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twdS4hu4QGk?t=1858
2020년 11월 22일 추수감사주일
✦ 추수감사절 메시지 ✦
“괴로운 상황에도 감사하는 사람들”
(고린도전서 1장 4~9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영국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명한 부자였던 컹글튼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집에서 쉬고 있는데,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딱 5파운드만 생기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이 말은 들은 컹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다가가서 “네 소원이 정말로 그거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녀는 놀라면서 “주인님, 그럼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컹글튼 경은 일하는 하녀를 격려해주면서 “내가 자네의 소원인 5파운드를 줄 테니 이제부터는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게.”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이 하녀에게는 자기 혼자 그냥 중얼중얼한 넋두리가 정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5파운드를 하녀에게 주고 난 그날 오후 컹글튼 경이 정원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는데 또 다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10파운드라고 하는 건데, 아이고 아까워라.” 그 하녀는 5파운드만 받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뤄진 후에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불평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번 미국 정부에서 주는 코로나 지원금을 다 받았습니다. 그때 $1,200을 받았는데, 없던 돈이 생겨서 ‘야, 지원금도 주니 정말 좋다.’라고 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까 ‘아니, 이왕 주는 것을 2천 불이나 3천 불을 주지 이게 뭐야?’라는 마음이 혹시 없으셨습니까? 받기 전에는 아주 좋고 감사하다 했는데 받은 다음에는 ‘이게 뭐야? 더 받았으면...’이라고 합니다. 그 하녀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가 넘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평이 넘칩니까? 특히 추수감사절은 감사해야 하는 절기이지만, 매년 돌아오기 때문에 억지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감사하도록 되어 있는 날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할 수 있다면, 아니 불평이 저절로 나올만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만 있다면, 그런 사람의 삶은 정말 풍성하고도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날마다 불평만 하는 사람과 늘 감사만 하는 사람 중 누구의 삶이 더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어려운 상황에도 감사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괴로운 상황에도 감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그렇다. 그렇게 될 수 있다.’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일이 안 풀리고 나쁜 일이 일어나며 괴로운 상황에도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을 오늘 본문에서 함께 찾고자 합니다.
1. 다른 형제자매에게 넘치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사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는 그리스 남부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 살던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첫 번째로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4절)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인하여 감사드립니까? 예수님 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까?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5절)
그것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게 된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너무 말을 잘하고, 특히 고린도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이교도들을 볼 때마다 아주 말을 잘해서 전도도 잘했습니다. 성경 지식도 많아서 예수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아주 잘했다는 겁니다. 그런 은혜가 풍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6-7절)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증거’, 즉 예수님에 대한 구원의 확신이 아주 강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하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멘! 할렐루야!’ 하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받았으면, 소위 ‘은사 장’이라고 별명이 붙은 12장과 14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가진 교회였다는 겁니다.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자세히 보면,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가 사실은 고린도 교인들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신앙이 성장하고 엄청난 은사들을 많이 가져서 그런 것들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풍족하게 주신 은혜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의 감사의 초점은 부족함 없이 은사를 누리고 많은 좋은 점들이 있는 고린도 교인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형편없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훨씬 많은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교회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의 영적 능력(소위 ‘영빨’)이 더 세냐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자기들 안에서 파를 나누어 갈라져 분쟁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받은 은사와 지식이 마치 자기 소유인 것처럼, 예언과 방언과 병 고침과 기적 등 성령의 은사가 자기 것인 양 자랑하며, 누구의 것이 더 좋은가 하는 것을 싸웠다는 겁니다. 자기 노력으로 이룬 것처럼 자랑하며 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의 4장 7절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전 4:7)
받은 사람이 뭘 자랑할 게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가지고 ‘내 선물이 더 크니까 내가 더 잘났다.’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맨몸으로 태어났습니다. 맨몸으로 왔다 맨몸으로 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 이렇게 많구나.’라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사를 가느라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짐 정리를 해보면 ‘내가 이런 게 있었나? 있는데도 안 썼구나.’라고 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갖고 있는데도 없다고, 부족하다고 항상 불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은데, 그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자랑하면서 남들과 비교하며 ‘저 사람은 없는데 나는 이게 있다. 저 사람은 별 것 없는데 나는 이렇게 높다.’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가 힘듭니다. 주신 분을 잊어버리고 사는데 누구에게 감사하겠습니까? 다 자기 것이니까 자기 자랑밖에 할 게 없는 겁니다.
또 많이 가진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나는 이렇게 없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많네. 나는 왜 이럴까?’라고 열등감을 가지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가진 것이 없다고 느끼니까 어떻게 감사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 즉 내 가족부터 시작해서 살고 있는 집, 입고 있는 옷, 신발, 자동차, 컴퓨터, 전화기 등이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내가 가진 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내가 가진 능력과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고 말은 하는데, 정말로 믿으십니까? 정말로 믿으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사실을 정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셨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지 않으셨다면, 작은 것 하나라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부모인 분들은 더 잘 아실 겁니다. 우리도 다 자녀였지만, 자녀가 입고 있는 옷, 신고 있는 신발, 먹는 음식, 쓰는 용돈이 다 누구의 것입니까? 다 부모가 준 것입니다. 다 부모의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입혀주고 먹여주고 용돈도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는 자녀인데, 자녀 중에도 착한 자녀가 있고 뻔뻔한 자녀가 있습니다.
착한 자녀는 어떻게 합니까? ‘아, 부모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사랑을 베푸시는구나.’ 하며 용돈을 아껴서 모았다가 아빠엄마 생일 때 기억하고 있다가 선물을 사서 ‘Happy birthday!’라고 하며 드립니다. 얼마나 착하고 기특합니까?
그런데 뻔뻔한 자녀는 받은 돈이 다 자기 것이니까 자기만을 위해서 씁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야, 지금 급하니까 아까 내가 줬던 것 있지? 잠깐만 빌려줘. 금방 줄게.’라고 하면 ‘No! Mine!’ 얼마나 뻔뻔합니까? 사실 우리도 다 그랬습니다. 부모님이 안 주셨으면 그 돈이 어디서 납니까? 그런데도 다 자기 것이라고 우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지금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내게 있는 것이 누구 것이라고 우깁니까? ‘Mine!’ 하나님이 ‘너 그것을 내가 원하는 일에 좀 써보지?’라고 하시면 ‘No! Mine!’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위해 사용합니까? 자기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남을 위해 쓸 줄을 모릅니다. 또 자기 것이 최고라고 자랑합니다. 여러분, 내가 주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즘 <말씀의 삶>에서도 다루었지만, 위대한 왕 중에 히스기야가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이 낫고서 바벨론 사신들이 왔을 때 ‘우리는 이런 것도 있다.’라고 하며 유다의 보물들을 자랑하며 다 보여줍니다. 그랬다가 그 결과 나중에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랑할 만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도 사실은 자랑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재물, 학벌, 사회적 지위, 좋은 가문, 자동차, 집, 자녀가 공부 잘하는 것, 심지어 우리가 받은 영적 은사도 우리는 자랑할 게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내가 그것의 주인도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귀한 선물에 대해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나 이런 것도 있다.’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걸 주셨구나’ 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내세우며 남과 자기를 차별하는 데 쓴다면, 또는 열등감을 느낀다면, 참으로 안타깝고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많은 좋은 것들이 있는데도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구호는 항상 ‘조금만 더, 조금만 더(Just a little bit more).’입니다. 그것도 역시 참으로 불행한 태도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결혼을 앞둔 청년들에게 획기적인 상품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희망 사항을 입력시키면 이상적인 상대를 소개시켜주는 슈퍼컴퓨터입니다. 평소에 자기와 어울리는 남자가 없다고 생각하며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한 젊은 여성이 컴퓨터 앞에 와서 자기 차례가 되어 자신의 희망 사항을 입력시켰습니다. 그녀의 희망사항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즐겁게 해달라면 언제나 멋진 음악과 춤을 선사할 수 있고, 우울할 때는 풍부한 유머 감각으로 나를 웃겨주고, 깊은 지식을 갖춘 지성미로 지적 욕구를 채워주고, 경제적 감각과 정치적 소신이 있고, 언제나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잘 놀아주고, 휴일엔 항상 가족과 함께 하며 즐거움을 주고, 조용히 하라고 하면 즉시 입을 굳게 다무는, 그런 상대를 원합니다!” 그랬더니 컴퓨터가 한참 돌다가 그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최신형 컴퓨터를 한 대 사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로 인해 감사하며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그리 쉽진 않은데, 자기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랑을 일삼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 넘치도록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드리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같이 위로해주고 기도해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사람인데도 나보다 은사를 더 가진 사람, 내가 없는 은사가 있는 사람, 나보다 돈이 더 많은 사람, 같은 직종인데 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사람, 같은 사업인데 돈을 더 많이 버는 사업체, 학벌이 더 뛰어난 사람, 더 지위가 높은 사람, 나와 나이가 비슷한데도 더 잘나가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면 ‘야,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구나!’ 하며 축하하고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시기와 질투가 나는 게 인간입니다.
그런 것들을 대놓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아이고, 잘났다’ 하며 신경을 안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그런 걸 과시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아니꼬워서 얼마나 보기가 힘듭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유치한 것인데도, 그걸 볼 때는 참 분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유치하고 한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보면서도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토록 미성숙하고 한심한 태도를 가진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자기들이 잘난 줄 아는 고린도 교인들, ‘우리는 이렇게 영적 은사가 많으니 믿음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다.’ 하면서 자랑하는 고린도 교인들, 또 그들 안에 있는 많은 은사를 보면서, 그들 안에서 활발하게 역사하시며 그 선물들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자기 잘났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답답하고 화도 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주신 분, 즉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눈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괴로울 때에도 감사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2. 현재의 불완전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결국 온전하게 만드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인하여 감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하게 그들을 야단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주 안 좋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훌륭한 교회 같았지만 아주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1) 분쟁
1:10-17을 보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3:1-4을 보면, 바울은 그들에게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다. 어른이 아니라 어린 아이다. 밥을 먹을 준비가 안 되어 젖밖에 못 먹는다. 육신에 속하여 시기와 분쟁이 있다.’라고 합니다.
2) 교만
4:18-21을 보면, 그들은 교만하고 말만 많았습니다. 특히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3) 성적 타락
그들은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고린도의 성적 타락의 문화에 휩쓸려서 성적 타락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5장을 보면, 아버지가 재혼했던 계모와 함께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 사람의 죄이지만, 그런 사람을 보면서도 그냥 가만히 두었다는 겁니다. 교회가 아무런 징계도 안 하고 그냥 두었습니다.
또 6장에 보면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고린도의 사창가를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7장을 보면 그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금욕주의자가 되어서 결혼을 죄악시하고 부부간의 관계도 죄로 여기며 정죄했습니다.
4) 법적 싸움
6장에 보면,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다고 자랑하면서도 사소한 일상생활의 분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고소했는데, 그것도 같은 교회의 교인을 고소하며 법정에 나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무 안타까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국에서도 교회 분쟁이 일어나 법정에 가니까 믿지 않는 판사가 그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들, 장로님들, 그만 좀 싸우세요.” 안 믿는 사람인 판사에게 그런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고린도에도 벌어졌습니다.
5)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8장에 보면, 자기 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음으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고 실족하게 했고, 이교도 사원의 우상 숭배의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6) 성찬을 잘못 행함
11장에 보면 바울이 성찬에 대해 말하는데,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으면 잘못이다.’라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할 때 어떤 분들은 ‘요즘 제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데,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자기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으면 죄라고 하니까 오늘은 제가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잘못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당시 성찬식을 할 때는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 예배 때 성찬식을 하고 예배 후에 그것을 가지고 함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풍성하게 먹는데 자기들만 먹고, 가난한 교우들에게 전혀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배가 터지고 어떤 사람은 쫄쫄 굶는 일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7) 은사의 문제
고린도전서에 별명이 붙은 장들이 많습니다. 12장과 14장은 ‘은사 장’이고, 13장은 ‘사랑 장’이고, 15장은 ‘부활 장’입니다. 특히 13장에서 왜 그렇게 사랑을 많이 이야기합니까? 은사가 많다고 막 자랑했는데,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침과 기적 등 신비로운 역사가 많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전혀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자랑을 위해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속성을 죽 나열한 겁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다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겁니다. 그들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이야기한 겁니다.
또 14장을 보면,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너무 무질서했습니다. 예배를 한 번 드려도 여기서 이 사람이 일어나 이야기하고 저기서 저 사람이 일어나 이야기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니까, 무질서하고 예배가 진행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질서 있게 사용하라고 권고한 겁니다.
8) 부활을 부인
15장이 ‘부활 장’인데, 고린도 교회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2). 그래서 부활에 관하여 아주 길게 쓴 겁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현실을 보면, 감사할 조건들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놓고 감사할 수가 있습니까? 그 중에도 특히 교인들이 파가 나뉘어져서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삼는 것이 바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여 생긴 교회인데 그들 가운데 다툼이 있다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선교사님들이 전도해서 현지인들 가운데 교회가 섰는데, 나중에 들려오는 소리가 전부 싸우기만 한다고 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렇게 굉장히 심각한 분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놀랍게도 ‘당신들을 인하여 감사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감사합니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8-9절)
여기를 보면, 바울은 주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을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을 소망하며 믿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그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한심합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화가 납니다. 그러한 그들을 예수님 안에서 부르시고 주님과의 교제권이 생기고 자기와의 교제권이 생기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많은 선물들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은 부족한 정도를 넘어서 정말 한심하고 형편없는 정도이지만, 이 세상 끝 날까지 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해주실 주님을 생각할 때, 주님을 신뢰하며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을 뿐 아니라 또한 고린도 교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4:14; 16:24). 사랑하지 않으며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형편없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이 편지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바울은 대단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잘 이야기했는데도 내 자녀가 나에게 반항하고 막 화를 내면 ‘오, 주님, 제 아이를 인하여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냥 같이 ‘야!’ 하며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주님, 저들을 인해서 감사합니다.’라고 한 것이니까 바울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바울은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신 이 사람들을 자기도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자기가 포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 그들로 인하여 감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편지 전체를 통해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제대로 된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교회생활을 하다가 다른 교인들을 보면서 실망과 분노를 느낄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끼리도 그렇고, 목장에서도 그렇고, 다른 성도들을 봐도 그렇고, 가끔 ‘저 사람은 왜 저러지?’ 하고 실망하거나 화가 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밖에 안 될까? 왜 저 사람은 말을 해도 저렇게 말을 할까? 왜 저렇게 행동을 할까?’ 참 답답하고 화가 나는 경험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오, 하나님, 저분을 인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저분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 저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분도 역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부르시고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분명히 잘 인도해주실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다면,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소망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들을 보면, 아직은 하나님께서 빚어가고 계시는 미완성품이며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완성품으로 빚으실 날이 올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눈으로 형제자매를 바라볼 때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 사람을 인해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가족끼리도 내 자녀를 보면서, 배우자를 보면서, 부모님을 보면서 여러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지만, 그 소망을 생각할 때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다른 목장식구나 성도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가는 말]
제가 오늘 네 컷짜리 만화를 준비해왔습니다. 찰스 슐츠(Charles Shulz)라는 분이 그린 만화 피넛츠(Peanuts)가 있는데,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 시리즈 중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Thanksgiving Day가 되었는데, 주인공 찰리 브라운의 가족들은 터키(Turkey)를 먹으며 즐거운 파티를 벌이고 있는 배경입니다.
그때 그 집의 강아지 스누피(Snoopy)가 개밥을 보면서 “저것 좀 보게.”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모두가 터키를 먹고 있지만, 나는 단지 개라는 이유로 개밥이나 주는구나.”라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생각하는 것이 “It might have been worse. 물론 더 나쁠 수도 있었지.” 그리고 돌아가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터키로 태어날 수도 있었잖아!”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열 가지 일들 중 아홉 가지의 좋은 일들보다는 나쁜 일 한 가지를 더 잘 기억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한 것 9개는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하나를 기억하며 열을 냅니다. 그런데 자기에 대해서는 그 반대로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든 남에 대해서든, 우리가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은 한 가지뿐이고 나쁜 것이 99가지라 할지라도, 그 한 가지로 인하여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삶이 정말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불평하고 낙심하고 불만을 토로할 만한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예배가 끝나고 가다가 지나가는 더 좋은 차를 보면 ‘나는 이렇게 안 좋은 차를 타는데 저 사람은 되게 좋은 차를 타네.’라는 마음이 들 때 생각을 바꾸는 겁니다. ‘It might have been worse. 더 나쁠 수도 있었지.’ 또 자신의 사업체나 직장을 보면서 ‘나는 왜 이것 밖에 안 되나?’가 아니라 ‘It might have been worse. 더 나쁠 수도 있었지.’ 특히 가족을 보면서 ‘왜 우리 가족은 이것 밖에 안 되나? 왜 내 배우자는 이것 밖에 안 되나?’가 아니라 ‘It might have been worse. 더 안 좋을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감사하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그 스누피 정도의 수준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남들과 비교해서 더 나쁘지 않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것은 굉장히 낮은 수준의 감사입니다. 정말 스누피 수준의 감사입니다. 오히려 너무 답답하고 너무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 삶과 다른 형제자매들의 삶에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내려주시는 하나님, 또 나와 다른 지체들을 완성품으로 빚으시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