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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7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9

하나님의 사람, 능력의 사람

(열왕기하 6 1-23)


 

1.   물에 빠진 도끼를 건져낸 능력

 


엘리사는 사역을 준비하는 선지자의 제자들, 즉 선지생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엘리사에게 배우려는 제자들이 숫자가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왕을 비롯하여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푹 빠져 있던 때에 선지자의 제자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지만, 동시에 갑자기 불어난 숫자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함께 거할 장소가 너무 좁아진 것입니다(1).

 

가난한 그들에게는 당장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거나 새 건물을 지을 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맙게도 제자들이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발 벗고 나섭니다.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2절)

 

자기들이 요단으로 가서 직접 나무를 베어 엘리사와 함께 거주할 넓은 처소를 세우겠다고 자원합니다. 엘리사도 그들의 마음을 고맙게 여기며 축복하고 보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처음으로 해보는 집 짓는 일이기 때문에 좀 불안했는지, 엘리사에게 같이 가자고 청하고(3) 엘리사는 그들과 함께 요단으로 갑니다(4). 그렇게 해서 다들 요단 근처 넓은 장소로 가서 먼저 나무 베는 작업부터 시작하는데,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5절)

 

한 제자가 실수로 도끼를 물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새번역> 성경의 번역이 재미있습니다.

 

“그는 부르짖으며 ‘아이고, 선생님, 이것은 빌려 온 도끼입니다’ 하고 소리쳤다.”

 

물자가 흔한 요즘과는 달리, 그 당시는 철 연장이 귀하고 값이 비싼 때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생도의 형편으로는 돈을 주고 살 수가 없어서 사정사정하여 다른 사람에게 빌려온 도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물에 빠져 버렸으니 얼마나 큰 문제입니까? 집 짓는 작업이 늦어진 것은 물론이고, 당장 도끼 값을 물어낼 일이 큰일입니다. 이때 엘리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이르되 너는 그것을 집으라 하니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니라” (6-7절)

 

엘리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어디 빠졌는지 물어본 뒤,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사람이 자기 눈을 의심할 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무거운 쇠도끼가 마치 튜브처럼 물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6절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그 전에 먼저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1절에 “엘리사”, 2절에도 “엘리사”, 3절에도 “엘리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6절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그러고는 바로 그 뒤에 다시 “엘리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열왕기서 저자가 완전히 일부러 그렇게 쓴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구약에서 어떤 단어가 반복될 때, 또는 이런 식으로 같은 단어를 써도 되는데 일부러 다른 단어를 쓸 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 기적이 엘리사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누가 했습니까? 바로 엘리사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다만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큰 문제도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서, 자기에게 없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다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문제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상식으로, 과학 지식으로 무거운 쇠도끼는 당연히 물속에 가라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자연법칙을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사실 문제가 일어났다는 그 자체가 큰일이 아닙니다. 삶에 문제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오는 게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위해서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목장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가 필요하고, 예배도 당연히 혼자 할 수 있지만 교회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일어난 게 큰일이 아닙니다. 내 옆에 하나님의 사람이 없는 게 큰일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 나를 위해 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없는 게 진짜 문제입니다. 그래서 혼자 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건 성경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공동체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연약하기 때문에, 잘 하다가도 순간 넘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넘어지면 옆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나를 끌어주고, 그 사람이 잘 하다가 넘어지면 내가 또 끌어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쇠도끼가 물 위로 떠오르는 불가능한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죽은 사람이 살아나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주시고, 내가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그 소중한 것이 회복되게 해주시며, 지금 이 순간 나를 가장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어서 떠오르게 해주십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딤전 6:9-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에 밑줄을 쳐보십시오. 이것은 물론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이지만,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못 되는 주요 원인이 뭡니까?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은 중립적인데, 그 돈을 사랑하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물질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물질이 아니더라도 다른 것을 사랑하고 욕심에 빠지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의 핵심은 돈이라고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주변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부터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크리스천들을 보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하지는 않고,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고 하는 데를 찾아가려고만 합니다. 예를 들어, 큰 교회, 프로그램이 많은 좋은 교회, 좋은 설교자가 있는 교회로 갑니다.

 

그러나 내 옆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 내가 이렇게 좋은 데에 있다는 것으로 만족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인생이겠습니까!

 

여러분, 남들이 나를 부를 때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나 자신을 평가할 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이 사람은 탐욕의 사람이야’, ‘이 사람은 믿음이 없어’, ‘이 사람은 섬길 줄을 몰라’, ‘이 사람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야’, ‘이 사람은 항상 화만 내’, ‘이 사람은 늘 불평, 불만, 원망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야’...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저 사람은 시시한 사람이야’라고 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모든 사람이 나를 볼 때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야.’라고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적인 세계를 보는 능력

 

그 후 본격적으로 엘리사의 공적 사역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대적으로부터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이스라엘의 라이벌인 아람은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아람 왕은 참모들과 극비리에 전략회의를 열고, 군대를 보내어 먼저 군사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이스라엘의 허를 찌르려고 했습니다(8). 그런데 그때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의 작전계획을 알려줌으로써, 번번이 아람의 계획이 낭패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9-10절)

 

여기를 보십시오. 전부 ‘엘리사’라고 안 나오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를 통해 계속해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람 왕과 핵심 참모 몇 사람만 비밀리에 의논하여 재빠르게 군대를 움직였는데도 항상 이스라엘 군대가 귀신같이 먼저 알고 가서 그 자리에 진을 치고 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아람 왕 입장에서는 아주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처음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10)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1절)

 

아람 왕은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화가 나고 답답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 이스라엘의 스파이가 있는 게 아니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하지만 아람의 신하들 중 지혜로운 자가 있어서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2절)

 

이것을 보면 당시 엘리사의 명성이 아람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어떻게 아람 왕의 은밀한 전략회의 내용을 다 알겠습니까? 쇠도끼 사건 때처럼, 국가적인 위기 앞에 하나님께서 아람 왕의 악한 계획을 엘리사에게 다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다시금 엘리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원리를 모르니까 아람 왕은 혼란스럽고 화가 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시 20:7-8)

 

이제 문제의 원인이 엘리사라고 들은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합니다.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는 보고를 들은 아람 왕은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들을 보내 도단을 포위합니다(13-14).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사가 자기들의 비밀회의 내용까지 다 꿰뚫어본다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엘리사인데, 그것을 기억한다면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아람 왕이기에 무모한 짓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말과 병거와 많은 군대를 보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엄청난 아람의 대군이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엘리사가 머물던 도단을 겹겹이 포위합니다. 아람 군대의 살기가 등등한 상황입니다. 이것을 본 엘리사의 사환이 두려워하며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5절)

 

그 당시 유행어가 “아아, 내 주여”였던 것 같습니다. 쇠도끼를 빠뜨린 사람도 “아아, 내 주여”, 여기 엘리사의 사환도 “아아, 내 주여”라고 하는 걸 보니까 그렇습니다.

 

이때 사환이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문제만 터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당황해 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절망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같이 있었을 뿐이지,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벌벌 떱니다.

 

여러분,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고 있는 사환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됩니다. 두려워합니까? 괴로워합니까? 큰일 났다고 호들갑을 떱니까? 불평합니까? 원망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정도가 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보십시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6절)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은 “아아, 내 주여 어찌하리이까?”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라고 합니다. 이게 또 무슨 말입니까? 저 엄청난 아람의 군대는 어림잡아 봐도 성 안의 사람들을 다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많은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듣는 사환을 보며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7절)

 

지금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즉 하나님의 사람과 그냥 함께 하는 사람과 진짜 하나님의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은 이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엄청난 군사와 말과 병거를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진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보고 있습니다. 이게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그냥 함께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영적인 것을 알긴 알지만, 그냥 눈앞에 벌어지는 일만 보고 좋은 일이 일어나면 ‘기분 좋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큰일 났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상식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를 해주니까 기도의 응답으로 엘리사의 사환의 눈이 열리며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는 전혀 안 보이던 이 영적 차원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포위를 당한 것은 엘리사가 아니라 아람의 군대였던 것입니다. “아아, 내 주여, 큰일 났습니다”라고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 68:17-19)

 

여러분,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서 두려워하거나 큰일 났다고 느껴지십니까? 현실이 왜 그렇게 무섭게 느껴집니까? 문제가 왜 그렇게 커 보입니까? 영적인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도와주기 위해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은 “유령이다!”라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니까 유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님이 보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엄청난 군대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되면, 문제보다 훨씬 크신 주님이 보입니다. 믿으십니까?

 

지금 아람 군대가 엄청나게 많고 강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론 지금 큰일 났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훨씬 강하고 많은 주님의 군대가 나를 지키고 계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어떠한 역경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사환이 큰일났다고 했을 때는 안 보였는데, 불 말과 불 병거를 보았을 때도 다시 “아아, 내 주여, 어떡합니까?”라고 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주님의 영광을 볼 수만 있다면, 사람 앞에서, 문제 앞에서, 기죽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군대를 못 보고 두려워하는 사환을 보며 엘리사는 야단친 게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야단치는 게 아니라, 불쌍히 여기면서 하나님께 그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고 남들을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남편이 예수를 안 믿는 여성도가 이런 기도 부탁을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남편이 사업을 하는데 잘되어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 부탁을 받았다면, 그럴 때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기도해주시겠습니까?

 

물론 사업이 잘되어서 성공하게 해달라고도 기도해야겠지만, 그 전에 먼저 그 남편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먼저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못 만나서 지옥으로 가는데 돈만 많이 벌면 무슨 소용입니까? 비록 세상에서 실패해도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보고, 기도를 그렇게 해줍니다.

 

여러분, 세상이 너무 커 보입니까? 반면, 주님은 너무 작아 보입니까? 기도할 때입니다. 또 그런 상태에 있는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무슨 뜻입니까? 기도해야만 볼 수 있는 크고 은밀한 일,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부드러운 기도나 침묵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 그렇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응답하시며 이전에 알지 못했던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지금 눈을 뜨고 있지만 자아가 살아서 자기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은 막혀 있는 벽 밖에 안 보입니다. ‘아, 벽이 막혔구나. 큰일 났구나.’ 그런데 사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절망적인 상황을 아주 잘봅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교회에서도 뭔가를 믿음으로 추진할 때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는 이유가 참 많습니다.

 

사실은 그런 것이 상식적으로 다 맞는 말입니다. 이건 이런 상태니까 안 되고, 저건 저런 상태니까 안 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절망을 그렇게 잘 봐서 뭐 하겠습니까? 절망은 절망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그 절망적인 상황을 넘어 있는 놀라운 영적인 세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보입니다. 기적이 보이고, 그 막힌 벽을 넘어서 존재하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보입니다. 이것을 정말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아람 군대를 사로잡은 능력

 

이제 엘리사는 몰려오는 아람 군대의 눈이 잠시 어두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18). 그 즉시 하나님은 아람 대군의 눈을 안 보이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군대라고 해도, 갑자기 눈이 안 보이니까 순식간에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신을 잡아 죽이러 오는 적군이니까 엘리사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그들을 순식간에 전멸시켜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달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눈이 안 보이는 그들을 인도해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안으로 끌고 갑니다(19). 그리고 다시 기도하여 그들의 눈을 뜨게 합니다(20).

 

어리둥절한 아람 군대가 눈을 떠서 주위를 살펴보니, 이게 웬 일입니까? 적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게 아닙니까! 성벽 주위로 엄청난 수의 이스라엘 군대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자기들을 노려보며 활을 겨누고 있습니다. 명령만 떨어지면 곧 벌집이 되어 전멸당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원수 같은 아람의 군대가 제 발로 함정에 빠진 셈이 되니까 이스라엘 왕은 흥분하며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1절)

 

이스라엘 왕이 요즘 표현으로 좀 촐싹거리고 있습니다. 힘이 약한 사람이 힘이 강한 사람에게 쩔쩔매고 있다가, 더 힘이 센 사람이 와서 그 강한 사람을 딱 잡고 있으니까, 얻어 맞던 사람이 갑자기 흥분하면서 “때릴까? 때릴까?”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이나 연속해서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라고 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 왕은 보통 흥분한 게 아닙니다. 사실 엘리사의 허락을 구한 것이 아니라 확인을 구한 것입니다. 사실 공격해서 전멸시키는 것이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왕도 아람 왕처럼 영적 분별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사가 힘들게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 성까지 데려온 목적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지극히 인간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2절)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무력으로 사로잡은 자라도 함부로 죽이면 안 되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포로 된 자들을 어떻게 죽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아람의 대군이 이렇게 제 발로 포로가 된 것은 이스라엘 군대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해주신 일을 가지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처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전혀 내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닌 축복의 순간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치 그것이 내 것인 것처럼 착각하고, 함부로 인간적으로 반응해서는 곤란합니다. 뜻밖의 축복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오히려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순순히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 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23절)

 

이스라엘 왕이 그래도 그 말을 듣고 잘 대접하여 보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베풀어 먹고 마시게 하고 보냈을 때 마음이 상당히 쓰렸을 것입니다. 다 전멸시키고 싶었는데 오히려 먹여서 보내니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겠습니까?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이렇게 하는 것은, 그의 낯을 뜨겁게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너에게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잠 25:21-22, 새)

 

이것을 통해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확실히 보았습니다. 엘리사의 목표는 단순히 자기 생명을 건지는 것이 아니었고, 아람 군대를 죽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아람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변화 받고 하나님을 믿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물론 그 뒤의 본문에 보면 아람 군대가 그 은혜를 잊고 또 쳐들어오는 악을 저지릅니다. 비록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미움은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다툼은 용서로 이겨야 합니다. ‘살려보내면 또 와서 나를 공격하지 않겠느냐?’ 거기까지 계산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사랑을 베푸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다 용서하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잃어버린 도끼 하나까지도 찾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소한 문제 하나하나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십니다. 동시에 아람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이 엄청난 큰 문제도 하나님은 해결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문제이든 큰 문제이든, 모든 문제에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너무 큰일이기 때문에 압도될 필요도 없고, 또 일이 잘 풀린다고 자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영적인 눈을 떠, 문제보다 크신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영광이 이곳에 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귀한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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