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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PdgtYpDnA_I?t=1842

 

 

2021221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3

부족함에서 풍족함으로

(요한복음 21~11)

 

[들어가는 말]

 

여러분 중 싱글이신 분들은 자신이나 친척이나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때를 생각해보시고, 결혼하신 분들은 자신의 결혼식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몇 년 안에 자녀를 결혼시키신 분들은 자녀의 결혼식을 떠올리셔도 좋겠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결혼식(결혼예배)이 잘 끝나고 이제 피로연 자리로 이동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잘 차려진 음식을 먹으면서 다들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먼저 들어온 순서대로 앉아 음식이 나오고, 받아서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주방에서 책임을 맡은 분이 아주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 나오더니 신랑 또는 신부인 나에게 또는 신랑 신부의 부모인 나에게 와서 말합니다. “큰일 났어요. 지금 음식이 모자라요.” 그때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눈앞이 캄캄하지 않겠습니까? 이 좋은 분위기, 즐거운 분위기 속에 어떤 사람들은 먹고 있는데, 뒤에 있는 사람들은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게 웬 일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이 바로 그와 비슷합니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합니다. 당시 혼인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갈릴리 가나라는 곳의 결혼식장에서 물을 포도주를 변화시키시는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공생애 사역을 이런 일로 시작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1.   심각한 문제의 발생 (1~5)

 

오늘 본문을 보면 갈릴리 가나라는 곳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집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1-2)

 

가나는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에서도 상당히 남쪽에 있는데, 가나는 거기서 약간 북쪽이고 갈릴리 호수에 더 가까운 데 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갔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청을 받아서 갔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 제자들이라고 할 때 열두 제자가 아니라, 1장까지 예수님과 함께한 다섯 명의 제자를 이야기합니다.

 

거리가 아주 가깝지는 않은 가나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 예수님과 그 어머니도 간 것을 보면, 아마도 마리아의 친척의 혼인잔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3)

 

이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라게 된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로 볼 때,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굉장히 큰일이 난 것입니다. 결혼잔치 피로연에서 음식이 모자란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혼인잔치를 벌이는 집(여기서는 신랑의 집)에서 제대로 잔치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잔치는 흥이 깨지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 진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모자라서 혼인잔치가 실패하게 되면 이 젊은 신혼부부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놀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 포도주가 부족하게 된 것은 유대인의 결혼예식이 일주일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것을 미리 계산해서 준비했을 텐데, 아마도 갑자기 불청객이나 예상하지 못한 손님들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접대상 아주 심각한 실수이며, 잔치를 벌이는 신랑 측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당시 혼인잔치는 개인 행사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동네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필요한 음식이 부족하게 되면 심지어 신랑신부를 법적으로 회당에 고소할 수도 있었습니다. 결혼잔치를 하다가 음식이 모자라서 누가 고소를 한다는 것은 지금 말이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은 그냥 그런 게 아니라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3). 마리아가 아들 예수에게 그 능력을 알고 기적이라도 일으켜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혼인잔치 전체를 관장하는 연회장이 할 일이지 마리아의 역할이 아니고, 또 포도주 공급에 대한 책임이 신랑에게 있지 손님 중 하나인 예수님에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마리아가 그 집안의 친척이라고 해도 마리아가 해결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신랑의 친척으로서 그저 아들 예수에게 이거 큰일 났구나. 포도주가 떨어졌다니 어쩌면 좋으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겠니?’ 하는 정도로 말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마리아는 나오지만 그 남편 요셉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학자들은 요셉이 이미 죽었고 장남이신 예수님이 집안의 가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마리아가 이런 부탁을 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아주 냉정하게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4)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기대와는 달리,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차갑게 거절합니다. 그것도 어머니에게 어머니여라고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하니까 무례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당시의 문화로 보면 여자여라는 호칭이 결코 무례하고 냉정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정과 존경의 느낌이 들어간 표현입니다. ‘여자는 그냥 woman이 아니라 lady라는 존중의 의미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하실 때도 여자여”(19:26)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상당히 차갑게 거절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서운하게 들릴 수 있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상처받기에 딱 좋은 말씀입니다.

 

바로 어제 큐티 본문이었던 마태복음 1521~28절에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곳은 구약시대 때 바알 우상숭배의 본거지였던 곳입니다. 가장 악한 왕 아합의 아내가 악한 이세벨인데, 그녀가 그곳 출신입니다.

 

거기 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인이 나와서 내 딸이 귀신 들려서 괴로워하니 고쳐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가 아니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아주 차가운 투로 말씀하며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오히려 더 가까이 나아와 절하면서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듣기에 아주 거북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우리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너희 이방인들은 개다.’라고 하는 아주 모욕적인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고 아주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말씀의 의도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하시며 소원대로 되라고 하시고,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인을 골탕 먹이거나 차갑게 거절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모욕적인 말씀을 하신 게 아닙니다.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귀신 들려 고생하고 있는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고쳐달라고 요청은 했지만, 이 여인에게 아직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 상황이 위급하니까 찾아온 것이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그렇게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 여인을 위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주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간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의 믿음의 반응이 있을 때 그들의 믿음에 따라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적과 믿음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결국 주님과의 관계가 있느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슨 뜬구름 잡는 게 아니고, 크게 기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정말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놀랍게도 아주 열정적으로 뜨겁게 믿으면서 외치며 기도하면서도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기도일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삶>에서도 바로 그런 것을 다루는데,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고, 정말 열심히 믿는 것 같고, 말씀과 기도와 봉사도 다 잘하는데, 정작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기만의 열심인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도 와서 아주 간절히 외쳤습니다. “내 딸을 고쳐주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고쳐만 주시면 된다는 겁니다. 고침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만입니다.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간 차가워 보이는 말씀들을 통해 그 여인의 믿음을 일으켜주신 겁니다. 병만 낫고 귀신만 쫓아내고 해결만 받고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그 다음에 또 귀신에 들릴 수도 있고 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생겨야 합니다. 인격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여인을 도전하신 겁니다.

 

지금 여기서도 어머니 마리아가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는데, 과연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믿음을 먼저 확인하십니다. 어머니 마리아로서 대하시는 게 아닙니다. 어머니로 대했다면 어머니여라고 했을 텐데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신자로서의 마리아의 믿음을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때와 마리아가 생각하는 때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이 행하시는 때가 따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에 관심이 없어 보이시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차갑게 거절하시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구한 쪽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도 기도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서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주님, 이렇게 해주십시오. 이것을 주십시오.’라고 하는 말은 뭡니까? ‘나는 이것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확신한다.’라는 말이 아닙니까. 나는 이게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생각하기 때문에, 이건 확실하기 때문에 주님, 이걸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그게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 마음을 좀 바꾸세요.’라고 합니다. 내가 마음을 안 바꾸고 주님이 바뀌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러시지? 이해가 안 간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확실한데 하나님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까? ‘급한 일을 당해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주님이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됩니까?’ 하며 서운해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뜻이 있으셔서 이렇게 인도하고 계신 것인데,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주님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시험에 든다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을 때 시험에 드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 되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이 뭔지는 관심이 없고, 내 뜻이 안 된다고 서운해 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도와달라고 생떼를 쓰는데, 정작 하나님이 중요시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문제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혹시 문제는 그대로 있더라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확실하게 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만 해결 받고 하나님을 떠나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도해주십시오.’라고 해서 같이 기도해서 응답이 되니까 믿음의 길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럼 그게 과연 뭐냐는 겁니다. 그게 진짜 좋은 거냐는 겁니다. 기적은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입니다. 정말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가?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5)

 

바로 그 예수님의 뜻을 마리아는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전혀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이 그런 말을 한다고 삐지지 않습니다. 그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인들에게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분의 뜻을 따라라.” 하고 말합니다.

 

자기주장을 끝까지 펴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비록 자기 아들이지만 아들로 보는 게 아닙니다. 주님으로 보는 겁니다. 예수가 자신의 아들이지만 그는 메시야(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정말 위대한 믿음의 여인입니다.

 

 

2.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표적 (6~11)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6-8)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이 있었습니다(‘정결예식’, 6). 그리고 그 예식에 사용되는 용기들도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토기보다 물이 덜 스며드는 돌 항아리들이 더러워질 가능성이 더 적었기 때문에 주로 물을 담는 데에 돌 항아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개가 놓여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두세 통이라는 것은 요즘으로 하면 20~30갤런 정도의 물을 말합니다. 돌 항아리 한 개당 그 정도인데, 리터로 하면 100리터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맹물을 가지고 600리터나 되는 포도주를 만드신 겁니다. 게다가 이것은 최상급 포도주였습니다. 혹시 군침(?)을 흘리십니까?

 

여기서 핵심은 , 성경에도 나오니까 포도주(와인)는 마셔도 되는구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물이 귀했기 때문에, 와인은 물 대신 사용하는 귀한 음료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 짧은 순간에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분자구조가 완전히 바뀌고 화학적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게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이시라면, 물을 변화시켜서 포도주 전문가조차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분이시라면, 그런 분에게 불가능한 문제가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을 때 종들은 어땠겠습니까? 별 갈등이 없습니다. 원래 물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채웁니다. 사실 돌 항아리의 물은 손발을 씻는 데 쓰는 물인데, 거기에 물을 채웁니다. 이의를 달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라고 하셨을 때는 갈등할 수 있습니다. 물을 뜨라고 해서 채웠는데, 그 물을 갖다 주라고 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물을 갖다 주면 자기가 욕을 먹고 야단을 맞을 텐데, 놀랍게도 그들이 뭐라고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냥 갖다 주었다고 나옵니다. 그들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순종에 따른 보상을 받습니다. 어떤 보상입니까?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9-10)

 

연회장은 물이 변해서 된 포도주를 맛보았습니다. 분명히 들고 갈 때는 물이었는데 언제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들고 가서 연회장이 맛보는 순간 그때는 포도주였습니다. 그 포도주가 어디에서 났는지 연회장은 알지 못하지만, 물을 떠 온 하인들, 순종한 하인들은 압니다. 이것이 보상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기적이 어떻게 해서 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기적은 믿고 순종하는 순간부터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하인들이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준 순간까지도 맹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물을 떠서 가져다주라고 하셨지, 포도주를 떠서 갖다 주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운 다음에 그 물을 떠서 갖다 줄 바에야 그냥 처음부터 물을 떠서 가져다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믿음의 과정입니다. 그냥 보면 굉장히 쓸데없는 과정 같지 않습니까? ‘아니, 물을 가져다줄 거면 뭐 하러 항아리에 담았다가 그걸 또 떠서 갖다 주나? 그냥 직접 주면 되지?’

 

그런데 하인들이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는 과정에 대해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연회장이 물을 받아서 맛보는 순간, 이미 최상급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떠서 갖다 주며 바꾸신 게 아니라, 그 중간에 하인들의 순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결국 물을 포도주로 바꾸셔서 그 혼인집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위기상황을 극복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신랑신부뿐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큰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아무 문제 없이 잔치가 죽 진행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처음에는 관여할 뜻이 없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도 왜 이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분명히 밝혀놓고서도 왜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사실 이것은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이기도 한데, 기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목적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죽 보면, 이렇게 한다고 하시고는 다르게 행동하신 때가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요한이 그런 것을 통해 사건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그런 문학기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단순히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메시야의 능력으로서 포도주를 공급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그 결과 그것을 본 사람들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게 초점입니다. 믿음이 초점입니다. 그저 단순히 잔치의 흥이 깨지지 않게 바꾸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위기상황이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해주셔서 큰 기쁨이 넘쳤다고 하는 기쁨이 초점이 아닙니다. 믿음이 초점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질적 변화를 통해 자신이 모든 물질을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창조주의 영광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분을 믿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1)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주님의 표적입니다.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에 주가 달린 것을 보면 또는 이적이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주는 도구로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 단어가 바로 표적’(세메이온)입니다.

 

일반 기적과 이 세메이온(표적)’이 다른 것은, 기적은 그 자체로서 놀랍지만 표적이라는 것은 기적을 넘어 기적을 일으키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적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적은 그냥 기적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까의 가나안 여인 같은 경우 이것을 좀 해주세요.’라고 할 때 해주셔서 그것만 받고 떠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을 체험했다.’ 하는 것이 나의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생기며 예수님을 따라 사는 믿음의 길로 나아간다면,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코로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혹시 복잡한 상황이나 두려워할 만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풀리지 않는 어떤 과제가 있습니까? 아주 힘든 상황에서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나갈 길이 안 보인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미 받아온 스트레스, 지금 받고 있는 스트레스, 앞으로도 받을 스트레스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기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주 복잡한 문제에서부터 아주 사소해 보이는 문제까지,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예를 들어,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로부터 수술로도 안 될 만큼 암세포가 다 퍼졌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직장 상사가 조용히 부르더니 미안하지만 내일부터는 안 나와도 됩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옛날 어떤 일에 대한 지불 청구서가 날아옵니다. 또 심한 경우에는 경찰서에서 전화가 옵니다. ‘당신의 자녀가 잡혀 있으니 여기로 오시오.’

 

이럴 때는 정말 앞이 캄캄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그러나 어떤 문제도 하나님을 당황스럽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성경을 통해 심는 대로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미래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어떻게 했는지, 주님과의 관계가 어땠는지, 그분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그분이 주시는 사명을 따라 어떻게 살았는지, 이것을 토대로 우리는 판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 즉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라

 

우리 인생의 결말을 최고로 만들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그리고 단순하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삶에 초청하라!’ 사실은 초청하라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라!’입니다.

 

내 삶 가운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그것이 인생을 최고로 만들 수 있는 비결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는 한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최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내 삶에 초청하고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나의 마지막 날뿐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의 인생 가운데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수많은 걱정거리로 가득한 인생에서, 우리가 염려 없이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일단은 신랑 신부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초청을 받아 그곳에 오셔서 계셨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아주 곤란에 빠질 뻔했던 상황이 오히려 최상급 포도주를 공급받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개입하셔서 우리가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상황을 바꾸어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어머니이지만 마리아가 주님을 향해 믿음을 더욱 갖게 해주셨고, 제자들도 처음 부르심을 받아 뭔가를 잘 모르고 있을 때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 믿음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런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는 상황 속으로 그분을 모셔 들이지 않는다면, 그 상황 속에서도 그분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적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외치고 고백을 해도, 정작 매 순간의 결정은 내가 하고 그분을 내 주인이 아니라 그저 옆에 계신 분 정도로 취급해드린다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평생 걱정만 하다가 그냥 인생이 끝나고 말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분을 초청할 뿐 아니라 매일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초청했다고 다 끝났거나 저절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혼인집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구했습니다. 왜 구했습니까?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은, 잘 생각해보면 포도주가 모자랐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신비이고 믿음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만사형통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 문제없이 평탄하게 살기 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주님의 표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부족함이 있을 때입니다. 사실 부족함이 있어야 풍족함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어렵고 힘든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모자랐기 때문에 그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문제가 축복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 때문에 잘된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위기가 기회입니다. 어려움과 문제는 정말로 변장된 축복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문제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연회장조차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다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을 내놓고 사람들이 취하면 질이 떨어지는 것을 내놓았습니다. 그래도 잘 모르기 때문이고, 원래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이처럼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힘든 것을 아는 것이 비극이 아닙니다. 사실은 부족하고 모자란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 비극입니다. 정말 주님을 필요로 하는데 주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비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문제의 자리에 계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바뀝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문제를 알았고, 그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 이상 문제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계셨어도, 사실 포도주가 떨어질 때까지 아무도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모자라는 문제가 발생하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아가 간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것을 보고 믿었습니다.

 

마리아와 제자들은 분명히 믿었지만, 이런 기적을 체험하고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마 종들은 놀라며 믿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들이 믿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걸 보면 자기 할 일을 하고 그냥 간 겁니다. 순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지지 않고 그냥 간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이 하는 건 아닌가? 예배도 참석은 하지만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나의 사랑의 마음을 드리며 하는 것인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제사를 그렇게 매일 너무 많이 했지만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들의 제사가 싫다. 역겹다. 그만했으면 좋겠다.’ 예배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참된 예배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삶의 문제를 보내실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때 그것을 통해 주님께 주목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해결 받으면 그냥 떠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세우고 믿음을 가지라는 뜻으로 문제를 보내실지 모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는 통로가 됩니다.

 

 

[나가는 말]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의무감에 갇혀서 할 수 없이 끌려가듯 해야 하는 건조하고 메마른 신앙생활이 아니라, 또는 그냥 자기의 열심이 넘쳐서 자기가 알아서 혼자만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정말 주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속에 주님을 정말 주인으로 모시고 참된 자유와 평안을 경험하는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과의 연합, 예수님과의 동행을 통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침과 같이 해주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7:38).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종교적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면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메말라가고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사라져가는 것을 우리는 가장 가슴 아파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말씀을 보고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주님을 향한 마음이 뜨겁지 않고 전혀 기쁨이 없는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어떤 유쾌함과 즐거움을 위해서 베푸신 기적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참된 평안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진정한 구주, 그리스도, 진정한 주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은 최상의 포도주로 인해 즐거워했을 것이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진정한 세상의 구주이시라는 사실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현대인들이 종교적 열심에서 오는 성취감과 필요한 것들이 채워지는 어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목이 마르다면, 그것은 어쩌면 최상의 포도주에 대한 목마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물이 포도주가 된 현상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으키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문제를 해결해주셔서 감사하다.’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해주신 주님, 나를 이렇게 붙들어주시는 주님, 이 주님과의 관계가 날마다 더욱 가까워지고 새로워지고 뜨거워지는, 바로 이런 놀라운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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