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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18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2

예후를 통해 이루어진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

(열왕기하 9 1 ~ 10 36)



1.   아합 가문의 진멸


1)  기름 부음을 받는 예후


역사를 돌아보고 지금 세상을 보아도, 권력 주변에는 항상 폭력과 음모가 난무합니다. 그러나 악하고 무질서하게 세상에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에게 가장 악했던 아합의 가문을 심판하는 있어, 하나님은 예후라는 장군을 사용하셨습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게 보였던 아합 가문을 그가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유다의 아하시야 왕까지 제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히 성취되는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당한 이스라엘 요람이 이스르엘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8:29), 동시에 길르앗 라못에서는 예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계속해서 아람군과 접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아직 젊은 선지자의 제자를 불러, 예후에게로 가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고 지시합니다(9:1-2).


엘리사는 일을 지시하면서 다른 장군들이 보도록 예후를 장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거기서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합니다(2). 왕이 아직 살아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기름 붓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지시한 것입니다. 그리 기름을 붓자마자 지체하지 말고 즉시 도망치라고 합니다(3). 예후가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릴까 두려워 선지자의 제자를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들은 말씀 그대로 행하고 바로 도망합니다(10).


예후가 장막 밖으로 나오자 그의 동료들과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도대체 선지자 제자가 무슨 메시지를 은밀하게 전달하러 왔는지 궁금해 하며 묻습니다(11). 그런데 선지자를 “그 미친 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굉장히 거친 사람들입니다. 예후는 처음에는 대답을 했지만(11), 무리가 말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자 선지자의 제자가 해준 이야기를 모두 전해줍니다.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다. 아합의 집을 치라.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멸절하리라. 이스르엘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예후의 동료들과 부하들은 즉시 그를 왕으로 추대합니다(13).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왕에 대한 불만이 신하들 사이에 가득했고, 예후가 이미 동료들과 부하들에게 리더십을 인정받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아시고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후를 왕으로 세우시며 분명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합을 쳐서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9:7)

 


2)  이스라엘 요람의 죽음


예후는 먼저 쿠데타 소식이 외부로 알려지지 못하게 철저한 함구령을 내린 다음(9:15b), 즉시 군대를 이끌고 요람 왕이 있는 이스라엘 성으로 향합니다(9:16a). 그때 망대에 있던 파수꾼이 예후의 군대가 질풍처럼 달려오는 것을 보고 요람 왕에게 즉시 보고하자, 요람은 왕인 자신의 명령도 없이 무슨 군대가 오는 것인지 궁금하여 사자를 보내라고 지시합니다.


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있더니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내가 무리를 보나이다 하니 요람이 이르되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어 맞이하여 평안하냐 묻게 하라 하는지라” (9:17)


평안하냐 질문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상황이 어떤지 체크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일은 되었느냐? 전쟁에서 이겼느냐?”라는 뜻입니다. 전쟁터에서 많은 군대가 돌아오는 것으로 보아, 완벽한 승리가 아니면 패배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와서 질문하니까 예후는 사납게 외칩니다.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뒤로 물러나라” (9:18) 말은, 이상 요람의 부하로 예후 자신에게 저항하지 말고 자기 수하에 들어오라는 의미입니다. 왕의 사자는 단번에 상황을 짐작하고 즉시 예후의 편으로 들어갑니다. 나갔던 사자가 돌아오지 않자 요람은 다시 사람을 보냈지만, 똑같이 됩니다(9:19).


이렇게 예후는 왕이 번씩이나 보낸 사자들을 차례로 자기편에 흡수한 폭풍처럼 계속 진군을 합니다. 마침내 예후의 군대가 성벽 바로 앞까지 왔는데, 성벽 우에서 그들이 예후의 군대라는 것을 알아차린 파수꾼이 이것을 왕에게 보고합니다.


파수꾼이 전하여 이르되 그도 그들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가 모는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하니” (9:20)


당시 유행어가 ‘미친’이었던 같습니다. 파수꾼도 그런 말을 합니다. “님시의 손자 예후가 모는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미친 사람처럼 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후가 이끄는 군대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용장인 예후가 무슨 일로 왕의 명령도 없이 저렇게 전선을 이탈하여 맹렬히 군대를 이끌고 달려오는지 궁금해진 요람 왕은,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유다 아하시야와 더불어 직접 병거를 끌고 나가 예후를 맞이합니다.


요람이 이르되 메우라 하매 그의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요람과 유다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9:21-22)


요람이 예후에게 “예후야 평안하냐”라고 물은 것은, 예후가 이렇게 전쟁터에서부터 급히 돌아온 데에는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빨리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히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즉시 요람이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요람은 적들과의 전쟁만 걱정하며 평안이냐고 물었지만, 진짜 평안을 깨는 것은 이세벨의 사악함과 땅에 넘치는 우상 숭배라는 말입니다.


대답을 듣는 순간 요람은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서 반역이라고 외치며 급히 말머리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예후의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 그의 등에 명중하고 심장을 꿰뚫어 버린 것입니다.


요람이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하니,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진지라” (9:23-24)


이렇게 해서 아합의 아들 요람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자기 부하 예후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후와 요람이 마주한 곳이 어디입니까? 공교롭게도 나봇의 토지입니다(9:21).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후는 요람의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지라고 지시하면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시체를 가져다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밭에 던질지니라 하는지라” (9:25-26)


나봇의 토지는 요람의 아버지 아합의 죄악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라 토지를 팔지 않는 나봇을 이세벨의 계략으로 죽이고 그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분명히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왕상 21:19)


엘리야가 와서 아합에게 말씀을 선포할 예후와 빗갈도 거기 있으면서 같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은 아합의 자식 대에 와서 무섭도록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예후는 자신이 요람을 죽여 그곳에 던짐으로써 이것이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을 억울하게 죽인 것을 세대가 지난 후에도 잊지 않고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 당장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답답해하거나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한 값을 물으시고 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혹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손해를 보더라도, 당장 악이 득세하는 같더라도,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계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22:37-40).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신앙인에게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특히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만큼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혹시라도 삶에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 일이 있습니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깨는 것이 없는지 우리는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자리에 없는 3자에 대해 험담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깨는 사람이 아니라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전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면 싫어하십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목장으로 모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의 관계를 세워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교제를 하지 않는 사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고,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나오도록 해야겠습니다.



3)  유다 아하시야의 죽음


요람이 죽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유다 아하시야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가지만, 예후는 그를 쫓아가서 죽입니다.


유다의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9:27)


순식간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명이 모두 예후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하시야는 아합의 외손자였는데 마침 자리에 같이 있다가 예후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것은 아합의 후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하시야가 자리에 있었던 것은 어떤 우연이나 재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심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4)  악한 왕후 이세벨의 죽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남편을 뒤에서 조종하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악녀입니다. 이제 예후의 반란군이 쳐들어와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지만 끝까지 당당했습니다. 치장까지 예쁘게 하고 나와 예후를 맞이합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9:30-31)


이것은 이세벨이 예후를 시므리에 비유하며 조롱하고 있는 겁니다. 시므리는 쿠데타로 집권했다가 아합의 아버지인 오므리에게 7 만에 진압되어 죽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후도 시므리처럼 죽고 것이라고 저주를 겁니다. 그러나 순간 이세벨의 측근들조차 이상 충성을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편이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9:32-33)


조금 전까지도 그녀를 섬기던 내시들이, 예후의 한마디에 이세벨을 위에서 내던졌고, 높은 데서 떨어진 그녀의 시체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시체는 예후의 말발굽에 짓밟혔고, 결국 들짐승들이 먹고 형체를 알아볼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한마디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서 장사하려 한즉 두골과 발과 그의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 (9:35-37)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왕상 21:23)


죽기 전에 마지막 독기를 내뿜으며 이세벨은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비참하고 끔찍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2.   철저한 심판


이세벨도 죽었지만 아직 예후가 이스라엘을 장악하는 데는 장애물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합의 아들 70명이 여전히 사마리아에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누구라도 죽은 요람 왕의 후계자라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예후는 정면승부를 할 경우 자기편의 손실도 클 것을 알고 심리전을 택합니다.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너희 주의 아들들이 너희와 함께 있고 또 병거와 말과 견고한 성과 무기가 너희에게 있으니 이 편지가 너희에게 이르거든, 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그의 아버지의 왕좌에 두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더라” (10:1-3)

 

예후는 성안의 이스라엘 장로들과 아합의 아들들을 교육하는 선생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는 겉으로 보면 아합 가문에 충성을 다하라는 내용입니다. 아합의 아들들 70명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왕으로 삼고, 자신에게 대항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편지는, 이미 대세는 기울었는데 괜히 아합의 아들들을 끝까지 편들면 그들과 더불어 비참하게 망할 것이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경고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편지를 받은 성의 리더들은 벌벌 떨기 시작합니다(10:4). 요람과 아하시야 두 왕도 당해내지 못한 예후를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후에게 항복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 왕궁을 책임지는 자와 그 성읍을 책임지는 자와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지라” (10:5)

 

그들이 복종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예후는 무서운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후의 말대로 행합니다.

 

“예후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너희가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 명이 그 성읍의 귀족들, 곧 그들을 양육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편지가 그들에게 이르매 그들이 왕자 칠십 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 (10:6-7)

 

이렇게 해서 70명이나 되는 아합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최측근의 손에 의하여 하루 만에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정권이 잘나갈 때는 그 밑에서 복종하고 아부하며 권세를 누리던 이들이, 세상이 바뀌니까 지체하지 않고 얼른 주인을 바꾸면서 예후에게 굴복합니다. 참으로 비정한 세상입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은 예후를 비롯한 측근 장군들의 반란으로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악한 왕후 이세벨도 예후의 한마디에 겁먹은 측근 내시들에게 던져져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아합의 남은 70명의 아들들도 어릴 때부터 자신들을 키워준 선생들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맺어진 관계는 이렇게 허무합니다. 배신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 자기 살 길만 찾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에 붙으면서 정의도 명분도 다 저버립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 밖에서 맺어진 인간관계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모이더라도, 그것이 믿음으로 하는 교제가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만남이라면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또 씁쓸하게 끝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으로 재미있는 모임에서 그치지 말고, 믿음 안에서 형제자매의 관계로, 영적 가족의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으로 모여 사랑과 섬김을 연습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예후는 아합의 아들들의 머리를 문 어귀에 달게 했는데(10:8),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자신이 반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10:10)

 

그 후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이 사마리아로 가는 예후와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예후의 쿠데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신분을 예후에게 그냥 말해주는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예후가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10:13-14)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조가 심판당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동맹을 맺은 남 유다의 아하시야 왕족들까지 모두 멸망당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며, 이미 오래 전에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악한 사람의 권력의 맛을 함께 보기 위해 거기 붙어 있게 되면, 악한 자가 심판을 받을 때 함께 심판의 불똥이 튀게 됩니다. 악한 자들과 같이 있었어도 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악한 자와 함께 한 것이 곧 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시 141:4)

 

다윗은 악한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그들의 진수성찬도 먹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기는 악을 행하지 않았지만 악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철저히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3. 바알 숭배자들의 진멸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을 마무리한 예후는, 이제 이스라엘의 종교적 죄악에 대한 심판을 실행합니다. 사마리아에 도착하여 아주 기가 막힌 책략을 구사합니다.

 

“예후가 뭇 백성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아오게 하라 모든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계책을 씀이라” (10:18-19)

 

대개 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은 자들은 나름대로 정통성을 확보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존의 종교를 더욱 부흥하게 만들고 큰 제사를 벌이며 음식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바알 숭배자들은 새로운 정권을 일으킨 예후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드디어 큰 제사가 열리던 날, 온 나라에서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신당을 가득 메우게 됩니다(10:21). 그리고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예복을 주어 입게 해서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의 표시로 삼습니다(10:22).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더불어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여기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 명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넘겨 주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리라 하니라” (10:23-24)

 

예후는 입구를 모두 막고 80명의 무사들을 시켜 바알 숭배자들을 모조리 죽이게 합니다(10:25). 전무후무한 대학살이 벌어졌고, 바알 숭배자들은 씨가 말라 버립니다. 또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을 가져다 불사르고 신당을 헐어 변소로 만듭니다(10:26-27).

 

고대 중동에서는 신전을 다시 재건할 때 반드시 원래 있던 곳을 찾아 거기에 다시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변소로 만들어 더 이상 신전을 재건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후는 그만큼 철저히 바알 숭배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과 바알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모두 잔인했고 술수에 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는 일에 그들보다 더 저돌적이고 잔인하고 집요하며 술수에 능한 예후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실 예후는 그렇게 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점들을 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거나 거룩한 사람은 아니지만, 세상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비정하고 잔혹한 일도 하면서 일을 추진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도 쓰셔서 역사의 또 다른 악을 심판하고 바로잡아 나가기도 하십니다. 예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알 숭배의 잔재를 뿌리 뽑는 일에 철저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10:30)

 

그러나 그러한 예후도 여로보암 이후 계속 있어 온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는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0:29)

 

예후도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없애고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보낼 경우 그들이 남 유다에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를 그냥 두고 권력을 강화하려 한 겁니다.

 

결국 예후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품고 바알 숭배를 없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 정권의 잘못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개혁이 자신의 이익에 어긋난다고 판단될 때부터 그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0:31)

 

그 결과 예후는 왕권을 보장받기는 했지만, 통치 시절 내내 아람 왕 하사엘의 공격이 계속되고, 북 이스라엘의 많은 영토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10:32).

 

결국 예후와 그의 가문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으면 결코 완전한 평안과 번영이 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후의 개혁은 대단했지만 그것은 칼과 술수에 의한 정치적인 개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은 개혁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영적 개혁의 최종 목표는 외적인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스라엘과 유다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는 엘리사의 제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예후에게 전달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마치 눈덩이가 불어나듯, 순식간에 그 강대한 아합 왕조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만 움직이시면 역사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도 톡 치시면 한 번에 바뀌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 여전히 악이 판을 치고 있고, 악한 자들이 권력을 잡아 그들의 뜻에 따라 세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아도, 그런 일들은 많이 일어납니다. 악한 자들이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분명히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분명히 뜻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 순식간에 악한 세력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늘 서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준비되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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