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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1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1 ✦
“하나님의 절묘한 타이밍”
(열왕기하 8장 1-15절)
1. 수넴 여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면, 하나님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며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한두 번만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함께 하기 때문에, 아무리 복잡하고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염려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어려움 앞에서 그때그때 돌파구를 열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넴 여인이 바로 그러한 은혜를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4장을 보면, 이 여인은 쉴 새 없는 사역으로 지쳐 있던 엘리사를 위해 좋은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엘리사를 위해서 자기 집에 아늑한 방을 만들어 편히 쉬도록 세심한 배려도 한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고마운 마음에 이 여인에게 소원을 물었고, 여인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녀에게 오랫동안 아기가 없고 남편도 나이가 꽤 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기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잘 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와 같이 들에 있을 때 머리가 아프다고 하며 집에 온 다음 어머니 무릎 위에서 죽어 버립니다. 여인은 이 일로 인하여 엘리사에게 달려왔고, 엘리사는 여인의 집으로 가서 그 아이에게 위에서 몸을 포개고 두 번을 기도하니까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여인이 오늘 본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봐도 아주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이 여인이 두 번째 나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여인에게 다시 한 번 인생의 위기가 몰려온 것입니다. 어떤 위기였는가?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 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니” (1절)
이 위기는 이 여인에게만 닥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전국에 걸친 재앙이었고 우상 숭배에 빠져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패역한 나라 전체를 기근으로 징계하시는 중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 수넴 여인을 위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 여인과 가족에게 기근을 피해서 7년 동안 다른 곳으로 가 있으라고 해주십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안정되게 살던 곳을 갑자기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사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즉시 길을 떠납니다.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칠 년을 우거하다가” (2절)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혹시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실 때 갈등 없이 이렇게 일어나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나와 내 가족이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데도, 가면 손해 볼까봐, 어려울까봐, 힘들까봐, 움직이지 않고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믿음의 선배들은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결코 쉽지 않았지만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비전의 길이 열렸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어딘지를 알아야 가죠? 알려주실 때까지 안 가겠습니다.’라고 안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세도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분노하셨을 때도 끝까지 ‘그래도 난 안 갑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벌을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그들의 놀라운 인생은 펼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후에 부를 찬양 곡의 가사처럼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주님 말씀하셔도 나는 안 가겠습니다. 주님 뜻이 아니라도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하기 때문에,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독한 기근에서 보호해주시기 위하여 이 수넴 여인에게 낯선 외국 땅으로 떠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꽤 부유하게 살던 여인이었는데도 이런 명령을 주신 것을 보면, 곧 닥칠 7년의 기근이 보통 혹독한 기근이 아니었다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엘리사를 믿었고 그에게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떠나 블레셋 땅으로 갑니다.
이것을 보면, 그 당시 기근이 블레셋에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친 재앙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근은 당시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런데 그 징계 중에도 믿음의 여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 지역의 땅에 이처럼 저주가 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습니다. 이 수넴 여인은 블레셋에서 7년을 머물게 되는데, 2절에서 “우거하다가”라는 말은 나그네로서 잠시 체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여인과 가족이 블레셋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상당 기간을 블레셋에서 살았지만, 그곳에 정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나그네로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 인생입니다. 오죽 하면 옛날 한국의 흘러간 옛 노래에서 “나그네 인생”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1-12)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위해 잠시 외롭고 답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삶에서 적응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갇힌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져도, 주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길을 주시기 위해서 잠시 나를 힘들고 낯선 환경에 몰아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백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시 91:1-4)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수넴 여인이 이방 땅인 블레셋에서 견뎌야 했던 시간은 7년이었습니다. 그 7년이라는 기간은 아주 힘든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혹시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지금 하나님이 나를 외롭고 힘든 자리로 보내셨습니까? 마치 좁은 곳에 가두어놓으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오히려 선한 뜻을 가지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7년의 기근이 끝난 후 수넴 여인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7년 동안이 힘들었지만 그 기간은 이 여인을 보호해주시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칠 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돌아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3절)
집으로 돌아온 여인이 자기 집과 땅을 되찾기 위해 왕에게 호소하러 간 것입니다. 아마 블레셋에 거주하던 7년 사이에 여인의 집과 땅이 나라에 속하게 되었던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대부분 그 가정의 가장인 남자가 당연히 하게 마련인데, 이 여인은 직접 왕에게 간 것으로 보아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분명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것은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여자의 몸으로, 특히 사회적 지위가 없는 과부는 사회적 지위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7년이나 떠나 있는 중에 잃어버린 집과 전토를 왕에게 호소하여 다시 되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참 나라가 어려울 때 외국으로 도망갔다가 이제 와서 자기 재산을 달라고 하는 이기주의자라고 매도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 외에는 따로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에 왕에게 간 것입니다. 다른 지역 관리에게 가지 않고 왕에게 간 것을 보면, 이미 거절을 당한 겁니다. 하급 법원에서 지면 상고를 해서 위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마침내 끝에는 대법원까지 가는 식으로, 처음에 지역 관리에게 말했는데 안 들어주니까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가 왕에게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가더라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결해주리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미리 앞서 가며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자신의 상황만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상황들을 동시에 보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놀라운 시간과 방법의 조화로 그 일들을 아주 기가 막히게 연결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만 보시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보시며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으시기 때문에, 놀랍게 연결시켜주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왕에게 호소하러 가던 바로 그 시각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그것을 보십시오.
“그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하며 이르되 너는 엘리사가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설명하라 하니,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의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하니라” (4-5절)
여기에 게하시가 등장하는데 이것부터 뜬금없습니다. 5장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줄 때 게하시가 탐욕을 품고 몰래 선물을 받아 오니까 나아만의 나병이 게하시에게 들었습니다. 그 후 안 나오다가 게하시가 여기에 다시 나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때 하필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종인 게하시를 불렀고, 그에게서 엘리사의 전설 같은 기적들에 대해 자신에게 설명하라고 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도 게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5), 즉 수넴 여인의 죽었던 아들을 다시 살린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살렸고...”라고 하는데 바로 그 순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수넴 여인과 그 살아난 아들이 왕에게 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해 호소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의 일치이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가요?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 절묘한 하나님의 타이밍이며 섭리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기적입니다.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 왕이 하필 이때 게하시를 불렀습니까? 할 이야기들도 많은데 왜 엘리사의 기적들을 설명하라고 한 것입니까? 또 기적들도 많은데 게하시는 왜 하필 그때 수넴 여인의 아들 이야기를 한 것입니까? 물론 다른 기적들도 이야기했겠지만, 어떻게 이 여인이 들어올 때 딱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바로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게하시도 그때 수넴 여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랍니다. 어떻게 저 멀리 사는 여인이 지금 여기 있는지 놀라서 왕에게 말합니다. “이 여인이 바로 그 여인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엘리사가 살려준 바로 그 아들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도 너무 놀라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사실 여부를 묻습니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설명한지라 왕이 그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이르되 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 주라 하였더라” (6절)
왕은 수넴 여인의 요청을 해결해주기 위해 즉시 특별 관리까지 임명하여 그 여인의 기업(집과 땅)뿐 아니라 여인이 없었던 7년 동안의 수확까지도 다 계산해서 돌려주게 해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이 한꺼번에 술술 풀릴 수가 있는 겁니까? 이것이 100%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 왕이 그렇게 정의로운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왕조차도 이걸 보니까 놀라운 겁니다. 그래서 너무 놀라며 여인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연처럼 보이는 사소한 일까지도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아주십니다. 단, 아무에게가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이렇게 보여주십니다. 사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면, 자기에게 실제로 해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희한하게 퍼즐처럼 꿰어 맞추어지고 이어지면서 결국은 선한 결과를 맺게 됩니다. 퍼즐을 흩어놓으면 이게 뭔지 알 수 없지만, 맟추어보면 아름다운 그림이 거기에 완성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이것도 자세히 보십시오. 뒷부분만 좋아하는데, 누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까?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나중에 나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별로 해결이 안 되면 하나님이 안 도와주신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럿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가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평생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투자하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주시고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2. 벤하닷과 하사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그 후 이어지는 사건은 엘리사의 사역과 영향력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 나라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과 라이벌 관계였던 아람의 왕 벤하닷이 깊은 병에 걸립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다메섹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왕에게 들리기를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하니” (7절)
적국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이미 엘리사의 명성은 아람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나병 치료와, 아람과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드러난 엘리사의 역할을 통해서 그는 이미 아람에서도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는 그들도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두려워하면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야, 믿음의 사람이야’라고 해야지, ‘저 사람은 예수 믿는다면서도, 교회에 다닌다면서도 나보다 못해’라고 하면 큰일입니다. 전도가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결정적인 때 거룩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한마디를 하면 영적인 권위가 섭니다.
벤하닷은 자신의 오른팔과 같은 신하 하사엘에게 예물을 잔뜩 들고 엘리사에게 가서, 자기가 과연 이 병에서 나을 수 있을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 8절에 보면 “그를 통하여 여호와께 물으라”고 하는데, 평소에 우상 신들을 섬기던 벤하닷이었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님께 묻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 능력만은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신하 하사엘을 불러 가장 극진한 예우로 엘리사에게 가게 합니다.
“하사엘이 그를 맞이하러 갈새 다메섹의 모든 좋은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 가지고 낙타 사십 마리에 싣고 나아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 이르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하니” (9절)
절대 권력자인 왕이지만 엘리사에게 와서 말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신하를 보냅니다. 그것도 낙타 40마리에 아람 최고의 예물들을 싣고 가서 또 자기를 부를 때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라고 부릅니다. 왕이 자기 스스로를 엘리사에게 “당신의 아들”이라고 낮출 정도로 큰 겸손을 보여줍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말이 아니라 겸손을 보여줍니다.
벤하닷은 불신자였지만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실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올 때 이런 겸손은 너무 귀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10절)
엘리사는 벤하닷의 사신으로 온 하사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줍니다. 그런데 서로 반대가 되는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왕의 병은 나을 것이지만, 왕은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벤하닷이 죽기는 죽을 것인데, 그 이유가 병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왕이 암살자에 의해 죽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우리 인간들입니다. 벤하닷에게는 당장 자기 몸을 괴롭히는 병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건강만 회복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병이 나을지를 엘리사에게 물어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닥친 진짜 문제는 병이 아니라 최측근 신하 하사엘의 배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도 ‘이게 지금 내게 가장 큰 문제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위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훨씬 더 심각한 위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 나 자신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 가장 심각한 위험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각자 다 다를 겁니다. 뭐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지금 내 마음을 가장 괴롭히고 평안을 앗아가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지금 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내게 괴로움을 주는 것보다도, 하사엘처럼 내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어떤 것이 오히려 내게 가장 큰 위험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내 인생에 지금 그게 무엇입니까?
여러분, 지금 무엇을 신뢰하고 의지하십니까? 내가 가진 돈입니까? 내 배우자입니까? 내 자녀입니까? 부모님입니까? 사회적 위치입니까? 그것이 진짜 문제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해치는 것일 수 있다는 겁니다. 당사자인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문제와 위험이 지금 내 뒤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고 대비하겠습니까? 우리는 못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의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기도하라,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이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 그걸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알지 못하는 문제와 위험을 깨닫는 눈을 주십시오. 저를 지켜주십시오. 제가 지금 생각하는 문제가 진짜 문제가 아닐 수 있는데 진짜 문제가 무엇입니까?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람이 그가 부끄러워하기까지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우니” (11절)
특이한 것은, 엘리사가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면서 하사엘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민망하게 여길 정도로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하니까 얼마나 이상했겠습니까? 그러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하사엘은 당황하며 왜 우느냐고 묻습니다.
“하사엘이 이르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하는지라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니, 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 (12-13절)
엘리사는 하사엘이 아람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하고, 왕이 된 다음에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이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사엘은 원래 이런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왕 앞에서, 또 엘리사 앞에서는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라고 하며 굽신거립니다. 그러니까 왕이 속은 겁니다.
물론 하사엘이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엘리사는 자기 백성을 향해 하사엘이 그런 악행을 저지를 것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와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하사엘은 부인하고 있지만, 엘리사는 이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13). 하사엘은 자기를 가리켜서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며 아니라고 하지만, 엘리사는 “하나님이 내게 알게 해주셨다. 너는 네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잔인한 사람임을 하나님이 내게 알게 해주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엘리사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앞으로 자기 동족들을 무참히 살해할 사람이니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숙입니다. 엘리사는 동족에게 다가올 엄청난 시련을 미리 보면서, 또 그 고통을 가져올 주인공을 자기 눈앞에 두고도 눈물을 삼키며 참아내고 있습니다.
“그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의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그에게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반드시 살아나시리이다 하더이다 하더라” (14절)
벤하닷에게 돌아온 하사엘은 엘리사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으니까, “엘리사는 왕이 틀림없이 회복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 대답입니다. 분명히 병에서는 낫지만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는 것을 말을 안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안심하고 잠든 벤하닷을 살해합니다.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5절)
하사엘이 벤하닷을 죽이는 방법은 아주 창의적인 방법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칼이나 창으로 푹 찔러 죽일 텐데, 이불에 물을 적셔서 얼굴에 덮어 질식사하게 만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하사엘이 엘리사의 예언을 듣고 가서 ‘아, 내가 왕이 되는구나. 그럼 빨리 왕을 제거해야지.’라고 한 게 아닙니다. 원래는 계획에 없었던 일을 충동적으로 벌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은밀히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면서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엘리사에게서 들킨 겁니다. 엘리사에게 직접 그 말을 듣게 되니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조급한 마음이 되어서 즉시 벤하닷이 잠잘 때 살해한 것입니다. 엘리사가 이때 어디 있었습니까? 다메섹에 있습니다. 자기 동네에 있으니까 이 말이 퍼질지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하사엘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해졌겠습니까?
병 때문에 죽을까 봐 걱정하던 벤하닷은 전혀 뜻밖에 자신이 신뢰하던 하사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결코 우연히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것을 다 알고 계셨고 준비하셨던 일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를 보내셔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붓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왕상 19:15)
엘리야를 통해 오래 전에 말씀하셨던 사실이 엘리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심판이든 축복이든,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을 통해 같은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이때는 처음 하사엘이 기름 부음 받은 때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으며, 때가 되면 이처럼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볼 때 엘리사와 관련하여 두 사람을 봅니다. 하나는 전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수넴 여인입니다. 다른 하나는 절대 권력자이면서도 자기에게 다가온 반역의 칼을 전혀 알지 못했던 벤하닷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상황이 외롭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보호해주시며 뚫고 나갈 길을 마련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이렇게 세상에서 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고 큰 성공을 이루었더라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며 살다가 결국 이렇게 갑자기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이며 재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이든지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