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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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7일 성금요일 예배

성금요일 메시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복음 1925~27)

 

[들어가는 말]

 

우리가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고 회개로 새 삶을 찾게 되거나, 침체 속에 있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때, 그것은 언제나 한 가지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깨달으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곱 마디를 소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1언은 이것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23:34).

2언은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입니다.

 

두 번째 말씀을 하신 후에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주님께서는 그 엄청난 고통을 견디시면서 세 번째 말씀을 하십니다. 숨을 쉬기도 힘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첫 두 마디 말씀이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면, 세 번째는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고,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이 세 번째 말씀은 사복음서 중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었습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건을 목격한 증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필채로 이 세 번째 말씀을 포함하여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돌아가시고 또 그 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우리에게 생생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온 사람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남기시기 전의 상황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5)

 

십자가 곁에 있던 여자들의 이름이 죽 나오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은 곁에 서서 모든 것을 지켜봤습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두 종류의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백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위하여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였습니다.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만 명을 먹이시던 때 거기 있으면서 그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은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치던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고난의 현장에서는 그 좋으신 주님의 고난을 구경하는 구경꾼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 전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하고 외치던 군중 가운데 그들도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많은 사랑과 은혜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저 끌려가시는 주님을 구경하며 따라가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그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여인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보며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계속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만은 백성들이 그냥 따라가던 그 길이, 이 여인들에게는 왜 눈물 없이는 걸어갈 수 없는 길이 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은 진심으로 사랑했고 존경했습니다.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온 무리 중에서 구경하기 위해 왔던 이들은 조롱하다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구경꾼들은 다 돌아가 버린 황량한 골고다 언덕 위, 피로 범벅이 된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여인들을 서 있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고난이 구경거리일 수가 없었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분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면 이 여인들처럼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의 현장에서 아픔을 같이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현장에는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기적의 현장에는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평생 다리를 못쓰던 사람을 일으키시는 기적을 일으키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예수님 곁에는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베풀어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먹고 예루살렘에서 자기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던 그 많은 사람들, 심지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다 흩어졌거나, 구경하다가 조롱을 다 하고 나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할 때가 있었는데 왜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지를 못했습니까? 그것도 이유가 하나입니다.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이을 얻고자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저분을 따라다니면 뭔가 떨어지는 게 있겠다.’ 했는데 그러다 소망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죽여라!’ 하고 외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보지 마시고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사랑하는가?’ 여러분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정말입니까? 그런데 왜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되었다고 머물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인색합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흘러서 기도의 자리가 눈물로 젖어본 때가 도대체 언제입니까? 여러분, 기도하실 때 기도 시간은 손수건이나 티슈를 준비할 정도로 눈물이 흐릅니까? 감사해도, 기뻐도 눈물이 납니다. 십자가의 감격이 마르지 않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점검해야겠습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감사의 눈물이 있는가? 나는 정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점점 사랑이 메마르고 눈물이 없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잘 지켜라. 잘 믿어라. 말씀을 지켜라. 열심히 봉사해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그리고 둘째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해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세 번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 아래에까지 따라온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특별한 사랑이 특별한 말씀을 듣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기뻐하시며,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따라가면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나를 따라와라.’라고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연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는 사람들에게만 주님의 말씀이 들리고 이해가 되고 실천이 가능해집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들려주시고 기적을 보여주셔도, 이사야의 말씀대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됩니다.

 

혹시 기도해도 주님이 응답을 안 해주시고 성경을 읽어도 주님께서 그 뜻을 알려주지 않으신다고 생각됩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

 

여러분,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야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행동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사랑이 식은 겁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뜨겁게 사랑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고 문자나 영상통화도 자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횟수가 줄어듭니다. 사랑이 식는 겁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 안 되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주님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 멀리 떨어진 것 같을 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거기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2.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순간 세상 누구보다 가장 마음이 아픈 사람은 육신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30여 년을 같이 살아온 아들 예수가 지금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가장 흉악한 강도들과 함께 근거 없는 누명을 쓰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 앞에서 죽어가는 예수는 단지 자기 아들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마리아의 아들로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세주로서 죽임을 당하고 계신 것이며, 그 죽음은 단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세상의 구원을 주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6)

 

여자여라는 말은 우리말로 비하하는 것 같지만, 헬라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귀네’(또는 귀나이’)인데, ‘아내, 부인, (성인)여자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처럼 비하나 경멸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존칭입니다.

 

이것은 자기 아내나 다른 사람의 아내 또는 어머니나 누구든지 어른인 여자에 대해 두루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귀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한 예수님의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고난 때문에 슬픔으로 가득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름으로써 그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자신의 육신은 갈기갈기 찢긴 상태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지만, 마리아가 받을 마음의 상처를 염려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비록 이 여인의 몸을 빌려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그녀의 아들로서 고난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30년 동안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며 살았지만, 이제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혈육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시며, 모든 사람을 위한 구세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전한 희생과 섬김으로 살아오셨고, 이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3.   보라 네 어머니라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요한을 소개하십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7)

 

주님은 이제 마리아의 관계에서 아들로서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십니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와 이 자리에 있는 요한을 마리아에게 아들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를 다른 동생들에게 맡기지 않고 요한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하십니다. 그때부터 마리아는 요한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한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어주신 것은 마리아가 너무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앞으로 성령이 오실 때 그들은 완전히 한 가족, 한 공동체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원래의 가족 관계를 부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지금 자기 가족들의 도움을 다 거부하고 다른 믿는 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라는 뜻도 아닙니다. 피로 맺어진 관계가 실제적인 것처럼, 성령으로 맺어진 관계는 그 이상으로 친밀한 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줍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믿음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 동기간이 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영적 가족 관계를 기뻐하며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마리아와 요한이 한 가족이 되었듯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요한이 어떻게 거기 와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주님이 끌려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만 도망간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요한도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두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하였기 때문이다.”(14:27)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갈 때 그들과 함께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요한이 어떻게 이 자리에 와 있다는 말입니까?

 

베드로와 자기 형 야고보를 비롯하여 열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지금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회개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지금 요한 혼자 주님의 마지막 유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비록 다른 제자들과 같이 실패했고 주님을 버렸지만,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언덕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배신하고 도망갔다가 십자가 아래 왔지만,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참혹한 주님의 모습 앞에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것에 대해 후회가 되고, 지금 고난받으시는 주님의 참혹한 모습을 볼 때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때 주님 앞에 용서를 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자기를 가리켜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자기에게 어머니를 맡겨주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실패하고 도망갔던 요한을 향하여 관계를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하신 말씀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마리아의 생계를 부탁하신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요한은 유대에서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유대 땅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얼마 전인 66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가 이미 순교(AD 62)한 다음입니다. 유다서를 유다와 다른 형제들도 다르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갔을 것입니다. 당시 마리아는 나이가 매우 많아서, 아마 80대 중후반쯤 됐을 텐데도 요한은 마리아를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에베소까지 그 먼 길을 모시고 함께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터키의 에베소에 가면 산 쪽에 마리아가 살았다고 하는 집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곳을 성지로 생각하며 교황도 세 번이나 방문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장소에 마리아가 정말로 살았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마리아가 말년에 에베소에 와서 살다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알려주는 흔적들과 자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은 끝까지 신실함으로 주님의 사랑에 보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요한에게 마리아의 생계를 책임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다른 아들들도 있는데 왜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관심은 마리아의 생계가 아니라 예수님을 버리고 실패해서 자책하고 있는 요한에게 사랑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일부러 세 번을 물으시면서 세 번 부인했던 그를 회복시켜주시는 그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보이고 계십니다.

 

한때 주님을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요한과 같은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체험이 많은 사람도 쓰러질 수 있고,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대단한 열정으로 하나님만 위해 살아온 사람도 때로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어떤 일이 생겨서 흔들릴 수 있고, 잠시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요한처럼 도망가고 실패했을 때 또 요한처럼 돌이켜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가 십자가 앞에 머리 숙이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용기와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요한은 비록 실패했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자기가 버리고 도망갔던 주님이 끔찍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았고, 거기서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복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약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은 기억도,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기뻐하던 감격도, 또 엄청난 영적 체험도 우리를 붙들어주지 못합니다. 주신 은혜는 감사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계속 붙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열정이나 경험이나 연륜이 우리를 붙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잘한 것은 감사하지만 지금 주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성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다 없어지고 천사 같이 된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죄는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조금만 해이해지면 바로 죄를 짓게 되는 죄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가 있지만 은혜로 그것을 덮는 겁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자리에 늘 나 자신이 머물게 해야 합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늘 가게 해야 하는 겁니다. 은혜에서 떠나는 순간 죄가 올라옵니다. 죄의 핵심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 노릇, 주인 노릇을 하는 겁니다. 은혜에서 떠나는 순간 내가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삶이 복잡해집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의 은혜에 붙들려 사는 것 외에는 올바로 살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언제나 주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은혜가 있는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황금 같은 이 금요일 저녁에 여기 나와 예배하시는 것은 정말 잘하신 겁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자꾸 나를 가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방종과 음란과 온갖 죄악이 있는 곳에 자꾸 나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기에 물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자꾸 나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은혜에 물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와 말씀 묵상과 예배를 떠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삶 공부도 하셔야 합니다. 목장 모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데서 소홀해지면 거기 사탄이 틈타서 우리가 넘어질 가능성이 커집니다.

 

오늘 요한이 맞이한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관심은 요한이 자신을 버린 과거가 아니라, 그를 불러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거룩한 부르심을 따라 앞으로 계속 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이 돌아와 십자가 아래 섰을 때, 주님은 이미 그를 용서하셨고 당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할 새로운 가족을 주셨습니다. 단순히 어머니 마리아를 잘 모시라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는 겁니다. ‘너는 나의 가족이다.’라고 선언하시며 회복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요한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은혜입니다. 여러분, 나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침체 가운데 있습니까? 한때 뜨거웠던 마음이 냉랭해져 있습니까? 한때 자신을 사로잡던 피 묻은 복음의 감격이 식었습니까? 불순종의 길에 서 있습니까?

 

오늘 자신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한 사랑과 배려의 음성, 그리고 사랑으로 요한을 부르시고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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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아사: 하나님을 놓고 대신 붙잡을 것은 없다 (대하 16:1-14) - 누가 나의 왕인가 4 (2/1/23) admin_p 2023.02.02 552
361 여로보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열심ㅁ을 버리라 (왕상 12:25-33) - 누가 나의 왕인가 3 (1/25/23) admin_p 2023.01.26 385
360 솔로몬: 세상에 보험 들지 말라 (왕상 11:1-11) - <누가 나의 왕인가> 2 (1/11/23) admin_p 2023.01.12 615
359 사울: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무너뜨려라 (삼상 15:7-23) - 누가 나의 왕인가? 1 (1/4/23) admin_p 2023.01.05 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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