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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11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9 ✦
“무자비의 집에서 자비의 집으로”
(요한복음 5장 1~9a절)
[들어가는 말]
1888년 예루살렘 유적을 탐사하던 어느 발굴단이 지하에서 작은 인공 연못을 발견했습니다. 다섯 개의 기둥이 있고 길이 13.5미터의 지하 연못이었는데,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연못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성경에 나오는 이 베데스다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아서 ‘이것은 실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가상의 것으로, 이야기 흐름상 만들어낸 것이다.’라는 주장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19세기말 이곳이 발굴되던 당시는 자유주의 신학이 주류로 전 세계 신학계를 휩쓸던 때였기 때문에 특히 이것이 허구라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발견으로 인해 예수님이 친히 다녀가셨던 베데스다 연못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지난 2015년 안식월 기간 중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했을 때, 함께 갔던 투어 그룹이 베데스다 연못을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무너지고 초라하지만, 그래도 2천 년 전 그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오래 전 예수님 당시에는 아주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곳은 지하로 내려가서 아주 큰 규모로 되어 있었습니다. 일종의 큰 목욕탕 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는데, 옛날부터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는데 그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것이 그런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함께 찾아보기 원합니다.
1. 베데스다 연못의 비참한 현실
1) 희망이 안 보여도 떠날 수 없는 베데스다
지난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과 또 갈릴리 가나에서 가버나움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5장은 축제로 시작합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1절)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해 갈릴리 가나에 가셨던 예수님은 이제 명절을 맞아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명절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유월절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유월절 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칠칠절)이라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부림절이라고 합니다.
<말씀의 삶>에서는 유월절이라고 가정하고 진행하는데, 이 명절이 유월절이든 오순절이든 부림절이든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습니다. ‘명절’이 Festival 또는 feast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3대 절기 중 하나였던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가셨고, 또 거기서 한 병자를 만나 고쳐주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2절)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습니다. 그때 가보니까, 옛날에 예루살렘 성벽이 있었던 자리에 베데스다 못이 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당연히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으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물을 길어 나르는 ‘샘문’이 있었고, 거름을 내다 버리는 ‘분문(糞門)’도 있었습니다. 또 생선을 들이는 ‘어문(魚門)’ 등 여러 문들이 있었고, 그 중 양이 들어오는 ‘양문(羊門)’도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 북동쪽에 있었던 양문을 들어서서 조금만 가면 성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제사에 사용될 양들이 양문으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문 곁에 베데스다 못이 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베트’와 ‘헤세드’가 합쳐진 말로, ‘집’이라는 뜻의 ‘베트’와 ‘은혜/자비’라는 뜻의 ‘헤세드’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또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성전 근처에 있던 ‘자비의 집’이라는 연못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까?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3-4절)
거기에는 병자들이 모여 있는데, 그들은 모여서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절의 “물의 움직임을...”부터 4절까지 괄호가 쳐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다는 말입니다. 괄호를 쳤다는 말은, 성경에서 인정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던 것을 전해주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본들은 이것을 넣었고 어떤 사본들은 뺐습니다.
그 못의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 있어도 다 낫는다는 전설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은 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여기서는 분위기가 1절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1절에서는 예루살렘에 명절 즉 축제가 있다고 말하는데, 2-3절은 축제의 장소인 예루살렘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축제에 낄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무리 명절이 되어 축제가 벌어져도 마음껏 즐거워할 수 없는 병자들입니다.
이 병자들은 세 종류였는데,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혈기 마른 사람입니다. 혈기 마른 사람이 바로 중풍병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몸이 불편해서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저 아래에 물이 있는데 어떻게 내려가겠습니까? 그런데도 물이 움직이면 못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자비의 집’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병에 걸린 사람들로 여겨져서 비참한 상태에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축제의 도시, 성전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데스다’에 전해져 내려오는 미신과 같은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보다는 베데스다에서 전해오는 미신 같은 이야기에 더 신뢰를 주고 있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또는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의 뜻과, 병자가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면 낫는다는 신비한 이야기가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었지만, 본문을 보면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장소 자체가 그렇게 은혜롭고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생각하는 치유 기적의 중심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천사입니다. 천사가 내려와 연못물을 움직일 때 들어가면 낫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가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지금으로 하면 온천수나 광천수가 나오는 간헐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중단되었는데 그 당시는 나왔던 것 같습니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에 가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거기에 간헐천(geyser)들이 있어서 뜨거운 물이 땅에서부터 뿜어져 나옵니다. 그것이 온천수인데, 나오는 시간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물이 뿜어져 나오면 박수를 치고 사진을 찍습니다.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여기도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가끔 물이 뿜어져 나올 때, 여기가 옐로우스톤처럼 자주 나오는 데가 아니라 정말 어쩌다 한 번씩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젓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게다가 그 물이 온천수나 광천수 같이 미네랄이 많이 들어 있는 물이니까, 실제로 거기에 어쩌다 먼저 들어간 사람은 몸에 좋은 겁니다. 그가 ‘몸이 개운하다. 병이 나았다.’라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더욱 미신적인 이야기에 사람들이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온천수였다면 한 명이 아니라 다 들어가도 되는 건데 그것을 모르고 첫 한 명만 들어가야 낫는다고 미신적으로 생각한 겁니다.
미신 같기는 해도 전혀 희망이 없이 살던 사람들에게 아무리 한 명만 낫더라도 이곳은 떠날 수 없는 곳입니다. 아무리 물이 움직이는 것이 우연이거나 미신이거나 신화라고 속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그 말은 아무도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분위기인 겁니다. 또한 병자들은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게 아니고,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 그대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지 저주하신 게 아니라는 표시로서 이것을 주셨다.’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데스다를 두고 자기들 나름대로 논리를 만들어낸 겁니다. ‘아,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야.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서 일으키는 현상이야. 아무나 낫는 것은 아니야. 맨 먼저 들어간 사람만 낫게 해주셔.’라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만들어냈거나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 전설내지 신화가 만들어지니까 베데스다는 ‘성전 옆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병자들에게는 더욱 성지가 된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하지 못하는 인생 패배자들의 성전이 베데스다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베푸시는 자비와 은혜보다는 물론 못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고 떠날까 하다가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아주 중독성 있는 장소였습니다.
2) 평안해 보여도 사실은 치열한 경쟁의 장소인 베데스다
그 당시 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상황을 머리에 그려 보십시오. 거기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서로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금방 서로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아픈 사람이 가장 잘 알아주는 법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제법 따뜻한 정도 함께 나누는 사이로 지냈을 것입니다. 어쩌다 먹을 것이 생기면 ‘이것 좀 먹어. 같이 나누어서 먹자.’ 하며 얼마나 훈훈한 정이 오가는 곳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게 지나고 있는데 갑자기 연못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조용하던 베데스다 연못이 갑자기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맹인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하고,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은 절뚝거리며 어떻게 든 가려고 하고, 중풍병자는 간신히 기어서 필사적으로 가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려고 막 애를 씁니다. 앞 사람을 붙들고, 치고받고 싸웁니다.
물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친구였던 사람들이 물이 움직이는 순간 경쟁자가 되고 적이 됩니다. ‘이 놈이 들어가면 내가 못 들어간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그곳은 ‘자비의 집’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과 잔인함으로 가득한 ‘무자비의 집’이 되고 맙니다. 이곳이 평소에는 ‘자비의 집’이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일이 벌어지면 ‘무자비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과연 하나님의 역사였을까요? 이게 정말 하나님이 하신 일일까요? 과연 하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그런 환자들을 모아 놓고 심심하면 한 번씩 물을 휘저으셔서 불쌍한 병자들이 아귀다툼을 하며 서로 자기가 들어가겠다고 싸우는 것을 즐겨하는 분이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마음이지, 결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사탄은 그것을 좋아했을 겁니다. ‘그렇지, 싸워라, 싸워라!’
베데스다 연못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거기는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고 기만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결과 치열한 경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물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해도 베데스다는 아름다운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 아니라 악한 분위기가 흐르는 ‘무자비의 집’이었습니다. 사탄이 기뻐하는 분열과 다툼과 경쟁이 늘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베데스다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도 베데스다와 같은 환상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만 되면, 이 한 방만 터뜨리면 엄청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부글거리는 물거품의 소문을 듣고 정신없이 서로를 견제하며 다툽니다. ‘저걸 차지하면 될 것이다.’ 요즘 그런 게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에 투자하면 될 거라고 막 몰립니다. 무슨 코인에 투자하고, 가상화폐에 투자하고, 서로 먼저 하려고 얼마나 경쟁입니까?
사탄이 행복에 대해 잘못된 시각을 갖도록 뒤에서 살살 조장하고 부추깁니다. ‘야야,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돼. 권력을 가지기만 하면 돼. 좋은 학교 나오기만 하면 돼. 좋은 직장 잡기만 하면 돼. 그럼 행복해질 거야.’ 광고에도 그런 게 많습니다. ‘이 물건만 가지면, 이 음료수만 마시면, 우리 침대에서만 자면, 이 옷만 입으면, 이 구두만 신으면, 이 핸드백만 가지면, 명품을 가지게 되면, 이 집을 사면, 이 자동차를 타면 행복할 거다.’라고 끊임없이 탐욕을 부채질합니다.
특히 ‘이런 것을 가지는 데 있어 왜 남들보다 뒤처지느냐? 앞서야지! 1등이 되어야지! 1등이 제일 좋다.’ 하고 부추깁니다. 1등이 제일 좋다고 할 때마다 옛날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개그맨이 외쳤던 게 기억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하면서 웃겼는데, 실제로 1등만 기억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서로 1등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물거품 같은 쾌락을 얻어 보려고 끝없이 경쟁합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하는데, 사실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실력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경쟁사회에서는 실력자만 인정받습니다. ‘업계 최고’라는 말을 하듯, 실력이 없으면 인간은 소모품처럼 쓰이다 버려질 뿐입니다. 아니, 실력이 있어서 조직을 위해 일하다가도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나오든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즉시 제거됩니다. 거기에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그런 곳입니까? 정말 실력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아프리카 초원 같은 곳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 세계가 그렇게만 계속 간다면 동물의 세계이지 어떻게 인간 세계이겠습니까? 오히려 약자를 우선하고 돌보는 것이 짐승과 다른 인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강자가 약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 으뜸이 되려면 낮아지고 섬기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얼마나 강조하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방식대로 하면 안 된다.” 하셨습니다.
가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배가 침몰할 때 구조보트에 힘센 남자들이 타는 것이 아니라 노약자와 어린이들이 우선적으로 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도 꼭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약자들이 짓밟히는 동물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두가 잘 사는 하나님 나라를 계획하셨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참 놀랍습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같이 놀고 있습니다. 사자가 풀을 뜯고, 독사 굴에 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 평화로운 곳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아름답고 조화롭게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바로 그런 나라를 만드시려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죽게 하시어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하나님을 무슨 선착순 경기처럼 1등만 살아남게 하시는 비정한 분, 또는 1등에게만 병이 낫는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해야 하지만 ‘너는 기도를 제일 많이 하니까 고쳐주고, 너는 기도를 별로 안 했으니까 안 고쳐주고, 너는 헌금을 많이 했으니까 고쳐주고, 너는 안 했으니까 안 고쳐주고...’ 이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똑같이 다 사랑하십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하는 믿음의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정도는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차별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차별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에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든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바로 나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서로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2.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1) 행위가 아니라 은혜를 의지하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5절)
병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왜 예수님이 하필 이 사람에게만 가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셨는데 반응이 없던 것인지 아니면 이 사람에게만 가셨던 것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38년 동안이나 중풍병(새번역)에 걸려 있었습니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의 상태 아닙니까? 그리고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38년이면 지금을 기준으로 1983년입니다. 1983년부터 지금까지 중풍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고생입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환자들 중에도 가장 가망 없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사실 물이 움직일 때 재빨리 움직여서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병자가 아닙니다. 금방 확 들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병자입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은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로 그런 건강한 사람들이 물이 뿜어져 나올 때 들어가니까 온천물이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아, 시원하다. 좋다. 피부가 좋아졌다.’라고 합니다. 그냥 피부가 좋아진 정도인데 병이 나았다고 소문이 잘못 퍼지고 확대가 된 겁니다.
3절에 나온 세 종류의 병자 중 물이 움직일 때 자기 힘으로 못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못이 움직이기만 해봐라. 그러면 들어가겠다.’ 하며 벼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모습입니까?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이 38년 된 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38년 동안 병에 걸렸던 중 몇 년이나 여기 베데스다에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들어가 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38년이라는 숫자가 그냥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구약성경에 이스라엘이 모세가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출애굽기). 그들이 이집트를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시나이반도의 시내산까지 갔다가 떠날 때쯤까지가 2년 정도 지난 때입니다. 모세가 과거를 돌아보며 1.5세대와 2세대에게 했던 고별설교인 신명기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신 2:14)
시내산을 떠나 가데스바네아에 왔는데, 가데스바네아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인 입구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부터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가 38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끈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시내 산에서 머문 기간과 가데스바네아로 이동하여 정탐꾼을 보내고 기다린 기간을 제하면 실제적으로 이집트를 떠난 후 40년 중에 38년이라는 겁니다.
가데스바네아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입구인데, 거기서 정탐꾼 열두 명이 갔다 돌아와서 12명 중 10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거기 못 들어갑니다. 거기 사는 백성은 우리보다 훨씬 강해서 싸워도 이길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우리는 전멸할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12명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만이 ‘괜찮다. 들어가자.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까 이길 수 있다. 들어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말만 듣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약속도, 나도 믿지 않는구나. 그곳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너희 소원대로 너희는 그 땅을 밟지 못하고 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그 38년 동안 다 죽었습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힘으로 쟁취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겠다고 약속하셔서 은혜로 얻게 될 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싸우려고 가 보았더니 그들은 거인이다. 그들 앞에 우리는 메뚜기 같아 보인다. 싸우나 마나 질 것이 뻔하다. 우리는 못 들어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셔서 되는 일을 마치 자기들이 싸워서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힘이 약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이미 주어졌지만, 오래 전인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 즉 은혜가 주어졌고 하나님이 계심에도 ‘내가 해야지’ 하는 생각을 성경은 ‘율법’ 또는 ‘행위’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표현합니다. ‘율법’이란 무슨 법을 지킨다는 뜻이 아니라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하겠다.’ 하는 표현입니다. 신약성경, 특히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내 힘으로 해보겠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데스다에서도 지금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아니라 행위로 결과, 즉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는 겁니다. 할 수도 없는데. 천사가 와서 물을 움직일 때 못에 자기 힘으로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병자들은 자기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힘으로 갈 수 없는 병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마치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라는 표현을 요한이 의도적으로 여기에 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은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러면 ‘글쎄요, 내가 착하게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노력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본문은 이런 사실을 강조하고자 세 종류의 병자들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다 맹인이고 다리 저는 사람이고 혈기 마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내가 저 물이 움직일 때 못에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하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지.’ 합니다.
2) 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6절)
아니, 38년 동안 중풍병을 앓는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이 사람도 자기가 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물이 움직일 때 남들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질문은 ‘네가 이제는 정말 네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치유 받고 싶으냐?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싶으냐?’ 하는 것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뭐라고 엉뚱하게 대답합니까?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7절)
이 병자는 말 그대로 베데스다 경쟁사회에서 완전히 버림받고 낙오된 사람입니다. 경쟁사회에서는 평소에는 괜찮지만 경쟁이 시작되면 남을 배려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나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서로를 돌봐줄 수가 없습니다. 물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에는 그나마 서로 위로하며 그럭저럭 훈훈한 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상황은 완전히 바뀝니다. 서로 들어가려고 엄청난 경쟁이 펼쳐지고, 그래서 싸우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납니다. 누가 들어가려고 하면 막 다리를 붙잡아 못 들어가게 하고, 그러면 저쪽에서 재빨리 다른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다리를 잡힌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너 때문에 못 들어갔다.’ 하고 치고받고 싸우며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데가 베데스다입니다.
지독하게 병든 몸으로는 도저히 경쟁자들을 제치고 물에 먼저 들어갈 길이 이 사람에게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고백한 대로, 그는 베데스다에 와 있기는 하지만 치료는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러면서도 떠나지를 못합니다. 못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떠나지를 못합니다.
이게 요즘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베데스다만이 자기에게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를 떠나면 희망이 더 없습니다. 여기도 희망이 없지만 그래도 물이 움직이는 거라도 있는데, 여기를 떠나면 희망이 아예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계속 붙어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낫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기를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남 탓을 합니다.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꾸 외부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에 있어서는 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믿는 사람들도 크게 다른 것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기도합니까? 기도 내용을 보십시오. ‘주여, 제가 저 물에 제일 먼저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이런 것을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고 내가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식이 먼저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병자에게 힘을 주어서 못에 내려갈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십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치유의 근원이 바로 여기 계십니다. 예수님이 그냥 치유하시면 되는데 뭐 하러 저 물에 들어갑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지금 원하시는 것은 은혜와 자비를 그가 진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짜로 알고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특히 그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진짜 핵심입니다.
우리가 행위와 은혜를 구별해야 하는데, 행위는 조건을 성취하는 사람에게 상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선한 결과가 대가 없이 선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은혜를 앞에 두고도 자꾸 행위의 법칙으로 해결해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에 오셨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가 모여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혜의 집, 자비의 집에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저 못에 들어갈까?’ 이것만 궁리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선물로 베풀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내 힘으로 차지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처음에 열심히 해보다가 잘 안 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현실의 고통도 알고 되지 않는 것도 알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용기가 없어서 ‘그냥 버티다 보면 나 한테도 대박이 터지지 않을까? 뭔가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가망 없는 베데스다 연못 주위를 서성이는 인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한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일부러 이 연못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 사이를 지나가셨을 텐데, 사실은 그들을 다 고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일부러 찾아가신 예수님은, 이곳도 일부러 이 병자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의 관심은 오직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이 베데스다 연못물에만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요행을 기대하면서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라는 유혹에 솔깃하여서, 그 순간이 오면 그 동안의 우정이나 훈훈한 정도 다 필요 없고 내가 나가야 한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그들은 치유와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거기 계신데도 예수님을 보지 않고 물만 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을 치유하시고 복을 줄 수 있으신 분인데도 그것을 모릅니다. 헛된 기대감으로 다른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와 비슷합니까?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이시고 예수님이 정말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인도하실 분인데도 우리는 뭘 보고 있습니까?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베데스다 못이 언제 움직이는지, 그것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38년 된 병자만이 예수님의 “낫고자 하느냐?”는 말씀에 그래도 반응을 한 겁니다. 사실은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치유를 베풀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8-9a절)
[나가는 말]
사탄은 거짓 행복의 소문을 세상에 뿌리면서 서로 돕고 돌보아주며 살아가야 할 인간들끼리 오히려 서로 경쟁하고 다투며 살도록 조장합니다. 병자들이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며 살았어야 할 베데스다 연못가를 치열한 경쟁의 장소로 만들고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사탄이 즐긴 것입니다. 자비의 집을 무자비의 집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삭막하고 살벌한 장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세상이 주지 못할 진정한 치유와 평안과 기쁨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연못의 물거품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전체 환자들에게 물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면 저 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아라.’ 하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 있는지 아니면 다른 데 있는지, 잘 점검해보아야 되겠습니다. 혹시 오늘 나의 베데스다 연못물이 무엇인가? 그것만 내가 기다리고 있는 뭔가가 있는가? ‘이것만 되면 내 삶이 나아질 텐데...’ 혹시 그런 것이 있는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물을 보지 말고 나를 보아라.’
“네가 낫고자 하느냐?” 바로 이 예수님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며 나아갈 때, 진정한 치유와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그곳이 진정한 ‘자비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