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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5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36 ✦
“막혔던 관계가 풀리고 새로운 관계로”
(창세기 31장 43~55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제가 어렸을 적에 한국 티브이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흑백 티브이였는데, 그 제목은 <도망자>(The Fugitive)였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려서 왜 주인공이 항상 도망만 다니는지 잘 몰랐었는데, 주인공이 도망가고 경찰이 쫓아오는 급박한 상황을 보며 어린 나이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1993년에 다시 영화로 나온 것을 본 다음에야 그가 도망 다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이 의사인데, 자기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끊임없이 쫓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도망자이기에 한 곳에 정착해서 살 수 없었는데, 그러한 그를 잡으려고 끈질기게 쫓아오는 형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도망만 다니던 주인공은 언제 진정한 자유를 얻겠습니까? 자기를 쫓아오던 형사가 죽거나, 아니면 아내를 죽인 진짜 살인범이 잡혀서 자신의 무죄가 밝혀질 때일 것입니다. 사실 형사가 죽는다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형사가 쫓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죄가 밝혀질 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드디어 20년간의 종살이를 공식적으로 끝내고 자유를 얻습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한 번 라반의 종이면 영원한 라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라반은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라반의 종이 된 후 자유를 얻어서 떠난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라반은 아주 지독한 사람이었는데, 그러한 라반에게서 드디어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라반이 두 눈 뜨고 살아 있는데 자유를 얻었습니다.
1. 마침내 포기하는 라반 (43~44절)
지난주 본문에서, 야곱 일행을 추격해 온 라반은 도둑맞은 자신의 드라빔을 찾았지만 발견되지 않았고, 이에 야곱은 라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그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라반이 뭐라고 합니까?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3-44절)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원래 그는 야곱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라고 한 말을 보면, ‘전부 다 내 것이고, 네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라반은 야곱이 결혼한 아내들과 낳은 자식들이 야곱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소유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평생 야곱을 종으로 부려먹기 위해서 딸들도 주고 자식도 낳게 하고 재산도 모으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던 라반이 이제는 뭐라고 합니까? 먼저 언약을 세우자고 제안합니다(44). 왜 그럽니까? 라반은 자기가 이제 야곱을 평생 종으로 부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 딸들이고 자기 자식들이라 주장을 해도, 그들 중 라반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 끌고 가고 싶으면 무력을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게 되면 야곱의 하나님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포기하고 언약을 세워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라반이 야곱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힘으로 밀어붙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고 죽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라반이 야곱을 쫓아오기 전날 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셨을 때(24),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에게 징계를 내리시고 엄청난 고통을 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야곱을 건드리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반이 이렇게 다 잡은 야곱을 순순히 그냥 보낼 리가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이 세상이 너무나 재미있다면, 아직도 하란을 떠나지 못하고 라반의 종살이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언제 진정한 자유를 얻습니까? 세상에서 만족을 얻겠다는 시도를 포기할 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세상 안에 다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도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분명히 또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의 그런 것들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고 계속 알려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돈이 많으면 좋겠다. 그래도 많이 가지면 좋겠다.’ 하고 포기가 안 됩니다. 돈 때문에 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고통과 문제가 일어날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세상의 것을 가짐으로 얻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계속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이 되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분명히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잘되기를 원합니다. 사실 안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목표를 추구해 나가며 그때까지는 괜찮은데, 막상 그것을 성취하고 나면 만족이 되는 게 아니라 허탈해집니다.
고등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요즘은 한국에 있는 학생들도 스펙을 쌓는다고 해외 봉사활동까지 갑니다. 그래서 그렇게 노력하여 대학에 들어갔는데, 들어가고 보니까 별 게 아닙니다. 고급차를 보며 ‘내가 저 차를 꼭 타고 싶다.’라고 안달이 나 있었는데, 막상 가지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20년 전쯤 아주 유명한 풋볼 선수 중 디온 샌더스(Deion Sanders)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프로야구와 프로풋볼에서 둘 다 주전으로 뛰던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크리스천이 되어서 책을 냈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보니까, 자기가 평소에 운동을 잘해서 돈을 엄청나게 벌었고 몇 대 없는 자동차 페라리를 사서 키를 손에 받는 순간 허무함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게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 있으면 내가 행복해지겠다.’라고 하는데 그게 이루어지면 이상하게 행복해지지 않고 허탈해집니다. 큰 집에 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막상 사서 살아보니까 그저 그렇습니다. 미국에 와서 성공을 위해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느 정도 잘 살게 되고 아이들도 순조롭게 크고 보니까, 감사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게 다였나? 겨우 이거였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까 더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진작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솔로몬은 실제로 최고의 것들을 다 누려보았던 사람입니다. 수많은 아내들, 엄청난 지혜, 또 명예와 권력을 다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한 만족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가짐으로써, 성취함으로써 만족이 되는 게 아니라, 모두 헛됨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그 모든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우리 마음을 채울 수 있을 만큼 큰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그럼 채워집니다. 그런데 자꾸 양다리를 걸치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세상 사람처럼 행동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서는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는 경우는 아직 하란을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들 중 하나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 목축업을 포기하고 소돔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할 수 있는 대로 소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면서 그들과 좋은 관계 속에 신앙을 지켜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가 결국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소돔 사람들과 똑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그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롯은 그렇게 많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돔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맙니다.
우리의 라반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우리를 붙듭니다. 회유하기도 하고 재산이나 좋은 것으로 끈질기게 우리를 붙들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라반이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고 세상이 나를 포기하게 만들 때 사실은 거기에 진정한 만족이 있고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2. 증거의 돌무더기 (45~52절)
이제 라반이 야곱과 더불어 증거를 삼자고 하자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알겠다고 하지 않고 돌들을 가져다가 증거를 삼습니다.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5-46절)
말로만 자유를 준다고 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언약을 세우고 음식을 같이 먹음으로써 언약을 확정지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이 왜 필요합니까? 사람들이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맺어야 하고 표시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라반은 분명하게 약속해놓고도 수십 번씩 바꾸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보내주겠다고 하지만, 언제 또 말을 바꾸고 야곱의 집으로 쳐들어와 다시 모든 것을 끌고 가겠다며 난리를 피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이 다시는 추격해오지 못하도록 증거의 돌을 세웁니다.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47-49절)
성경의 주를 보면 ‘여갈사하두다’나 ‘갈르엣’ 모두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아람어를 사용했던 라반은 “여갈사하두다”라고 불렀고,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불렀습니다. 둘 다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증거의 돌무더기는 무슨 뜻입니까? 이제 라반은 이 돌무더기를 넘어 야곱을 해치고 잡으러 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야곱도 이 돌무더기를 넘어 다시 라반의 종이 되어 그 밑으로 들어가거나 그의 도움을 받으러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둘 사이에 영원한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1-52절)
야곱을 두려워하게 된 라반은 이제 야곱이든 그의 후손이든 이 경계선을 넘어와서 자기를 해치지 않을 것을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이제 야곱은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다시 라반에게 돌아가서 그 밑에 들어가 종이 되어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출애굽 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보면 이것을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면서 사실은 마음속에 ‘일단 여기를 떠났다가 힘들면 다시 돌아오자.’라는 ‘양다리 걸치기 작전’을 벌였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다 그런 게 있었습니다. 나중에 광야에서 힘들어지니까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를 떠나서 홍해를 건넌 후 광야로 들어가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 길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이집트 군대가 자기들을 쫓아올 때 그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광야에서 굶어죽거나 목이 말라 죽는 일이 있어도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넘으로써 애굽과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애굽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라고 하신 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야곱에게는 증거의 돌무더기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돌이 세워짐으로써 이제 라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좋지만, 동시에 자기가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더 이상 라반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며 살아서 알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생활도 더 어려워지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위 ‘잘나가던 때’가 그리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어가 ‘라떼는 말이야’입니다. 이전의 잘나가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야곱의 돌무더기와 같은 경계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셔 들였기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무의미한 삶과 헛된 욕망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더 이상 내게 올 수도 없고 나도 더 이상 세상으로 도로 넘어가 도움을 기댈 수도 없는 영원한 경계선이 됩니다.
그런데도 자꾸 넘어가려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여전히 죄를 짓고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삶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돈을 준다고 해도 주님을 모르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계선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전에 좋았더라도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무의미한 자랑과 욕심으로 가득한 세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옛날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계속 나아갈 때, 힘들어도 그렇게 나아갈 때, 거기서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만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사람, 분명히 주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안 믿는 사람과 똑같거나 전혀 주님과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가 진정으로 믿은 것인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라반은 사랑이 전혀 없는 아주 야비하고 치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약간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43b)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라반이 이제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라반은 지금껏 자기 딸도 사랑하는 딸이 아니라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로 보았습니다. 지금 여기까지 그들을 쫓아온 것도 그들을 다 도로 붙잡아가거나 해치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신이 조금 들면서 자기가 어떻게 자기 딸들과 손주들을 죽이겠느냐고 합니다. 이제는 그의 눈에 딸이 딸로 보이고, 손주가 손주로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옆에 살면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순간이 되니까 보이게 된 겁니다.
사람의 욕심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동물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은, 맹수들이 정말 무섭지만, 정말 무서운 존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너무 잔인합니다. 맹수들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데, 인간은 배가 불러도 계속 욕심을 부린다는 겁니다. 욕심에 한계가 없습니다. 한 번 욕심의 노예가 되면 벌어지는 현상은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겁니다. 내 이득을 위한 도구로 보입니다.
이전에 다른 교회에서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환자가 들어올 때마다 ‘요건 얼마짜리, 요건 얼마짜리’라고 환자를 구분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보니까 비로소 환자가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모두 내 성공을 위한 도구로 보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배우자끼리도 믿지 못해서 ‘저 웬수가 언제 내 돈을 빼갈지 모르지.’라고 생각해서, 금고 비밀번호도 혼자만 알고 또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바꿉니다.
그러다 허무하게 끝난 사람, 비참하게 서로 싸우다 끝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되면 사람이 사람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을 제대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부탁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0절)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라반이 야곱에게 그런 식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원래 레아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는데 라반이 그를 속이고 레아와 결혼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라반이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존심 때문에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다른 여자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잘못을 완곡하게 사과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일을 용서해달라고, 그리고 다른 형태로 자기 딸들에게 복수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라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반이 하나님의 두려운 능력을 경험하게 되니까 야곱이 존귀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자기를 알아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라반이 온 겁니다. 그런데 라반의 눈에 이제는 야곱이 크고 존귀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자기가 그에게 지금까지 저질러 온 잘못들이 생각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솔직하지는 못해도 사과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딸들에게 보복하지 말아 달라고 아버지로서 딸들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다운 마음이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사실 야곱은 지금 붙들리지 않고 도망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처지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니라, 야곱을 라반 앞에서 높여주고 계십니다. 야곱의 존귀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니, 어차피 이렇게 하실 것을 왜 지금까지 그토록 라반 때문에 고생하게 하셨습니까? 왜 라반이 야곱을 그토록 괴롭히게 그냥 놓아두셨습니까? 그것은 야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훈련하시기 위해서 라반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라반이 있었기 때문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에서는 자기 본능대로 살다가 믿음의 길을 떠난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자격이 있었던 사람이 믿음의 길을 떠나버렸습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아무 훈련 없이 왕이 되었다가 금방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젊은 시절 황금기를 도망자로 보내면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수많은 시편들을 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훈련받고 왕이 되니까 가장 위대한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주변에 나를 아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치 눈에 뭐가 씐 사람처럼 나만 보면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하며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똑같이 갚아주겠다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좋아하라는 게 아니라 보복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람은 사실 나를 겸손하게 하고 내 속에 있는 교만을 버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신 훈련조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코로나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만 아니라 이런 상황도 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삶을 정리하고 새롭게 되어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라반이 없었다면 야곱이 그렇게 낮아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길들이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다른 방법을 쓰십니다. 한 조교의 훈련이 끝나면 또 다른 조교를 보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계속 훈련시키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보내시는 하나님의 훈련조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보복하려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 좀 제발 내 눈앞에서 치워주세요.’라고 할 때 정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좋아할 게 없습니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또 다른 사람이 옵니다. 못된 사람을 피하니까 그 다음에 더 지독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꾸 이 사람만 없으면 행복해지겠다고 하지 말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며 사랑하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그들은 뭔지도 모르면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다 나를 겸손하게 만드시고 훈련시키셔서 복을 주시려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코로나 사태로 우리가 모두 어려운 것도 하나님이 뭔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훈련시키시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기간을 잘 보내야겠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상황이 있다면,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때가 될 때 그들이 사라지게 하실 것이고, 오히려 놀라운 말과 함께 우리에게 미안해하면서 떠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3. 새로운 관계의 시작 (53~55절)
이제 라반은 증거의 돌 앞에서 뭐라고 맹세합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3절)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내용을 보면, 그의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나홀은 아브라함의 동생이자 라반의 할아버지인데, 그들의 조상은 사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나홀의 하나님과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각각 다 다른 하나님이며, 나홀과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사실 우상이고 이방의 헛된 신들입니다. 그런데 라반은 하나님의 이름을 많이 부를수록 좋은 줄 알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알라 신이여!” 하며 생각나는 모든 신적 대상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님 외에는 모두 인격적인 신이 아닌 가짜 신들입니다. 참 신과 가짜 신의 차이는 우리가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야곱은 간단히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며 섬기는 하나님, 오늘까지 자기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 것입니다.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54-55절)
이제 야곱과 라반은 새로운 관계가 됩니다. 야곱은 라반과 또 모든 사람들(형제들, 즉 라반의 아들들과 친척들)과 함께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같이 식사를 합니다. 여러분, 나를 괴롭히고 미워하는 사람과 같이 밥 먹고 싶습니까? 절대 같이 밥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먼저 제사 즉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길을 열고, 그 다음에 같이 식사하며 진심으로 교제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세웠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표시입니다.
나의 친척이나 이웃이나 직장 동료나 교회 성도나 사업체 손님은 모두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내게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나도 그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믿지 않는 가족, 믿지 않는 친구들, 믿지 않는 직장 동료, 믿지 않는 사업체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는 겁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대하는 겁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 얼마 전 어떤 크리스천 여성 하나가 절을 방화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들이 믿는 것을 따라가지는 않지만 존중해주며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 그렇게 적대적인 것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이웃의 요구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의 지혜로 그들을 깨우쳐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부패한 사회 속에서 깨끗하게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갖는 겁니다.
특히 야곱이 라반과 하나님 안에서 잘 해결하고 보내준 것처럼, 우리도 헤어짐을 잘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이,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볼 사람 아니니까’ 하면서 원수처럼 헤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잘못입니다. 정말 실수입니다. 어디서 언제 어떻게 만날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만나건 만나지 않건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축복하며 보내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라반 역시 자기의 딸들과 손주들을 축복하고 돌아갔습니다. 야곱이 먼저 푸니까 라반도 풀리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혹시라도 내 마음속에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보복하는 마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또 용서하며 사랑하는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상황 속에 불평하고 원망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이 어려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