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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3N6_h0HcgX0?t=1693

 

 

2021117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41

세겜에서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다

(창세기 3318~ 3417)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우리 삶에 닥칠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이 산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제대로 살지 않고, 영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고, 죄 가운데 살다가 어려움을 경험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징계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굉장히 당황하게 되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런데 삶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은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이전 세대에도 그랬고, 몇 천 년 전에도 똑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야곱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의 오랜 결심에 따라 20년 만에 라반의 집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믿음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가 처음으로 겪은 일은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들이 보복으로 살육을 저지르는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다 알 수 없지만, 성경에 굳이 이런 끔찍한 일을 기록하고 있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함께 찾아보기 원합니다.

 

 

1.   야곱이 벧엘이 아닌 세겜으로 간 이유

 

형 에서를 피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서 살던 야곱은,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여종인 실바와 빌하를 통해 열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물론 열두 번째 아들 베냐민은 길에서 나중에 낳게 됩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갖게 되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라반과 모든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던 야곱에게 큰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형 에서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문제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아주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면서 야곱에게 오던 에서가, 그것도 4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오던 에서가, 20년 만에 만난 쌍둥이 동생 야곱을 보고서 반가움에 서로 부둥켜안으며 울고 화해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에서의 굳은 마음을 만지시고 부드럽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에서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도 야곱은 쉽게 에서를 믿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함께 집으로 가자는 에서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은 세겜이라는 성 앞에 장막을 치게 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3318)

 

자신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하던 문제가 해결된 야곱은, 오래 전 하나님 앞에 서원한 내용을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서를 피해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인 벧엘로 가서 하나님 앞에 했던 서원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28(20-22)에서 도망가다가 거기서 했던 서원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조건을 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신다면, 저의 가는 길에서 저를 지켜주신다면, 저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면, 제가 안전하게 아버지 집(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이라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꼭 조건부라기보다는, ‘하나님, 이렇게 해주십시오.’ 하는 간구입니다.

 

이 중에 안 이루어진 게 있습니까?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늘 그와 함께 하셨고, 가는 길에 그를 지켜주셨고, 아무것도 없이 갔는데 풍족하게 해주셨고, 안전하게 돌아오도록 해주셨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는 강도나 도적 떼가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안전하게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조건을 걸면서 해주시면 자기가 이런 것들을 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첫째,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둘째,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여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전을 세우겠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자원해서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게 아니라 자기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구한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이 채워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풍성한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자신이 서원했던 곳인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세겜 땅에 있는 밭을 사서 그곳에 정착하고 거기에 단을 쌓습니다. 세겜에서 벧엘이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그런데 벧엘까지 안 가고 거기에 단을 쌓습니다.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19-20)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알겠는데 엘엘로헤는 뭡니까? ‘엘엘 로헤라고 읽어야 합니까, ‘엘엘로 헤라고 읽어야 합니까, 아니면 엘 엘로헤라고 읽어야 합니까? 세 번째가 맞습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야곱 자신의 바뀐 이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을 더 이상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마음이 있는 겁니까? ‘내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래서 이 이름을 받은 사람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되었으니까 누구와 겨루어도 자신이 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나는 믿음으로 승리할 자신이 있다.’라는 뜻으로 단을 쌓고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세겜에 단을 쌓은 것은 좋은데, 원래 약속을 지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 약속대로 하면 야곱은 벧엘로 가서 거기에 하나님의 전을 세워야 했습니다. 단지 작은 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전 재산의 십일조를 바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은 이전에 했던 서원의 내용을 지키지 않습니까? 20년이나 흘렀으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자신이 서원했던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까? 그러나 야곱이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잊어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계산이 빠르고 정확한 야곱이 그런 것을 잊어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자기가 서원한 것을 안 지키면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음이 있으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서원한 내용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전에 에서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거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32장에서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예물을 엄청나게 준비해서 그것도 몇 번에 걸쳐 보냈습니다.

 

그가 에서를 위해 준비한 물품 목록을 보면 그 양이 정말 엄청납니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 나는 낙타 30마리, 거기에 딸린 새끼들,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입니다(32:14-15).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것을 요즘 돈으로 환산해보면 100만 불이 가볍게 넘어가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가 사양하는데도 강권하여 받도록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33:11). 야곱이 뇌물의 힘을 믿고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이 해결해주신 것에 너무 기뻐서 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했는데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돈을 너무 많이 쓴 겁니다. 생각하지 못하게 너무 많이 썼습니다. 아무리 야곱이 백만장자였다고 해도, 이 정도면 자기 재산의 엄청난 부분이었을 텐데, 그러다 보니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데 있어서 분명히 지킬 마음은 있었지만 망설이게 된 겁니다.

 

이미 에서를 위해 엄청난 돈을 사용했습니다. 사실 에서가 그만두라고 했을 때 그만둘 수도 있었는데 자기가 굳이 하겠다고 해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거기서 또 재산의 1/10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치고, 게다가 벧엘에 하나님의 성전까지 짓는다면 엄청난 돈이 들어가게 되니까, 계산이 빠른 야곱으로서는 암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야곱이 꼭 돈 욕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돈에 너무 짜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딸린 식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가족들(아내들, 어린아이들), 또 종들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고, 특히 고대사회에서 싸우는 군사 비슷하게 자기 집에서 기르는 종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에서에게 많이 주었지만 남은 가축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엄청난 떼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하루 비용이 얼마가 드는지 조금만 계산해보아도 여기서 돈이 더 나가면 힘들겠는데?’ 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야곱의 돈 욕심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돈을 다 쓰면 어떡하지? 굶어죽으면 어떡하지?’

 

우리도 문제는 돈 욕심 같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은 아니지만 올바른 헌금생활과 십일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크리스천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실제로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잘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안 되는 경우 이걸 다 했다가는 생활이 어려워질 텐데 어떡하지?’

 

사실 우리가 돈 욕심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돈 욕심이 아니라 그 핵심에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하다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다 썼다가 내가 쓸 돈이 없으면 어떡하지? 굶어죽으면 어떡하지? 우리 애들이 힘들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입니다.

 

결국 야곱도 똑같습니다. 야곱은 베델이 아닌 세겜 성읍 앞의 밭을 사서 성전을 짓겠다고 했지만 그런 규모가 아니라 작게 제단을 쌓습니다. ‘성전이라는 것이 자기가 벧엘에서 꿈을 꾸었을 때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했던 그 건물인 지구라트를 의미합니다. 그런 건물을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건데 그냥 작은 단 하나를 대충 쌓았습니다.

 

결국 야곱은 서원을 지키는 흉내만 낸 겁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하게 된 원인은 물질적인 것이었고, 더 깊이 들어가면 자신의 식구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까 봐 염려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신앙적 결단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돌리며 계산을 해도, 우리에게 속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돈을 제대로 안 바쳤으니까 네가 값을 치르게 하겠다.’라고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후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를 죽 보면, 나중에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자기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이 야곱으로부터 두려움을 없애주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하나님만 정말 신뢰하도록 훈련을 계속 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랑하는 요셉이 없어져 죽은 줄 알게 되고, 베냐민마저 빼앗기게 되는 상황이 다 그 안에 있는 두려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을 극복하여 참 이스라엘이 되라고 훈련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훈련을 위해 하나님은 잠시 야곱이 자기 결정대로 살도록 놓아두십니다.

 

 

2.   세겜에서 일어난 비극

 

하나님과 약속대로 벧엘로 가지 않고 자기가 선택한 세겜 땅에 정착한 야곱은 세겜이 벧엘과 가까우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굉장히 험악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딸 디나가 대낮에 그곳 추장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한 일입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41-2)

 

제가 성경을 쓴 사람이라면 이런 건 빼고 쓰겠습니다. 이렇게 좋지도 않은 이상한 일을 왜 굳이 씁니까? 지저분한 사건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웬만한 종교의 경전을 보면 이런 지저분한 일은 거의 안 나옵니다. 좋은 일만 씁니다. 그런데 성경은 있는 그대로 씁니다.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인생이고 그런 인생에서 하나님을 붙들라는 겁니다.

 

여기서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는 말은 단순히 눈으로 보기 위해 나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만나서 교제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디나는 이날 처음으로 밖에 나간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가나안 여자들 특히 바로 옆 성인 세겜 여자들을 사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집은 약간 시골에 들어가 살고 있었고, 디나는 도시를 동경한 겁니다. 그리고 거기 여자들은 세련되고 화려하니까 신기해서 보러 간 겁니다. 평소에도 교류하다가 이날도 그들을 만나려고 나갔다가 변을 당한 겁니다.

 

그러면 왜 디나는 집 안에 있지 않고 가나안 여자들을 만나러 세겜으로 혼자 간 것입니까?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으니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호기심 때문으로 보입니다. 여기 그 땅의 딸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들이 가나안 여인들입니다. 성경에 가나안 여자라고 나올 때는 단순히 가나안에 사는 여자가 아닙니다. 가나안 여자들은 성적으로 너무나 문란해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찾을 때 자기 종에게 맹세를 시켰습니다. 이 땅의 여자들, 즉 가나안 여자들은 절대 아내로 삼지 않겠다고 맹세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를 얻어 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디나는 왜 그런 여자들을 사귀려고 나간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도 그 동안 눌려 살았는데 자유롭게 살아보자고, 저 여자들처럼 성적으로 문란하게 놀아보자고, 요즘 식으로 하면 이 클럽 뛰고 저 클럽 뛰고 그렇게 놀려고 했던 것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무엇에 호기심이 생겼습니까? 그들이 입는 옷을 보면 자기와 다릅니다. 자기는 촌스러운데 세련된 패션에 노출이 심합니다. 또 몸에 달고 있는 장신구도 보면, 사실 그런 것들이 다 미신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지만 그런 장신구가 신기합니다. 또 거침없이 음담패설 같은 말들을 하니까 충격적이기도 하면서 호기심이 드는 겁니다.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내가 그 동안 이거 너무 답답하게 살았구나.’ 마치 청소년들이 미성년자 관람불가라고 되어 있는 영화를 보면 그것을 너무 보고 싶어 하는 청소년의 심리와 비슷합니다.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은 겁니다.

 

성적 호기심이나 세상에서 즐기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친 호기심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그 안에 들어가게 될 때, 그것이 어느 순간 우리를 걷잡을 수 없는 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막 즐거워하며 웃을 때 저 사람들은 뭘 가지고 저렇게 낄낄거리며 좋아할까? 궁금하다.’라는 호기심이 듭니다. 호기심까지는 좋은데 자기도 좀 알아보자고 실제적인 상황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전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스파크가 튀고 폭발하게 됩니다.

 

디나의 불행은 그 호기심이 단순히 어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 남자에게 강압적으로 성폭행 당하는 비극으로 발전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겠습니까? 디나가 그냥 여자들을 보러 갔는데 갑자기 세겜이 와서 끔찍한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가나안 여자들과 가나안 남자들이 파티를 하며 아주 음란하고 문란하게 마약과 술을 하며 파티를 즐기는 곳에 가 있었는데, 세겜이 보니까 뭔가 다른 여자가 하나 있는 겁니다. 굉장히 마음이 가고 관심이 갑니다. 가나안 여자들과 다르니까 접근해서 그런 짓을 한 겁니다. 이것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사건이 더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3-4)

 

이 일을 통해 세겜은 디나를 더욱 좋아해서 아내로 맞아들이려 합니다. 사실 세겜 사람들은 성적인 일에 대해 제한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마음에 들기만 하면 성관계를 갖는 것은 예사였고, 강간 같은 것이 약간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세겜처럼 높은 위치에 있고 게다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야곱의 집안이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집안이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법이 있었고, 특히 할례 받지 않은 자들과는 통혼하지 않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세겜이 바로 그런 원칙을 가진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하겠다는 겁니다.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5-7)

 

33장과 34장 사이에 시간이 상당히 흘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신체적으로 많이 약해졌습니다. 천사와 씨름할 때까지도 굉장히 힘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이때는 나이가 조금 더 들고 아들들의 힘이 더 강해진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전 같으면 야곱이 혼자 했을 텐데 여기서 아들들을 기다립니다.

 

디나가 세겜에 갔다가 그곳 남자, 그것도 추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정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냥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밭은 사고 살 때 거기 사람들도 신기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밭을 샀다는 말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그리 쉽게 밭을 팔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땅이 없어서 이리저리 다녔는데, 밭을 샀다는 말은 그들이 야곱을 인정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가 가진 엄청난 부를 보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거기서 밭을 사서 단을 쌓아 예배도 드리고, 자기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단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다 됐다. 나는 문제가 없다.’라고 자신감이 넘쳤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을 때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고 하셨으니 이제는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 나는 누구든 이길 수 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승리한다.’라고 하며 얼마나 자신감이 넘쳤겠습니까? 이것이 교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했으니까 그런 겁니다. ‘라반도 나를 어쩌지 못했고, 에서도 하나님이 해결해주셨으니, 앞으로 누구를 만나도 이길 자신이 있다. 나는 이스라엘이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 하고 단을 쌓았는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아니, 이스라엘이 되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아들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마침 세겜이 그 아버지 하몰과 함께 정식으로 청혼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8-10)

 

굉장히 솔깃한 제안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인데 파격적인 제안이 아닙니까? 밭 하나 겨우 사서 장막을 치고 살고, 엄청난 가축들을 돌보기에도 좁은 땅인데, 이제는 서로 통혼도 하고 물건 매매도 하고 땅도 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제안입니까? ‘여기 기업을 얻고 살아라. 정착해서 우리와 같이 살자. 우리와 같은 민족이 되자.’라는 말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이 대우해주겠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좋은 제안입니까? 그렇게 야곱을 설득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원래대로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몰이 와서 제 아들이 댁의 따님을 성폭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하고 용서해주시고, 우리와 같이 삽시다.’라고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말이 없습니다.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 말이 뭡니까? 이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또 자기들이 힘이 있으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와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세겜도 제안을 합니다.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 (11-12)

 

인간은 똑같습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엄청난 부잣집이나 재벌급 되는 집에서 잘못을 저질러놓고는 돈으로 해결하자고 합니다. 돈을 줄 테니 넘어가달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도 똑같습니다. 권력이 있고 돈이 있으니 뭐든지 구하는 대로 주겠다. 당신들의 딸 디나만 다오.’라고 합니다.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해결 방법이 있겠습니까? 첫째는,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제안한 대로 결혼시키고 돈도 받고 해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니까 설득해서 일단 디나를 찾아오는 겁니다. 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니까 그것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고 손해배상을 하게 하고, 그렇게 해결한 후 디나는 결혼을 시키지 않고 독신으로 살며 가족과 같이 살게 하는 겁니다. 네 번째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한 도전이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싸우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겠습니까? 참 힘든 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없던 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그들과 싸우겠습니까? 그래서 정확히 이것을 따지며 책임을 묻고 디나도 결혼시키지 않고 자기들과 계속 살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겠지만,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참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13-17)

 

지금 할례를 받으면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비극적인 방식입니다.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할례라는 하나님이 주신 방법을 속임수의 수단으로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세겜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살려놓으면 나중에 자기들에게 화근이 되기 때문에 죽이겠다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래서 세겜의 성폭행 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부족 전체를 다 죽이려고 계획을 하는 겁니다. 속이면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아니라 야곱의 아들들이 그렇게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이 일을 꾸민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겠습니까? 자신의 거룩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일 수가 없습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이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잘 해결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과 자존심과 이 사건을 혼동합니다. 그래서 엉뚱한 방향으로, 그것도 아주 비극적인 방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디나 사건을 통해 성경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고 있습니까? 먼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신앙인이라고 해도 평안하게만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죄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은 죄가 가득한 곳입니다. 죄에 대한 호기심이 적당한 기회와 합쳐질 때 폭발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면 됐지.’라고 할 때 위험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다 됐다고 하는 순간 넘어집니다.

 

아무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위가 올라가고,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에, 결혼도 잘하고, 아이들도 잘 낳아서 가정을 아름답게 이루고, 교회에서 신앙생활도 잘하고... 이런다 할지라도 늘 경계하고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평안할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특히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이렇게 평안히 지내니 좋다. 감사하다. 계속 이렇게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영적인 부분에서 소홀하며 나아가다가는, 이런 일이 갑자기 터질 때 야곱처럼 또 그 아들들처럼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힘차게 나는 이스라엘이다.’라고 하면서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단도 쌓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디나 문제로 인하여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큰 실패를 경험한 이유가 뭡니까? 그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자기 가족들과 함께, 공동체와 함께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공동체적인 신앙입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나아가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를 교회로 묶어주셨겠습니까? 그냥 각자 알아서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왜 굳이 교회로 같이 모여야 합니까? 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고 그 몸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까?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굳이 녹화해도 되는데 라이브로 하고 있습니까?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자 가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특히 지금 코로나 상황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얼마든지 자기 혼자 알아서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더욱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늘 계속 만나지는 못하지만, 올 수 있을 때 와서 같이 예배도 하고, 온라인으로라도 계속 목장으로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격려하며 서로 기도해주고, 평소에도 문자로 연락하고 전화하며 서로를 돌보아주며 그렇게 붙들어줄 때,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혼자서만 자꾸 하게 된다면, 디나처럼 호기심이나 어떤 계기로 넘어지게 되든지, 아니면 야곱의 아들들처럼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나를 낮추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뿐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아갈 때, 놀라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이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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