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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9일 수요예배
✦ 크리스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2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가?”
(마태복음 19장 16~26절)
1.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
얼마 전 주일예배 때 마가복음 10장에서도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부자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 중에 물질적인 복도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3-24절)
대부분 이 말씀을 해석할 때 낙타가 정말 그 작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각 해석에 따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첫째, 문자 그대로 덩치가 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다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당시 중동의 사람들은 가장 큰 동물 하면 낙타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큰 낙타가 아주 작은 바늘구멍을 통과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되고, 따라서 물질의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편한 말씀이 됩니다.
둘째, 낙타라는 단어가 원래는 ‘밧줄’이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밧줄’이라는 뜻의 아랍어 단어인 ‘감타(gamta)’와 ‘낙타’라는 뜻의 ‘감라(gamla)’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구전 과정이나 필사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의 종류 중에서 가장 크고 굵은 것을 밧줄이라고 한다면, 밧줄을 바늘귀에 넣는 것도 역시 불가능합니다.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고 해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셋째, ‘바늘귀’가 당시에 실제로 존재하던 문이라고 주장하는 해석입니다.
옛날에는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자 성벽을 쌓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대부분 해가 지면 성벽 여러 곳에 있는 큰 출입문들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이 한두 개쯤은 더 있었습니다. 소위 ‘쪽문’이나 ‘개구멍’이라고 부르는 게 그런 것들입니다. 옛 예루살렘의 성벽에도 그런 좁은 문이 있었는데 그것을 ‘바늘귀’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이 경우에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는데,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인 바늘귀 문으로 그 큰 낙타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힘들지만 작은 낙타이거나 살을 빼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해석이 맞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 약간의 여유가 생깁니다. 낙타는 자신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해 놓는 동물인데, 자신을 위해 비축한 지방을 다 뺀다면 덩치가 훨씬 작아져서 바늘귀 문을 통과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자가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2. 부자 청년의 진짜 문제
실제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만나셨을 때 그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하니까, 먼저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18-19절)
그런데 그 청년은 이 모든 계명을 자기는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0-22절)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언급하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영생을 얻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계명들을 정말 지킨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등을 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결국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22장에 가면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실 때의 두 번째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 22:37-40, 새)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첫째와 둘째라는 순서가 있어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라는 것을 보면, 첫째와 둘째가 중요도 면에서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순서는 있지만 똑같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이 부자 청년도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 부자 청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계명을 지킨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진짜 문제는, 십계명을 실제로는 제대로 지키지 않았으면서도 자기는 다 지켰다고 착각한 데에 있습니다.
당연히 그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부모를 공경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주 착실한 모범생이고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랬으니까 그 젊은 나이에 관원도 되었고 부자도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다 지켰다고 하는 그 계명의 핵심이 뭔지를 몰랐습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4-17)
예수님이 왜 이 청년에게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겠습니까? 자기 것을 팔아서 나눠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팔아서 나눠주라고 하신 이유는, 그가 가진 믿음이 단지 ‘죽은 믿음’과 ‘이론적 믿음’이지, ‘진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생을 얻으려면 정말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감격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기 것을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도 하고 헌금도 드리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요 14:15, 21, 새)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며,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엇을 가리킵니까?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결국 ‘영생’이라는 게 뭡니까? 단지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영생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과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게 영생이 아닙니다. 영원히 지옥에서 살면 그게 무슨 영생이겠습니까?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의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지 못했다고 느꼈습니까? 그에게는 주님과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세운 다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이 그냥 도덕적으로만 계명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으니까 진정한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살인, 간음 같은 죄는 안 지었지만, 이웃을 정말 사랑해서 자신의 것을 팔아 나누고자 하는 진짜 사랑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따르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왜 자기 소유를 팔아서 나눠주는지가 중요합니다. 왜 나눠줍니까?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가난한 자들이 눈앞에 보이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안 하고 말로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웃을 그 정도로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로 율법의 핵심 정신입니다. 따라서 계명은 사랑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그런 사랑이 없이 지키려니까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었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3. 축복의 상징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대표적인 축복의 상징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무엇이 있으면 축복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돈, 건강, 장수, 자녀의 성공, 취업, 화목한 가정 등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축복의 상징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머니’ 즉 ‘돈’입니다. 성공도 좋아하고 행복도 좋아하지만, 성공의 기준이 돈이고 행복의 기준도 돈입니다.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서 돌이 되면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특히 ‘돌잡이’라는 것을 시킵니다. 저희 아이도 돌잔치 때 성경책, 연필, 1불짜리 지폐 등을 놓았는데, 아이가 바로 연필을 잡았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금방 했다고 다시 시켰는데, 아이가 짜증을 내며 우는 바람에 그만둔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어느 젊은 부부의 돌잔치에서는 아기가 색연필을 잡으려고 하니까 엄마가 자꾸 색연필을 먼 곳으로 치우고 의도적으로 아기가 잡기 쉬운 곳에 돈을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웃었지만, 그 엄마는 그래도 돈을 잡는 게 인생에서 가장 좋다고 당당히 말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돈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불편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축복의 상징이 구원을 방해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돈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재물이 구원을 방해하는 것인데도 왜 하나님은 물질을 복으로 주시는 겁니까? 성경을 보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엄청난 거부였고, 그의 아들인 이삭도, 또 야곱도 다 부자였습니다. 요셉도 애굽의 총리였으니까 돈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윗도 부자였고, 그의 아들인 솔로몬은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낸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큰 부자였습니다. 니고데모도 그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재물의 축복을 허락하셨고, 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에게 물질의 넉넉함을 복으로 주겠다고 성경 여러 곳에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대가 되는 두 개념이 둘 다 진리일 수 있습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복의 아이콘(상징)을 알아야 하는데, 바로 선악과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함께 구원을 얻게 하는 중요한 나무였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선악과 때문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낙원을 잃고 쫓겨난 것은 곧 천국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주신 것은 분명히 축복인데, 그 선악과로 인해 천국을 잃게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입니다. 축복이 저주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선악과의 교훈은, 선악과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매주 중요한 선물이며 축복이지만, 그로 인해 자기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순간 천국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4-5)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선물입니다.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거나 옭아매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분명하지만, 그 복을 가지고 살면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할 때 그 순간 그 복은 더 이상 복이 아니라 저주로 변하여 천국을 잃게 됩니다.
낙타와 바늘귀 비유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재물은 가장 큰 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실제로 복이 아니라 복을 알게 하는 보조 장치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즘 건강 보조식품들이 넘쳐나는데, 아무리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 해도, 건강 보조 식품들은 근본적으로 병을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보조 역할을 할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건강, 장수, 자녀, 화목한 가정, 성공 등과 같은 복들은 우리에게 참된 복을 알려주는 보조 기능을 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복은 바로 영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재물을 주실 때도 있고, 가져가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건강을 주실 때도 있고, 가져가실 때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수나 자녀의 성공이나 화목한 가정 등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생을 위해 그런 것을 주실 수도 있고,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생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8-9)
오늘 예수님 말씀의 두 번째 교훈은, 재물이 내 삶에서 하나님이 되는 순간,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우리는 천국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의 상징들이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되는 순간, 인간은 천국을 잃어버립니다. 돈, 건강, 장수, 자녀 등 축복의 대표적인 아이콘들이 내 삶의 주인이 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돈이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줄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이 곧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 천국을, 영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4. 낙타도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낙타와 바늘귀 비유의 뜻은 분명합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은 부자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자와 보통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돈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부자에게 돈이 중요하고 소중하듯이, 가난한 사람이나 중산층에게도 돈은 중요합니다. 부자가 돈을 좋아하는 만큼, 가난한 자나 중산층도 돈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부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중산층이든, 돈이나 어떤 다른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돈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돈은 그냥 돈일 뿐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돈은 여러 가지 축복의 상징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말씀은, 돈이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축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삶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면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영생을 잃게 합니다. 아니, 사실은 영생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과 우리에게 하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5-26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가 무슨 뜻입니까? 천국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는 것, 구원을 받는 것,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요 1:12-13, 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특권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살다가, 이 땅을 떠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집, 즉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방법, 즉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것을 통해 그 천국행 티켓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아 영생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론적인 사랑이나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움직여 사랑을 실천합니다.
왜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거짓 증언을 하지 않습니까? 왜 부모를 공경합니까?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 지켰다고 하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왜 그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 청년은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까?
그러한 참 이웃 사랑을 실천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낙타는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 가능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의 삶을 살 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산다는 것이 곧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즉 돈이나 건강이나 장수나 자녀나 화목한 가정이나 성공이나 그 외의 어떤 것도, 우리 삶의 주인이 되도록 허락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그래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