람들이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며 랍비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다면 안식일에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고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는가? 그래서 안식일에 하나님이 생명을 여전히 주시고 심판하는 일을 하고 계시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일을 쉬신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데,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라는 말씀은 곧 ‘나를 통해서 일하고 계시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식일에 병자의 병을 낫게 해주신 사건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내가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뜻입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대담하면서도 무엄한 말입니까? 진짜 신성모독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내가 대행하고 있다.’라고 하시니 얼마나 무엄하고 신성모독적인 말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안 한다. 하나님의 뜻이니까 한다.’ 이 얼마나 대담한 말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인기나 영광을 따라 살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서 사시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니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행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내가 원하니까 하고 내가 원하지 않으니까 안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예수님을 구주(Savior)로만 믿습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천국에 가게 해주신 분’. 물론 그것은 맞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납니다. 그 다음에 내 주인(Lord)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자기가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 부분을 다루는 것이 <새로운 삶>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데, 삶은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 동안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뭔가를 먹고, 마시고, 어디를 가고, 일을 하고, 취미활동을 하고, 스마트폰을 하고, 인터넷을 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했을 겁니다. 그 중에 ‘이것을 주님이 원하실까? 주님이 하라고 하셨나?’라고 생각하고 하신 게 얼마나 됩니까? 물론 이메일을 체크할 때 ‘주님이 이메일을 체크하라고 하실까?’ 하고 체크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결정을 할 때, 예를 들어 그로서리 쇼핑을 갈 때라도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걸지 생각해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데, 어르신들과 기저질환이 있으신 분들 외에 갈 수 있는데 안 가고 있다면, 교회는 안 가는데 다른 데는 간다면, 이런 것들을 주님께 물어보고 하셨느냐는 겁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안 읽고도 주님이 기뻐하실지, 기도하고 안 하고도 주님이 기뻐하실지를 얼마나 생각하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너무 피곤하게 다 체크하며 살라는 게 아니라, 여기서 핵심은 내가 하는 모든 결정의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는 겁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모든 결정의 주도권을 자기가 여전히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삶이 꼬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 행복해 보여도 그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진짜 쉼, 진짜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겠다고 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자꾸 내 맘대로 하려고 하다 보니까 진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8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귀를 막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두 가지 아주 특별한 사실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2:16). 그리고 동사의 시제가 여기서도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내 아버지시다.’라고 하신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내 아버지시다.’라고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뒤에 가면(20장)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에 들어 있는 특이한 사실은,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신성모독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고 혈안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 사람을 살리는 날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오히려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율법을 따른다고 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안식일의 참뜻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나가는 말]
이 세상은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상황입니다. 단 한 사람의 승자만을 허락하는 곳, 그래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입니다. 평소에는 평화롭게 사는 것 같아도, 이익이 걸렸다 하면 거기에 누구나 뛰어들어 서로 싸우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동체와 우리의 삶이 그런 베데스다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뻐할 때 우리도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나음을 입었을 때 우리도 나음을 입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세상이 그렇게 베데스다처럼 치열하게 싸우는 무자비의 집이 아니라, 진짜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인 것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베데스다 연못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천사가 내려오면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니라, 또 어떤 기간 중에 한 번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도 아니고, 날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고 날마다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선 곳이 어디이든지 바로 거기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없다면 38년 된 병자와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또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치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날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