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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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4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2 ✦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
(누가복음 13장 10~17절)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요즘 우리가 즐겨 먹는 생크림 케이크가 처음 나온 것이 1980년대 초중반 정도였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한 번은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어서 교회에 갔는데, 교회 마당에 초대형 하얀색 케이크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생일 파티를 벌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일을 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다녀와 보니 그 큰 생크림 케이크가 다 없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다 나누머 먹은 겁니다. 그래도 부서진 조각이 약간 남아 있어서 맛을 봤더니 ‘아니, 이럴 수가!’ 너무 맛이 있었습니다. 나를 빼놓고 자기들끼리 먹었다고 분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생일 케이크는 중증 장애인인 한 자매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인이 되는 것을 기념해서 교회가 그녀를 불러 생일파티를 해준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송명희입니다. 시인으로 주옥같은 시들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은혜와 감동을 끼친 분입니다. 당시 담임목사님이 장애우 사역에 힘을 쓰기 시작하셨는데, 그 자매와 연결되어 그분을 위해 생일잔치를 벌여주었던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심한 뇌성마비로 인해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합니다. 그분이 어린 나이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 처음 교회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교회 담임목사님이 그때부터 송명희 자매를 적극 후원하셨습니다. 그분이 쓴 시집을 사서 보기도 했는데, 그분이 쓴 시로 지은 노래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갖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분을 보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고백하니 얼마나 놀라운 믿음인지 모릅니다.
오래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주일이 되어 그 담임목사님께서 섬기시는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처음 보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당시 1990년대였는데, 거기에는 교인들 중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설교를 수화로 통역했습니다. 요즘은 방송에 보면 다 수화 통역을 하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런 게 없어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시각 장애자, 정신 장애자 등 장애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그 교회는 처음부터 그렇게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을 하려고 세워진 교회였던 것입니다.
요즘은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그래도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제 대학 동기 중에 유명한 번역가가 있는데 자기 페이스북에 글을 쓴 것 중 마음에 한 문장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친구는 장애인으로, 어릴 때부터 다리를 못 써서 휠체어를 타는 친구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애초에 장애인을 배제하고 디자인했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여전히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보다 훨씬 편견이 더 많던 시절, 무려 2천 년 전 얼마나 많은 편견이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불과 20여 년 전에도 편견이 많았는데, 교회가 그런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장애인들이 안 보이는 데 있거나 주눅이 든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고 활기차게 다니는 것을 보기만 해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1. 꼬부라진 여인의 치유 (10~13절)
오늘 본문에는 중증 장애를 가진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0-11절)
예수님은 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몸이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얼마나 불쌍한 모습입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그런 모습으로 살았으니까, 아주 긴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아온 것입니다. 몸이 꼬부라져서 펴지 못하니까 그 부분의 피부가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지금부터 18년 전인 2003년이면 제 아들이 태어난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태어난 아이가 성인이 되었으니 세월이 얼마나 많이 흘렀습니까?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이 여자는 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큰 고통 속에 살아온 것입니다. 아주 오랜 기간입니다.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몇 살이었는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무려 열여덟 해 동안 꼬부라져서 앓아왔고, 그것도 그냥 병이 든 것이 아니라 귀신에 들린 것 때문임을 본문이 말해줍니다(11). 한 여성으로서 몸이 꼬부라져서 전혀 펼 수 없었다는 것은 굉장한 고통이자 수치였습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당연히 정상 생활이 불가능하고 결혼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아주 젊었을 때 그렇게 되었다면 결혼할 수도 없고, 결혼했는데 그렇게 되었다면 쫓겨났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의 미국 같이 장애인들을 보호하는 환경이 아닌 1세기 초 유대 땅에서 이 여인은 어디를 가든지 놀림감이 되고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저렇다고 하고, 저리 가라며 돌을 던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죄를 지어서 저렇게 되었다고 멸시를 받았습니다. 몸이 이렇게 된 것만도 억울한데, 그것을 가지고 멸시를 당하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요즘은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한국의 티브이 프로그램 같은 데를 보면 자기들끼리 외모의 약점을 잡아서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지금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 특히 외모를 지적하면서 웃기곤 하는데, 그러나 약한 사람들을 돌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라면 다른 사람의 약한 부분이나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듯한 말을 하거나 농담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렇게 몸을 펴지도 못한 채 꾸부리고 살던 이 여자가 왜 이 시간에 이 회당에 와 있겠습니까?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으니 정확히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안식일에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예배드리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꼬부라진 몸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부터가 아주 힘들고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몸 자체가 휘어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형편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또 자신의 이상하게 생긴 몸을 사람들 앞에 보인다는 것도 아주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게다가 그 당시는 여자들이 회당 내의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강한 열망으로 회당에 온 것입니다. 그것도 귀신 들린 상태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한 이 여인을 보신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2-13절)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기적은 언제나 믿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이 여자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당에 그 불편한 장애를 가진 몸을 이끌고 힘겹게 왔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오라고 부르실 때 부끄럽다고 안 나온 것이 아니라 담대히 나와서 안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이 여자에게 믿음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분명히 이 여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예수님이 그곳 회당에 오셔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또 병이 낫자마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도 이 여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이 여자는 인생의 고통스런 문제가 오히려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주님 때문에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의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들으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18년 동안의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이 여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했어도 병이 나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웬만하면 포기할 텐데 이 여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통당할 때 한두 번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쉬울 수도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동안 안 하던 새벽기도를 한다든지, 작정기도를 한다든지, 금식기도를 한다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님 앞에 나와도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나의 기도에 아무 응답도 안 하실 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면서 계속 신실하게 주님 앞에 꾸준히 나아간다는 것, 그래도 새벽기도, 작정기도, 금식기도를 하며 계속 붙들고 나아간다는 것은 정말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혹시 자신의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럴 때 기도하지만, 아무리 주님께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보여주실 때가 분명히 옵니다. 만약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면, 혹시 잘못된 것을 구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야고보서).
그런데 우리가 아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내용을 기도했는데도 응답해주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가장 정확한 때에 줄 테니까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내용은 괜찮은데 방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쪽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옆으로 오라고 하시지만 모를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중에 갑자기 교회에 물이 안 나와서 수도 회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은 직원이 테크니션에게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Can I put you on hold for a moment?(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보통 웬만한 회사들은 음악 소리도 나는데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무 소리가 안 나고 있으니까 전화가 끊어진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끊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2분 정도 있으니까 그 사람이 다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침 테크니션이 갈 수 있으니 바로 보내주겠다고 했고, 와서 바로 고쳤습니다. 전화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끊어진 줄 알고 끊어버리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금방 나올 건데 말입니다.
기도했는데 아무 응답이 없다면, 마치 그와 비슷한 상황인 겁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상황이 힘들어도 실망하지 말고 계속 신실하신 주님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전화가 끊어진 게 아닙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해보다가 안 된다고 금방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끈질기게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거기 계십니다. 다 보고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믿는 자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2. 화가 난 회당장 (14절)
지금 이렇게 기적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자리에 여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중증 장애를 가졌던 여자가 고침을 받은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며 여자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은 이 여자가 치유 받은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감격하는 게 아니라 분노합니다. 막 싫어하면서 화를 냅니다. 짜증을 냅니다. 회당장은 아마도 이 여자를 오랫동안 보아 왔기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여덟 해 동안이나 몸을 전혀 펴지 못하고 고생하던 여인이 완전히 치유를 받은 놀라운 사건이 지금 자기가 직접 보는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럼 이게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지금 그녀는 너무 기뻐서 소리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사람들도 함께 기뻐하며 잘됐다고 박수 치고 부둥켜안으며 축하를 합니다.
그러나 이때 회당장은 심기가 아주 불편해져서 분개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식일에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며 일하지 말고 쉬라고 하신 십계명의 제4계명(출 20:8-11)을 범했다고 생각해서 화가 난 겁니다. 그것도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있는 회당에 와서 그런 일을 벌였다고 열을 받은 겁니다.
이 회당장은 지금 이 여인이 열여덟 해라는 긴 세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얼마나 죽지 못해 살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고통에서 마침내 해방된 지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도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회당에서 안식일에 이런 일이 벌어짐으로 회당장인 자신의 권위가 손상당했다고 생각되어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당장은 안식일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는 것 같았지만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왜 주셨는지 모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나오는데 한 군데 더 나옵니다. 모세가 지난 광야 40년 생활을 돌아보면서 출애굽 1.5세대, 2세대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과거를 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고별설교를 한 것이 신명기입니다. 거기에도 십계명이 나옵니다.
“12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것은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한 것이다.
13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4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15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신명기 5:12-15, 새번역)
이 말씀을 보면, 제 칠일은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시면서 쉬라고 하시는데, 자신이나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모든 육축이나 나그네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함께 안식하라고 하십니다. ‘너만 쉬지 말고, 너의 집에 있는 가족들과 종들과 동물들까지 다 쉬게 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해내셨다는 것, 노예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이끌어내셨으니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쉬지도 못하고 노예로 고생하는 데서 구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쉬는 게 초점이 아니라 ‘너도 쉬지만 남들도 혹사시키면 안 된다.’ 하는 것이 안식일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냥 무조건 몸이 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쉬는 날도 없이 노예로서 혹사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시고 자유를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자기 가족이나 종이나 짐승이나 나그네나 누구든지 혹사시키지 말고, 안식일에 자기가 쉬듯이 다른 사람들, 특히 종들이 다 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쉬면서 남들은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안식일의 핵심 정신은 무조건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래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장은 그러한 안식일 정신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안식일에 예수님이 자기 회당에 와서 일을 했다고 생각이 되니까 화가 난 겁니다. 이게 사실은 무슨 신학적이거나 신앙적인 문제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이 상해서 분개하는 겁니다. ‘내가 책임자인데 감히 여기서 이런 일을 하다니!’ 자신이 믿는 방식과 다른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니까 분하게 여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기가 맞는지 틀리는지 점검할 여유도 없습니다. 당연히 자기는 맞는다고 여깁니다. 여자가 나은 것도, 놀라운 능력을 행하신 저 예수가 누구인지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이 모독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납니다. 자기 생각, 자기 자존심, 자기 논리, 자기 방식이 위협을 당했기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화가 날 때가 있는데, 화를 낼만한 어떤 일이 생길 때 가장 먼저 할 일이 재빨리 생각을 하는 겁니다. 과연 내가 화내는 게 옳은지 냉철하게 점검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의 이 치유 사건을 통해 주님을 제대로 믿는 믿음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겁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빠서 예수님은 안 보입니다. 그 반대인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겁니다.
만일 어떤 이유로든 감정이 상할만한 일이 일어나면,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 대해 불평하거나 뒤에서 험담을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이것이 옳은가? 나는 화가 나는데, 주님이 보실 때 이것이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 혹시 내가 이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객관적으로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정말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정말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지옥 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보통 ‘지옥으로 향해 가던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옥으로 가던 게 아니라 지옥에 있던 겁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꺼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달아야 하고, 그래서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엔 은혜가 별로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은혜입니다. 사랑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교회와 믿는 자들이 세상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저번에도 말씀드린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오래 되었지만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그 책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기 좋은 말들이 많은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 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일은 굳이 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
또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교회 예배 때 어떤 엄마가 자기 아이를 데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아이가 떠들지도 않고 장난치지도 않고 그냥 뒤를 돌아보며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웃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만 좀 웃어! 여긴 교회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한 대 쥐어박았고, 아이가 우니까 “차라리 우는 게 나아. 그게 교회에 어울려.”라고 하며 경건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기도에 몰입했다는 겁니다.
참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또 미국의 유명 문학가였던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에 넣어서 잘 지내나 실험해 봤더니 잘 지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넣었더니, 약간의 적응기를 거치자 잘 지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장로교인과 침례교인과 천주교인을 넣어 보았더니... 얼마 후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교회를 조롱하면서 이런 말을 쓴 겁니다. 참 안타깝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들이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까?
은혜에 굶주려 있는 세상에게 우리는 주님 안에 은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회당장의 태도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율법 공동체가 아니라 은혜 공동체, 사랑 공동체, 섬김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화가 날만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가 반드시 자신에게 질문할 것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문제가 될 만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내 눈에 거슬린다고 해서, 단지 내 방식이 아니라고 해서 내가 문제를 삼는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반드시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먼저는 상대방에 대해 용납과 사랑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잘못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을 막 정죄하고 지적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잘 이야기해주고 함께 고쳐나가는 성숙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은혜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교육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 중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식이 아닙니다. 기술이 아닙니다. 책을 읽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은혜를 정말 체험했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할 때 사람이 변화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체험해야 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교회에서 ‘은혜로 합시다.’ ‘은혜롭게 합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아무렇게나 하자는 말이지만, 은혜라는 말은 곧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이런 말도 합니다. “은혜의 입구는 올바른 행동이나 거룩함이 아니요 오직 회개뿐이다. 죄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은혜다.”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회당장은 율법으로 따졌습니다. 사실을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율법으로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자격이 없는데 받는 선물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율법으로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치유되지 못했습니다. 회당에 올 때마다 이 회당장은 여인을 보고 뭐라 했겠습니까? ‘죄인이 왔다. 죄인이 감히 여기를 어떻게 오느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너는 나올 자격이 없다.’라고 계속 정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한 순간에 치유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중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3. 예수님의 대답 (15~17절)
예수님은 물론 이 여인을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치유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18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해온 여인이 하루 이틀 더 기다리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이 여인을 여기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사건 외에도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인데, 대부분 토요일입니다. 그러면 금요일 낮에 고치시거나 다른 날 고치실 수도 있는데, 꼭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뭔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고치신 것에 대해 화를 내는 회당장의 태도를 꾸짖으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5-16절)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외치시는데, 이것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외식이 힘든데, 그런 외식이 아니라 ‘위선자들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 즉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회당장뿐 아니라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와 동조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외치신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자기 짐승을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은 괜찮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이 여인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고생했는데 이제 사탄의 매임에서 놓아주는 것은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7절)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부끄러워한 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모순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안식일이지만 소나 나귀를 우리에서 풀어 데리고 나가서 물을 먹이는 것은 괜찮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서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여러 말씀 중에 왜 하필 우리에서 짐승들을 풀어서 데리고 나가 물을 마시게 하는 이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다른 데서는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안식일이라도 꺼내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겁니다. 구덩이에서 자기 짐승을 구해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고, 이 자리에는 안식일이지만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고 나가 물을 마시게 하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방금 그렇게 하고 온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딱 하시니까 얼마나 마음이 뜨끔하겠습니까? 또 혹시라도 예수님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너, 조금 전에 저기 가서 그렇게 했잖아!’라고 하시면 얼마나 창피합니까? 그러니 슬그머니 뒤로 물러가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이중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가리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책이 또 이런 귀한 말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은혜라는 말이 자유주의를 대강 용인해도 좋다는 압축 표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은혜는 다르다. 은혜에는 자기희생의 요소, 즉 비싼 대가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분노와 정욕은 그냥 넘어가면서 남의 살인과 간음을 욕하는 데는 얼마나 빠른가. ‘우리 대 저들’이 될 때 은혜는 죽는다.”
무슨 말입니까? 내 편, 네 편으로 나누기 시작할 때 은혜는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데도 그러면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죄는 괜찮고 어떤 죄는 안 된다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그러한 이분법적 신앙, 위선적인 신앙을 꾸짖으십니다.
우리도 바로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내 것은 굉장히 챙기면서 남의 것은 무시하는 태도는 없습니까? 남이 어떤 잘못을 하면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하고 흥분하면서, 내가 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똑같은 잘못을 하면 ‘뭐,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따지느냐?’ 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없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요즘 이런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작년 2020년 한국에서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에 뽑힌 것이 바로 ‘아시타비’(我是他非)였습니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라는 뜻인데, 그게 요즘 많이 쓰는 전문용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사자성어로 표현한 겁니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나는 괜찮고 다른 사람을 틀렸다고 하는 겁니다.
이 회당장과 거기 있던 사람들의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나름대로 괜찮은 죄와 절대 안 되는 죄를 구분하는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상에 따라 바뀌는 겁니다. 똑같은 것이라도 나나 내 편에 있는 사람이 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고, 다른 편에 있는 사람이 하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라고 합니다.
게다가 죄 중에서도 이것은 괜찮고 저것은 안 되고, 악독한 죄만 피하면 괜찮다고 하며 만족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악독한 죄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계속 바뀐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 대해 전혀 다르게 접근하십니다. 그분은 죄를 큰 죄와 덜 큰 죄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하나님께로 두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실수가 많고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요즘 문제가 되는 일들이 한국에서 운동선수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수를 하고 나서 어떻게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한 회개를 즉시 하게 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어떤 악한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받은 은혜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룰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어떤 규칙이 살리는 게 아닙니다. 교육이 살리는 게 아닙니다. 은혜가 살립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이 여인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이 은혜를 나누며, 또 주변의 이웃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주는 삶을 매일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