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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4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6 ✦
“고린도에서 얻은 소중한 열매들”
(사도행전 18장 1~4절)
[들어가는 말]
두 개의 그릇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는 최고급 금을 사용해서 만들었고 화려하게 빛이 나는 아주 값비싼 금 그릇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싸구려 흙으로 만든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나게 비싸고 번쩍거리는 금 그릇에는 온갖 더러운 오물들이 들어 있고 오염이 되어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그릇은 오물통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생긴 그릇에는 진귀한 보물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그릇은 굉장한 가치를 지닌 보물입니다.
그릇은 무엇인가 담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물론 그릇 자체에도 어느 정도 가치는 있지만,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실제 가치가 결정됩니다. 아무리 금 그릇, 아니 다이아몬드 그릇이라도 오물과 쓰레기가 담긴 그릇은 쓸 수가 없고, 보물이 든 그릇은 싸구려 재료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졌어도 보물 그릇입니다.
우리 인생도 아주 똑같습니다. 인생은 자기 삶의 순간순간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습이 쌓여서 된 것이지, 갑자기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자기 인생 여정을 자기 대신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채워서 온 것이지, 남이 채워줄 수 없습니다. 자기 인생 여정을 자신의 삶으로 채워가는 것이 인생인 것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루 24시간이 주어진 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인생은 자기 인생 여정을 자기 자신의 삶으로 채워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은 철저히 자신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할 수 없습니다. 가끔 보면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부모님 때문이다.’라고 부모 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라고 배우자 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자식을 잘못 둬서 그렇다.’라고 자녀 탓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결과를 놓고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도 ‘내가 저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됐습니다.’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그게 아니라는 증거를 죽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의 인생이 지금 무너지고 망가져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지난 세월 동안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살지 않고 하찮은 것들과 잘못된 것들로 채워 온 결과일 뿐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인생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God of the second chance)’이십니다. 실패하면 또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자기 인생을 중요한 것,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을 고귀한 것으로 채워야만 합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는 겉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화려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인생의 진짜는 스펙에 있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스펙(spec)을 쌓으려고 굉장히 노력들을 하는데, 아무리 쌓아 보십시오. 사람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돈과 학벌과 가문과 명예와 성공 등 인생을 살면서 쌓아놓은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런 것들은 언젠가 허무하게 없어져 버릴 것들입니다. 그런 욕망과 쾌락으로 인생을 채우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화려할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인생이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통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비록 평생 힘들게, 어렵게 살았어도 자기 인생길을 생명과 진리의 삶으로 채워온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집중해온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보물 그릇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사는 인생은, 혹시 이전에 무가치하고 망가진 인생이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보물 그릇으로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인생이었습니다.
1. 문제의 도시 고린도
1) 고린도로 가게 된 이유
저번 주에 17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베뢰아로부터 나흘길이 되는 그 먼 아테네까지 배를 타고 찾아가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큰 무리의 회심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가 섰다는 말도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몇 명 나오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믿은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해서 아테네에서의 전도를 실패했다고 단정하여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낙심하고 절망했다면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자신의 출발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아테네를 떠나, 지금은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고린도를 찾아갑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1절)
복음 사역을 조금 한 다음에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갑니다. 그리스 북쪽은 당시 마케도니아라고 불렸고, 남쪽은 아카이아(Achaia)라고 불렸습니다. 아기를 부를 때 ‘얘, 아가야!’라고 하는 것과 발음이 똑같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행정구역 아가야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2천 년 전 타락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렇지만 굉장히 중요한 도시였고 인구가 많은 도시였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로 발길을 옮긴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다르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쓴 고린도전서 16장을 보면 “아가야의 첫 열매”로 나오는 사람이 스데바나(Stephanas)라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의 첫 열매’가 아니라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쓴 것을 보면 아덴과 고린도와 남쪽 지역을 통틀어 처음 믿은 사람이라는 말인데, 지난번 본문을 보면 아덴에서 믿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아덴에서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또 다른 사람들”에 스데바나라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스데바나는 고린도에 사는 사람인데 그날따라 다른 일이 있었든지 사업이 있었든지 아테네에 왔다가, 마침 거기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제일 먼저 믿은 사람은 스데바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로부터 고린도에 대한 말을 듣고 ‘내가 고린도에서도 꼭 복음을 전해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고린도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왜 갔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고린도가 그 당시 굉장히 유력한 도시였고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에베소, 고린도, 로마가 소위 ‘Big Three’입니다. 나중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당시 행정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고 인구가 많은 도시였기 때문에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쉬운 결정이었습니다.
고린도에서 아테네가 지금은 차로 한 시간 반 정도이지만, 걸어서는 사흘길이 됩니다. 아테네에서 고린도를 찾아가는 바울의 마음은 낙심이나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기대감, 특별히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용해주시는가! 아시아 출신인 내가 어떻게 이 유럽까지 와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가!’ 하는 감사함과 찬양으로 충만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고린도는 어떤 곳인가
그렇다면 고린도가 어떤 곳인가를 살펴봐야겠습니다. 고린도가 성경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도시이기 때문에 오늘 시간을 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대에 큰 번영을 구가하던 고린도는 BC 146년 로마제국에 정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폐허가 되어 약 100년 동안 그냥 방치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BC 44년, 그러니까 바울이 본문에서 고린도를 찾아가기 100년 전에 로마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재향군인들과 자유인이 된 노예들을 대거 고린도로 이주시켜 예전보다 더 큰 규모로 고린도를 재건했습니다. 그때부터 고린도는 대를 이어 가며 고린도에 살아온 원주민들보다 외지에서 유입된 각양각색의 이주민들이 더 많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로마 사람들도 많고, 다른 유럽 사람들도 많고,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아시아 사람들 등 굉장히 많았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그리스 남쪽의 펠로폰네소스(Peloponneses)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잇는 사이에 고린도가 있습니다. 고린도는 무엇보다 거대한 상업의 중심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앙 시장이었습니다. 그리스 본토와 섬 같이 생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시켜주는 지협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남북 간뿐 아니라 동서 간의 뱃길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이 고린도 도시 지도에 보시는 것처럼 아주 좁습니다. 지협을 가로질러 가면 뱃길이 300마일 이상 절약이 됩니다. 아니면 남쪽으로 삥 돌아서 이탈리아로 가든지 이탈리아에서 아시아로 가야 하는데, 이리로 가면 굉장히 시간이 절약이 됩니다.
이것을 보시면 지금은 그 지협에 지금은 운하를 팠습니다. 옛날에는 이 운하가 없었습니다. 이 운하는 19세기 말(1893년)에 완성됐기 때문에, 그 옛날에는 디올코스(diolkos)라는 길을 이용해서,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밑에 트롤리나 수레 같은 것을 깔고 배가 도착하면 거기에 배를 올려 굴리면서 남쪽 항구와 북쪽 항구 사이로 왔다 갔다 하며 운반했습니다.
지금 이 운하가 3.5마일 정도로 짧은데, 그 전에는 뱃짐들과 작은 배들까지도 땅으로 운반했습니다. 그러면 많이 절약할 수 있었고, 200마일 이상 삥 돌아가는 위험한 항해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배들과 이탈리아에서 아시아로 가는 배들이 이리로 많이 지나갔기 때문에, 고린도가 엄청나게 번성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운하가 생기기 전에는 배를 옮기는 길인 ‘디올코스’(diolkos), 즉 선박도로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는 두 개의 주요 항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서쪽으로 고린도 만에 있는 레키움(Lechaeum)과 동쪽으로 사론 만에 있는 겐그레아(Cenchrea)였습니다. 따라서 그 두 항구를 통해 고린도는 양쪽 바다에 한 발씩을 걸치고 그 지협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항구도시인 고린도는 뱃사람의 도시, 해상 상인의 도시였으며, 헬라의 바다 신이며 로마에서는 넵튠(Neptune)으로 불리던 포세이돈(Poseidon)이 거기서 숭배를 받았다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무역이 고린도로부터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면, 복음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BC 46년에 아름답게 재건한 고린도는, 부귀영화와 문화를 자랑했습니다. 특히 그들이 2년마다 주최했던 운동경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이스트미아 제전(Isthmian Games)이라고 했습니다. 이스트미아 제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올림픽 제전(Olympian Games)과 함께 그리스 4대 경기였습니다. 올림픽, 피티아(Pythian Games), 네메아(Nemean Games), 그리고 이스트미아입니다. 올림픽이 열린 올림피아가 고린도에서 멀지 않습니다. 이 고대 그리스 4대 경기의 하나로서, 고린도 지협에서 2년마다 개최되었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주의 수도로서 그들이 그때 갖고 있던, 심지어 아테네보다 더 우월한 정치적 특권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해보면 저 산이 보입니다. 해발 575미터의 바위산입니다. 저 산 이름이 ‘아크로고린도(Acrocrointh)’입니다. 저 산의 평평한 정상 부분에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신전이 고대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방문했을 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복당하기 전인 고대에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성애와 미의 여신으로 등장하는 아프로디테가 영어로는 비너스(Venus)입니다. 그 유명한 파리의 루브르(Louvre) 박물관에 가서 ‘제일 유명한 데가 어디인지 찍어 주십시오.’라고 하면 모나리자(Mona Lisa)와 비너스를 찍어줍니다. 그래서 거기 갔을 때 그 두 개만 보고 왔습니다. 그 비너스가 아프로디테입니다.
그 신전에는 천 명에 달하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신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매음하는 매춘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밤에는 창녀가 되어서 거리들을 돌아다니는 데가 고린도였습니다. 낮에는 저 위에 있다가 밤에는 도시로 내려와서 음란한 짓을 하는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이처럼 고린도의 성적 난잡함은 악명이 높아서 ‘코린티아조마이’(korinthiazomai)라는 단어, 즉 ‘고린도사람들처럼 행동하다’라는 단어가 ‘음란한 행위를 하다’라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코린티아스테스’(korinthiastēs)라는 단어, 즉 ‘고린도 아가씨’라는 단어가 매춘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린도가 얼마나 난잡한 도시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전 안에서 합법적인 매음이 그 정도로 벌어졌다면 신전 밖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 당시 고린도 사람들의 성적 타락이 얼마나 심했던지 헬라문화권 속에서 ‘고린도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말이 ‘음란한 행위를 하다’라는 뜻이 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모욕적일 말입니까? ‘고린도 남자’는 ‘포주’나 ‘기둥서방’이란 뜻이고, ‘고린도 아가씨’는 ‘매춘부’의 의미가 될 정도의 도시였습니다.
2. 고린도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런데 그런 도시를 바울이 혼자 걸어서 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무모해 보이도 무의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도시에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통하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하나님은 바로 그런 타락한 도시 한가운데서 아주 놀라운 만남을 예비해놓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그냥 무모하게 가도록 내버려두신 게 아닙니다. 거대한 타락의 도시, 아주 문란한 도시, 물질만능의 도시 고린도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홀로 고린도를 찾은 바울을 위해서, 주님은 이미 귀한 동역자들을 예비해두셨던 것입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2-3절)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 땅에서 태어난 본토 유대인은 아니었습니다. 소위 헬라파, 즉 해외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지금의 터키 북동쪽, 즉 흑해 남동쪽에 있는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 땅을 떠나 조상 대대로 이방 땅에 살면서 당시 지중해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자신이 태어난 아시아 대륙의 본도를 떠나서,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뭔가 성공을 해보려고 갔을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굴라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사람, 즉 천막제조업자였습니다. 이것이 영어로 ‘텐트메이커(tentmaker)’입니다. 그래서 요즘 자비량 선교사들을 가리켜 텐트메이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제국의 수도 로마에 천막제조업자로 정착했던 아굴라가 로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로마의 4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 1세가 수도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은 다 나가라는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저번 빌립보에 대해 살펴볼 때도 언급했지만, 그것이 바로 그때입니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의하면, 그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약 2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AD 50년경에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당시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에 살고 있던 2만 명의 유대인들 중에 로마 시민권이 없는 유대인들은 다 나가라고 추방해 버렸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주동자 이름이 크레스투스(Chrestus)인데, 이것이 헬라어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투스(Christus)’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라틴어로 하면 거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유대인들 간에 유혈사태 폭력적인 일이 자꾸 일어나니까, 황제가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을 수도 로마에서 추방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이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수도 로마에서 추방당한 것은 이들이 로마 시민이 아니었다는 의미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아굴라는 본도 출신 유대인이었고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는 로마사람이었다는 의견이 상당합니다. 그런데도 왜 둘 다 로마를 떠났느냐 하면, 아무리 로마사람이라도 남편을 따라 같이 떠났다고 보는 겁니다.
로마에서 추방당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굴라의 고향인 아시아 대륙의 본도로 돌아가지 않고, 유럽 대륙의 아가야 수도 고린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천막 제조업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천막제조 비즈니스를 연 겁니다. 그리고 마침 그때 고린도를 찾아간 바울이 고린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묘하게도 바울 역시 천막제조업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게 우연입니까? 우리 삶에 우연처럼 보이는 게 참 많은데,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유대인 부모는 자기들이 부자든지 가난하든지 상관없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어린 아들에게 기술을 하나씩 배우게 했습니다. 유대인 <탈무드>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에게 생선을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 다 그냥 제공줄 수도 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기술을 배우게 한 것이 유대인의 지혜입니다.
바울이 태어난 다소(Tarsus)는 천막 제조에 필요한 가죽 생산지로 굉장히 유명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어린 시절 부모에 의해 바로 그런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사람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살면서 함께 천막 제조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2절 맨 끝에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아무도 모르는 고린도에 도착해서 일단은 유대인 가운데 수소문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고 비용을 충당해야 하니까, 천막 만드는 일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그 중에 아굴라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와 함께 천막제조를 그의 밑에서 하기 위해 간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나 놀라운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굴라라는 사람의 삶을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이방 땅 본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거기서 떠나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이사해서 거기 살고 있지 않았다면, 또 그가 바울의 고린도 방문 직전에 때를 맞춰서 마침 로마에서 추방을 당하여 고린도로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의 만남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아시아 대륙의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가 어떻게 로마제국의 수도인 유럽의 로마로 이사하여 정착을 했겠습니까? 로마제국은 아굴라가 살던 아시아 대륙의 본도를 포함한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잡고 나서, 로마제국 내에 사는 사람들에게 통행과 이주와 거주의 자유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롭게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국의 수도 로마에 천막 제조업자로 정착한 아굴라 부부는 왜 로마에서 추방당한 다음에 그 넓은 로마제국의 그 많은 도시들 중에 왜 하필 고린도로 간 것입니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일단 그것은,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의 선동으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이든 아니면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든,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와서 앉아 있는데, 서로 간에 별로 상관없는 사람들 같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있지만, 사실 우리가 함께 와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저분과 같이 이렇게 같이 있습니까? 이전에 전혀 모르던 분들과 어떻게 이러고 있습니까? 놀랍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과 아굴라 부부의 만남은 아주 개인적인 만남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만남의 뒤에 있는 배경을 보면 엄청난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다 2천 년 전 고린도에서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만날 수 있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보기에 별 것 아니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한 나라를 강하게도 하시고 쇠락하게도 하십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그래서 뉴스에서 세계의 리더들이 이렇게 했고 저렇게 했다는 것을 보실 때, 또 한국, 미국, 북한, 일본, 중국, 캐나다, 멕시코, 중남미, 유럽 등에 대한 뉴스를 보실 때,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아, 하나님이 나한테 뭘 주시려고 지금 이 나라를 움직이고 계신가?’
그렇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진짜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지금 사람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심지어 사람들이 악하게 하는 것조차 하나님은 놀랍게도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나에게까지 그것이 영향을 미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쉬운 예로, 미국에 이민 오신 분들은 미국 이민정책이 얼마나 많이 바뀝니까? 제가 올 때와 지금은 너무 다릅니다. 종류도 많아지고 비자도 다르고 순위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이 있는 분이 분명히 계실 겁니다. 내가 이런 것으로 왔는데, 오자마자 내가 왔던 그것이 없어진 겁니다. 이제는 없어졌고 더 이상 안 나옵니다. 저희 가족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으로 왔는데, 저희가 온 다음에 그 케이스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른 새로운 것이 생겼습니다.
이런 것은 물론 미국 정부에서 이민정책을 하느라고 그렇게 한 것이지만, 놀랍게도 나를 옮기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제가 그때 없어지고 나서 하려고 하다 안 됐으면, 지금 여러분을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사람을 갑자기 어디서 턱 만나게 하시는 것, 우리의 인생의 계획에서 나는 이것을 원하는데 다른 것을 주시는 것, 또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 또한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 나라 저 나라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다 나와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까지도 사용하셔서 나를 인도해주십니다.
그런데 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고린도로 이주한 것입니까?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간 운동경기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4대 제전은 올림피아, 피티아, 이스트미아, 네메아에서 개최된 대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올림피아 제전입니다. BC 776년부터 4년마다 열리면서, 근대올림픽으로 지금까지 맥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인 고린도에서 열린 이스트미아 제전(Isthmian Games)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리기 위해 BC 582년에 시작됐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의 가장 큰 축제로 매 2년마다 지금은 운하가 생겨 뱃길이 된 그 고린도지협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스트미아 제전에는 모든 그리스인이 참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매 2년마다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릴 때면,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고린도 지협이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과 또 구경온 외부 사람들로 엄청난 인파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군인들은 대부분 천막을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천막 제조업자들의 원래 주된 고객이 군인들이었는데, 그 다음 고객이 이스트미아 제전처럼 대규모 경기대회에 참여하는 선수들과 외부 관람객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숙박시설이 굉장히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대규모 경기대회가 벌어지면 참가하는 선수들과 외부에서 온 관람객들은 임시 숙소로서 천막을 사용했던 겁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AD 51년 4월에 고린도 지협에서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수도 로마에서 유대인들에게 나가라고 추방한 것이 AD 49년 말부터 50년 초였습니다.
그렇다면 수도 로마에서 추방당한 아굴라 부부가 넓고 넓은 로마제국 내에서 또 그 많은 도시들 중에 왜 하필이면 이 고린도로 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천막제조업자였던 이들은 자기들이 추방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고린도 지협에서 대규모의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에 천막이 많이 필요하니까 그리로 간 겁니다. 또 올림피아도 거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굴라 부부에게 고린도는 추방당한 뒤 새로운 이주지로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 고린도는 로마에서 추방당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사를 오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주후 50년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로 이주를 한 것이고, 얼마 후 고린도를 방문한 바울과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고대 고린도 시대부터 시작되었던 이스트미아 제전이 고린도가 로마제국에 정복당하면서 폐지되었다가, 100년이 지난 BC 44년에 방치되었던 고린도를 대대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하면서 이스트미아 제전도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그때로부터 다시 100년이 지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추방당하여 고린도로 오고, 그 다음 얼마 있다 바울이 이곳으로 와서 둘이 만났을 때,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그 당시 이스트미아 제전은 체육대회와 음악경연대회가 함께 어우러진, 사람들이 돈을 물 쓰듯 막 쓰는 축제 중의 축제였습니다. 만약 카이사르(시이저)가 100년 전에 폐지되었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부활시키지 않았다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굳이 그리로 갔겠습니까? 결과적으로 고린도에서 바울과 이들 부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바울이나 아굴라나 브리스길라 같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일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는 일들이 사실은 우리 개개인의 삶 속에서 거룩한 뜻, 선한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전 유행가 중에 ‘잘못된 만남’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단 한 명도 우리 간에 잘못된 만남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소중한 형제자매들입니다.
3. 고린도에서 바울의 복음 사역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4절)
주중에 아굴라의 집에서 아굴라와 함께 천막을 제조하여 판매하면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던 덕분에, 바울은 안식일마다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다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 즉 가르쳤습니다.
놀랍게도 11절을 보면, 바울이 다른 곳과는 달리, 고린도에서는 무려 1년 6개월이나 머물게 됩니다. 그렇게 1년 반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의 두 번째 편지로 여겨지는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고린도에 1년 반이나 머물렀기 때문에, 그 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3년 정도 머물렀던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서신 중에 가장 긴 편지인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를 써 보냈습니다. 물론 두 개의 편지가 더 있었다고 여겨지기는 합니다.
이때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이나 머물렀기 때문에, 3차 전도여행 중 다시 그 익숙한 고린도를 찾아가서 또 3개월을 머물며 거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수라고 평가되는 로마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것도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였던 뵈뵈를 통해 로마서를 로마로 보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때 고린도에서 1년 반이나 머물렀기 때문에, 바울의 마음속에 ‘내가 로마로 가야겠다’는 결단과 전도의 사명감이 싹틀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보겠지만, 그래서 배 타고 거기를 떠나기 전에 서원을 합니다. 무슨 서원이었겠습니까? ‘내가 땅 끝까지 가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를 포함해서 땅 끝까지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가장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준 교회가 되기는 했지만, 엄청나게 문제가 많은 교회이기는 했지만, 바울의 삶에서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어떻게 보면 그의 신앙을 한 단계 성장시켜준 영적 훈련소였습니다. 너무 문제가 많은 곳이었고 힘들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거기서 더 훈련을 받고 더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런 편지들이 그 후에 많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소중한 복음의 동역자들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할 수가 있었던 일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들 부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 다음에 얼마 안 되어서 금방 다른 데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고린도까지 온 아굴라 부부가 천막제조업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아굴라 부부를 도와서 주중에는 천막을 만들고 판매하는 일에 동참했고, 또 이스트미아 제전도 관람할 수 있었고, 그 경기대회가 나중에 바울의 믿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경기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뛰지만 상 받는 사람은 한 명이다. 그 상을 향해 달리자.’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것이 이스트미아 제전을 보면서 영향을 받았다는 힌트가 됩니다.
전도여행을 시작한 이래 늘 다른 동역자들의 도움 속에서 움직였던 바울이 홀로 타락의 도시 고린도를 찾아가 사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홀로 찾아간 고린도는 주님께서 바울을 위해 예비해놓으신 영적 보물창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주님의 은혜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여기 고린도에서만 마치면 안디옥에 돌아가서 잘하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제 많고 어렵고 난잡하고 문란한 고린도가 오히려 은혜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어디든 바울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 주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홀로 찾아간 고린도도 바울이 이전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더욱 큰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아굴라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고린도로 왔을 때 사실 얼마나 마음이 비통했겠습니까? 어떤 학자들의 말대로 브리스길라가 정말 로마 사람이었다면, 자기 고향을 떠나서 유대인 남편을 따라 추방당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그리고 고린도에 와서도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을 탁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연결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역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여섯 번이나 그 이름이 기록되는 축복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특히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보다 더 영적으로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순서가 바뀌어 나옵니다.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먼 데 있었던 게 아닙니다. ‘로마에서 떠나지 말았으면 더 은혜가 있었을 텐데...’가 아닙니다. 그 어려운 고린도가 오히려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 저 멀리 딴 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아, 내가 저기만 가면... 저것만 되면...’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려운 지금 이 자리, 내가 답답한 바로 이 자리, 내가 지금 괴로워하는 바로 이 자리,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이, 스스로 고린도를 찾아간 바울의 경우처럼 자기 뜻대로 온 자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어쩔 수 없이 고린도로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경우처럼 어쩔 수 없이 온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내가 원해서 왔든 어쩔 수 없이 왔든 상관없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나의 삶의 자리,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은혜의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상황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일으키셨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건들을 일으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상세하게, 아주 치밀하게 그 선한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믿고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더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크게 일어납니다.
우리 삶에 비록 지금 눈물이 있고,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또 홀로 감당해야 할 문제가 있는 자리라 할지라도, 그 속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예비하신 그 은혜를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우리가 가지기 원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날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주님의 이끄심을 더더욱 따르면서 주님의 놀라운 뜻을 이루어드리는 도구로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