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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29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6

여로보암 2세와 시대의 선지자들

(열왕기하 14 23-29)


 

1.   북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여로보암 2


지난주 살펴본 것처럼, 유다의 아마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이스라엘 요아스가 아마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여로보암이 왕위에 오릅니다(23). 바로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하는 여로보암 2세입니다. 그는 41 동안 다스리면서 이스라엘을 태양처럼 빛나는 제국의 자리에 올려놓았으며, 그의 리더십 아래 이스라엘은 아주 넓게 영토를 확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5)


남쪽으로는 홍해의 아카바 만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요단 동편까지 원래 이스라엘의 영토였던 곳을 모조리 회복한 것입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마음껏 영토 확장을 있었던 것은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의 덕분이기도 합니다.


당시 오랫동안 북이스라엘을 압박하던 아람이 신흥 강대국인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수도 다메섹이 점령당하면서 비틀거렸습니다. 끊임없이 국력을 키우며 기회를 엿보던 여로보암 2세는 바로 틈을 재빠르게 군대를 움직여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해 버린 것입니다.


영토가 커지니까 상대적으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넓은 영토에서 걷힌 세금과 여러 자원들을 활용하여 무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라의 경제가 윤택해지면서 북이스라엘은 부와 힘을 동시에 소유한 대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이뤄낸 여로보암 2세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같은 위대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것이 여로보암 2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26-27)


과거의 이스라엘은 극심한 고난에 처했는데도 도와줄 사람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힘든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로보암이라는 지도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여로보암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하시고 여로보암에게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뛰어난 리더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 왕을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41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쿠데타 없이 나라를 통치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다스리는 기간 동안 라이벌인 아람이 앗수르의 침공으로 꼼짝 하는 국제 정세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로보암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로보암 2세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잘나서 잘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국제 정세가 그렇게 돌아가니까 운이 좋고 재수가 좋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평가합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4)


여로보암 2세는 세상적 시각으로 아주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여로보암 1세의 죄를 그대로 본받아 우상 숭배를 따라한 악한 왕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로보암은 성공에 취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악을 행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왕입니다. 아니,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서도 아주 뛰어난 왕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좋은 말로 그를 칭찬하며 그를 높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아주 단순하고 냉혹합니다. 그는 악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끝냅니다. “악했다.


그토록 놀라운 업적을 이룬 여로보암 2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일곱 절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면 세상의 역사책에 얼마나 길게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실제 역사에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다른 왕들과 똑같이 악을 행한 왕이었습니다. 악한 왕이었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최고의 리더이며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칭송하고 치켜세웁니다. 시대의 영웅이라고 높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평가를 그들이 받을 있을 것인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역사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것보다 중요한 ,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인기를 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엄청나다고 평가를 받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악하다고 평가를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무엇을 이루기 원하는가? 그것을 원하는가? 이런 것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것인지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점검하면서 살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좋은 소리를 들을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하다는 평가를 듣게 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은 없이도 사람이다’, ‘저 사람은 예수 믿어도 천국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고 하면 그냥 끝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최악의 재앙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대는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겠습니까? 태평성대였고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절이라면,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으로는 역대 왕들의 시절과 마찬가지로 계속 암흑기였습니다. 막강해진 국력 때문에 오히려 교만해져서, 부유해진 국민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해버렸습니다.


이상한 , 사람은 일이 풀리고 부자가 되고 살게 되면 좋아질 같아도 이상하게 타락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맨해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다수가 마약 파티를 상습적으로 즐깁니다. 성적인 타락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한 클럽들도 많습니다.


가난할 때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살만 하면 이상하게 눈이 그런 데로 돌아갑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이스라엘도 똑같았습니다. 외부적으로 강해진 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급속히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은 얼마 있어 닥쳐올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시대로부터 불과 30 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을 앗수르(역사의 앗시리아) 압박해줌으로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시대에 번영할 있었던 것인데, 바로 앗수르의 손에 의해 멸망당할 줄은 이때 여로보암 2세도,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여로보암 2 그토록 부강했는데, 군사적으로도 강하고 돈도 많고 다들 살았는데, 불과 30 후에 강한 나라가 그대로 망할 누가 알았겠습니까?


30 전이면 제가 이민 때입니다. 저는 그때 기억이 굉장히 생생합니다. 그런데 겨우 사이에 망한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부유하고 모든 일이 풀린다고 마음이 풀어져서는 곤란합니다. 엄청난 재앙이 금방 몰려올지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금 힘들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바꿔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 힘들 우리는 잘될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풀리고 부유해지는 날이 바로 타락해버립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때를 대비하지 않았던 겁니다. 대충 우상 숭배하며 살다가, 잘되니까 타락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힘들 미리 잘될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바로 서게 것입니다.

 


2.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


1)  요나 (활동연대: BC 784-772)


요나서는 길이가 짧지만 하늘과 땅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액션과 안에 흐르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담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사실 <피노키오> <백경 모비 > 같은 문학작품도 요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땄습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단지 재미를 넘어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크고 끈질긴 것인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악하고 못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도구로 쓰십니다. 때로는 사명이 싫어서 하나님의 사람이면서도 최대한 멀리 도망쳐 보려고도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쓰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뤄지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요나서입니다.


요나서 자체만 보면 요나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열왕기하(14:25) 등을 보면, 요나가 자신의 시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선지자였음을 있습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는 여로보암 2 때였는데, 요나는 영적지도자로서 정치지도자인 여로보암 2세와 절묘한 팀워크를 이루며 이스라엘의 마지막 번영에 기여했습니다. 재앙과 회개만을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야와는 달리, 요나는 계속 여로보암 왕의 승리를 예언했고,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져 백성들이 번영을 누렸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을 다시 일으키시는 도구로 쓰임 받는 신이 났을 겁니다. 우리는 요나서 1장에서 도망부터 가는 요나를 보기 때문에 그를 신통치 않게 있는데, 전까지는 최소한 요나가 아주 충성스럽고 열정적인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갑자기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면서, 요나의 인생이 바뀝니다.


너는 일어나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악독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 1:2)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퀴 도는 걸어서 3일이나 걸리는 “큰 성읍”이었으며, 초강대국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지금의 이라크 북부 도시 모술). 니느웨는 30미터가 넘는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요새였으며, 성벽 위로 마차 3대가 달릴 있을 정도로 성벽이 두꺼웠습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악독”한 성읍이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건축술과 군사력으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포로들에게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앗수르 니느웨 사람들의 불의와 우상 숭배와 잔인한 폭력을 이상 그냥 두지 않으시고, 성을 심판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으시고, 요나를 보내셔서 심판의 메시지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예언자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에게 보내어 예언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신 일은 요나서가 유일합니다. 그러므로 요나서는 선교적으로 아주 독특한 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요나서를 신약의 마태복음 28:19-20 나오는 지상대명령(대사명) 비교되는 책으로 높게 평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이 단순히 그들에게만 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는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요나서를 통하여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강한 군사적 힘으로 북이스라엘을 공격한 대적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지만, 자기 조국을 짓밟은 앗수르에 가서 회개할 있도록 메시지를 전하라니, 요나는 속이 뒤틀렸습니다. 요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던 아니라,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니느웨로 보내시는지를 너무 알았기 때문에 문제였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해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실 것을 생각하니까, 그것이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요나도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번영과 부흥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는데 신이 아지 않으면 이상한 일입니다. 이처럼 누가 봐도 보람된 , 신나는 일을 하나님이 시키시면 우리도 요나처럼 신나게 순종하며 일할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도저히 받아들일 없는 어떤 일을 하나님이 시키실 , 니느웨 같이 내가 도저히 용서할 없고 받아들일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품으라는 명령이 떨어질 ,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면서도 싫은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하나님이니까 놓고 싫다는 말은 못하고, 요나처럼 도망가 버리는 겁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이미 아실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명령을 받고도 반대편인 다시스(스페인 남부 지브랄타 Gibraltar 부근의 도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결국 물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 3일간 들어가게 되고, 회개한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앗수르의 왕부터 시작해서 12만이나 되는 니느웨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 사람들도 정도의 회개 운동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그토록 악한 니느웨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회개를 하게 것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당시 앗수르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주변 나라들을 점령하던 앗수르 군대가, 북쪽에서 일어난 신흥제국인 아라랏의 공격을 받아 참패를 당하게 것입니다. 게다가 무서운 전염병과 흉년과 기근이 겹쳐 앗수르 제국은 말할 없이 피폐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때 앗수르에서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지는 일식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과학적으로 그것을 알지만, 당시 별들과 태양을 숭배하던 앗수르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당시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은 이러한 여러 재난으로 인해 가난하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낮아지고 연해진 마음 밭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와 자연현상까지 주관하시면서 복음 전파의 타이밍을 맞추십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들이 행했던 악한 죄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 이들은 다시 타락했고, 결국 요나의 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박은 자들을 용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요나에게,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2)  아모스 (활동연대: BC 767-755)


아모스는 원래 선지자가 아니었고, 뽕나무를 재배하던 농부이자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여로보암 2 시대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습니다.


유다 웃시야의 시대 이스라엘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 1:1)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로보암 2세는 세상적인 관점으로 100년에 나올까 말까 뛰어난 리더였습니다. 정말 엄청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성공과 번영이 오히려 재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강해진 국력으로 부유해지고 안일해진 이스라엘의 왕족과 상류층은 급격히 타락했고, 그에 따라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부정부패로 가득했습니다. 상도덕이 무너지고 성적으로 너무나 문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 타락도 극에 달하여,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혼합적 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나가서는 사기를 치고, 인신매매에 가담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인과 관계를 맺는 죄를 짓는, 위선적 신앙인들로 넘쳐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린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나가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북이스라엘의 타락으로 인하여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억압을 받았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널리 퍼진 사회였습니다. 힘이 없어서 억울하게 당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없는 백성들을 이곳저곳에서 보면서, 아모스는 피눈물을 쏟으며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타락을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강같이 흘려보내라고 외쳤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버리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했습니다.


아모스서는 선지서들 중에서 사회정의 문제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도전한 책입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 5:21-24, )


이것을 요즘 말로 하면, “너희가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나는 기쁘지 않다. 내게 너희가 아무리 헌금을 드려도 나는 받겠다. 역겹다. 찬양하는 집어치워라!”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다만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여러분, 공의와 정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약한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을 말합니다.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신앙이란 복만 누리는 아니라 책임을 행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여러분,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찬양하고 멋지게 했는데, 나가서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살인하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만, 나가서 전혀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역겹다. 그만 해라. 집어치워라.”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호세아와 아모스의 예언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회복의 소망을 선포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것은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의 잔인한 공격이 가장 무서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무서운 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날이 온다.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것이다.” ( 8:11, )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듣기 싫어하던 그들에게 오는 가장 무서운 저주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거두어버리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마음에 부담이 되더라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길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3)  호세아 (활동연대: BC 755-714)


호세아는 무려 4명의 유다 왕들과 2명의 이스라엘 왕들이 다스리던 시간 동안 활동한 선지자(예언자)입니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시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 1:1)


그런데 말씀을 보면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호세아는 분명히 북이스라엘 사람인데, 오히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유다의 왕들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한과 북한의 관계에 있어서 ‘남북관계’라고 하고 북한은 ‘북남관계’라고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축구를 하면 한국은 ‘한일전’이라고 하고 일본은 ‘일한전’이라고 합니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경기를 하면 연대는 ‘연고전’이라고 하고 고대는 ‘고연전’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지금도 순서가 중요하고 특히 성경에서는 순서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호세아는 당시 대립관계에 있던 유다 왕들을 먼저 소개한 것입니까? 먼저 소개했다는 것은 자기 조국 북이스라엘의 왕들보다 라이벌인 유다의 왕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랬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북이스라엘에는 계속해서 무력 쿠데타가 일어나 왕조가 자주 바뀌었습니다. 힘을 가진 자가 왕권을 빼앗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조가 바뀔 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숙청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은 전형적인 인간의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달랐습니다. 유다의 리더들과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타락한 적이 많았지만, 그래도 다윗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유다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왕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세워진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라가 타락하고 정치적인 파워게임이 벌어지곤 했어도, 감히 왕권을 빼앗을 마음을 품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백성들의 분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호세아는 칼과 창으로 왕위에 앉은 자기 조국 이스라엘의 왕들보다 유다의 왕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존경입니다. 유다가 이스라엘보다 뛰어나서 그런 아닙니다.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서 드려지는 참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교제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호세아 자신이 태어난 조국은 북이스라엘이었지만, 영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의 조국은 유다였던 셈입니다.


그러한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하셨는데, 문제는 고멜이 엄청나게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다는 있습니다. 자녀 셋을 낳고도 끊임없이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습니다. 보통 남편 같으면 눈이 뒤집혀서 당장 잡아와 돌로 죽였을 텐데, 하나님은 호세아가 고멜을 용서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와 살게 하십니다. 그것도 비싼 값을 치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호세아는 결국 참다못해,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런 혐오스런 일을 시키실 있느냐고 하며 하나님께 따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바로 그것이 끊임없이 나를 배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나의 마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신약의예수 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는 같은 이름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길 구원을 얻을 있다고 소리 높여 부르짖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과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호세아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자신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호세아는 자기 눈으로 보고 맙니다. 그러나 비록 죄로 인하여 멸망당한 이스라엘이었어도, 하나님은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 2:23)

 


[나가는 ]


우리는 바로 시대의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되겠고, 나만 믿으면 된다고 것이 아니라 시대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바로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진정한 부흥의 불길이 우리에게서 일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백성으로 나아갈 있도록, 그래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그러한 주님의 종들이 있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회개하고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무너진 인생이라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소망을 우리 자신이 붙들 아니라 그것을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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