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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10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1

상황의 역전, 교회를 향한 위로

(사도행전 1635~40)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임하는지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주님 안에서는 그분을 믿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 특히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주님께서 당신의 넘치는 위로로 우리를 채워 주심으로써, 고난당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주님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시려는 주님의 신비로운 인도하심입니다그런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상황이 바뀌고 내가 경험했던 어려움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납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입니다.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원래 인간입니다. 그래서 뭔가 어려움이 오지 않으면 이기심을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계속 살게 되면 그 누구도 참된 이웃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이기적인 상태에서 머물게 되면 이웃 사랑으로까지 나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조차 이기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때로는 고난을 주시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시며 이웃을 돌아보는 계기를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눈앞에서 좋은 일이 생기면 좋아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괴로워하는 일희일비의 모습에서 벗어나,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8:18)라고 고백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1.   석방 명령과 석방 거부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이 바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심한 매질을 당하여 온몸이 부서지고 찢어진 채로 피를 흘리며 중범죄자들이나 갇히는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 한밤중에 깨어나 기도하며 찬양하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진을 보내주셨고, 그들을 매고 있던 모든 차꼬가 풀렸습니다. 보통 지진이라면 위에서 다 무너져 떨어지면서 죽었을 텐데, 이것이 다 풀렸다는 것은 보통 지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지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나가지 않고 기다리며 있다가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던 간수를 말리면서 살려냈고, 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그와 온 가족이 믿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닥친 엄청난 고난과 괴로움이 오히려 한 영혼과 또 그의 가족들까지 다 구원받게 하는, 이전에는 전혀 예상도 못하던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때 시간은 여전히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때 세례를 받은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다시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극진하게 음식을 대접했고, 자신의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믿게 되었음을 크게 기뻐했습니다(34).

 

여기까지가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날이 새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된 바울과 실라는, 작별을 아쉬워하는 간수와 그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뒤, 빌립보에서 그들의 숙소였던 루디아의 집으로 돌아가는 해피엔딩 스토리로 끝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래야 이 한밤중의 이 놀랍고 은혜로운 구원의 드라마가 잘 마무리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됩니다.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5)

 

날이 밝으니까 그 전날 바울과 실라를 심하게 때리고 투옥시켰던 빌립보의 집정관(스트라테고스)들이 부하를 감옥으로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전날 그렇게 심하게 때려놓고 왜 이렇게 갑자기 내보냅니까? 이 사람들을 가두었더니 간밤에 큰 지진이 났습니다. 자기들도 자기들이 한 짓을 합니다. 누구라도 재판을 거쳐서 해야 하는데, 유대인이니까 재판도 없이 마구 때리고 그대로 중죄인들이 갇히는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자기들이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마침 그날 밤 큰 지진이 난 겁니다. 그 당시 미신을 많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뭔가 신이 노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빨리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석방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그들이 모르는 놀라운 일들을 이미 겪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감옥을 빠져나가서 감옥이 텅 비어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닌데, 감옥이 비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6)


집정관들의 부하들을 통해 명령을 전해 받은 간수는, 한밤중에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은 바로 그 간수입니다. 그는 바울에게 선생님들, 석방되었습니다. 이제 나가서 평안히 가셔도 됩니다. 너무 기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한밤중에 간수를 따라서 바울과 실라는 분명히 간수의 집으로 갔습니다. 몸도 씻김을 받고 음식도 대접받고 세례를 베푼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이 아침에는 감옥에 있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간밤에 간수의 집에서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실라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던 간수가 이제 금방 동이 트는데 선생님들이 사라지시면 제가 곤란해지니까 다시 돌아가 주셔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지진이 나서 감옥 문들이 열리고 발의 차꼬까지 다 벗어진 상황에서도 감방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던 바울과 실라였는데, 간수에게는 자신의 자살을 막아 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해준 영적 은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생명의 은인입니다.

 

설사 바울과 실라가 그 새벽에 자신들의 숙소인 루디아의 집으로 가겠다고 해도 간수 입장에서는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았을 때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 있었다는 말은, 그들이 날이 새기 전에 간수의 집에서 스스로 자기들의 발로 감옥에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만약에 간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을 본 바울과 실라가 , 하나님이 이것 때문에 여기서 우리에게 고난을 겪게 하셨구나. 이제 우리의 사명은 끝났다.’라고 하면서 그 새벽에 숙소인 루디아의 집으로 가버렸다면, 이 간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간수는 죄수를 놓친 심한 죄인이 되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죽음의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의 가족들까지 평생 불명예 속에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감방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과 실라는 탈옥수가 되는 겁니다. 고의로 범죄자가 된다면 어떻게 진리이신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자기들의 발로 걸어서 빌립보의 지하 감옥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몸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 같은 경우는 지병도 있었고 몸이 아주 안 좋은 상태입니다. 게다가 고문을 얼마나 많이 당하고 매질을 얼마나 심하게 당했습니까? 그러니 캄캄한 지하 감옥, 그것도 중죄인들이 갇히는 그런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한 바울과 실라는 이제 우리 일은 끝났다하며 그냥 가버린 게 아니라, 날이 새기 전에 자신들의 발로 걸어서 다시 빌립보 지하 감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날이 밝은 것입니다.

 

간수의 입장에서도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자기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 바울과 실라가 자기 입장이 곤란할 수 있을 때 스스로 감옥으로 돌아가준 것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은인을 자기 손으로 다시 감방에 들어가게 하고 철문을 잠글 때, 바울과 실라로부터 은혜를 입은 간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집정관들로부터 사람이 와서 석방시켜 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의 마음이 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간수는 단숨에 달려가 바울과 실라에게 석방 소식을 전합니다. ‘이제는 나가셔서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이제는”(36)이라는 말은 원래 지금 당장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나가라고 그가 흥분하며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흥분하여 외친 간수와는 달리 바울은 석방 소식에 들뜨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바울은 차분한 목소리로 간수를 통하여 윗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37)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로마 사람인 우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과 함께 한 실라 역시 로마 시민권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 공화정 시대에 제정된 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은 본인의 동의하에서만 지방 법률에 따라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승복하지 못할 경우 로마 황제에게 직접 상소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잡혔을 때 가이사랴로 끌려가서 총독 앞에서 내가 황제에게 상소한다.’라고 했기 때문에 로마로 끌려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로마제국 내 각 행정구역의 총독이나 집정관은 명백한 죄의 규명 없이, 다시 말해 재판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로마 시민에게 매질이나 태형 혹은 고문을 가하거나 투옥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또 피고가 로마 시민이라면 언제든지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로마법은 피고인의 변론권을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가 굉장히 발달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노예가 있는 계급사회였는데도 불구하고, 로마제국 내에서 최하층이었던 노예의 변론권까지도 로마법이 인정해주고 있었습니다. 노예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는데, 로마 시민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로마 시민의 자기 변론권은 정당한 법적 권리였기 때문에, 정식 재판을 통한 유죄 선고 없이 이렇게 로마 시민을 때리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아주 심각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귀신 들려 점치던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이라고 외쳤고, ‘로마 사람인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일을 한다.’라고 하며 아고라에 모인 집정관들과 시민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로마 사람인 우리라고 구별하여 불렀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로마 시민이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는 것에 불을 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인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심히 소란스럽게 하고 있고 로마제국의 제도와 관례와 규정을 허물어뜨리려 한다는 거짓 모함을 하며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습니다. 그런 거짓 모함에 간단하게 선동당한 빌립보 시민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하며 여종의 주인들에게 합세했습니다. 집정관들은 재판도 거치지 않고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서 맨살에 심하게 채찍과 몽둥이로 매질을 가한 뒤, 쓰러진 그들을 빌립보 감옥에 그것도 중죄인들을 가두는 지하 감옥에 투옥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거짓 모함으로 바울과 실라를 고발한 주인들, 그들에게 선동당한 아고라(광장)의 빌립보 시민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때리고 가둔 관리들과 빌립보의 집정관들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정식 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심하게 때린 다음 옥에 가둔 바울과 실라가 혈통으로는 분명히 유대인이지만, 법적으로는 로마법의 보호를 받는 로마 시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오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나중에 산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사람인 우리를 재판도 없이 이렇게 함부로 막 때리고 고문하고 태형을 가하고 투옥시켰다가 이제는 사사로이 석방시키고 한다. 그것은 부당한 일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자신과 실라를 불법으로 감옥에 가둔 장본인들,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집정관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석방시켜야 한다.’라고 아주 강하게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2.   역전된 상황

 

1)  상관들의 두려움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인 줄 알고 함부로 대하며 때려서 가두었는데, 법적으로 로마 시민이라는 보고를 들은 집정관들은 정말 깜짝 놀라며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요즘 말로 깜놀하고 멘붕에 빠졌습니다. ^^) 그래서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38-39)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보고를 듣자마자 집정관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합법적인 재판을 하지도 않았고 로마 시민인 바울과 실라를 마구 때리고 투옥시켰다는 것은 로마법을 그대로 어긴 범죄 행위일 뿐 아니라, 로마 시민에게 그렇게 한 것은 로마제국을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보통 범죄가 아닌 겁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사자인 자기들이 문책을 받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심한 형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두려워서 벌벌 떱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는 지하 감방으로 찾아가고, 바울과 실라에게 나오기를 청하면서, 직접 감옥 밖까지 바울과 실라를 인도한 다음에, 자신들의 잘못을 문제 삼지 말고 조용히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손이 닳도록 싹싹 빌며 제발 떠나주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빨리 떠나야 자기들의 잘못이 덮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에게 찾아가 직접 데리고 나와 떠나달라고 했는데, 사실은 바울이 처음 잡혀서 매를 맞을 때 분명히 나는 로마 사람이요!’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듣지 못하고 막 때렸습니다. 워낙 소란했기 때문에 그것이 들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을 해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난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석방 통보를 받은 후에 그냥 떠날 수도 있는데 굳이 자기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이것은 자기가 로마 시민인 것을 드러냄으로써 로마 시민으로서 덕을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빌립보에 믿는 사람들이 이제 막 나왔습니다. 루디아와 가족들, 간수와 가족들, 그리고 귀신 들려 점치던 여종도 귀신이 쫓겨나간 후에 분명히 믿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나와 자연스럽게 빌립보에서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가 떠난 다음에 남겨질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안전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는, ‘이 모든 일이 로마 권력에 의해서 묶이고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행하시는지 묵묵하게 바라보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권력 기관인 로마 당국자들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신들이 높은 사람들이지만 당신들보다 위에 계신 분이 계시다. 심지어 로마 황제보다 위에 계신 분이 계시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다.’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  빌립보 교회를 향한 위로

 

이제 날이 밝아 빌립보의 집정관들로부터 사과를 받고 출옥한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합니까?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40)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빌립보에서 자신들의 숙소였던 루디아의 집으로 갑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은 루디아와 그 가족들은 빌립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루디아의 집에는 바울의 일행 중 바울과 실라가 잡혀간 뒤 남은 디모데와 누가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거짓 모함으로 잡혀가 심한 매질을 당하고, 그것도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엄청난 매를 맞고서 피를 흘리며 끌려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생각하며 이들이 밤새 얼마나 염려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겠습니까? 믿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니까 금방 믿은 루디아를 비롯한 이들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디모데와 누가와 마음을 합하여 기도했겠습니까? 합심기도, 부르짖는 기도를 이들이 이때 한 것입니다.

 

바로 그 루디아의 집으로 바울과 실라가 가서 그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이 빌립보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한밤중에 주님께서 어떻게 감옥을 흔드시며 감옥의 문들을 여시고 차꼬를 풀어주셨는지, 그 한밤중에 지하 감옥에서 너무 캄캄하여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살하려던 간수와 그의 가족들까지 자신들을 통해 어떻게 구원해주셨는지, 날이 밝자 빌립보의 최고 우두머리인 집정관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직접 찾아와서 어떻게 사과하게 하셨는지, 이런 것들을 죽 나눈 것입니다.

 

그럴 때 밤새 염려하며 기도하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특히 그렇게 울부짖어 합심해서 기도했을 텐데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을 확인하며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위로하고라는 말에 노트가 붙어 있습니다. 성경 아래쪽에 있는 주를 보면 권면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쓰인 헬라어 동사가 위로하다라는 뜻도 있고 권면하다라는 뜻도 있다는 겁니다. ‘권면하다라는 말은 권하면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위로하다권면하다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는 루디아의 집에서 다시 만난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그들이 감옥에서 겪은 일을 간증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며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위로였습니다. 우리는 위로라고 하면 보통 만나서 얼마나 힘드시겠어요?’라고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도 물론 위로이지만, 진정한 크리스천의 위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더욱 바로 섭시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3.   아름답게 세워진 빌립보 교회의 뒷이야기

 

1)  누가의 헌신과 빌립보 사역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냥 보고 넘어가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40절을 다시 보면, 주어는 두 사람즉 바울과 실라입니다. “두 사람3인칭 복수형(그들)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바울과 실라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만나 위로했습니다. ‘루디아의 집에 들어갔다’, ‘형제자매들을 만나 보았다’, ‘위로했다’, ‘갔다’라는 말들 모두 바울과 실라가 그랬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마지막 동사는 가니라인데,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다음 행선지인 데살로니가로 떠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주어가 두 사람즉 바울과 실라입니다. 그런데 원래 바울과 함께한 일행은 네 명이 아니었습니까? 본래 바울과 실라가 수리아 안디옥에서 떠나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세 명이 되었고, 드로아에서 누가를 만나 네 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두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빌립보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지난 16절을 보면 우리가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누가복음을 쓴 의사 누가인데, 누가가 거기 같이 있으면서 우리가라고 즉 우리 네 명이라고 쓴 겁니다. ‘우리1인칭 복수형입니다. 그런데 25절부터 바울과 실라만 잡혀서 매질 당하고 갇히고, 여기서 떠나는 사람도 두 사람, 즉 바울과 실라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써야 했습니까? 빌립보를 떠날 때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동행했지만, 디모데는 나중에 다시 빌립보로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확실히 빌립보에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누가가 남지 않고 바울과 같이 계속 데살로니가로 가고 베뢰아로 가고 아덴(아테네)으로 가고 고린도로 갔다면 계속 우리가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1610절에서 드로아에서부터 우리가로 나오다가, 나중에 누가를 빼고 그들이로 나오다가, 205절에 가서 다시 우리가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과 헤어졌지만 그때 다시 누가가 합류했다는 뜻입니다.

 

누가가 왜 빌립보에 혼자 남았겠습니까? 사실 그에 대한 답은 쉽습니다. 방금 예수님을 믿은 초신자인 빌립보 성도들을 돌봐주기 위함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나와서 위로하고 권면하고 가르치고 떠났는데, 잠깐 말씀을 가르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믿자마자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제대로 복음을 설명해줄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충분하게 가르치고 복음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빌립보에 남았던 것입니다.

 

누가는 원래 직업이 의사입니다. 1세기에도 의사는 부와 명예가 보장된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누가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그것을 다 포기하고 바울 일행과 함께 드로아에서 합류하여 에게 해를 건너 빌립보로 갔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사역을 마친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면서 누가에게 혼자 빌립보에 남아 그곳의 교인들을 보살펴주기를 원했을 때, 누가는 왜 하필 나만 남나?’라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전적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거기에 남아 사역을 했습니다.

 

나중에 205절에서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누가가 다시 함께 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때로부터 약 5년 정도 지난 후입니다. 그 사이에 누가는 5년 동안 계속 빌립보에서 머물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누가는 5년 동안이나 헌신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 자기가 빌립보에 혼자 남아 누가는 이렇게 훌륭히 헌신했다.’라고 쓰지 않고, 그냥 그들이 가니라하고 3인칭 복수형으로 기록함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는 안 가고 남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만 밝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세운 여러 교회들 중에 특히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한 번도 꾸중하지 않고 사랑의 편지를 썼던 교회입니다. 또 바울의 전도 사역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빌립보 교회라고 하면 복음을 전해준 바울만 생각하는데, 그 뒤에는 누가의 수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그토록 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해 헌신하고 협력하며 바울에게 사랑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교회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바울이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후에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소리 없이 헌신했던 누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복음 안에서 다름을 극복하고 하나 된 빌립보 교회

 

의사였던 누가가 홀로 남아 보살폈던 빌립보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은 루디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 그리고 귀신 들렸다 치유 받은 여종, 그 외에 루디아와 같이 강가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다른 여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는 여성 파워가 세고 여성 리더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루디아와 간수의 가족들을 각각 최대 열 명씩 잡아도 처음에는 빌립보 교회가 20여 명도 채 되지 않는 적은 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주 놀라운 사랑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 복음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보십시오. 여성 사업가, 여종, 간수 - 이 사람들이 서로 섞일 만한 사람들입니까?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이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먼저 인종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빌립보가 매우 세계적인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에 속하기 이전에는 헬라에 속해 있었으며, 에게 해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동서로 길게 뻗은 에그나티아 대로(Via Egnatia)에 걸쳐 있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원래 소아시아(터키)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유럽 사람이 아니라 아시아 사람입니다. 빌립보 본토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 이민(사업을 위한 취업이민)을 온 사람입니다.

 

귀신 들려 점치던 여종은 아마도 헬라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녀는 외국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 정복한 곳에서 사람들이 노예로 많이 팔려왔고 도처에서 소위 수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간수는 그 당시 대부분의 간수들과 마찬가지로 은퇴한 군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로마 식민지의 합법적 행정 기관 안에 속한 모든 관리들과 같이 로마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에 있었으니까 로마 시민입니다.

 

이 세 사람은 민족적, 문화적으로 볼 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물론 로마제국에 의해서 정치적으로는 하나인 나라 안에 있었지만, 단지 로마라는 제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환경을 뛰어 넘는 하나 됨을 그들이 발견한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배경을 보십시오.

루디아는 옷감 비즈니스, 그것도 자주장사로서 부유층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부유한 여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집도 있고 넉넉하게 많이 도왔던 겁니다. 루디아는 자기 가족들 외에도 그 네 명(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의 선교사들을 자기 집에 모시고 돌봐주고도 남을 정도로 넓은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15).

 

원래 귀신 들려 점치던 여종은 루디아와는 사회적 신분상 완전히 반대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노예입니다. 자기 자신도 자기 것이 아니고 주인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명이 데리고 있어서 자기 삶이 없고, 주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돈을 벌어주었습니다. 자기가 돈을 벌어도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재산도, 권리도, 자유도, 생명도 자기 것이 아닌 아주 비참한 여인입니다.

 

간수는 사회적으로 볼 때 그 두 여인들의 중간쯤 되는데, 그는 분명 로마 장교 출신이었을 것이고 그 감옥에서는 책임 있는 지위(간수장)에 있었지만, 결국은 로마제국이라는 국가에 속한 공무원입니다. 상당한 중산층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빌립보 교회의 소위 창립 멤버 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차별 없이 대등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서로를 받아들이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높으니까 너는 내 밑이다라고 하지 않고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가정의 가장(남편/아버지)은 매일 아침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여자로 만들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종으로 만들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예수님 안에서 함께 구원받고 하나가 된 사람들, 그렇게 멸시를 받았던 세 부류의 대표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썼듯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라고 한 것이 정말 빌립보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또 이 사람들의 개인적 필요도 생각해보십시오.

루디아는 지적인 필요, 뭔가를 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계속 듣고 집중해서 들었습니다(14). 주님이 그 마음을 여셨는데, 그것은 깨닫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원래는 아시아 출신인데, 처음에는 유대교에 끌렸기 때문에 회당이 없어서 강가로 나가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던 경건한 이방인이 루디아였습니다. 그러나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종은 심리적 필요를 갖고 있었습니다. 귀신에 들려 있는 상태이니까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도 귀신 들리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귀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악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귀신에 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 자아가 없습니다. 자기가 뭘 하고 싶어도 귀신에 의해서 조종을 받는 겁니다. 게다가 이 여종은 사회적으로 주인들이 꽉 잡고 자기를 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귀신이 바울에 의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겨나가고 예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의 경우에 그의 필요는 도덕적인 면이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양심이 어느 정도 눈을 떠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그는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며 두려운 상황 속에서 즉시 질문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살아날 수 있는지, 또는 모면할 수 있는지 하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소리친 것으로 볼 때, 그는 마음속으로 그런 것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그 필요가 채워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모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어떻게 표현합니까? 40절에서 형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루디아와 가족들만 한 것이 아닙니다. 루디아와 가족들, 간수와 가족들, 여종, 다른 여인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형제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형제자매들을 말합니다. 부유한 여성 사업가, 착취당하던 여종, 아주 거친 로마 군인 출신 간수가 서로서로 또한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형제자매 관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그들 안에 약간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계속 한 마음 안에 굳게 서라’, ‘마음을 같이해라’, ‘같은 사랑을 가져라’, ‘뜻을 합하고 하나로 뭉쳐라하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렇게 달랐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 정말 형제자매인 교회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 뒤에 누가 있었습니까? 누가가 있었습니다. 누가가 빌립보에서 귀한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누가는 할 일 없는 백수가 아니라 그 당시 의사로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적은 무리를 위해 홀로 빌립보에 남아 오랫동안 이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권면하며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 빌립보 성도들이 놀랍게도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위로와 권면으로 가르쳤던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분량만으로 보면 누가가 쓴 책(누가복음, 사도행전)의 분량이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습니다.



 [나가는 말]

  

이 세상에 참된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참된 위로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다 끝이 있고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원한 위로와 격려 속에서 날마다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그저 나 잘되고 나 잘 먹고 잘 살고 내가 성공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나의 도움과 권면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특히 같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나의 권면과 위로가 필요한 지체가 누구인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나 또 목장에서나 섬김을 받는 데 만족하지 말고, 다른 형제자매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권면하고 격려하는 사역자(목자, 목녀, 직분자)로 헌신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권면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주님의 말씀의 통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통해 흘러나가는 주님의 말씀이 나 자신을 먼저 위로하고 권면하고 세워줄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나를 채우고 흘러나가서 다른 형제자매들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생명이시며 능력이신 주님의 그 말씀으로 주님의 위로와 권면을 입은 내가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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