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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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7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40 ✦
“마침내 임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열왕기하 17장 1~41절)
1. 이스라엘의 멸망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호세아입니다. 선지자 호세아와 이름만 같았지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있던 9년은 북이스라엘이 멸망의 길로 떨어지는 비참한 시간이었습니다. 호세아는 반 앗수르 정책을 펼치던 베가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릅니다(15:30). 그는 왕이 된 후에 계속해서 앗수르에게 조공을 착실히 바쳐가면서 자신의 권력도 유지하고 나라도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왕이 된 게 사실은 앗수르의 지원을 받아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호세아를 향해, 성경은 그가 악하기는 했어도 다른 왕들처럼 심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합니다(2). 그런데도 그의 시대에 나라의 멸망이 왔습니다. 그보다 더 악한 왕들의 시대가 아니라, 그래도 조금 나은 호세아의 시대에 멸망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왕들보다 조금 더 낫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리더십의 진정한 평가는 다른 왕들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자신과 백성들이 확실한 회개와 방향 전환을 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미국도 굉장히 복잡한 상황입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전당대회를 해서 대통령 후보를 추대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최대 비호감 후보 두 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훌륭한 점을 많이 갖춘 사람들입니다. 국회의원들이나 역대 대통령들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업적을 많이 남기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업적을 많이 남겼던 여로보암 2세가 성경에는 굉장히 짧게 나옵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성경은 관심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런 데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세상에서 성공을 하느냐 안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왕들이 업적도 나름대로 있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 아니었다는 겁니다. 다 악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조금 덜 악했다고 잘한 게 아닙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모두 리더인데, ‘내가 저 사람보다 그래도 조금 더 낫지. 내가 저 사람보다 조금 덜 나쁘지.’ 하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늘 바로 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실 때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지, 저 사람보다 더 낫다거나 덜 악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말씀과 기도로 교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요즘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전하면서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진리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마태복음 22장에서 “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라고 하셨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관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구약도 신약도 죽 읽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그 백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가를 봅니다. 특히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어떻게든 끌어와서 백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고, 백성들은 어떻게든 다른 데로 눈을 돌리고... 그 중 몇 명이 하나님께 눈을 맞추며 나아오면 좋아하시고, 다윗 같은 사람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실까를 보여줍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호세아입니다. 앗수르의 영광을 이룬 정복자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죽자, 그때까지 잘 섬기다가 호세아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천하의 디글랏 빌레셀이 없는 앗수르는 더 이상 옛날 같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앗수르에게 당한 설움에서 벗어날 때라고 생각한 호세아는, 먼저 앗수르에게 바치던 조공을 더 이상 바치지 않는 대담한 결정을 내립니다. 물론 호세아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중동에서 유일하게 앗수르를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소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기들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그렇게 한 겁니다(4).
그러나 호세아는 참 보는 눈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의 애굽은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어지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을 호세아는 몰랐습니다. 소 왕은 그런 복잡한 상황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도 돌보기 힘든 처지의 애굽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서 그 무서운 앗수르와 싸우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호세아는 상황을 완전히 오판한 것이고, 썩은 동아줄을 잡은 것과 같이 줄을 잘못 서게 된 겁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자신과 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고 말았습니다.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겁니다.
호세아의 이 갑작스런 친 애굽 정책은 앗수르의 새 왕인 살만에셀을 격분하게 만듭니다(4). 이에 앗수르의 대군을 이끌고 와서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합니다(5). 그런데도 기대했던 애굽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포위 작전 도중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왕이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죽습니다. 그러자 그의 형제인 사르곤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아 사마리아 공격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살만에셀의 죽음이 이스라엘에게 별 이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호세아 왕이 항복함으로써 208년 전 여로보암이 세웠던 북이스라엘은 마침내 멸망을 당하여 BC 722년에 나라가 없어지고 맙니다.
갑자기 어떤 상황이 벌어졌다고 그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거나, 그 가정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그것이 곧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뭔가를 하셨다면 그에 대한 것이고, 나에 대한 것은 나에게 하십니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2. 멸망의 혹독한 대가
멸망당한 나라의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친 앗수르의 침공 때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지만, 나라가 망하면서 다시 3만 명이 포로가 되어 앗수르에 끌려가게 됩니다.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6절)
그리고 다른 민족 사람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시킵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24절)
여기서 “사람을 옮겨다가”라는 표현은 당시 앗수르의 식민지 이주 정책을 보여줍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다른 지역에 흩어 버리고, 정복한 곳에는 다른 백성들을 대거 이주시켜서, 정치적으로 또 인종적으로 분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미리 막았습니다. 이처럼 앗수르는 정복당한 민족의 반란을 방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서, 반역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의 주민들을 멀리 딴 곳으로 이주시켜버리는 강제 이주 정책을 펼쳤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처럼 강력한 민족성을 가진 백성들의 집중되는 힘을 깨버리고, 고향 땅에 애착을 갖는 애국심을 자손 대에 가서 아주 말살시켜 버리겠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앗수르 입장에서는 이것이 아주 효과적인 정책이었지만, 정복을 당한 나라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 온 생활 기반을 모두 빼앗기고, 전부 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반란을 일으킬 만한 여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이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이 17만 명이나 되는 조선 사람들을 만주 지역에서부터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집단 이주를 시켜버린 사건입니다. 그 일을 통해 고려인(까레이스키)들이 생겼고 슬프고 비참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시 가족이 생이별을 당하고, 먼 길을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끌려가다가 기차 안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기차에서 살아남아 낯선 땅에 도착한 사람들을 소련 군인들은 마치 짐을 던지는 것처럼 마구 기차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그 추운 겨울에 아무 준비도 없이 버려진 사람들 중 상당수가 얼어 죽거나 굶어 죽고, 또 현지 적응에 실패하여 많이 죽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조금이라도 저항 의지를 보이는 지도자급 고려인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바로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겁니다. 당시 앗수르는 포로들을 끌어갈 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아무리 야만적인 고대사회라고 해도, 포로들의 발목을 줄이나 사슬로 묶어 짧은 보폭으로 걷게 한 것뿐 아니라, 가죽 끈에 달린 갈고리를 포로들의 혀나 턱에 꽂았습니다. 묶인 손이나 발에 구멍을 내어 밧줄을 엮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포로들이 잘 따라오지 못하면 이 갈고리 끈을 사정없이 잡아 당겨서 포로들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앗수르가 이토록 잔혹하게 포로를 다루었던 방법을 나중에 바벨론도 똑같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앗수르도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때 그런 방법으로 끌려가며 고통을 당한 겁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사람은, 자기도 똑같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 전역에 흩어서 이주를 시킨 다음,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로는 다른 이방 민족들을 대거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첫째, 이렇게 이주해 온 이방인 민족들과 원래 거기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서로 결혼하게 됨으로써 인종이 섞이게 된 것입니다. 단일민족의 순수성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것은 큰 치욕이었습니다. 이 일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큰 내분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남 유다가 망하여 바벨론에 끌려갔다가 페르시아 고레스 왕이 보내줘서 포로들이 돌아옵니다. 돌아와 보니까 섞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이 유대인이 된 것이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 민족들과 섞여 사마리아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 때까지 서로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종교가 혼합되었습니다. 다른 데서 이주하여 온 민족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사마리아에 그대로 가지고 와서 계속 자신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재앙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25-26절)
처음에 이방 민족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를 하여 자신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섬겼는데, 하나님께서 사나운 사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습니다(25). 이에 놀란 그들은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하여, 이것은 이 지역의 신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각 민족마다 그 민족의 수호신이 있다고 믿었고, 일단 그 나라에 오면 그 지역 신들에게 합당한 존경을 표해주어야 재앙을 받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우상 신들을 그대로 섬기면서도, 동시에 이스라엘 지역의 하나님도 예배하게 함으로써 양쪽이 다 좋게 하자는 실용주의적 발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런 의견을 누군가가 대표로 앗수르 왕에게 전달했고, 왕은 그것을 명령합니다.
“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27-28절)
이렇게 해서 사마리아 지역은 인종이 혼합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도 혼합되어 버리는 불행한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29-33절)
여기 잘 보시면 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좋은 대로 하는 겁니다. 특히 32절에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원래 제사는 누구에게 드립니까?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 드렸다는 것은 전형적인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나를 위해서 하십니까? 물론 나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나가는 것, 그리고 형제자매와 함께 마음을 모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다른 건 필요 없고, 하나님도 상관없고, 나만 유익을 얻으면 된다고 하며 신앙생활을 하면, 그것은 진짜 신앙생활이 아니고 전형적인 우상숭배적 생각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그 세력이 대단한 것처럼 보였지만, 놀랍게도 역사를 보면 그 생명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앗수르의 공포정치는 결국 많은 주변 나라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고, 정복을 당한 민족들의 저항 의지만 불태웠습니다. 힘으로 누르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힘이 약하여 당할 수밖에 없지만, 결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복수심이 있어서, 힘으로 누를수록 더 복수심이 커집니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십시오. 특히 IS의 테러 공격으로 현재까지 프랑스가 가장 많은 희생자들을 내고 있는데, 바로 어제는 북부 소도시에 있는 성당을 공격해서 미사를 인도하던 신부를 살해했습니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14일에 일어난 니스 트럭 테러 직후에 프랑스가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은 “프랑스가 서방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대표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프랑스의 식민 역사 탓이 크다고 분석합니다.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는 약 500만 명으로 전체의 7.5%이며, 독일(5%)이나 영국(4.6%)에 비해 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이렇게 무슬림 인구가 많은 건 프랑스의 개방정책 때문이 아니라 식민 역사 때문입니다. 1830년 알제리 점령을 시작으로,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시리아, 레바논 등에 정착촌을 건설한 프랑스는, 식민지의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데려와 경제 성장을 위한 자원으로 이용했습니다. 이 무슬림 이주자들이 남아 자녀를 낳으면서 이민 2세, 3세로 이어지며 프랑스에 거대한 무슬림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현재 프랑스에서 하류 계층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식민 통치가 끝난 이후에도 과거 식민지였던 곳들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961년에 파리에서 알제리 독립을 외치며 비무장 시위를 벌인 알제리계 시민 200여명을 프랑스가 학살한 일이 있는데, 1990년대 ‘알제리 무장 이슬람 조직’은 알제리 내 친프랑스 인사를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과 외국인을 참수하며 보복했습니다. 최근 프랑스 테러범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가정이 모두 과거 식민지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미국 주도의 대테러 연합군에 참여해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병한 점도 IS가 프랑스를 미워하는 원인 중 하나지만, 대테러부대의 또 다른 주축인 영국과 비교해보아도 역사적, 종교적 원인이 프랑스 테러의 가장 큰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것들이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은 힘으로 막 눌러서 다 해결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복수심을 더 자극해서 보복을 하게 되고, 그러면 또 가서 누르고 그러면 또 보복하고, 그렇게 죽고 죽이는 폭력이 계속되는 겁니다.
IS가 나오게 된 원인 중 하나도,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여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한 후에 수니파들이 밀려나니까, 극단 수니파 이슬람인 IS가 나오게 된 겁니다. 지금 미국의 총기 사고를 보십시오. 미국은 총기 소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소위 ‘인디언’으로 불리는 원주민들을 총으로 다 죽이고 땅을 빼앗은 그것이(서부 개척이라고 부르지만) 부메랑처럼 자기를 때리게 된 겁니다.
앗수르도 똑같습니다. 정복한 지역에 대해 혹독한 공포정치를 실행했고, 결국 그 민족들의 복수심을 키워주게 되었습니다. 결국 앗수르는 신 바벨론과 메대 왕국의 연합군에게 얼마 못 가서 비참하게 멸망당합니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전쟁의 화신으로 불리던 군사강국 앗수르는 더 지독한 강적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옛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3.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
열왕기서의 기자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것을 기록한 뒤, 이스라엘이 왜 멸망당하게 되었는지 그 설명을 덧붙입니다. 크게 세 가지인데, 사실은 서로 다 연결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첫 번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강대국 이집트의 전차군대를 홍해 바다에서 수장시키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친히 인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어떻게 삽니까? 먹을 것을 주시고 마실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나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주변 나라들의 시스템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7-8절)
고난이 오면 겸손히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는 당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어려움이 왔는데도 주님께 매달리지 않는다면 진짜 신앙인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안정되고 풍성해지며 힘이 생기면 마음이 슬쩍 바뀝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던 눈이 자꾸 다른 데를 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여유가 없을 때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봤는데, 여유가 생기니까 자꾸 이것도 보고 저것도 봅니다.
북이스라엘은 남 유다를 압도하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로보암 2세 때는 부귀영화와 국력이 절정에 이르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강해지고 부유해지니까 하나님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해 버린 백성들이 저지르지 못할 죄는 이제 없습니다.
2) 우상 숭배
이때까지 열왕기서에서 계속 강조한 것과 같이, 멸망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19명이나 되는 왕들이 모두 여로보암이 잘못 닦아 놓은 패턴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로보암에게서 시작되어 계속해서 후대 왕들이 반복한 그 무서운 죄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의 첫 번째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두 번째는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것인데, 북이스라엘의 19명의 왕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상 숭배로 백성들을 이끌다가 나라를 망하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 (9-12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니까 죄의 길로 가게 되었고, 그 죄의 핵심이 우상 숭배입니다. 9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한순간에 하나님을 끊어버린 게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다 보니까 그리로 가버린 겁니다. 이게 무섭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리니까 죄의 길로 가게 되었고, 죄의 핵심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6-17절)
우상 숭배도 이렇게 종류가 다양해서, 광야생활을 하던 시절에 시작된 금송아지에서부터, 이세벨이 도입한 아세라 목상, 앗수르와 바벨론에서 들여온 일월성신 숭배, 모압과 암몬으로부터 들여온 자식을 불에 태워 죽이는 인신 제사, 그리고 복술과 사술 등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하지 말라고 율법으로 일찍부터 엄하게 금하셨던 이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를 왕들(최고 리더들)부터 앞장서서 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토록 우상 숭배를 엄하게 금지시키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예배하는 대상을 닮게 되어 있어서, 우상을 숭배하면 그 우상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죄를 함부로 짓고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한 인간의 영혼의 방향성이며 정신적인 틀(frame)입니다.
그 모든 우상들은 책 제목처럼 ‘돈, 섹스, 권력’입니다. 그러니까 돈과 섹스와 폭력을 삶의 절대적 목적으로 내세웁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하면 그 사회가 황금만능주의, 음란, 폭력, 미움이 가득 차게 됩니다. 지금 사회를 보십시오. 전부 그런 것들로 가득합니다. 황금만능주의로 돈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돈으로 다 판단을 합니다. 음란한 것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넘쳐납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폭력과 미움이 가득해서, 남을 죽여야 내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떤 나라이든, 지금 이런 것들로 가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회의 영적 상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교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그러니까 다른 데를 볼 수도 있지만, 바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는 어떻게 해서 생겼습니까? 인간은 항상 뭔가를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나면, 실제로는 없는 신이라도 스스로 만들어서 예배하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신, 자기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신을 만들어서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합니다. 결국 그것은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게 죄의 본성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
그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니까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멸망의 세 번째 원인입니다.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13-14절)
하나님은 백성들이 한 번 잘못했다고 바로 심판의 칼을 드는 무지막지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몰라도, 일단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상,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듯, 계속해서 알아듣게 타이르시고 가르쳐주십니다. 모든 왕들에게 차례로 선지자들을 보내서 때로는 부드럽게 설득도 하시고, 때로는 무섭게 야단도 치시면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들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는 분이시지만, 영원히 참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왕들과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스스로 재앙을 불러온 것입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을 말하면서 남 유다도 같은 이유로 멸망당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19-20). 아직 유다가 멸망하려면 136년이 더 지나야 하지만,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다 멸망당하고 난 후인 바벨론 포로기에 기록된 책입니다. 모든 사건을 다 알고 있는 기자는, 남 유다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유다도”(19)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명령은 남 유다에게도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많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유다의 왕들과 리더들과 백성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들과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짓게 됩니다. 그래서 136년이 지난 BC 586년에 유다도 똑같이 이방인(바벨론)의 침략으로 비참하게 망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지만, 내가 일일이 다 실수를 하면서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남의 실패를 보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역사의 비극에서 배우지 못하면,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나라이든, 그 아픔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후에도 남 유다를 꽤 오래 남겨 두셨습니다. 136년이면 오랜 기간입니다. 다윗의 가문에게 주신 언약 때문에, 유다에게 새로운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 유다는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계속 타락의 길을 가다가 결국 바벨론의 손에 처참히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셔도 그 복의 흐름을 내가 잡지 않으면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나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도 하나님께서 별 징계를 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게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겁니다. 빨리 돌이키라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먼저는 나 자신이 빨리 풀지 않은 관계를 풀어야겠습니다. 삶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은밀한 부분을 빨리 정리해야겠습니다. 해결하지 않고 놓아둔 죄의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그런 형제자매가 있으면 기도해주면서 사랑으로 그들을 주님의 길로 이끌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