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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4일 부활주일 연합예배
✦ 부활절 메시지 ✦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8장 1~10절)
[들어가는 말]
신약성경의 사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각기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을 비교해보면 서로 약간 안 맞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마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라, 각자의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각 저자마다 자신의 특색을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도 사복음서에서 기록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여러 번 이야기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에게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중 마태복음은 부활과 관련된 놀라운 사건들 중에 여인들이 천사를 통해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천사로부터 부활 소식을 듣는 두 여인 (1-7절)
오늘 본문에는 안식일 후 첫날, 요즘으로 하면 일요일 아침, 믿는 자들에게는 주일 아침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이름은 알려졌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방문했을 때의 사건이 나옵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1절)
두 여인은 원래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그들은 향료를 가지고 금요일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예수님 시신의 매장을 깔끔하게 매듭짓기 위하여 이때 간 것입니다(막 16:1-2; 눅 24:1-2). 니고데모가 이미 많은 향품을 가지고 와서 안식일이 되기 전에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냈지만(요 19:39), 여인들도 자기 나름대로 향품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두 여인이 무덤을 보려고 갔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2-3절)
그때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천사는 흰 옷을 입고 번개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번개와 같다는 것은 엄청나게 밝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모습을 보면 두렵지 않겠습니까? 천사의 이러한 모습에서 이미 승리하셨다는 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천사는 약 2톤이나 되는 돌(바위)이었는데 그런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습니다(2). 아무리 인간에게 무거워도 하나님의 천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죽음을 이긴 초자연적 승리를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이 돌은 로마의 권위로 봉인된 것이기 때문에, 당시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로마를 능가하는 권위가 아니면 이 돌을 함부로 굴려내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러니까 이 사건은 로마보다 강력한 권위의 존재가 행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일이 일어날 때 거기에는 분명히 무덤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4절)
총독 빌라도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경비병들을 보내주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천사를 보고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번쩍하며 나타나니 이것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이것 역시 세상에서 아무리 막강한 세력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로마의 권위를 뒤에 업고 있는 총독 빌라도의 권위는 곧 황제의 권위입니다. 그런 권위를 업고 있는 총독과 총독의 권위를 업고 있는 경비병에게는 감히 누구도 도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큰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때 로마 군인들은 무서워서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막강한 로마의 군인들도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에게는 꼼짝 할 수 없었고,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마비가 되었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 내용인 27장 62-66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한 가지 요청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27:63-64)
그때 빌라도는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고 말했고(65), 그들은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큰 바위로 무덤을 인봉했습니다(66). 인봉을 해놓고 그냥 간 게 아니라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정치권력인 로마의 유대 총독과 최고의 종교권력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가장 최고 권력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했으니까 얼마나 단단하게 지켰겠습니까? 누가 감히 거기 접근하겠습니까? 그래서 경비병들은 총독의 이름으로 무덤을 인봉하고 그곳을 “힘대로 굳게”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그런 상황에서 무덤에 접근하여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바위를 열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들어가서 몰래 시신을 건드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군인들이 졸았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조를 짜서 돌아가면서 쉬었고 또 지켰기 때문에 누구라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몰래 접근해서 엄청나게 큰 돌을 옮겼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것은 로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신을 도둑질하기 위해 거기 접근한다는 것은 감히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총독과 산헤드린 공회가 주도하여 최선을 다해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 무덤의 돌은 천사에 의해 굴려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거기 계시지 않고 나오셔서 두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는 게 뭡니까? 불안해하는 게 뭡니까? 요즘 아시안 혐오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데, 바로 어제도 그랬습니다. 또 요즘 총격 사고를 비롯해서 계속 폭력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특히 조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그로서리를 가거나 파킹랏에서 걸어갈 때 요즘은 더더욱 둘러보지 않겠습니까? 건장한 사람이라도 갑자기 뒤에서 와서 치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굉장히 불안한 상황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어떻게 하는 게 아닌지 불안하기도 합니다. 또 내 가족, 특히 어린 자녀를 어떻게 할까봐 불안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여전히 불안한 상황입니다. 백신이 나와서 좋아지고는 있지만, 요즘 들어서 미국에서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는 계속 어려우니까 ‘혹시 내가 이러다 직장에서 해고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할 때는 손님들이 많이 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매출이 줄어드니까 미래에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사업체에 오는 고객들에게 내 인생이 달려 있습니까? 아니면 내 직장 상사나 회사에게 내 인생이 달려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요즘 <말씀의 삶>을 공부하면서 더 느끼는 것이지만, 세계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뭔가 결정을 내립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위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힘이 센 사람들이 다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악도 선으로 바꾸셔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다른 것을 걱정하느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게 부족하지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벌벌 떨며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쉬운 말로 하면 respect한다는 겁니다.
혹시 다른 것을 너무 두려워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덜 하는 건 아닌가 돌아봐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뛰어 넘어 역사하십니다. 사람보다, 환경보다, 그 어느 누구보다, 또 바이러스보다 비교도 안 되게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이십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5-6절)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천사가 돌을 굴려낸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나오시도록 돕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때 이미 무덤 밖에 나와 계셨습니다. 천사가 돌을 굴려서 열어드려 나오신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문이 잠긴 곳에도 갑자기 나타나셨으니까, 부활하신 몸은 뭔가 다른 몸이 틀림없습니다.
어쨌든 천사가 돌을 굴려낸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여인들로 하여금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6). 예수님이 이게 너무 무거워서 못 나오실까봐 돌을 굴려드린 게 아니고, 여자들이 왔을 때 빈 무덤을 보고 확인하라고 열어준 것입니다.
이 두 여인은 금요일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식일 직전 그곳에 모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이 당연히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오기는 왔는데 이 큰 돌을 누가 옮겨줄 것인가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그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두 여인과 경비병들은 똑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똑같이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는 경비병들에게 말하지 않고 여인들에게만 말합니다. 두 여인과 경비병들이 모두 천사의 초자연적인 나타남과 능력 앞에서 무서워했지만, 천사는 여인들에게만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5)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에게만 들려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천사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5)라고 말하며 여인들의 마음을 위로해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6) 하고 말합니다.
이 여인들은 무덤 속에 계신 예수님(정확히는 시체)을 보려고 왔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6)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게 아니고, 이미 예고하신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천사는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던 대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이미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부활의 확실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갑자기 일어났거나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예언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그냥 흘려들었습니다.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하고 신경도 안 썼습니다. 전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느낌이나 지식이나 판단이나 상식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 어떻게 합니까? 주님의 말씀보다는 이전에 내가 경험한 내 생각, 내 상식, 내 지식을 주로 의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정을 내릴 때 보십시오. 인생에 또는 가정에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냥 내가 아는 한에서 결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인생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해야 우리 인생이 잘 풀리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7절)
이제 천사는 여인들을 위로한 다음에 그들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깁니다. ‘빨리 가라’고 합니다. 빨리 가라는 말은, 이처럼 좋은 소식을 자기들만 알고 있지 말고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가서 전할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그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셨다.’입니다. 둘째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다.’입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 (8-10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 새” (8절)
여자들은 이때 무서움과 큰 기쁨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러니까 지금 너무 무서운데 또 너무 기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무서움’에 사로잡힌 것은 다른 세계에서 온 천사와 만났기 때문이고, ‘큰 기쁨’을 느낀 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빨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달려갑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중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9절)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여기를 잘 보면, 사실은 여자들이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라,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들이 가는 앞에 나타나신 겁니다. 주어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여자들을 만나주신 겁니다.
이 여자들은 십자가 곁에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무덤을 보러 왔지만,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일찍 갔고 그 결과 천사를 만났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여인들을 보시고 “평안하냐?”(9) 하셨는데, 이것은 평범한 유대인의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인사를 받을 겨를도 없이, 너무 감격스러우니까 그대로 예수님께 다가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9). 이것은 절했다는 말입니다.
발을 붙잡았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슨 환상이나 영이거나 헛것이 아니라 실제 몸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발을 붙잡은 것은 존경의 표시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왕을 만나 경의를 표할 때 꿇어 엎드리며 발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분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시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메시아시라는 것을 깨닫고 경배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0절)
여기를 잘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버리고 간 자들입니다. 도망간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저주도 했습니다.
그나마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까지 몰래 따라갔기 때문에 부인하게 된 일이 생겼지만, 다른 제자들은 벌써 다른 데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요한만이 유일하게 십자가 앞까지 왔지만, 사실 요한도 처음에는 어딘가에 피신해 있다가 나중에 나온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자들을 향해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저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가서 그것들에게’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자식들에게’, ‘나를 배신한 것들에게’라고 할 텐데, 그게 아니라 ‘내 형제들에게 말하라.’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도 용서하셨는데 왜 이들을 용서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배신자들이지만 용서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도 꾸준히 하고 예배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헌금도 잘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은 나를 너무 사랑하시고, 그렇지 못하고 등한시하면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신다.’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변덕스러운 것이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똑같습니다. 더 좋아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사랑이 많으신 정도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내가 어떠한 상황이든지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상황이 어떻든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솔직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삶을 살고 있나?’ 사실 자신이 없지 않습니까? 돌아보면 형편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솔직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때가 얼마나 됩니까? 너무 부족합니다. 너무 연약합니다. 이기적인 말과 행동을 할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도 않고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워할 때가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러한 나를 보시면서 놀랍게도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내 형제다. 너는 내 자매다.’ 이게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여러분, 특히 내가 뭔가 죄를 지을 때, ‘주님 보시기에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다 알지 않습니까? 그때 이 음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내 형제야. 너는 내 자매야.’ 이 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면 잘못하려는 그 순간에 ‘아, 내가 예수님의 형제인데, 자매인데, 이러면 안 되지. 맞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의 음성을 늘 기억하고 들으면서 주님과 동행해야겠습니다. 지금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면 잠든 데서 깨어나야 합니다.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면 빠져 나와야 합니다.
무슨 거창한 일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1분, 2분, 5분 등 짧은 기도로 시작하는 겁니다. 또 이런 공 예배에 마음을 다해 현장에서 또는 온라인으로 참석하는 겁니다. 말씀을 몇 절이나 한 장이라도 읽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하며 나아가다 보면 분명히 주님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면 됩니다.
뒤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해 경비병들에게 보고를 받고는 그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해라.’ 하고 시킵니다(13). 이것이 바로 요즘 많이 나오는 가짜뉴스의 원조입니다. 그러니까 가짜뉴스를 퍼뜨리라는 겁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훔쳐갔다.’ 그래서 이 가짜뉴스가 유대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됩니다(15). 사람들이 가짜뉴스에 속았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는 두 명의 마리아가 부활의 증인으로 나오는데,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숫자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여자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지금의 눈이 아니라 옛날 당시 사회에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요즘의 눈을 가지고 평등이나 인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잘못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사회가 어땠는가를 연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삶>을 들으셔야 하는 겁니다. ^^
여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때는 종교지도자들이 군인들을 매수해서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와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라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제자들이 ‘우리가 훔쳐간 게 아니다. 진짜 부활하셨다.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증명하려 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여자들을 증인으로 내세울 게 아니고 남자들을 등장시켰어야 합니다. 그것도 어디 비천한 사람이 아니라 유력한 사람, 예를 들어 아리마대 사람 요셉 같은 공회원이나 니고데모 같은 바리새파이자 공회원인 높은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라고 했어야 믿지, 여자들이 봤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마태복음은 담담하게 막달라 마리아와 누구인지 모르는 또 다른 마리아를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내쫓아주신 아주 비천한 출신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어떻게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틀림없이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죄 용서를 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 사건은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의 ‘대 사명’ 또는 ‘지상 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으로 연결됩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어라.’
이 세상에는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만들기 위해 가서 믿게 하여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르쳐 그대로 살도록 도와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확장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단지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 내 몸이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은 우리도 역시 장차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은 틀림없습니다. 성경에서 약속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부활의 소망을 알려주는 사명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부활신앙으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