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LV7K5vFhvyM?t=2195
2020년 11월 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34 ✦
“도망가는 자와 추격하는 자”
(창세기 31장 17~32절)
[들어가는 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성공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성공을 거두고 나면 마음이 허탈해지고 ‘내가 고작 이러려고 그토록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가족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노력한 건가?’ 하는 회의가 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가장 깊이 경험한 사람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돈이 많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재산을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역사상 최고의 부자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아내도 천 명이나 되니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 다 헛되다고 합니다. ‘내가 다 해봤는데 아무리 해도 헛되다. 모든 걸 다 가져보았는데 헛되다.’ 다 해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맞을 겁니다.
그런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래 전 아주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하프타임(Half-time)>(1995)이 있습니다. 밥 버포드(Bob Buford)라는 분이 쓴 책인데, 큰 케이블 회사 사장이었다가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쓴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전반전이 성공을 추구하는 기간이었다면 후반전은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게임의 승패는 전반전이 아니라 후반전에 판가름 난다... 하프타임은 단지 어떤 ‘때’나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60세까지 살더라도 그때까지 하프타임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생의 전반전을 마감하려는 사람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공에서 의미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드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겪은 것이 바로 이러한 ‘하프타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조금 더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계속 살펴보는 것은, 이들이 처한 상황이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치열한 영적 싸움 끝에 믿음의 길로 나아갔던 믿음의 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1. 도망가는 야곱 (17~20절)
야곱은 이제 고향인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데,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도망을 칩니다. 이때 다른 사람이 보았으면 야곱이 왜 도망을 가는지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이곳에 빈털터리로 왔다가 엄청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아내 둘에 첩이 둘, 열두 명의 아이들과 엄청나게 많은 재산이 있습니다. 이렇게 안정되고 좋은데 뭐 하러 고생하는 길로 떠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도망치다시피 하란을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은 그러한 삶으로는 이제 더 이상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로 인생의 하프타임을 겪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17-18절)
여기 보면, 야곱은 자기가 밧단아람, 즉 하란에서 얻은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도망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양이나 소를 몇 마리만 끌고 가도 힘들 텐데, 수많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그 먼 길을 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떠납니다.
야곱이 가는 목적지는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의 집입니다(18). 왜 그는 이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마음에 갈급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뭔가 허전함이 생겼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그 갈급함을 느끼면서도 가만히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하란에서는 갈급함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많은 재산도, 심지어 아내들과 자식들도 그 허전함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결혼도 하고 자녀도 많이 낳고 재산도 많이 축적하고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을 이루고 보니까 자신의 마음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텅 빈 마음은 결혼한다고, 자녀를 많이 낳는다고, 재산을 많이 갖는다고 채워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텅 빈 마음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가 생각할 때, 자기가 빈털터리로 혼자 에서의 손을 피해 도망올 때 만났던 하나님이 생각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벧엘에서 자기를 만나주시고 약속을 주시고 인도해주겠다고 하신 그 하나님을 다시 찾기 위해 이제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건 도망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야곱의 ‘하프타임’입니다. 그는 그 동안 오직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혼자 와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많이 낳고 재산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단을 내리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19-20절)
야곱은 라반의 집을 떠나는 데 있어서 미리 알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칠 낌새를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도망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라반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호락호락 쉽게 보내줄 사람이 아닙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살면서 일해 오면서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는 사람인데, 그런 야곱을 라반이 쉽게 보내주겠습니까?
야곱이 처음에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을 때, 라반은 레아를 끼워 팔기 식으로 처리하며 자기를 속였고, 요셉이 태어난 후에 떠나게 해달라고 했을 때(30:25) 하나님이 너를 통해 복을 주셨느니 어쩌니 하면서 품삯을 가지고 야곱을 붙잡았습니다. 라반은 결코 자기를 순순히 보내줄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곱은 갑자기 도망하여 탈출하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갑자기 어느 날 충동적으로 떠나기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탈출을 위해 상당한 준비를 했습니다. 사막에서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동물인 낙타들을 미리 여러 마리 사 두었습니다(17). 게다가 도망가는 시기로 라반이 양털을 깎는 때를 잡았습니다(19). 목축하는 사람들에게는 양털을 깎는 때가 큰 축제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때는 아무래도 야곱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도망가는 데에는 이처럼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먼저 아내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유프라테스 강이라는 장애물도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라반이 금방 추격해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뒤도 안 돌아보고 요단강 동편 땅인 길르앗을 목표로 하여 미친 듯이 달렸고 강도 건넜습니다. 길르앗을 통과하여 요단강의 지류인 동쪽의 얍복 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이고, 거기만 들어가면 라반이 더 이상 추격해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 땅에서 성공적으로 살아온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성공이 과연 만족을 줍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인생의 성공(success)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significance)가 우리에게 만족을 줍니다. 내가 성공해서 만족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 때 만족이 됩니다.
그래서 미국의 부자들을 보면 기부도 많이 하고 가난한 곳에 가서 봉사활동도 합니다. 보여주기 식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의미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자기에게 만족을 줍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 안에서 사는 삶이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없는 인생이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인생이겠습니까?
유명한 미국의 크리스천 가수 중에 토비 맥(Toby Mac)이 있는데, 그의 노래 중 <Lost My Soul>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I don‘t want to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my soul.” (나는 온 세상을 얻고 내 영혼을 잃어버리기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디서 나온 말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천하(온 세상)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없이도 온 세상을 얻고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없이 사는 삶은 결국 목숨을 잃는 삶입니다.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것 다 하고 놀 것 다 놀고 쉴 것 다 쉬고 내 맘대로 살면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의외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를 늘 돌보아주고 사랑해주던 사람들,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길을 막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누구든지 자기 부모나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미워하고 증오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인생이 되고자 하나님을 찾을 때에는 다른 것을 보지 말고 정말 주님만 보며 달려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신경 쓰면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중환자를 실은 앰뷸런스가 가다가 자동차와 접촉사고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운전자가 나와서 앰뷸런스의 길을 막으며 11분 정도를 못 가게 했습니다. 급한 환자라 빨리 가야 한다고 해도 ‘환자가 죽으면 내가 책임지겠다. 어떻게 보상하겠느냐?’라고 시비를 하다가 정말로 골든타임을 놓친 환자가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알고 보니 운전자가 그런 쪽으로 상습범이었고 일부러 사고를 낸 것이어서, 최근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앰뷸런스가 죽어가는 환자를 싣고 갈 때 교통신호를 다 지키며 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환자를 싣고 갈 때는 빨간불이라도 마구 소리를 울리며 지나갑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신호등마다 서서 다 지켜가면서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면서 가면 환자는 살 수가 없습니다. 환자를 실은 앰뷸런스는 교통법규를 위반해서라도 빨리 달려야 합니다. 사실은 그게 위반이 아니라 법규 위에 있는 겁니다. 법규보다 중요한 게 생명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경찰차나 소방차도 그렇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이 편안한 때가 아니라 비상상황(emergency)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여유 부리고 할 것 다 하면서 가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빨리 가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 가는 것을 막는 것을 다 물리치고 죽 나아가야지, 쉬었다 가고 놀다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죽 가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2. 추격하는 라반 (21~24절)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1-22절)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 지 사흘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처음 그것을 들은 라반은 분명히 엄청나게 분노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23절)
길르앗은 이스라엘 땅의 북동쪽에 있습니다. 요단강 동편입니다. 이렇게 쫓아간 것을 보면 라반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란에서 길르앗까지는 약 250마일 이상 되는 거리인데, 야곱이 그 많은 짐승들과 가족들을 다 이끌고 10일 정도 만에 거기까지 간 것을 보면, 아주 필사적으로 도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강만 건너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 직전에 따라잡힙니다. 이제 야곱에게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분노한 라반에게 잡혀서 곤욕을 치르고, 모든 것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순간 다시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24절)
여기서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셨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실제로 라반이 그날 밤 경험한 일은 단순히 꿈 꾼 게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계시를 주실 때에는 너무나 두려워 거의 초죽음이 되다시피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라반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 아니라, 라반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가 거의 기절할 정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라반은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기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고 공포를 느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니까 야곱을 순순히 보내주는 것이지, 아니면 그럴 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결단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 들이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살겠다고 하는 결단은 가장 중요한 결단입니다. 여러 가지 삶의 문제에 얽혀서 제대로 살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정말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주님을 제대로 섬기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결단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길을 위험에서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믿은 후에도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제대로 할 때도 있지만 제대로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한 번 주님을 온전히 따르겠다.’라고 결단할 때가 있는데, 야곱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이제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겠다며 결단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 여기까지 오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십니다. 바로 이런 역사가 결단한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결단하며 나아가는 사람의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아가겠다고 할 때, 모세가 바로에게 계속해서 말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가게 하라(Let my people go).”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너는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예배하게 하라. 막으면 죽는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할 때, ‘내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겠다. 이제는 세상의 쾌락이나 내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겠다.’ 하고 결단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켜주십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이에도 하나님은 그를 지키며 보호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꾸 내 나름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봅시다.’라고 하면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라고 하며 변명이 많고 핑계가 많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 판단을 해버립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것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작지만 소중한 믿음의 첫걸음을 뗄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발걸음을 떼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엄청난 일만 생각하니까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자기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발걸음입니다. 작은 첫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걸음들이 하나하나 쌓이면 죽 가게 되는 겁니다. 첫걸음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뭘 해야 됩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입니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닫혀 있던 성경을 여는 겁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작은 첫걸음입니다. 열어야 읽을 수 있지, 안 열면 어떻게 읽습니까?
이게 바로 작은 첫걸음입니다. 아주 작고 별 것 아니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첫걸음은 참 중요한 믿음의 걸음입니다. 그리고 그 걸음을 계속해서 조금씩, 조금씩 걸어갈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대면하는 라반과 야곱 (25~32절)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25절)
드디어 라반은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있는 야곱 일행을 10일 만에 따라잡게 됩니다. 그러한 라반이 야곱에게 가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도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26-28절)
이때 라반이 굉장히 눈치를 보며 이야기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말을 하니까 혹시 벼락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의 이 말들은 다 거짓말입니다. 보십시오. 20년 동안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겠습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본심은 그 다음 말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29절)
말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를 해치지 말라고 하신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잘 보면, 라반이 야곱의 뒤를 쫓아온 것은 잔치를 하고 보내주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야곱을 해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다’라는 말은 ‘나는 너를 죽이려고 왔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라반의 이 말을 통해서 자기가 걱정했던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자기를 라반의 악한 계획으로부터 막아주시고 지켜주셨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반의 이 말을 들을 때 야곱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 생각합니다. 해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막으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야곱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지켜주고 계시는구나.’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맞구나.’
그런데 라반이 이토록 분노하며 야곱을 쫓아와서 해치려고까지 한 것은, 단순히 몰래 도망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가 아끼는 것을 도둑질해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30절)
19절을 보면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이 ‘드라빔’이란 것은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가정의 수호신상으로서, 숭배하기도 하고, 행운을 주거나 재앙에서 지켜준다고 믿으면서 모시던 작은 인형 같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쇠나 나무로 만든 것인데, 한 마디로 말해 집안에서 모시던 우상이었는데, 만들어 모셔 놓고 섬기거나 만지던 것입니다. 라반은 그것을 굉장히 아꼈던 것 같습니다.
라헬이 급하게 도망가면서도 이것을 훔친 것을 보면, 라헬 역시 평소에 아버지의 드라빔을 가지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라헬도 고대 근동의 우상숭배의 문화에 물들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던 야곱은 라반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1-32절)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랑하는 아내가 바로 도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야곱은 드라빔을 훔친 자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아주 자신 있게 맹세합니다. ‘신상이 발견되면 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 정도로만 이야기하면 될 것을, 훔친 사람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아주 과격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라헬이 왜 드라빔을 훔쳤겠습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나도 저것을 가지고 싶다. 저게 있으면 뭔가 행운을 줄 것 같다.’라고 하며 탐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골 3:5).
라헬도 하나님에 대해 이전에 언급한 것을 보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드라빔을 훔쳤습니까? 그것이 뭔가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해주시겠지만, 드라빔까지 가져가면 더 좋겠지. 하나님도 우리를 지켜주고 드라빔도 지켜주면, 두 배로 안전할 것이다.’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드라빔을 훔친 것은 죄였습니다. 다행히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엄청난 재앙이 임할 뻔했습니다. 사실 나중에 야곱의 말대로 결국 그렇게 됩니다. 실제로 라헬은 이때 죽지는 않지만, 나중에 베냐민을 낳다가 길에서 죽고 맙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의지하는 다른 뭔가가 있습니까?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도 섬기겠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 가운데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이 가졌던 태도이고, 라헬이 가졌던 태도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많이 무너졌다고들 많이 걱정합니다. 1980년대까지 많이 부흥하던 한국교회가 90년대 들어서 정체되기 시작하더니, 21세기 들어와서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지금은 더 빨리 쇠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의지하고, 다른 것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두 배로 안전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섬기는 것이 정말로 안전하고 형통한 길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이 특정한 지역에만 한정되어 계시고 나는 내 나름대로 생활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 나가서 예배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배당 안에만 계십니까? 하나님이 성전 안에만 계십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이 건물 안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타락하여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됐을 때 나타난 현상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렸던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제사는 계속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로는 우상을 섬기며, 심지어 성전 안에까지 우상을 들여다놓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성전이나 특정한 지역에 제한시켜 놓고 평소에는 자기 맘대로 살다가 제사할 때만 얼굴을 씻고 나와서 예배하고, 끝나면 바로 나가서 또 자기 맘대로 사는 그런 삶을 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코로나 사태 때문에 온라인 예배를 시작한 지가 벌써 8개월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 상황 때문에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이것도 분명히 예배입니다. 대충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예배를 드려도 기쁨과 감격이 없고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혹시 몸만 와 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 뒤에 숨겨 놓고 잠시 몸만 와 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가진 게 많다고 만족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그 영혼이 만족을 얻지 않는 이상 다른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엄청난 부귀영화를 얻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일시적일 뿐입니다. 오히려 가진 게 많을수록 걱정이 더 많아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이 언제 참 만족을 얻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때 사실 만족을 얻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속아서 살아왔습니다. 결혼한다고 돌아가지 못했고, 아이들 키운다고 그냥 있었고, 재산을 모은다고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것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가나안에 간다는 게 아니라 믿음의 고향으로 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갈 때 마치 다 잃어버릴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를 벼랑으로 몰아가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풀리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것 같은데 뒤를 보니까 낭떠러지 절벽인 겁니다.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아주 기가 막힌 시를 썼습니다. 인간이 벼랑 끝에서 날 수 있음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그들은 벼랑 끝까지 갔다.
그가 밀었다.
그들은 날았다.
너무 간단한데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시인이 ‘벼랑 끝에서 발견한 날개’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잠재력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휴머니즘으로 말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실제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아무 때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가 벼랑 끝에 섰을 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아, 나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해두셨다가 위기 때 우리를 위해 사용하시는 힘입니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섰다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늘을 나는 것은 아닙니다. 벼랑 끝에 있다고 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벼랑 끝에 있다가 결국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벼랑 끝에 서는 용기를 가지고 거기에 섰던 사람들만이,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사람들만이, 쓰임을 받고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삶의 벼랑 끝, 이번 코로나 사태와 같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며 막막한 벼랑 끝과 같은 이런 사태를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 안에서 정말로 믿음을 가지고, 기대감을 가지고 날아오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당장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입니다. ‘내일 하지.’가 아니라 지금 할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올 때입니다. 그럴 때 기쁨이 있고 온전한 가치가 회복됩니다. 자꾸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이건 안 되고 저건 안 되고... 핑계하며 변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돈 좀 번 다음에, 학위를 딴 다음에, 집안이 안정된 다음에 하려고 하면 이미 늦었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지금 작은 첫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무조건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를 방해할 만한 세력을 막아주시고 그들을 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사람을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면 네가 죽는다. 이 사람은 내 아들이고 내 딸이기 때문이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이런 귀한 믿음의 역사가 우리 삶에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