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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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4일 수요예배
✦ 누가 나의 왕인가? 1 ✦
사울: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무너뜨려라
(사무엘상 15장 7~23절)
오늘부터 수요예배 새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누가 나의 왕인가?>입니다. 코로나 사태도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이 제대로 성장하지 않는 것을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핵심이 바로 ‘Lordship’에 있는 것을 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이기 때문에 신앙 성장이 되지 않고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번 시리즈로 lordship에 대한 것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의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의 <누가 왕인가?> 책을 발견하고 앞으로 몇 주간 이 책을 나누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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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요즘은 웹툰이 아주 인기인데, 웹툰으로 인기를 끌면 드라마로 만듭니다. 그런데 웹툰 이전에 웹소설이 나오고 그중 인기를 끌면 웹툰으로 나오고 또 드라마로 만듭니다. 그렇게 웹툰이 인기를 끌기 이전에 인기를 끌던 《광수생각》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한 남녀의 대화가 나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유명한 변호사에 빌딩도 두 채나 가진 부자야. 그리고 나도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다녀. 게다가 난 삼 형제 중 막내야. 그런데 너는 왜 내 청혼을 받아 주지 않는 거야? 내 배경과 스펙이 마음에 안 들어?”
그 얘기를 듣던 여자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음... 네 배경과 스펙은 마음에 드는데, 네가 싫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만,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쓰시려면 내가 이것저것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조건이나 능력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 직분도 그 기준이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의 사람이어도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실 수 없습니다. 스펙이나 재능이나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쓰임을 받는 조건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 사울도 처음엔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전에도 살펴본 적이 있지만, 사울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실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무엘이 사울을 질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질책은 사울에게 과거를 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7절)
하나님은 사울의 스펙을 보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우신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스스로 자기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신 이유는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사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자꾸 전쟁에서 이기고 잘나가다 보니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도 내가 혼자 알아서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사울을 쓰실 수 없었습니다.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때도 복음 앞에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했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라는 말도 있듯이, 날아다니는 것이 추락하지, 땅에 있는 건 추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을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쓰시기 시작했을 때의 겸손함이 남아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처음 만나 기름을 부을 때 사울은 참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삼상 9:21)
우리가 살아갈 때 자신감과 능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당시의 사울은 참 훌륭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 쓰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모습을 금방 버리고 타락해버렸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은 하나님이 아멜렉과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을 버리신 이유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때는 우리가 돈이 없거나 능력이 없을 때가 아닙니다. 패배했을 때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제일 잘나갈 때가 위험할 때입니다. 사실은 너무 잘나가서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도 버리십니다. 사실 버리신다기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을 쓰실 수가 없는 겁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떠나니까 하나님도 그를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이제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 없고, 내 알아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동안 누렸던 하나님의 복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전에 했던 신앙생활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결코 먼저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버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놓아두시는 것입니다.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10-12절)
이때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무엘은 하나님을 떠난 사울을 보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밤을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사울을 돌아보아주십시오. 한 번만 봐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사울이 끝까지 예배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게 된 것입니까? 12절에 열쇠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념비가 아니라 사울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운 겁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기념비가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비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 앞에 서고,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열두 지파와 제사장들과 함께 강에서 열두 돌을 취하여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들은 그때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오늘 일어난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행하신 일이다. 후세에 우리 후손들이 이 돌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일하셨노라고 말해야겠다. 하나님의 일을 기념하고 기억해야겠다.’
“20 여호수아는 요단 강에서 가져 온 돌 열두 개를 길갈에 세우고 21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 자손이 훗날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든, 22 당신들은 자손에게 이렇게 알려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23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24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수 4:20-24, 새번역)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일이 잘 풀리니까 초심을 잃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공이 복이 아니라 독입니다. 자기를 해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조금 잘되니까 믿음의 길을 떠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모습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조금 전 사무엘이 사울을 위해 하나님께 온 밤을 부르짖었다고 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런 마음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그렇게 기도한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했지만 아직 응답이 없습니다. 안 돌아오고 있습니다.
처음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왕이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는 왕이 되고 실제로 승승장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느 날 사울은 지금껏 이뤄 온 업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말렉과 전쟁에서 그는 자신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흔적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겠다.’라고 하고 그것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사울에게 문제가 생긴 겁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흔적이 사라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게 된 겁니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들과 그 흔적이 삶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나오다 안 나오는 사람이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눅 9:23-24, 새번역)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만 해도 남자만 오천 명인데,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하면 수만 명이 따라다닌 겁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주님의 제자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분의 능력의 말씀을 듣기 위해 엄청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실제로 그중에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 사람은 아주 적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면 뭔가 이득이 있으니까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따르다 뭔가 손해를 보게 되면 절대 안 따라갈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해를 당하고 고난이 있더라도 따르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결심할 때부터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배 때 중요한 것은 와서 은혜받는 게 핵심이 아니고 결단과 헌신이 예배의 핵심입니다. 개인 예배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통독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다.’라고 결단하며 헌신하고 말씀 붙들고 그렇게 살고자 애쓰는 겁니다.
설교 때도 여러 내용이 있지만 한 가지를 붙들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다.’라고 결단하고 나가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보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살아보고 또 와서 예배를 드리면 은혜를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지는 않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네가 나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너를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기 위해서다. 너를 망치로, 톱으로, 때로는 못으로 또 칼로 쓰려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네가 도구가 되길 거부하고 너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구나.’
한국의 어떤 유서 깊은 교회에서 장로님 한 분이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안타까워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교회 벽에 못이라도 하나 박으면 내 몸에 박는 겁니다. 벽돌 하나 움직이면 내 몸이 부서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우리 부모님의 피와 헌신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님 때부터 헌신적으로 교회를 세웠고, 그 아드님인 이 장로님도 대를 이어서 충성하니까 얼마나 귀한 충성이고 헌신입니까? 그런데 그 충성과 헌신 때문에 그 교회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이름으로 새겨진 헌물입니다. 미국 교회들에 가보면 그런 것들이 많은데, 그것을 보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목적이 되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중 하나만 옮기려고 해도 정말 힘이 듭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고, 하늘 복을 받는 일이며, 하늘에 상급을 쌓는 일입니다. 그 봉사를 기념하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내 이름이 새겨져서 내 공로를 기념하는 것이 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떠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놓고는, 실제로 사람의 기념비를 세우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런 사람과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 개혁지에 가면 앙리 뒤낭(Henry Dunant)이라는 사람의 묘가 있습니다. 그는 적십자사를 창설한 사람으로, 노벨 평화상을 첫 번째로 수상한 사람입니다. 그는 죽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장례에는 어떤 절차도 행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 제네바시는 앙리 뒤낭을 기념하는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종교개혁자 장 칼뱅(존 칼빈, John Calvin) 역시 죽기 전에 “내 무덤조차 만들지 말라.” 하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렇지만 후대 교회들은 그 위대한 칼빈의 무덤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초라하다며 그를 위해 기념비를 만들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해온 일들은 참 귀합니다.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본을 삼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나님이 아닌 그 일을 한 누군가를 위해 기념비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그 기념비는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일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흔적만 남도록 살지 않고 자기 업적을 나타내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참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구로 쓰임 받는다고 할 때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좋은 일, 위대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안 믿는 분들을 열심히 섬겨서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가장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을 ‘전도왕’이라고 하며 사람을 띄워주기 시작하면 기념비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사람이 전도를 잘해서 믿었겠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전도를 하고 아무리 섬겨도 안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되기 시작하는 것은 ‘내가’라는 말이 많아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처음 섰던 때의 뜨거운 열정이 사라지고 내 말이 많아집니다. 이 땅의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내 말만 옳다.’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다 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보면 진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툼이 많아지고,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내가’ 왕과 주인이 될 때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우리 안에 진짜 왕은 누구입니까? 나인가, 하나님인가, 잘 점검해봐야겠습니다.
2. 사울의 착각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18-19절)
사울은 왜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진멸하지 않고 탈취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아까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잡아야 할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다 진멸하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텐데, 진멸하지 않고 자기가 갖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렇게 좋은 것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왜 다 진멸해? 이것들을 내가 취하면 더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렇다면 사울에게 왜 이런 마음이 찾아왔을까요?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0-21절)
여기 보면 사울은 하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15절에서도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내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언제부턴가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 아니라 남의 하나님입니다. 즉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돈이나 성공이나 명예나 심지어 자녀나 그 어떤 것에 집착하고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꾸 내가 붙잡을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많이 가지면 풍요로워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이익이 되는 것이 보이면 ‘이것을 가져야만 풍요로워진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가진 그 어떤 것도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없이 행하는 어떤 것도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다 경험해본 솔로몬이 전도자로서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때만 진정한 풍요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다 누리며 행복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주셔야 누릴 수 있습니다.
뉴욕에서 열심히 일하며 오직 은퇴한 후에 따뜻한 플로리다로 이사 가서 매일 골프만 치며 노후를 즐기자고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플로리다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골프만 쳤습니다. 그런데 지겨워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졌습니다. 매일 남아도는 시간에 나가서 골프만 치니까 오히려 지겨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 도로 뉴욕으로 다시 이사 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가장 값어치 있을 때는 시간이 남아돌 때가 아닙니다. 바쁜 일상 가운데 시간을 내서 즐기는 순간이 소중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찾아오는 쉼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면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3. 끝까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순종은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울이 스스로를 작은 자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겸손을 보고 쓰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신을 크게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은 그를 쓰실 수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는 일을 했느냐고 묻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대로 전쟁터로 나갔고, 아말렉 왕 아각도 잡아왔고, 아말렉 사람도 진멸하였습니다.” (20절, 새번역)
사울은 자기가 순종했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순종하긴 했습니다. 아말렉을 쳤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기 제일 힘들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입니다.
여러분, 지난 ‘새해맞이 감사예배’ 때 2023년의 말씀을 받으셨을 텐데, 마음에 드십니까? 그러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드는 말씀이 아닐 때 순종을 못 합니다. 쳐다보기도 힘듭니다.
우리가 보통 예배를 통해 ‘은혜받았다’고 할 때는 말씀이 내 마음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거나 부담이 되는 말씀을 듣고서 은혜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내 마음에 쏙 들기만 하면 순종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사울은 하나님 말씀대로 진멸하기는 했는데 좋아 보이는 것들은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21)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그러한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비슷하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실 거야. 저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막상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네 마음을 들여다보아라. 정말 나를 위해 하는 일이냐? 아니면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냐?’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혹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닌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잘 봐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인데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실 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너는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구나. 너는 네가 딱 원하는 만큼만 하는구나. 네 마음에 드는 만큼만 하는구나. 그것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프다. 나는 네가 하는 일이 기쁘지 않다!’
이 시대 신자들과 교회의 문제의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분명히 주님의 일을 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다 합니다. 그런데 딱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한다는 겁니다. 예배를 드려도 딱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하고, 봉사를 해도 딱 자기 마음에 드는 만큼만 하며,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얼마나 화려한가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것을 잘 아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잘못 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삶에서 누가 너의 왕이냐?’
“22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22-23절, 새번역)
이것을 신약성경의 말로 바꾸면 이겁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것은 사실 믿음도 아닙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이 순종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후 25년 만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대로 합니다. 순종은 그런 것입니다. 순종은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해도,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순종이 아닙니다. 엉뚱한 일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야 합니다. 내 맘에 꼭 드는 것은 ‘아, 은혜롭다. 오늘 은혜받았다.’라고 하고, 내 맘에 안 드는 것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라고 부담을 느끼며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떤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잘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