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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5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8 ✦
“갈리오의 판결이 선교에 미친 영향”
(사도행전 18장 12~17절)
[들어가는 말]
우리 교회 삶 공부 여러 과정이 있는데, 삶 공부는 완전히 지식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연결되는 것을 추구하지만, 삶 공부를 하면 아무래도 성경 지식이 늘게 마련입니다. <생명의 삶> 때도 배우고 <말씀의 삶>에서는 더 많이 배우지만, 성경 내용은 몇 가지로 분류됩니다. 구약성경은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나뉘는데, 구약성경에는 역사서가 여러 권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 역사서, 편지서(서신서), 예언서 중 역사서는 딱 한 권 밖에 없습니다. 그 한 권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우리 한국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배워야 하느냐?’라고 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그들의 역사를 배우는 게 아니라 역사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서는 역사책이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역사서를 읽을 때는 특별히 역사적인 배경을 함께 알고 읽어야 도움이 됩니다. 역사적 배경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감이 안 잡힙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편지나 일반서신의 배경을 모른 채 그냥 읽으면 교훈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으며 함께 살펴보고 있지만, 왜 사도 바울이 그런 편지들을 썼는가 그 배경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왜 갈라디아서를 썼고,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썼고,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썼고, 왜 에베소서, 골로새서, 로마서를 썼는가, 그런 것들이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선교와 전도를 하던 상황 속에서 이 편지들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고, 또 그래서 이렇게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에서 바울이 고소를 당하여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 부분은 그냥 빨리 읽고 지나가는 내용이지만, 놀랍게도 오늘 이 본문이 하나님께서 복음의 전파를 위해 베풀어주신 보물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해 복음을 전한 지 8~9개월 정도 되었을 때, 이 지방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리더십이 교체되어서 갈리오라는 사람이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2절)
아가야(Achaia 또는 Achaea)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사람이 갈리오(Gallio)입니다. 고린도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면 델포이(Delphi) 신전이 있는데, 거기 비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주후 51년부터 52년까지 아가야의 총독으로 재임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리오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인데, 이 사람은 스토아 철학의 대가인 세네카(Seneca)의 친동생입니다(형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음). 세네카라는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세네카는 아주 유명한 철학자로, 폭군 중의 폭군이었던 네로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네로가 젊었을 때에는 ‘로마를 세네카가 다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원래 갈리오의 노바투스 가문은 좋은 가문입니다. 이 형제의 아버지는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큰 도시인 로마로 갔습니다. 원래는 스페인 출신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두 아들을 조금 더 좋은 집안에서 양육시킬 욕심으로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라는 사람의 집에 양자로 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갈리오의 아들이 되어 갈리오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이유는, 이 집안의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번 본문이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노바투스의 원래 집안은 아버지가 로마 원로원의 의원이고, 형은 당대 스토아 철학의 대가인 세네카로 네로 황제의 스승이 될 정도로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갈리오는 이런 좋은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다고 생각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라는 사람의 양자로 들이는데, 그 사람은 또 로마제국 수사학의 대가였습니다. 노바투스가 그런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고 갈리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갈리오는 원래 집안도 대단하고 양자로 들어간 집은 더 대단한 양쪽 집안에서 아주 좋은 것들만 배우고 자라서, 어른이 되어 로마의 유력한 정치인이 되었고 총독으로 아가야 지방에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갈리오는 형 세네카와 함께 한때 로마제국 내에서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건강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AD 51-52년에 짧게 총독으로 있었던 것도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AD 65년 네로 황제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은 형 세네카와 함께, 갈리오는 네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참 비운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갈리오가 그의 인생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벌어진 사건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아가야의 수도인 고린도로 왔는데, 고린도가 아가야의 수도였기 때문에 이리로 온 것입니다. 그때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열심히 몇 개월째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증거하니까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볼 때마다 속이 끓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데 그 영향력이 대단하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이니까 기분이 나빴습니다. ‘저놈을 어떻게 처치하나? 어떻게 손봐주나?’ 이렇게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그 지방의 리더가 바뀌어서 새로운 총독 갈리오가 부임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총독이 교체되어 부임하면 민심을 얻기 위해 처음에는 민원을 많이 들어줍니다. 대개의 경우 갓 부임한 신임 총독은 현지 사정에 아직 어둡기 때문에 여론에 쉽게 휘둘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로 그것을 노리고 신임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라고 하는데, 아무 때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이 아니라, 총독이 바뀌니까 재빨리 선수를 쳐서 고소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저번에 고린도에 갔었을 때 보면, 지금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끌려갔던 법정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법정이라고 번역된 말이 ‘베마(bēma)’인데 지금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총독 관저 앞에 있었으며, 총독이 소송 사건을 심리할 때 재판소 역할을 했던 곳으로, 광장에 있는 넓고 높이 도드라진 단이었습니다. 총독이 거기에 나와서 재판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를 로마법과 관련된 사회, 정치 문제로 몰아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바울 개인을 사회정치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킬 뿐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나사렛 이단(그리스도교)을 없애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3절)
유대인들의 고발 내용을 보면, “이 사람” 즉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율법’이라고 번역된 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원래 헬라어 단어는 ‘노모스’라는 단어인데, 유대인들의 ‘율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반 법’, 다시 말해 당시의 ‘로마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본문을 정확하게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율법을 어겼다고 해봐야 로마 총독에게 안 통할 것을 아니까, 그렇게 고발한 것이 아니라 그가 로마제국의 국법을 어겼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로마는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여러 나라와 민족을 정복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국가 백성들이 섬기는 종교의 내용을 검토해서 로마 행정 당국의 질서와 사회질서의 상식선에서 크게 혼란을 일으키는 종교만 아니면 다 허락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만신전(Pantheon) 같은 곳도 만들어서 수많은 신들을 한꺼번에 섬길 수 있게 했고, 백성들 특히 공무원들은 1년에 한 번 연 초에 와서 황제 신전에서 절하고 가서 자기 종교를 섬겨도 되게 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는 로마제국이 허용한 종교만 포교할 수가 있었습니다. 유대교도 그 당시 합법적인 종교의 하나로 허락되어 있었고, 로마법 아래서 보호를 받는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교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우리가 섬기는 유대교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주 이상한 것을 퍼뜨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며, 바울이 로마법을 어기고 불법적인 사이비종교를 퍼뜨려 사람들을 선동하고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식으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문제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로마법과 관련된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살짝 둔갑시켜서 바울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나와서 고발한 게 아닙니다. 아주 치밀하고 교활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이들이 고소한 내용이 인정되어 바울의 복음 사역이 불법이라고 판결이 내려지면 로마법에 의해서 이제 기독교는 불법 종교가 되고 맙니다. 바울이 이전에 비시디아 안디옥이나 이고니온 같은 곳에서 관리들이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고린도에서 로마의 총독이 그렇게 판결해버리면 기독교가 로마제국 내에서 아예 불법 종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고린도나 아가야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로마제국을 향하는 복음의 위기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연히 유대교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교에서 조상 때부터 섬겨오던 그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짜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자기들의 유대교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분리시켜서 없애기 위해 갈리오에게 고소했습니다.
2. 갈리오의 중요한 판결
그러나 로마제국의 중앙 정치무대 출신이자 세네카의 친동생인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들의 그런 의도대로 넘어가고 조종 받고 움직이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4절)
유대인들의 고발에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려 하는 순간, 갈리오는 바울의 변호를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울의 말을 가로막고 자기가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갈리오가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 너무나 황당한 얘기들입니다. 왜냐하면 끌려온 이 사람이 무슨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거나, 윤리나 상식이나 도덕적인 면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든지, 그런 로마법상 문제라면 분명 총독인 자신이 재판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금방 간파한 것입니다.
갈리오는 아주 합리적이고도 훌륭한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을 저질렀다면 ‘너희’들의 고발을 받아 줌이 마땅할 것이고 말합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행동은 로마법과는 무관하므로 너희들의 고발을 나는 받아 줄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리오는 이어서 뭐라고 선포합니까?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5-16절)
갈리오 총독은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발을 그들의 ‘언어’와 ‘명칭’과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문제로 파악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갈리오가 아주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분별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것도 아니고 로마법을 어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너희들 유대교 내의 문제이다. 너희들의 해석의 문제이다. 이것은 총독인 내가 처리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15절에 나오는 ‘언어’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헬라어 원문으로 language가 아니라 그 유명한 ‘로고스’(‘말씀’)라는 단어입니다. ‘명칭’과 ‘너희 법’이라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는 행정관리가 갑자기 언급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격이 높은 말이고, 학자들이나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개 총독, 정치인, 행정관리가 쓸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갈리오는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의 문제”라고 하며 ‘로고스’(언어)와 ‘오노마’(명칭)와 ‘노모스’(법)에 관한 문제라고 정확하게 정리를 해줍니다. 이런 냉철한 분별은 갈리오의 집안 배경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결국 갈리오는 고소 사건을 바울의 무죄로 판결하고 결론을 내리는데, 이는 하나의 판례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재판 중에 특이한 경우나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총독들은 어떻게 판결했는지 그 판례를 찾아봅니다. 이전에 이런 비슷한 재판에 대해 어떤 법을 적용했고, 어떤 판례를 두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건으로 사도 바울이 무죄 석방되는 판례를 남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성경을 읽으며 ‘어, 그냥 그런가 보다.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하며 무심코 지나갈 만한 내용이지만, 사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 사건입니다. 이제 2차 선교여행의 막바지에 있는데, 앞으로 남은 2차 선교여행과 그 후에 또 펼쳐질 3차 선교여행에 굉장히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바울이 이러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바울의 복음 전파의 길이 앞으로 탄탄대로이고 무조건 순탄할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더 큰 반대와 고난과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이 갈리오의 판결은 앞으로의 복음 전파와 선교 사역에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결정입니다. 이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에 기독교가 불법이 아니고 계속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또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고소를 당합니다. 그때 로마의 유대 총독이 있던 가이사랴에 마침 베스도가 막 부임을 합니다. 그래서 그 전 총독인 벨릭스에 의해 잡혀 있던 바울에게 묻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행 25:9)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겠느냐?”라고 하는 말은 과거에 바울이 무죄 판결을 받은 판례가 있다는 것을 베스도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줍니다. 바울에 대해 이전에 혹시 비슷한 사건이 없었는가 알아보니까, 몇 년 전 고린도에서 아가야 총독 갈리오가 이런 판결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고린도에서 내린 갈리오의 판례를 상기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황제 앞에 상소합니다. 로마 시민은 황제에게 상소하면 반드시 로마로 가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행 25:11)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가야 총독 갈리오의 무죄 판결의 판례로 인하여 이제 복음은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중요한 동기가 바로 갈리오라는 인물로 인해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이 갈리오라는 사람을 최적의 때에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연한 사건이고 우연한 만남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복음이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바로 이때(AD 51년경) 로마사람 갈리오 총독과 유대인인 사도 바울을 고린도에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별 의미가 없거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만한 사건들을 통해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울만 아니라 바로 우리 삶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잘 모르고 그냥 넘어갈 뿐입니다.
여러분, 지난주 지내시면서 누구와 만나셨습니까? 누구와 통화나 문자를 주고받으셨습니까? 지난주에 어떤 우연찮은 사건이 있었습니까? 운전하고 갈 때 갑자기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그로서리 쇼핑 갔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누가 내 앞에 지나쳤습니까? 갑자기 어디서 연락이 온 게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어디서 만나거나, 아주 오랜만에 누구와 연락이 닿았던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그냥 지나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만약 운전하고 가다가 너무 빨리 가서 티켓을 띠어서 법정에 갔을 때, 거기 나온 판사가 그냥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나올 수 있는데 그 사람이 나왔습니다. 나를 잡은 경찰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안 좋은 일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드럽게 넘어가주기도 하는데, 그런 하나하나가 다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는 것이고 뭔가가 있는 것인데 우리는 모르고 그냥 넘어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로서리 쇼핑을 갔을 때, 아니면 옷을 사러 갔을 때, 거기서 왜 하필 이 직원이 지금 내 앞에 있을까? 이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한 번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보십시오. 우연찮게 앞에 있는 직원이 “안녕하세요? 잘 지내세요?”라고 했을 때 “예, 잘 지냅니다. 당신은 잘 지내세요?”라고 반문했는데 그때 그 사람은 뭔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해준 그 한마디, “잘 지내세요?”라고 한 말이 굉장한 위로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만남, 만남이 결코 우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단순한 것을 넘어서 이런 구원의 역사까지 그런 작은 만남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3. 집단 폭행을 당하는 소스데네와 갈리오의 무관심
갈리오 총독이 바울을 고발한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는데, 지금 갈리오 총독이 바울에 대한 고발을 기각시켰음에도 유대인들이 승복하지 않고 재판 결과에 불복한 것입니다. 마치 시위를 하듯이 계속 소란을 피우니까 내쫓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즉각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버리고, 그와 동시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17절)
여기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로 ‘모든 사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본문 앞에 나온 사람들을 의미한다면 헬라어 문법상 ‘이 사람들’ 또는 ‘그 사람들’ 하고 정관사가 붙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고 그냥 ‘모든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는 말은, 이들이 거기 있던 고린도 시민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법정은 누구나 참관할 수 있도록 공개된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조금 전에 ‘베마’라는 높은 돌 위에 총독이 앉아 재판을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그리스보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에 이어 새로 회당장이 된 것으로 보이는 소스데네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법정으로 끌고 와서 소리를 지르며 갈리오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고린도 시민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법정에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죄수처럼 끌려온 바울을 보니까, 전혀 죄수처럼 보이지 않는 연약한 몰골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매도 많이 맞고 배도 몇 번 파선했기 때문에 몸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그 연약한 바울을 악랄하게 고발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갈리오 총독이 그들의 고발을 취소시키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갈리오 총독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시위를 벌이며 갈리오 총독 앞에서 계속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고린도 시민들은 그러한 유대인들의 악랄하고도 무례한 행동을 보면서 다 같이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리오가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자마자 그 유대인들을 지휘하며 악랄하게 굴었고 대표로 말하던 사람으로 보이는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습니다. 우리말 ‘때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몽둥이로 때리거나 주먹으로 때리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시민들이 지나가면서 소스데네를 그냥 한 대씩 툭 친 식이 아니라, 그에게 집단 폭행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오늘 본문보다 약 2년 전에 수도 로마에서 일대 폭동을 일으켰던 유대인들에 대한 고린도 시민들의 반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연약한 바울에 대한 소스데네의 악랄한 행동이 고린도 시민들(헬라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를 로마법을 위반한 정치 문제로 몰아서 매장시키려 했던 유대인들, 특히 그들의 대표였던 소스데네의 계략은, 오히려 자기가 사람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바울은 남은 기간 동안 고린도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바울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 시민들이 소스데네에게 집단 폭행을 가한 곳이 어디입니까? 무슨 으슥한 뒷골목으로 끌고 들어가서 한 게 아닙니다. 바로 법정 앞, 그러니까 갈리오 총독이 직접 보고 있는 곳이고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갈리오 총독은 고린도 시민들이 소스데네를 집단 폭행하는 것을 보고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소스데네가 몰매를 맞도록 그냥 두었다는 말입니다. 갈리오는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아가야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제국의 총독이었습니다. 자기 관할구역의 치안 유지가 그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는데, 그런데도 갈리오가 총독으로서 고린도 시민들의 집단 폭행을 보고서도 그냥 두었다는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지금 소스데네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이 몰려왔는데, 자기들의 대표 격인 소스데네가 고린도 시민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같이 온 유대인들도 아무 상관을 하지 않고 방관했다는 것입니다. 막 험악해지니까 ‘나는 저 사람과 상관없다.’라는 식으로 슬쩍 옆으로 나온 겁니다.
어쩌면 이것은 바울을 악랄하게 괴롭힌 소스데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그 후에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 세상을 떠난 뒤에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은, 이 소스데네가 그 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이 바로 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와 후서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데, 그 고린도전서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전 1:1)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시기는 3차 전도여행 중이었고 장소는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에서 3년 있는 동안 고린도전서를 썼는데, 본문에 나오는 회당장 소스데네가 동일인물이라면, 오늘의 집단폭행 사건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소스데네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바울이 3년간 머물며 고린도전서를 쓸 때 거기에 같이 있으면서 고린도전서를 같이 썼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물론 소스데네가 전임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 같이 예수님을 이때 이미 믿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그가 크리스천들에게 아주 친화적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분풀이로 소스데네를 집단 구타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모든 사람”(17)이라는 단어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때, 그것보다는 오히려 소스데네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고소하는 데 앞장섰던 핵심인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러던 소스데네가 이 집단 폭행 사건 이후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그 위대한 사도 바울과 함께 쓰고 공동저자가 되는 놀라운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사실 그 누구보다도 바울이 소스데네가 회개하며 돌아왔을 때 기뻐하며 영접하고 감싸주었을 것입니다. 가장 크게 환영해주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는 더욱 복음의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이야말로 교회를 잔멸하며 악랄하게 핍박하던 복음의 원수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자기와 비슷하게 했던 소스데네가 돌아왔으니 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소스데네와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악랄한 복음의 원수라도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이처럼 놀라운 영광의 자리로 인도해주십니다. 영원한 상급의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안 믿어서 ‘나는 안 돼.’라고 하십니까? 왜 안 됩니까? 됩니다. 혹시 누군가를 보면서 ‘저 사람은 절대 안 돼.’라고 하십니까? 기독교의 ‘기’ 자나 교회의 ‘교’ 자만 나와서 거품을 물고 욕을 하는 그런 분을 혹시 아십니까? 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분을 잘 주목해서 보십시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통해 이런 복음의 원수가 복음의 일꾼으로 변화되는 역사를 한 번 기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갈리오에 대해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소스데네가 집단폭행을 당하는데도 가만히 보고 있습니다. 상관하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갈리오는 행정관일 뿐입니다. 누가 매를 맞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진리의 편이라 바울 편을 들어주고 무죄 석방을 해준 게 아닙니다. 갈리오는 그저 냉정한 분별력과 합리적인 지식으로 판결을 내렸을 뿐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아가야 총독으로 금방 부임했는데, 자기가 다스리는 데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결정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렸던 그러한 이기적인 판결조차 역사 속에서 사용하셨습니다. 세상의 정권이든 권력이든 재물이든, 하나님은 그들이 진리에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완전하고 선하신 뜻으로 복음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지금 뉴스를 보면 세계의 여러 지도자들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요즘 남북관계, 북미관계, 북러관계, 북중관계, 한중관계, 미중관계 등 복잡합니다. 그 가운데 지도자들이 뭔가 결정을 내립니다. 그 동안 한참 이야기가 잘 되는 듯하다가, 바로 어제인가 북한에서 뭔가를 또 쏘았다고 합니다. 그런 결정조차, 그런 모든 것조차 하나님은 놀랍게도 완전하고 선하신 뜻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잘 보십시오. 비록 각 지도자들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뭔가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결정조차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9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0절) 하셨습니다. ‘내 백성’은 헬라어로 ‘라오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여기서 문맥상 ‘콕 찍어 놓은 내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눈에 비친 고린도가 어떤 곳이었습니까? 다 지옥 불에 쳐 넣어도 시원치 않을 아주 저주스럽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음란하고 타락한 도시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그 백성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백성이 이 성 중에 많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우리는 다 끝났다고, 여기는 가망이 없다고, 저 사람들은 저주스럽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은 진리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던 갈리오도 사용하셔서, 나중에 마침내 복음이 바울을 통해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까지 들어가도록 발판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교회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하나 되며, 각자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냥 어디가 연봉을 더 많이 주는가를 위해서 산다면, 그저 세끼 밥을 위해 사는 허무한 인생밖에 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다 없어질 돈에 내 목숨과 인생을 걸어야 되겠습니까?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1센트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줄 수 있지 않는가?’라고 하신다면,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자녀들이 어떻게 하나 보십시오. 서로 싸웁니다. 서로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지금 나에게 이런 위치를 주셨습니까? 왜 이런 재능을 주셨습니까? 왜 건강을 주셨습니까? 왜 내 가족을 주셨습니까? 바로 그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그렇게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면 그게 뭡니까? 세상에서 실패해도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성공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하지만 성공이든 실패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인생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관심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에게 향하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모든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바로 그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에 인생의 목적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저 남들보다 더 좋은 밥 먹기 위해, 더 큰 집에 살기 위해, 더 좋은 차를 몰기 위해, 그저 연봉 몇 만 불, 몇 십만 불에 인생을 던지는 안타까운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죽음과 동시에 다 사라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허무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때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인생이 되도록 하나님의 관심에 집중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 즉 집이나 차나 가족이나 연봉이나 재능이나 시간과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허무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놀라운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도행전을 꿰뚫는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이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부흥이 다시 한 번 교회가 살아나는 데 귀한 동기가 될 수 있기를 원하며, 그러한 움직임이 우리 각자가 서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