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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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5일 수요예배
✦ 누가 나의 왕인가 10 ✦
므낫세: 실패할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역대하 33장 1~13절)
[들어가는 말]
제 아들이 어릴 때 가장 인기 있던 게임기가 닌텐도에서 나온 DS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12년 말에 게임기 혁신의 아이콘으로 일컬어지던 기업 닌텐도에서 새롭게 출시한 제품이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닌텐도가 이렇게 몰락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게임기’라는 틀에 갇혀 ‘모바일’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에 게임기를 2억 대 이상 판매한 닌텐도가 스스로 ‘게임기 잘 만드는 회사’로 규정하면서 그 틀에 갇히게 되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교만이라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정의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닌텐도가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으려면 스스로 규정한 낡은 틀을 부수어야 가능한데,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늘 누리는 영광에 안주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어떤 분야나 그렇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든지, 연구를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또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 잘된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실패한 왕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모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공했지만 교만해져서 결국 실패한 왕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은 므낫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모두 갖춘 왕이었습니다.
1,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는 두려움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왕하 23:26)
므낫세가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으면 하나님이 그 므낫세 때문에 격노하셔서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은 므낫세 때 주어진 게 아닙니다. 이것은 엄청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유월절도 회복하며 모든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평가받는 요시야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요시야는 므낫세의 손자인데, 그렇게 놀라운 영적 회복과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므낫세 때문에 품으신 분노를 돌이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요시야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가 범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므낫세가 회개는 하지만, 그가 워낙 악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그 악의 결과가 남아서 결국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 동안 다스리며” (1절)
므낫세는 히스기야 왕의 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기도하여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았는데, 므낫세가 왕이 될 때 12세였으니까 히스기야가 생명 연장받은 다음 3년 뒤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히스기야는 죽다가 살아났으니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하여 영적으로 얼마나 충만한 상태였겠습니까? 그러한 아버지에게서 므낫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므낫세는 12세에 왕위에 올라 무려 55년을 통치했는데, 모든 왕들을 통틀어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지만 또한 그는 가장 악한 왕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므낫세는 유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장 완벽한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왕이 되어 첫 번째 한 일이 아버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고 그 이전의 우상 문화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므낫세는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일월성신까지 도입하여 섬겼습니다.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3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2-3절)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인신 제사를 행했으며, 왕자인 자기 아들을 우상에게 희생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점술과 사술, 무당과 박수를 의지하는 무속신앙이 유다에 뿌리내리도록 자기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4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제단들을 쌓고 5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6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 (4-6절)
그뿐 아니라 므낫세는 정치적으로도 아주 강퍅하고 악한 왕이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여서 그들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왕하 21:16)
므낫세의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던지, 그의 손자 요시야가 왕이 되어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악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고 유다는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왕하 21:11)
하나님이 보실 때 므낫세가 저지른 죄악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에 그곳에 살던 악한 아모리 민족들의 죄악보다 더 컸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악했던 겁니까? 그는 자기만 악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백성까지 전부 죄악으로 오염시켜버렸습니다. 왕이 최고로 악하니까, 유다 백성도 가장 악하게 되어 죄악을 범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9절)
역대기와 열왕기는 같은 역사를 다루지만,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역대기는 유다, 특히 성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반면, 열왕기는 객관적인 사실을 다룹니다. 그러한 열왕기하에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 므낫세는 정말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 더 이상 악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구제 불능이었다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가장 잘못한 일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우상을 만들고 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상숭배의 목적은 오로지 자기의 형통이기 때문입니다. 무당에게 굿을 해달라고 하면서 신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귀신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기만을 바라면서 돈을 내고 기도를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우상을 믿는 것(미신)의 차이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해 애씁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가 원하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일예배 때 교회당에 앉아 있다고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는 교회에 나오면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겁니다.
전도할 때 교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많이 했는데 요즘도 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자녀가 잘될 겁니다. 돈을 잘 벌고, 꿈을 이루게 될 겁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만약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그런 것뿐이라면 주님을 믿는 게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만약 예수를 믿겠다고 왔는데 돈을 잘 못 벌고 꿈을 못 이루고 자녀가 잘 안 되면 교회를 떠날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으면 박해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인물 중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 다윗, 다니엘 등을 꼽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나 베드로와 야고보 등을 닮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이 못 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인생은 안락함이나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고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성경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바울을 많이 말하지만, 실제로 그의 삶을 닮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적습니다. 그는 수도 없이 고난을 겪었고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 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복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끊임없이 구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내 삶의 진짜 왕은 누구입니까? 나는 실제로 누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을 보면서 신앙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이 본질에서 혹시 변질된 건 아닌지, 주님으로부터 많이 멀어진 건 아닌지를 점검하며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그리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바로 이 므낫세 왕 때 톱으로 켬을 당해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히스기야 때 많이 도왔는데, 결국 노 선지자가 되었을 때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들이지만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처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가끔 보면 교회에서도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 수능이나 SAT나 ACT 만점 받은 학생, 서울대나 하버드에 합격한 학생 등을 앞에 세워 간증시키고,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이렇게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그렇게 잘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을 잘 믿어도 그렇게 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자녀가 잘되고 형통한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라면 그것 역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따라가는 길에는 복된 길도 있고 고난의 길도 있습니다. 복된 길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고난의 길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될 때도 있지만 항상 잘되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잘되면 예수를 잘 믿는 것이고, 대학이나 직장에 떨어지면 예수를 잘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실패할 때가 많고, 예수를 잘 안 믿거나 믿음의 길을 떠나도 세상에서 아주 잘될 수 있습니다.
복의 길이든 고난의 길이든,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세상에서 어떤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상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성공의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 서게 될 텐데,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우상의 유혹에 빠지는 주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므낫세가 우상을 숭배한 이유도 두려움 때문입니다. 북쪽으로는 앗시리아가, 동쪽으로는 바벨론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라는 강대국이 유다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므낫세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들이 강한 이유는 그들이 믿는 신들 때문이 아닐까?’ 각 나라마다 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신만 믿는데, 이왕이면 여러 신들을 믿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므낫세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신들도 도입하여 그들도 믿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권력과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욕망이 생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이나 돈을 따라가게 되면 결국 우상을 숭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의 성공과 돈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방법이 무엇입니까? 본질적인 믿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의 권력과 힘과 성공과 돈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것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고 그것들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주변 강대국들을 보며 그들이 가진 권력과 힘이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그것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있었습니다. 이전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 권력이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무서워도, 돈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셨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시면 그냥 무너집니다.
만약 므낫세가 정직한 사람들의 형통함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다면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돈을 보고 있습니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까?
2. 징계는 사랑의 표시
“10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1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10-11절)
유다의 왕이 한순간에 쇠사슬에 결박된 포로가 되어 다른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므낫세가 이런 어려움을 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이 구절의 주어는 ‘여호와’ 즉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므낫세가 당한 위기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기 때문인데, 그때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12 므낫세는 고통을 당하여 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는 조상의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해졌다. 13 그가 주님께 기도하니,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그 간구하는 것을 들어 주셔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왕이 되어 다스리게 하셨다. 그제서야 므낫세는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12-13절, 새번역)
므낫세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자 겸손해지면서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켜 기도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악한 왕인 므낫세가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렇게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은 환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었다면 므낫세는 끝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역대기는 하나님의 징계를 사랑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므낫세가 당한 고통은 하나님이 므낫세를 포기하셨다는 표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신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벌을 주고 괴롭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회복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은 은혜입니다.
삶의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만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고통이나 환난이 아닙니다. 환난은 나의 능력 밖의 것이기 때문에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한 환난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해주시고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과 환난이 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므낫세는 사로잡혀 결박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에야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시구나. 이방의 신들과는 다른 분이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이전까지 계속 우상숭배를 했는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잡혀가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우상숭배를 하고 심지어 자기 아들들까지 불에 살라 바쳤는데 결과는 자기가 잡혀가는 겁니다.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때 정신을 차립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구나.’
회사에서도 리더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 자기 밑의 직원들을 혼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너무 잘해서 지적할 게 없을 때입니다. 잘하니까 가만히 놓아둡니다. 다른 하나는 말해봐야 소용없을 때 포기해서 가만히 놓아둡니다. 만약 잘못했다고 야단치고 질책한다면, 그것은 사실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곧 혼내는 것입니다. 포기하면 야단칠 이유가 없습니다. 야단치고 신경 쓴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매를 드셨다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를 내셨다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므낫세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회개하며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해주신 것입니다. 역대기에만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니까,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왕의 자리를 돌려주십니다. 므낫세는 그제야 주님만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지시면 누구나 변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는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으나(전체로도 #2),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그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고 실패할 수 없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실패한 것 같았던 므낫세를 하나님은 인생의 끝에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지시니까 악한 마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겠다고 하던 사울이 변화되어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 바울이 뭐라고 썼습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므낫세는 수치스럽게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로 전락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나, 하나님께서 친히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혀주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 주셨습니다. 징계하시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당한 수치도 놀라운 사랑으로 가려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잘나갈 때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고난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것보다, 형통할 때 믿음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는 기도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막상 성공을 이루고 손에 그것을 쥔 다음에는 기도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성공하니까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겁니다.
우리도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일이 잘 풀리고 성공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통할 때 하나님을 떠나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실패가 아니라 성공과 형통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므낫세가 힘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떠나 모든 악을 최악으로 저질렀지만, 힘이 없어지자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므낫세를 보면서, 그렇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성공하고 힘이 강해져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보다, 이렇게 망하고 힘이 없어져서라도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혜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인생에서 성공했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다면 그것은 결국 실패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성공하고 높이 올라가도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인 것 같은데 믿음이 아닌 삶을 우리는 두려워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지금 삶에 어려움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너를 놓지 않았다! 나는 너를 아직 사랑한다!’ 엄청난 악을 행했어도 므낫세는 인생 말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보는 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인생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하나 더 기억할 것은, 므낫세가 그렇게 바뀌었지만, 그 므낫세 때문에 유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므낫세는 회개하고 돌아왔지만, 그가 그 전에 수많은 악을 행할 때 좍 번져서 백성은 거기에 완전히 심취해 있습니다. 므낫세는 회개했지만, 자기가 저지른 죄가 온 백성을 아직 덮고 있는 겁니다. 백성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겁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므낫세 때문에 유다가 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성공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