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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5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33 ✦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시간”
(창세기 31장 1~16절)
[들어가는 말]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북쪽 국경 지역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새옹’이라는 말은 이름이라기보다는 ‘변두리 노인’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주 비싸고 훌륭한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하루는 그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새옹의 불행을 마치 자기 자신들이 당한 것처럼 슬퍼하며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새옹은 별로 슬퍼하지 않으면서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늦은 오후, 뜻밖에도 두 달 전에 도망갔던 말이 살찌고 기름진 암말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새옹은 자신의 말도 찾고 자기 말의 짝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암컷 말도 공짜로 얻은 것이니,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도 축하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새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이것이 화가 될지 누가 압니까?”
새옹에게는 말타기를 무척 즐기는 아들이 있었는데, 며칠 후 그가 아버지 몰래 새로 온 암말을 가만히 끌고 나와 마음껏 속력을 내며 타다가 말의 앞발이 돌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앞으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또 다시 새옹의 집으로 몰려와 걱정스런 표정으로 위로했습니다. “참 안됐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러나 새옹은 이번에도 무표정하게 말했습니다. “이 화가 또 복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들의 다리가 부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방 흉노족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징집령을 내려서 젊은이들을 모두 전쟁터로 보냈고, 새옹이 살던 마을의 젊은이들 역시 모두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새옹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터로 불려가지 않았습니다. 그 전투에서 마을 젊은이 대부분이 전사했을 때, 다리가 부러져 전쟁에 나가지 않음으로 살아남은 새옹의 아들을 보면서 마을 촌장이 부러운 듯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과연 화가 복으로 바뀌었군.”
이 ‘새옹지마’의 일화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복이 내일은 화가 될지, 오늘의 화가 내일은 복이 될지, 정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이 어려운 것이 오히려 복으로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야곱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1. 상황의 변화로 인한 결단 (1~3절)
야곱은 두 아내와의 결혼을 위해서 14년을 일했습니다. 라헬을 위해 7년을 일하여 결혼하고는 보니 레아였습니다. 그래서 라헬과 결혼한 후 또 다시 7년을 일했습니다. 이 의무 기간이 지나고 두 번째 계약을 맺은 후부터 엄청나게 돈을 긁어모으게 되고, 오히려 라반의 재산보다도 더 많아지게 됩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1절)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비즈니스 주인인데 직원 한 명을 고용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가만 보니까 주인인 나보다 그 직원이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 비즈니스를 이용해서 뒤로 뭔가를 빼돌려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라반의 양을 맡아서 쳤는데, 야곱의 양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라반의 양들은 점점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라반의 아들들이 이것을 볼 때, 당연히 야곱이 자기들의 아버지 양들을 슬쩍슬쩍 빼돌려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조사를 안 했겠습니까? 요즘 경찰이나 검찰이 조사하는 것처럼 난리를 치며 조사를 했는데, 자세히 조사해보니까 원래 라반과 야곱이 맺었던 계약 그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본 것처럼, 라반이 야곱과 계약을 맺은 다음에 무슨 수를 썼습니까? 아주 악랄한 방법을 썼습니다. 양들 중에서 아롱진(얼룩 있는) 것들, 점 있는 것들, 검은 것들만 야곱이 가지겠다고 하니까, 그런 양과 염소만 골라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에게 맡았고 야곱에게는 흰 양과 염소만 맡겼습니다.
라반은 그것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아예 자기와 야곱 사이를 사흘길이나 떨어지게 했습니다. 서로 섞일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야곱이 치던 흰 양떼에서 얼룩이 있거나 점이 있거나 검은 양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까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곱이 엄청난 부자가 된 것을 시기하면서 모함하는 ‘라반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의 처남들입니다. 즉, 그의 아내들의 형제들입니다. 레아와 라헬 외에도 남자 형제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가족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사실 돈은 가치중립적인 것이기에, 더 정확히 말하면 돈에 대한 욕심, 그리고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애초에 라반과 야곱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고, 또한 장인과 사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돈 문제에 대해서는 친척이고 가족이고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라반이 시작한 일인데, 자기가 시작을 해놓고서는 이제 와서 일이 생각대로 안 풀리니까 야곱 탓을 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2절)
여기에서 라반의 안색이 야곱에게 전과 같지 않았다는 것은, 약간 서먹해진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대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라반은 야곱을 눈엣가시 같이 또 원수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라반이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은 그냥 넘어가주는 것이 아니라, 뭔가 결정적인 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뭔가 조금이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뒤집어버리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돈의 속성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사실은 종이조각이고 별 게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파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돈을 금으로 다루어서 그런지 돈을 ‘Gold’라고 하는데 God과 ‘l’ 자 하나 차이밖에 없습니다. 돈은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실 돈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이 사람을 그렇게 무섭게 바꾸어 버립니다.
돈 문제가 끼어들면 부부고 부모고 형제고 없습니다. 무섭습니다. 요즘도 재벌들을 보십시오. 상속문제로 누가 경영권을 가질지, 누가 상속을 더 할지를 놓고 싸움을 벌입니다. 미리 변호사들을 동원해서 준비를 해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속세를 안 내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돈은 사람을 무섭게 만듭니다.
이것은 누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손해를 보면 그냥 기분이 나쁘기 때문에 못 견디고, 그래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어쨌든 싸웁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정말 문제입니다. 역사를 보면 전쟁도 돈 때문에 일어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라반과 그 아들들이 야곱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적대적으로 그를 대하게 된 이 일을 통해서, 야곱이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라반과 그 아들들이 야곱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호의를 베풀었다면, 야곱은 하란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편하고 좋은데 왜 떠나겠습니까?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과 그 아들들의 태도가 아주 적대적으로 변한 것을 본 야곱은,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상황이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개 괴로움을 느끼면서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데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왜 일이 안 풀리는가?’ 하나님께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합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리고 길이 막힐 때, 또 나쁜 일이 벌어질 때,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아, 바로 지금이 내가 변화해야 할 시간이구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시간이구나. 그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했구나. 정말 하나님을 붙들어야 할 시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로 우리에게 고통의 순간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불편한 상황을 통해서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해결할 수 없고 내 능력을 넘어서고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될 때야말로 사실은 신실하신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아가는 사람은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그냥 거기 머물고 마는데, 깨닫는 사람은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라반과 그 아들들이 야곱에게 적개심을 품고 씩씩거리는 것이 야곱에게 좋은 일입니까? 사실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들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그냥 보아도 이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고, 아주 안 좋은 상황입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잠도 오지 않을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이때 뭔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가 사람의 마음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꾸겠습니까? 어떤 사람과 관계가 불편해졌을 때 내가 어떻게 함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이 오히려 굉장히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이상한 것이, 편안하고 잘되면 간절히 하나님을 안 찾는데, 괴롭게 되면 간절히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순간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이제는 타협하고 안주하는 삶을 중단하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더 이상 편안하고 겉으로만 안정된 삶에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되고, 비록 모험이 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일어나서 믿음의 발걸음을 떼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하란에서 지내면서 믿음생활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결혼하고 자녀들도 많이 낳고 이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빈털터리로 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대단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의 불편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그가 다시 믿음의 길로 돌아오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혹시 깨닫지 못할까봐 직접 오셔서 말씀까지 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3절)
이것은 단순히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즉 ‘이제는 더 이상 너의 재주나 능력을 믿지 말고, 믿음의 길로 다시 들어서서 나를 신뢰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하는 대로 다 잘 되었는데, 그것이 자기 능력과 지혜로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믿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2. 야곱의 제안 (4~13절)
이제 야곱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아내들을 설득해서 함께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혼자 떠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와 고향을 떠나면서까지 야곱과 함께 하겠느냐는 점입니다. 야곱과 레아는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라헬도 자기에게 아이를 낳게 하라고 화도 냈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닌데 자기와 함께 가자면 따라오겠습니까?
만약 아내들이 자기를 따라오지 않기로 한다면 야곱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먼저는 혼자 떠나는 겁니다. 다른 옵션은, 다 포기하고 그냥 거기 눌러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자기와 함께 떠날 수 있도록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설득을 합니까?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4-5절)
이때 야곱은 들에서 양을 치며 있는데, 사람을 보내서 라헬과 레아를 들로 부릅니다. 왜냐하면 집으로 가 장막 사이에서 이야기하면 들킬 수도 있고 정보가 샐 수도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곳으로 부릅니다.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아내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 일종의 가족 전도입니다. 물론 레아와 라헬도 야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믿는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힘든데, 이들 앞에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전도는 간증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셨다는 것인데, 야곱이 지금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20년 동안 여기서 살면서 믿음으로 한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기부터 그렇게 해야 하고, 아내들도 그런 믿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을 이렇게 몰아가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한 직접 떠나라고 말씀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상황이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전에 야곱은 라헬과 레아에게 먼저 그들의 아버지인 라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가 자기를 대하는 것이 이전과 달라졌다고 설명합니다.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을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하면서 적대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이 이제껏 자기와 함께 해주셨다고 간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험한 상황에서도 자기는 괜찮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6-7절)
여기 있는 내용은 30장에서 살펴본 내용과 조금 다릅니다. 30장에서는 야곱의 품삯이 한 번만 정해진 것으로 나오고, 아롱진 것이나 점 있는 것이나 검은 것은 모두 야곱이 자기 소유로 삼기로 한 것을 보았습니다. 흰 것은 다 라반의 소유로 남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라반이 무려 열 번이나 야곱의 품삯을 바꿔가면서 속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열 번’이라는 것은 정말 10회라기보다는, 굉장히 많은 숫자를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요즘 말로 하면 ‘갑질 중의 갑질’을 한 것입니다. 고용주가 고용인을 향해 엄청난 갑질을 해댄 것입니다.
게다가 라반이 자기를 해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이 지켜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야곱의 입에서 점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3, 5, 7).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8절)
처음에 품삯을 계약할 때 라반은 분명히 점 있거나 아롱지거나 검은 것은 야곱에게 다 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30장). 그런데 그런 양들이 많이 나오게 되니까, 라반은 계약을 자기 맘대로 바꾸어서 점 있는 것만 가져가라는 식으로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또 점 있는 것만 나오니까 약이 오르고 열 받아서 아롱진(얼룩진) 것만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또 아롱진 것들만 나옵니다. 그러자 또 검은 것만 가져가라고 했고, 그러니까 또 검은 것만 나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게 어떻게 야곱이 한 일이겠습니까?
30장에서는 야곱이 나뭇가지를 양들이 교미할 때 거기 세워놓았다고 되어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방법을 쓸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안 해도, 라반이 아롱진 것을 가져가라고 하면 아롱진 것만 나오고, 점 있는 것만 가져가라고 하면 또 점 있는 것만 나오고, 검은 것만 가져가라고 하면 검은 것만 나옵니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니까 그것을 본 야곱은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은 내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구나. 나뭇가지라는 방법을 써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복을 주신 것이다’ 하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면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9-10절)
야곱은 꿈 이야기도 하면서, 꿈에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해준 말을 이야기합니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12절)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사실 야곱은 믿음의 사람답게 산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14년 동안 아내들을 얻기 위해 종처럼 일했고, 6년은 돈을 벌겠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직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기하며 자기를 속이려 했던 라반을 보며 치가 떨렸고, 엄청난 위기감과 고통도 느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 세상에는 나를 지켜줄 자가 아무도 없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정말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그와 함께 하셨고, 모든 일을 다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똑같습니다. 혹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 괴롭고 억울하고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까? 특히 사람 때문에 힘든 적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서 그 사람과 확 맞붙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통쾌하게 확 쏘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더 악화될 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중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길을 가고 있는데, 작고 이상하게 생긴 괴물이 앞에 나타나 길을 막고 위협합니다. 그러자 그는 괴물을 때려서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때리니까 그 괴물이 더 커져서 다시 옵니다. 또 때려서 보내니까 또 더 커져서 옵니다. 때릴수록 점점 더 커져서 결국은 길을 꽉 막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괴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다툼’입니다. 다툼이라는 것은 때리면 때릴수록 없어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는 그냥 무시하고 놓아두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줄어들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그럴 때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든 일을 당할 때, 특히 사람 때문에 힘든 일을 당할 때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가서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 상황을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판단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이것이 내 잘못 때문에 된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쪽 때문에 상황이 안 좋아졌다면, 그 사람과 붙을 게 아니고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이 처리해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또는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한 사람의 모든 면을 100% 다 알 수 없습니다. 몇 가지 면만 보고 미워하거나 비판하거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내 편견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지, 전체를 다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를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완벽하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전부 다 알고 계십니다. 나에 대해, 상대방에 대해, 이 상황에 대해, 100% 다 보고 다 알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깨닫고 있던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롬 12:19, 새)
물론 사도 바울은 야곱보다 훨씬 뒤의 사람이지만, 야곱은 이 말씀대로 실천한 것과 같습니다. 이제 야곱은 아내들을 설득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해주신 말씀을 인용합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13절)
이것이 야곱의 간증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그의 믿음을 다시 깨어나게 했습니다. 편안했으면 그냥 영적으로 죽은 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힘들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믿음이 일깨워졌습니다. 야곱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시고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시다. 나는 가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같이 가자.’ 하고 말합니다.
아내들이 태어나고 자란 친정이니 떠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곳에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비록 모험이 되더라도,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약속 밖에는 없지만, 이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자고 야곱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실함’이란 뭡니까?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해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몇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약속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은 길을 안 열어주시고 잘 안 해주신다.’라고 오해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같은 줄 알아서 그렇습니다. 인간처럼 자꾸 변덕이 심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간과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3. 가족회의의 결과 (14~16절)
이제 야곱의 간증을 들은 라헬과 레아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14-16절)
그들은 완전히 자기들의 아버지 라반에 대해 굉장히 혐오감을 드러냅니다. 아버지 집에 더 있어 보았자 얻을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 있다가는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라고 하면서, 아무 미련 없이 야곱과 함께 떠나겠다고 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라고 야곱을 격려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 생각해 보면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아닙니까? 지금 야곱이 라반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갈등관계에서 심한 경쟁을 벌이던 라헬과 레아가 한마음이 됩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히 된 일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죽이는 데 한마음이 된 사두개인, 바리새인, 제사장들, 헤롯당 등이 있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도 그날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악한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지금까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던 관계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라헬과 레아가 하나 되기를 야곱이 얼마나 원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참 힘듭니다. 자기와도 하나가 안 되는데 자기들끼리 어떻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관계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왜 그토록 야곱의 삶이 복잡하게 얼키고 설키고 섞여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따라야겠다고 결단하자, 모든 삶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모든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이 복잡하다면 대개 이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아서 판단하고 자기가 알아서 결정하며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결단을 내리게 되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일이 풀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한 가지가 풀렸다고 계속 풀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하나를 풀어주시고, 그래서 또 의지하고 나아가니까 또 풀어주시는, 이런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돈도 벌게 해주지만 생명을 지켜줄 수 없고 아무 보장이 없는 라반의 집에서 일어나, 비록 험해 보이고 좁은 길이라도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특히 상황이 어려울 때 흔들리지 말아야겠고,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빨리 깨닫고 변함없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책들 내용을 메모해놓았는데, 그 중 아주 감명 깊게 읽은 책에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병들어 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라. 지금이야말로 그대 심장이 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대 생명으로 주님을 위해 살 때이다. 건강한가? 감사하라. 건강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건강을 하나님의 도구로 기꺼이 사용할 때이다. 가난에 처해 있는가? 감사하라.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진리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음이다. 부유한가? 감사하라.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는 기쁨을 누릴 기회이다. 실패했는가? 이제야말로 그대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짐을 겸손히 기다릴 때이다. 성공했는가? 교만에 빠짐없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이다. 젊었는가? 무엇에든 도전할 수 있고 실수가 인정됨이다. 상대적으로 늙었는가? 그 동안 쌓은 경륜으로 이제부터 남들을 위해 삶의 그늘을 제공할 수 있는 거목이 되어감이다.” (이재철, <참으로 신실하게> 중에서)
지금 나의 상황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바로 이런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향해 힘차게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