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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14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5

드로아에서 예배 중에 생긴 일

(사도행전 207~12)

 

[들어가는 말: 나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보기]

 

이 시간 자신에게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지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잘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아직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은 상관없지만, 예수 믿은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진단해볼 수 있는데, 특별히 공적인 면에서 잘하고 있지 못한 것을 보면 더 빠릅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인 삶에서도 그렇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증상이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라고 부르는데, 믿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일요일이 아니라 주일(주님의 날, The Lord’s Day)’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을 정하여 주님의 날을 기억하며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떠나, 공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지 않거나 자주 빠진다면, 내가 주인인 삶을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둘째로, 상습적으로 예배 시간에 늦는 것을 보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여기 있는 누군가를 집어서 이야기하는 게 절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어쩌다 한두 번 급한 일이 생겨서 늦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도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어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러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 헤매다 늦게 간 적이 있습니다. 목사도 늦을 때가 있는데 교인들이 왜 늦을 때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어쩌다가 아니라 거의 매주 빠짐없이 예배 시간에 늦는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솔직히 저도 약속시간에 늦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많이도 안 늦고 조금 늦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늦는지, 왜 진작 서두르지 않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그 약속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제가 교회협의회 회장이고, 회장은 늦게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빨리 서둘러 갑니다. 그런데 회장이 아닐 때는 슬슬 하다가 늦을 때가 있었습니다.

 

예배도 똑같습니다. 예배 시간에 매번 늦는다면 그것이 뭘 말해줍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그다지 내 인생에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직장이나 사업체에 매일 지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사업의 사활이 걸린 계약을 위한 만남이 있거나, 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거기에 매번 일부러 늦게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일찍 가서 기다렸다가 모임에 참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어쩌다 늦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예배에 상습적으로 늦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에게도 아주 좋지 않은 메시지를 주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서 신앙 교육을 해도, 그렇게 되면 자녀의 신앙에 굉장히 큰 타격이 옵니다. ‘, 예배는 늦게 가도 되는 거구나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또 어쩌다 놀러가서 교회를 안 가면 , 예배는 안 가도 되는 거구나.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라는 메시지를 심어주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경을 읽히고 기도해도, 그런 것이 지속되면 우리 자녀의 신앙에 굉장히 마이너스입니다.

 

셋째로, 이것도 상습적인 것인데, 예배 시간에 조는 것을 보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도(우리 교회 말고 다른 교회) 매주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직분을 가진 분들입니다. 이것도 너무 피곤해서 어쩌다 한두 번 조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거의 매주 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다른 시간보다 설교 시간에 조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앞자리에서 어느 집사님이 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옆에 앉은 집사님에게 집사님, 저 집사님 좀 빨리 깨우세요.”라고 하니까, 그 집사님이 화를 내면서 자기가 재워놓고 왜 나보고 깨우래?”라고 했다는 농담도 있습니다.

 

물론 설교자부터 설교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가 없더라도 한 주도 빠짐없이 매주 졸고 있다면, 자신이 영적으로 아주 심각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예배 시간에 조는 분들 중에 자기에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을 할 때 조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꼭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거나,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는 좁니다. 그래서 밤에 불면증이 올 때 성경을 읽으면 그대로 잠이 듭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영적으로 아주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으니까 영적인 일만 하면 잠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노는 것이나 스포츠나 드라마 보는 것이나 예능 보는 것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좁니까? 어쩌다 깜빡 졸 수도 있지만, 그런 육적인 일들은 아주 잘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 복음이 생생하고 살아 있던 그 초대 교회에서, 예배 중 설교 시간에 졸다가 위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입니다. 그런데 유두고가 과연 우리처럼 상습적으로 졸던 사람일까요? 이 사건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드로아 교회에서의 예배

 

지난 번 본문인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 아래 이집트에서 나오게 된 것, 특별히 이집트의 장자들을 치시고 문지방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놓았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살아났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그 유월절 후 일주일 동안이 무교절인데, 무교절 후에 우리즉 바울 일행은 빌립보(외항인 네압볼리)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로 건너가,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모인 교회 대표들과 다시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드로아에서 7일 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6절에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도착했다는 점입니다그러니까 그리스 북부의 빌립보 외항인 네압볼리에서 배를 탄 바울 일행이, 에게 해를 건너 지금의 터키 북서쪽 해안에 있는 드로아에 도착하기까지 5일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그 거리는 배로 이틀 길이었습니다.

 

1611절을 보면, 바울 일행은 2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마게도냐로 들어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는데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마게도냐로 드루와 드루와’, 그래서 그곳이 드로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환상을 드로아에서 보고 처음으로 동쪽으로 서쪽을 향해 마게도냐로 건너갈 때, 드로아에서 배로 빌립보의 외항인 네압볼리에 도착하는 데 단 이틀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20장에서는 드로아로 갈 때 똑같은 코스를 반대로 간 것뿐인데도 이틀 뱃길을 5일 걸려서 갔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들이 탄 배가 바다 위에서 아주 심한 풍랑을 만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탄 배가 이틀 뱃길의 거리를 닷새 걸려 도착했다는 것은, 그 배가 큰 폭풍을 만나서 뱃사람들이 그 배를 조종하지 못할 정도로 되어 사흘 동안 표류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로 인해 배에 탄 사람들은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이고, 멀미도 하며 아주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특히 당시 평균 수명으로 이미 노년기를 맞이한 바울은 누구보다 더 고생하며 힘들어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6)입니다. 7일을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원래 파송 교회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드로아에서 7(일주일) 동안이나 머무르게 됩니다. 지난 번 2차 전도여행 때와 지금 3차 전도여행 중에 배를 타기 위해 잠시 여기를 거쳐 가기만 했고, 또 고린도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복음의 큰 문이 열렸다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도하지 못했던 이곳 드로아에서, 드디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7일 동안 머물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단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3일 동안이나 에게 해의 심한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 녹초가 되고 일어날 수 없었으며 병에 걸리기도 했을 몸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주일 사이에 드로아에서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고 또 동시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바다에서 사흘 동안 심한 풍랑 때문에 표류하며 고생했던 이 고통은, 결코 의미가 없거나 헛되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일어난 생명의 역사를 전해 주는 오늘 본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7)

 

그 주간의 첫날이라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기를, 안식일 후 첫째 날, 즉 오늘의 일요일(주일)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는 단순히 일요일이라고 하지 않고 주일이라고 부르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우리가 잘못 해석하면, ‘주일, 즉 일요일에 같이 모일 때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예배도 하고 봉사도 하며, 나머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내 일(나의 날)이니까 내 마음대로 산다.’라는 잘못된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라는 표현이 약간 조심스럽지만, 전통적으로 주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주일에 특별히 주일만 주의 날이 아니고 매일이 주님의 날이며 나는 주님의 것인데, 특별히 하루를 정해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로 정한 날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 개념이 예수님을 통해 더 확장되고 확정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떡을 떼려 하여모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빵을 먹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 아니라, 242절의 표현처럼 성만찬을 말합니다. 요즘은 약식으로 하고 또 1년에 몇 번 안 하지만, 1세기 당시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로 모일 때 매번 떡을 떼는 성만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만찬이라는 것은 단순히 떡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쪼개어 나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고난을 받으셨다고 할 때 사용된 으깨어 부서지다라는 단어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성만찬 때 떡을 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을 할 때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몸이 찢기셨다. 그리고 피를 흘리셨다.’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하나로 묶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주님의 상에 둘러 앉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이미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정확히 말하면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주일)에 드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특히 드로아는 지금의 터키 즉 이방인 지역인 아시아에 있고, 드로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교 같은 데서 로마제국이 태양신의 날을 주일로 정한 것이라는 말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려고 한 바로 전날, 그러니까 바울이 드로아에 머문 7일간의 마지막 날에 이들이 모인 것인데, 바로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바울은 7일 동안 자신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드로아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일예배는 낮에 드린 게 아니라 저녁 때 모여서 드렸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노예나 일꾼 같은 하류층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로마의 귀족들도 나중에 많이 믿었지만, 특히 노예들 중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1년 내내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모든 일이 끝난 저녁 시간에 함께 모여 주일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 날 드로아를 떠날 계획이었는데, 그 후에 바울이 드로아로 돌아온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예배는 드로아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이 땅에서 드린 마지막 주일예배였습니다. 그것을 직감한 바울은 강론즉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한밤중까지 계속 했던 것입니다. 7절에서 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로고스(logos)’이고, “밤중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자정’(밤 열두 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설교가 밤 12시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강론이라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혼자 일방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강론이라는 헬라어 단어에는 토의토론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처음 접한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날 떠나는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듣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하고 그러면 바울이 대답을 하면서 함께 말씀을 나눈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바울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또 드로아의 형제자매들과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예배, 실제로 마지막이 된 이 예배를 드리는 바울의 마음속에, 어떻게든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제가 비밀 아닌 비밀이 있는데, 삶 공부를 할 때 수강생들의 반응에 따라서 가르치는 내용이 바뀝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 하고, 눈이 초롱초롱하고, 질문도 하고, 숙제도 열심히 해오며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이 있을 때는, 저도 신이 나서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고 싶어서 원고에도 없는 이야기들까지 막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시간이 지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열심히 하는데 보니까 취침시간이거나, 깜빡깜빡 하면서 고개를 앞으로 끄덕거리거나(졸거나), 노트 필기도 제대로 안 하고 숙제도 잘 안 해오면, 저도 빨리 대충 하고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드로아의 성도들이 너무 열심히 질문하고 말씀을 알고 싶어 하니까, 바울도 너무 알려주고 싶어서 계속 하다 보니까 밤 열두 시까지 진행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정까지 이어졌습니다.

 

 

2.   유두고가 예배 중에 떨어져 죽었다가 살아나다

 

밤 열두 시까지 계속된 이 예배 장소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8)

 

바울과 드로아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주일예배를 드린 곳은 어느 교인 집의 윗다락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주로 모이던 집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집 건물의 가장 윗층을 가리킵니다. 당시 집의 구조로 이것은 3층이나 맨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신 곳도,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에 모여서 기도하다 성령을 받은 곳도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위층에 있는 넓은 공간입니다. 그러니까 이곳도 좁은 곳이 아니라, 꼭대기에 있는 탁 트인 넓은 공간이었는데 천정이 높지는 않은 곳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지붕 밑의 다락방에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그들의 체온과 내쉬는 숨 때문에 더웠을 것이고, 또 예배를 위해서 평소보다 많은 등불을 켜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태가 자정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때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9)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깊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무슨 은혜를 받았느냐고 했더니 굉장한 적용점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게 뭐냐고 하니까 창에 걸터앉으면 안 된다. 예배 때 창에 걸터앉으면 죽을 수 있다. 그래서 편안한 데 앉아서 졸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닙니다. 천정이 낮은 다락방에 사람들이 꽉 차게 앉아 있고, 창문을 열어놓았는데 거기 걸터앉아서 듣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예배의 진행을 위해 등불을 많이 켰는데, 그런 상황이면 사람들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와 켜놓은 등불에서 나오는 연기가 전부 위로 올라가서 창문으로 나가게 됩니다. 당시에는 창문에 유리가 없으니까 뜨거운 열기가 그리로 나가고 시원한 바람도 그리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 창문에 앉아 있던 많은 사람들 중에 유두고라는 청년도 있었습니다여기서 쓰인 청년이라는 단어와 12절에서 쓰인 청년이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입니다. 12절에서 쓰인 청년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삶>에 나오는 파이스(Pais)’입니다. ‘아들, , 신하라는 뜻인데, 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8~14살에 해당되는 중학생 나이의 청소년에게 사용하는 단어가 파이스입니다. 그러니까 유두고라는 청년은 20대 청년이 아니라 십대로서 중학생과 고등학생 사이(14) 정도 되는 아이였던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유두고인데 헬라어로는 유튀쿠스입니다. 이것은 당시 천한 사람이나 노예에게 붙여지는 흔한 이름이었고, 귀족에게는 절대 붙이지 않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유두고도 노예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유두고가 다락방의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는 하루 종일 일을 하다 왔습니다.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린 몸으로 와서 앉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질문하는 그 속에 있었는데 너무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던 것은, 거기가 편안해서라기보다는 시원한 공기를 쐴 수 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려고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피로에 지친 유두고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의 강론이 밤 12시까지 계속되니까, 하루 종일 일한 몸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지면서 그만 3층 다락방 창문에서 땅바닥으로 확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급히 가서 그를 일으켜보았지만, 유두고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 위에서 떨어져 즉사한 겁니다. 그리고 이미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바울도 상당히 당황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즉시 속으로 주님,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을 것이고, 주님께서 뭔가 응답을 주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0)

 

바울은 유두고가 떨어진 곳으로 뛰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죽은 유두고의 시체 위에 엎드려서 시체를 안았습니다. 이때 갑작스러운 유두고의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울면서 통곡하며 소리를 지르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단호하고도 확신 있게 선포합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보며 유두고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거나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바울이 달려갔을 때 여전히 생명이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9절에서 유두고가 죽었다고 단정하여 기록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그는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기록한 마태와 요한처럼 세리나 어부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처럼 부잣집 도련님도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유두고가 3층에서 떨어져 죽는 바로 그 현장에 같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여기 보면 계속 우리가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쓴 누가도 거기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유두고가 3층 창문에 걸터앉아 졸고 있다가 땅으로 떨어지니까, 현장에 있던 누가가 가서 보고 유두고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에, 이미 그의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멎어 죽었다고 사망 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실제로 9절의 떨어지거늘의 헬라어 원어는 파멸하다, 끝장나다라는 뜻입니다. 확 떨어져서 이제 다 끝나고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선포한 생명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미 끊어져 버린 유두고의 육체의 생명이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부어주신 영원한 생명이 그와 함께 있다는 뜻도 됩니다.

 

유두고는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려 피곤에 지친 몸으로도 집에 가서 쉬지 않고 예배에 참석한 청소년입니다. 어른들도 힘들 텐데 어린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왔습니다. 9절에서 깊이 졸더니라는 것은 우리 식으로 졸았다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졸음이 왔다라는 뜻으로서, 그가 졸음과 오랫동안 싸웠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두고는 하루 종일 일해서 너무 피곤하고 졸렸기 때문에 그냥 계속 졸거나 집에 가서 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자리에서 창문에 걸터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깨려고 굉장히 졸음과 싸우면서까지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며 말씀을 사모했던 아름다운 아이였던 것입니다. 편안한 데서 수시로 조는 우리와 같은 게 아닙니다. 어떻게든 말씀을 들어보려고 악조건 속에서도 애를 쓰다가 결국 그렇게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졸음 때문에 떨어져 죽은 유두고에게, 주님께서 생명을 부어 새롭게 살려주시려는 것을 바울이 이때 알았습니다. 뭔가 주님께서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두고의 죽음 때문에 소리치며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선포했고, 유두고는 정말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실은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바울을 통해서 유두고에게 임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통로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방식을 주목해보십시오. 바울은 죽은 유두고의 시체 위에 자기가 엎드려서 그 시체를 끌어안았습니다. 구약 열왕기상 17장에서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는데 똑같이 합니다(왕상 17:21-22). 시체 위에 엎드려 끌어안았습니다. 또 열왕기하 4장에도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 똑같은 방식으로 한 것이 나옵니다(왕하 4:34-35). 지금 바울이 한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오래 전에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떠나신 의사였던 교우님이 계신데, 그분이 저에게 이 장면을 이야기해주시면서 이것이 의학적으로도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사이셨던 그분이 그것과 관련된 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잘 가지고 있었는데 교회 가스 폭발사고 때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두고의 시체 위에 엎드렸다는 헬라어 원어가 에피핖토라는 단어입니다. 유두고가 떨어졌다고 할 때 사용된 헬라어는 핖토입니다. ‘파멸하다, 끝장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에 에피라는 전치사를 붙여서 에피핖토가 되면 파멸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덮어주다, 밀어닥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이미 파멸하고 끝장난 유두고의 죽음을 덮어버린 것이고, 생명이 밀어닥쳐서 죽음을 밀어내버리고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 때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우리가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왔다가 아무 의미 없이 자기 삶으로 다시 돌아가 아무 변화 없이 일주일 동안 또 살아가는 그런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 모임 자체가 예배는 아닙니다. 지금 이것은 예배 모임이고, 예배 모임 때 말씀 앞에 결단하고 헌신하며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면서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기적으로 모이는 예배의 시간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루 종일 세상의 모든 일과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로 얽매여서 정말 노예 같은 삶을 살다가, 근심과 괴로움과 갈등을 가지고도 주님 앞에 나오는 시간, 그래서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오는 아주 소중한 자리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한 유두고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유두고는 피곤해서 졸다가 그대로 떨어져서 파멸하고 끝장난 듯 보였지만, 그 위에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바울의 몸을 통해서 임함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파멸하고 끝장나서 아무 소망이 없는 인생이, 주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덮어지고 죽음에 밀어닥쳐서 죽음을 밀어내고 승리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소중한 시간에 어떻게 우리가 매번 늦게 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소중한 시간에 어떻게 매번 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원하시는 것이 영적으로 계속 깊이 잠들어 있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파멸과 끝장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덮어지고 생명으로 죽음을 밀어내는 승리의 삶으로 바꾸는 변화의 시간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절망과 어두움이 닥쳐와도, 우리가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온갖 죽음과 착취와 고생과 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주님 앞에 나오나?’가 아니라 나 같은 것이 그렇게 형편없고 보잘것없기 때문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절망과 어두움 속에 살다가, 그래도 주님 앞에 나와서 바로 이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덮어지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를 매주 우리가 예배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다시 살아난 유두고를 통해 받은 위로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1)

 

드로아의 형제자매들은 주님께서 새롭게 살려주신 유두고와 함께 또 다시 3층 다락방으로 올라가 밤을 꼬박 새우며 주님의 은혜를 나눕니다. 너무 놀라운 장면이 아닙니까? 이 정도의 사고가 났으면 어유, 이제 됐다. 이제 그만 하라는 주님의 사인인가 보다. 이제는 좀 쉬자.’라고 할 텐데, ‘이제 살아났다. 됐다. 또 올라가자.’ 하고 또 올라가 말씀을 전하고 배우고 질문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열심입니까? 이런 열정이 우리에게도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바울 일행은 계획대로 드로아를 떠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12)

 

바울 일행이 떠난 뒤에도 드로아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살리신 유두고를 통해 주님의 큰 위로와 격려를 입었습니다. 유두고를 볼 때마다 주님의 생명의 능력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인들 중 다수가 당시 로마제국에서 노예였을 텐데, 매일 노동으로 삶에 지치고 힘들고 고달픈 이 사람들이 교회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그 예배에 와 있는 청년 유두고를 볼 때마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주님의 생명이 임한 것을 그들이 생생히 보았는데, 유두고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큰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내가 혹시 저런 일을 당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나도 저렇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하고 생각하며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일행과 함께 드로아에서 7일 동안 머물렀고,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주님께서 다시 살리신 그 생명의 역사는 마지막 날, 즉 주일 밤에 일어났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7일보다 적게 머물렀다면, 바울과 함께 밤 12시까지 계속되었던 그 주일 예배는 없었을 것이고, 유두고가 떨어져 죽는 일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고, 또 죽은 유두고를 주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역사도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이 드로아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바울이 드로아에 7일 동안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7일 동안이나 머물렀습니까? 지금 바삐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도 일주일이나 머물렀던 이유는, 단지 이틀 걸리는 뱃길을 5일이나 걸려서 왔기 때문에, 즉 너무 풍랑에 시달리며 힘들었기 때문에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2-3일이면 끝내고 떠날 수 있는데 일주일을 있었다는 것은, 몸이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사흘 동안 사실은 죽을 고비를 넘긴 것입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이틀 걸리는 뱃길을 5일 걸려서 왔다는 것은, 엄청난 파도와 바람으로 큰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고생하다가 간신히 드로아에 도착했으니 얼마나 힘듭니까. ‘,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렇게 고생했기 때문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7일이나 머물러야 했고, 그래서 몸도 마음도 회복할 수 있었고, 또 거의 회복된 주일 밤 예배 때 말씀을 전하다가 유두고가 죽는 사건이 일어나 주님의 능력으로 그를 살려내는 생명의 역사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드로아를 떠난 뒤에도 드로아 사람들은 유두고를 볼 때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고 하며 주님의 큰 위로를 계속해서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결과론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사실은 주님의 역사가 대개 이런 식으로 일어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 삶에도 똑같이 이런 식으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너무 힘들고 고생해서 이런 일은 안 일어났으면 좋았는데하는 그 일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괴롭고 어려웠던 그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다에서 풍랑 때문에 고생했던 그 뱃길은, 그래서 고생길이 아니라 상상치 못한 생명의 열매를 드로아에서 거두게 해주시기 위한 신비로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당한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누군가가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는 놀라운 역사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도 그가 남긴 편지들을 통해 지금 우리의 삶에까지 그런 영향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이런 멋진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멋진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인정해주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멋진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인생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이 얼마나 남은 것 같습니까? 젊은 분들은 많이 남았다고 느낄 것이고 연세가 드신 분들은 얼마가 남았을지 세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주님께서 오늘도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잠이 들어 있는 채로 주님 앞에 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두고처럼 너무 피곤하고 괴롭지만 어떻게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드리기 위해 졸음과 싸우는,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아예 자려는 자세가 아니라, 싸우면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겠다는 자세로 살다가 주님 앞에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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