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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8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4 ✦
“거룩함의 회복을 위한 의로운 분노”
(요한복음 2장 13~22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크게 화가 났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별로 기억하기 싫은 때인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분노하고 격분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저 스스로도 생각해보면 크게 화를 냈던 기억이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화를 냈었나 그 이유가 불분명합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굉장히 분노하고 격분하고 화를 내고 심한 경우에는 물건을 집어던져 깨기도 했는데, 세월이 조금 지나서 돌아보니까 ‘내가 그때 왜 화가 났지?’ 하고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엄청나게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그렇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일,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일인데, 그런 것을 가지고 화를 냅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분노하고 격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우리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감정이 상해서 나오는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정의를 위하여, 불의가 판치는 것을 보고 분노하며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화를 내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정의를 위해 일어나고 시위를 벌이며 불의에 항거하는 일들이 역사를 보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그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선택적 정의나 자기편을 위한 정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경우 틀림없이 자신의 소위 ‘정의로운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옵니다.
종종 크리스천들도 교회 내에서 분노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 많이 예로 드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도 불의를 보시고 성전에서 분노하시며 뒤엎으시고 화를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정확히 맞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의 분노와 예수님의 분노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해를 당하는 것을 보며 격노하는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의 분노는 대부분 자신을 위한 분노입니다. 자기감정이 상해서, 기분이 나빠서, 자존심이 상해서, 뭔가 찔렸기 때문에 분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분노는 정말로 하나님을 위한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자신을 위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수님이 왜 그렇게 분노하며 과격하게 행동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오늘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13~17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3절)
예수님은 이때 분명히 갈릴리에 계셨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예루살렘은 남쪽이고 갈릴리는 북쪽이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하면 예루살렘에 ‘내려가셨다’는 것이 맞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맞지, ‘서울에서 부산으로 올라갔다.’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항상 성전중심주의였기 때문에, 또 예루살렘이 산 위에 있었기 때문에, 동서남북 어디서 가도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유월절이 되어 예수님이 그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4-16절)
보통 예수님 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성품이 온화하시고 온유하시고 부드러우시고 자애로우신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성화를 보아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고 찡그리며 화를 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대부분 온화한 표정, 부드러운 표정, 또는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이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아주 크게 분노하시는 것을 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장사꾼들을 다 쫓아내시고, 또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막 엎으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십시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다는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데, 채찍을 휘두르시는 표정이 웃으면서 하거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셨겠습니까? 막 화를 내시면서 얼굴이 상기된 채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이건 정말 과격한 행동인데, 이런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분노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이 정말로 이렇게 분노하실 일입니까?
성전에서 하는 이 장사는 사실 유대인들의 편의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큰 명절이면 유대인 남자들이 제사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는데, 특별히 1년에 세 번 오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에도 그것이 나와 있는데, 먼 데서 오는 경우에는 짐승을 끌고 오기 힘드니까 와서 짐승을 사서 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갈릴리나 저 북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남쪽 유대 땅까지 며칠씩 걸어서 예루살렘에 와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제물로 바칠 짐승들(소, 양, 염소 등)을 끌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광야를 지나 온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그 당시 이스라엘 내의 본토(히브리파) 유대인들뿐 아니라 로마제국에 흩어져 사는 헬라파(그리스어를 주로 하는) 유대인들은 소아시아나 북아프리카나 멀리 유럽에서부터 배를 몇 번 갈아타고 몇 주가 걸려 예루살렘에 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배를 몇 번씩 갈아타면서 소나 양을 끌고 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는 제사장에게 흠 없는 제물이라고 합격을 받아야 하는데, 갈릴리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에서는 짐승을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는 흠이 없었을지 몰라도 여행 중에 병에 걸리거나 어디 빠져서 다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난처해집니다. 기껏 끌고 왔는데 바칠 수 없는 불합격 판정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장 안전한 방법은 멀리 사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장들이 이미 흠이 없다고 판정을 내린 양이나 소를 사서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성전에서 들어가 서신 곳은 소위 ‘이방인의 뜰’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돈을 바꾸는 환전상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십니다.
이런 것들이 원래는 밖에 있었는데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AD 27~30년경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기 돈벌이를 위해서 만든 시장입니다. 가야바는 로마의 총독을 매수해서 자기 장인인 안나스의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은 사람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때는 아론의 후손도 아니고 엉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뇌물을 주고 로마로부터 대제사장직을 임명받는 겁니다. 그런데 가야바는 장인으로부터 빼앗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장인 안나스와 가야바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장을 만드는 이런 일쯤은 얼마든지 로마 당국에게 뇌물을 주고 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시장에서 사지 않은 제물은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퇴짜를 놓았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이니까 밑의 제사장들을 다 동원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어디엔가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1년에 한 번씩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며칠 전 큐티 본문을 보면 예수님도 반 세겔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아 거기서 나온 은전 한 세겔로 베드로와 자신의 것을 내라고 하셨습니다(마 17:24-27).
그렇게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그 당시 가장 순전한 은으로 만든 레바논의 ‘두로 은전’으로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전을 보통 사람이 어디서 구합니까?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면 성전에서 그것으로 환전해 주었습니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비리가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이 거저 바꾸어주었겠습니까? 한 개를 내야 하는데 두 개를 내놓으라고 하여 더 많이 받아서 챙긴 겁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등골이 휘어지는 겁니다. 원래 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내야 하고, 또 안 내면 안 되는데 이것 아니면 안 받아주니까 안 살 수도 없는 곤란한 지경입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 이방인의 뜰의 광경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경건한 기도 대신 가축들의 울음소리와 양의 우는 소리만 가득합니다. 짐승들을 제물로 잡아서 바치느라 우는 소리가 아닙니다. 상품으로 쓰려고 놓았기 때문에 들리는 소리입니다. 처절한 회개와 경건한 예배와 간절한 기도 대신에 아주 시끄러운 돈거래와 상행위만 있습니다.
먼 길을 달려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경배하고자 무릎 꿇은 사람들, 특히 이방인들이 이방인의 뜰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은혜의 자리였는데, 돈과 권력에 취한 지도자들, 그것도 일반 지도자들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에게 착취당하고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사지 않은 소나 양의 경우에는 자꾸 퇴짜를 놓으니까 백성들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성전에 와서 샀고, 심지어 가까이 사는 사람들조차 성전에 와서 사야 했습니다. 상인들과 제사장이 야합해서 조직적으로 폭리를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인들이 많이 걷어 그 중 큰 액수를 제사장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는 식으로, 서로 다 짜고 한 겁니다.
이 얼마나 악합니까? 이것이 도대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까? 백성들은 다른 데도 아니고 성전에 와서 바가지를 쓰면서도 하는 수 없이 거기에서 제물을 사야만 했습니다. 속으로는 ‘저 도둑놈들’이라고 욕을 했겠지만, 종교지도자들과 상인들 때문에 울화통이 터지고 욕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관행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들이 단순히 돈만 내놓으라고 했겠습니까? 거의 조직폭력배 같은 사람들, 성전군인들, 심지어 때로는 로마 군인들까지 동원해서 백성들에게 무력으로 하니까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안 하겠습니다.’ 하고 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사서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백성의 편의를 도모하라고 해준 것을 악용해서 아예 백성을 착취하는 행위로 완전히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대해 화를 내신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7절)
예수님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 그러셨는데, 이 성전 청결 사건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옵니다. 소위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그들에게 지적하십니다. 완전히 강도짓을 하는 타락한 곳이 되었다는 지적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약간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셔서 뉘앙스가 약간 다릅니다.
게다가 다른 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에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얼마 안 되어서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역 초기에 하신 것이냐, 아니면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사실 그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을 하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런 질문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초기에도 한 번 이렇게 하셨고 3년 정도 사역을 하신 후 나중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또 그렇게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쓰신 분들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요한은 앞쪽에 하신 것으로 기록했고, 다른 세 사람은 뒤쪽에 하신 것을 기록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는데, 17절에 보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하는 말씀을 그들이 나중에 기억해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69:9의 인용입니다. 이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 말씀을 이루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오래 전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아주 큰 바자회를 열었습니다. 우리도 선교바자회를 하고 교회들마다 많이 합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도 아주 크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매년 여선교회에서 열심히 해서 바자회를 크게 했는데, 그 교회는 예산의 절반 가까이를 밖으로 내보내는 교회였기 때문에 사역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제가 고등부 시절 성경을 열심히 읽을 때였으니까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렇게 교회에서 장사를 해도 되나?’ 하는 의심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맛있어서 사먹었습니다. 사먹으면서도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이 항상 있었습니다.
아마 그런 의심을 한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겁니다. 예수님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는데 이래도 되느냐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선교를 위한 것이라도 바자회를 하거나 주일에 점심을 파는 행위를 모두 장사 행위로 보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일단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핵심은, 성전이 원래의 기능, 하나님이 성전을 허락하신 본질적인 기능을 상실한 채 폭리를 취하고 이익을 남기는 사업체처럼 운영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만큼은 지금의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이윤을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닙니다. 결국 문제는 성경적 가치관인데,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교회가 기업처럼 되었다.’ 사실 우리 교회처럼 그렇게 규모가 크지 않은 교회는 이런 점에 있어서 유혹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큰 교회를 보십시오. 몇 백 명 수준이 아니라 몇 천 명, 몇 만 명 되는 교회를 보면 교회가 기업화되었다는 말이 그렇게 간단히 들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기업처럼 되었다는 말은, 단순히 조직이 있고 어떤 일을 맡은 직분자들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단체를 주도하는 동기와 목적이 생산성과 능력과 실력과 가진 것에 있다는 말입니다.
오래 전 제가 그런 신문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쪽에서 교계 신문에 각 교회의 예산이 얼마라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A 교회의 내년 예산이 얼마’라고 나오는데,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후에 다른 교회 기사가 나옵니다. ‘B 교회, A 교회보다 더 많은 예산 얼마’. 조금 있으면 또 ‘C 교회, A나 B보다 더 많은 예산 얼마’라고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산이 얼마라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물론 예산이 많아서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잘 쓰자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굳이 밖으로 알릴 필요는 또 뭡니까? 전혀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교회 내에서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말에는 결국 어떤 메시지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돈이 이 정도다.’라고 자랑하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교회가 기업화가 되는 겁니다. 돈이 많은 것이 교회에서 무슨 자랑이겠습니까?
또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성공지향적인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져오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역이 아니라 장사(비즈니스)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라고 그런 위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교회들처럼 예산이 많지 않다고 해도, 그런 것을 사용하는 목적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어야 하지, 단순히 ‘우리는 이 정도다.’ 하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면 장사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숫자가 이 정도다.’라는 것도 자랑하기 위한 것이 된다면 장사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니 자랑한다기보다 감사할 것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런 분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 자랑하고 감사할 일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우리가 교만하게 자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감사할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공동체를 말하지만, 막연히 잘 성장하고 실력 있고 유능한 사람들이 많은 것, 즉 우리 교회는 박사가 몇 명이고 의사가 몇 명이고 교수가 몇 명이라는 것이 교회의 수준의 기준이 된다면 장사하는 집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서는 헌금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업에서 수익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면, 교회에서 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업에서 손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면, 기업이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교회에서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이 같은 의미라면, 그것은 정말 장사하는 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공동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있더라도 그 안에 복음이 없다면 그냥 조직이 될 뿐입니다. 장사하는 집이 될 뿐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소홀히 여기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교회에서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사랑을 나누고 섬기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베드로가 변화산상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을 짓고 삽시다.’라고 한 것과 같이 ‘우리끼리 너무 좋으니까 우리끼리만 삽시다.’라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나아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신 것은 단순히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관한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이익을 내는 어떤 일을 하느냐 마느냐는 것도 아닙니다. 바자회를 하든지, 점심을 제공하든지, 또 다른 무엇을 하든지, 이것을 왜 하는지, 이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그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이 성전을 헐라 (18-22절)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토록 과격하고 혁명적으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와서 질문을 하고 예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18-20절)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전은 아버지의 집이니까 더럽히지 말라고,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곧바로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당시 성전을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라고 생각하던 경건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며 장사꾼들을 내보내고 동물들을 내보내시며 채찍을 휘두르실 때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와, 잘한다. 통쾌하다. 시원하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하신 이 말씀에 아마도 그들은 경악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아니, 성전을 헐라뇨? 하나님의 집, 거룩한 전을 헐라는 게 말이 됩니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 와서 시비를 건 유대인들뿐 아니라 거기 있던 선량한 사람들까지 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헐라고 하느냐?’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아주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배를 받으신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징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출애굽 했을 때, 광야생활 40년 동안 성막을 짓게 하셔서 성막이 그들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셨습니다. 구름으로 임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다윗이 모든 재료를 다 마련해놓고 솔로몬이 드디어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을 알게 해주십시오. 이 집에서 기도하면 받아주십시오.’라고 성전봉헌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그때 솔로몬이 기도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장소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시고 구원하신다는 증거가 되며 그들에게 확신을 주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자들도 처음에 그 말씀을 들었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예수님이 당신의 육체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1-22절)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이제는 무엇입니까?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그 말이 뭡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사장들을 통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곧 성전이시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와 동행하심을 아는 것은, 이제 건물인 성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교회가 성전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전의 완성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각자가 함께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잘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여기 이 교회라는 공간에 계시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성전이 아닙니다. 자꾸 ‘성전 건축’이라고 하는데, 물론 거룩한 건물이라는 뜻으로 성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면서 자꾸 ‘성전 건축’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지 성경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된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사람이 성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을 가지고 ‘성전’이라고 하면 안 되고, 교회에 속한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성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참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모임이 곧 교회이고, 모이는 이 장소가 예배당이지만 이것은 구약이 의미하는 성전이 절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그래서 예배당에서 기도해야 응답이 더 잘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예배당에서 기도하면 실제로 응답이 더 잘됩니까? 그것은 건물에 무슨 효험이 있고 어떤 영적 기운이 있어서가 절대 아니고,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함께, 즉 우리 믿는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여서 간절히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가 더 응답이 잘되는 것이지, 건물에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장소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전을 진짜로 무너뜨리고 폐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겠다는 뜻인 것을 깨닫습니다.
3.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라
오늘 성전 청결 사건과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연결시켜 볼 때, 교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서는 이렇게 편의라는 명목 하에 아주 세속적인 것들을 합리화하여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도 잘못된 것을 하면서도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보다 우리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도 ‘이곳이 성전이다.’라고 하는 것을 경계해야겠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움직이는 조직들은 힘의 원리에 따라서 자기가 알든 모르든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런 모습이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강도의 소굴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대기업의 횡포가 있는데, 물론 대기업이 좋은 일들도 많이 하지만 뒤에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지 않습니까? 굳이 진짜로 횡령하고 사기를 치지 않더라도, 약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착취하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과 비슷한 행위가 됩니다.
주님은 교회를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임마누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힘의 원리가 아닙니다. 뛰어난 사람이 많으면 좋은 교회,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많으면 좋은 교회, 돈이 많으면 좋은 교회, 사람이 많으면 좋은 교회라는 힘의 원리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원리입니다.
만약에 그런 힘의 원리가 정말 맞는다면, 예수님은 가장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까? 가장 끔찍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김으로써 자유를 누리는 모임입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교회인 것을 항상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예수님의 경고처럼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단순히 바자회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헌금을 강조한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자기이익을 취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정말 무엇을 원하실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편하고 우리끼리 즐거운 자기이익을 향해서 나아갈 때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윤 창출입니다. 기업마다 사업체마다 돈을 버는 것이 사실 목적이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가 돈 버는 게 목적이 될 때, 어떤 자기이익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될 때, 나누는 것보다 받는 것에 더 치중할 때, 어렵지 않게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교회의 머리이며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정말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교회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나눔이 실천되는 곳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심으로써 우리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 각자가 성전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이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광야의 길을 가는 동안 결코 혼자 가게 두신 적이 없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길을 인도하고 계심을 알리기 위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셨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그들과 동행함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성막을 두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고달픔도 있고, 외로움도 있고, 위험도 있었지만, 고난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들이 범죄했을 때 그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사함 받았고,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그들은 성막에 나와 기도함으로 도우심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드디어 정착해서 성막을 짓고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진짜 위기는 밖에서 오는 적들의 위험이 아니라, 그들이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물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습니다.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서 제사할 수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성전이신 예수님을 통해 경험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예수님을 모신 우리 각자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스리는 가치, 내 삶을 다스리는 가치, 내 가정을 다스리는 가치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논리, 힘의 논리, 장사하는 집의 논리가 아니라, 진정한 성전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성전이시며,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성령의 전, 곧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답게 매일매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