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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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일 수요예배
✦ 누가 나의 왕인가 8 ✦
여로보암 2세: 주님 없이 성공할 때 착각하지 말라
(열왕기하 14장 23~29절)
[들어가는 말]
애초에 죄를 지으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지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기준’입니다. 오늘 열왕기하 14장에 나오는 여로보암 2세 이야기를 통해 성경은 바로 이 기준에 대한 문제를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미워한 것은 그들이 기준으로 삼던 것이 위협을 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든 이방인이든 허물없이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율법대로 행하기를 힘쓰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 바로 그런 예수님의 행동은 자기들의 질서를 위협하고 깨뜨릴 만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 안에서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들도 예수님의 일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서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들이 진리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기준에 대한 문제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화가 났다면, 그것은 진리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내 기준에 용납이 안 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옳은 기준이면 괜찮지만, 잘못된 기준 때문에 화가 난다면 그것은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잘못된 분노입니다.
1. 나인가, 예수님인가?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루는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내 기준인가, 예수님의 기준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요 9:2, 새번역)
이것은 매우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제3자 입장에서 쉽게 한 질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누군가의 죄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논쟁을 벌이시거나 길게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를 그냥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신학적인 논쟁에 관심을 보일 때 예수님은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고쳐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에게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집니까?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며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푼 이 일이 오히려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은혜로운 기적 사건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눈을 뜬 놀라운 일에는 관심이 없고, 눈을 뜨게 된 경위를 신학적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고 불법을 저질렀다고 하며 정죄했습니다. 중간에 눈이 안 보인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던 사람이 보게 된 일이 역사상 어디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놀라운 일이 자기들 앞에서 일어났는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에 그랬다고 화를 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맹인이었던 그를 불러 예수님에 대하여 추궁하기 시작했고, 그는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아주 곤란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추궁하고 그가 대답한 내용을 보십시오.
“24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말하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25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 9:24-25, 새번역)
앞을 못 보던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눈을 뜨는 은혜를 체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눈을 떴다면 이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우며 축하해줄 일입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런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기준이 위협을 받았다고 느끼며 분노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예수님은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내 삶의 왕으로 모셨다고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과 내 뜻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를 알고 그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면 됩니다.
지금도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이전에 없던 갈등이 빚어집니다. 자기 문화와 기준으로 살고 있었는데, 복음을 접하게 되니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서 신부님이 한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수군거렸고, 마침내 몇몇 사람들이 고발하여 징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고발한 사람들은 어느 날 신부님이 밖을 나가는데 ‘신부님이 어디를 가나?’ 하고 보니 이상한 동네로 들어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몰래 따라가 보니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데, 커튼이 쳐 있지만 대충 모습이 보이는데, 신부님이 그 집에 있던 한 여성과 방에서 꼭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겁니다. 징계위원회는 “그것이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고, 신부님은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신부님에 대해 정직 결정이 내려졌고, 그것을 위원장이 선포하고 있는데 그때 회의장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들어왔습니다. “내가 바로 그 여자입니다. 신부님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나병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여성 나병환자는 자기의 병 때문에 아무도 자기를 찾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자기를 만져주는 사람은 당연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나병이었지만 나병이 전염되지 않는다고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를 찾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녀를 불쌍히 여긴 신부님이 그 집에 찾아오셨을 뿐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슬쩍 본 사람들은 신부님의 그런 행동을 보고 오해해서 고발했던 것입니다.
물론 마음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품었다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겠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한 인간에게 따뜻한 허그를 해준 겁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신부가 여성과 부적절한 접촉을 했기 때문에 교회법에 의하여 징계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게 옳은 결정이겠습니까, 아니면 옳지 않은 결정이겠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일화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청년이 주일예배에 늦게 왔는데 모자를 쓰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어떤 분이 예배 후에 그 청년을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는데 감히 모자를 쓰고 오는가? 모자를 벗어야지.’라고 야단쳤습니다. 그 청년이 그렇게 신앙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교회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 나오기로 한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청년은 주일 아침에 늦게 일어났는데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교회를 갈까 아니면 그냥 빠질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뭔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래도 예배에 가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금방 일어났으니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충 세수하고 머리에 물을 묻히고 그래도 머리가 뻗치니까 모자를 쓰고 예배에 온 것인데, 그랬더니 ‘감히 모자를 쓰고 예배한다.’라는 말을 들으니 그 청년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자기는 머리가 삐죽 나와서 모자를 쓰고서라도 예배드리겠다고 왔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한 겁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자를 쓰고 하나님을 예배하면 안 된다는 법이 어느 법에 있습니까? 그렇게라도 예배하겠다고 온 그 청년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자기 기준만 주장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 한 사람을 실족하게 만든 겁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말 돌아봐야겠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준이라면, 혹시 내 기준을 막 강요하는 건 없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교회에는 당회, 연석회의, 제직회, 공동의회 같은 회의들이 있는데, 요즘 우리가 회의할 때 보면 대체로 평화롭고 의견들을 잘 교환하며 질서 있게 해서 좋습니다. 물론 이전에는 조금 민망한 순간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회의할 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여전히 많습니다. 한인총회 같이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 부끄러운 광경을 목격할 때도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는데, 화를 낸다고 권위가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상처만 받고 자기 마음도 상할 따름입니다.
우리 삶에 말씀이 아니라 다른 것이 기준으로 되면 잘못됩니다. 내 삶에 기준으로 삼은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우선순위에 둔 것이 무엇입니까? 혹시 그 잘못된 기준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고쳐야겠습니다.
2. 하나님 없이는 복도 없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3절)
여로보암 2세가 왕위에 오른 것은 주전 786년으로, 그는 41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여로보암은 ‘백성이 번성케 되기를 원하다’라는 뜻인데, 그 이름대로 여로보암 2세는 솔로몬 이후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면서 북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치적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5절)
여기서 ‘하맛’이라는 곳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맛은 아람(시리아)의 수도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3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상업적으로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다윗이 통치하던 때 이스라엘이 잠시 점령한 적이 있던 곳으로,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통일왕국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거의 회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엄청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여로보암 2세에 대해 성경은 단지 일곱 절로 설명하고 끝냅니다. 그것도 그가 악했다고 선언합니다.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않은 왕도 몇 장에 걸쳐 설명할 때가 있는데, 성경은 어째서 여로보암 2세에 대해서는 이렇게 인색한 겁니까?
그것은 그가 이룩한 업적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결코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실패한 왕이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4절)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을 강력하고 부유하게 만든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상을 섬긴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이 지은 죄를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하나님을 떠난 악한 왕에게 이 같은 번성을 허락하신 겁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잘될 때, 더 나아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사기를 쳐도 안 들키고, 명예를 얻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 왜 그런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성공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런 것이 결코 성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이 번성한 것은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잠시 유보된 상태였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27절)
유진 피터슨이 번역한 <메시지> 성경에 보면 당시 상황을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이스라엘의 이름을 역사에서 지우실 마음이 없으셨다. 그래서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사용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27절, 메시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강성하게 하신 것은, 축복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심판을 유보하신 것이었을 뿐입니다. 업적으로만 보면 여로보암 2세는 엄청나게 성공하고 복 받은 인생 같은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결코 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부강하고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며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죽은 지 20여년 만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고 맙니다. 여로보암 2세 때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누리던 번영을 누렸고 영토를 크게 회복했지만, 그것은 진짜 성공과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여로보암 2세에 대해 단지 일곱 절로 설명을 끝내서 자세한 시대상을 알 수 없지만, 그와 같은 때 살며 활동했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의 사역을 통해 여로보암 2세 시대가 어땠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모스는 사회적으로 소외 받는 약자들에 관심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정의의 선지자’라 부릅니다. 아모스는 당시 사회의 죄에 대하여 일일이 지적합니다.
“6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7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8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암 2:6-8, 새번역)
재판관이 돈을 받고 의인을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적은 빚을 갚지 못했다고 해서 종으로 팔아넘깁니다. 힘 있고 부유한 자들이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횡포를 부리며 비도덕적인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아모스는 이러한 이스라엘 사회의 죄를 고발합니다. 나라는 강성하고 부유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정의는 사라져서 타락한 사회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타락은 종교적인 타락으로 이어져서 우상을 숭배하고, 신전에서 성적 행위가 이뤄지며, 온 나라가 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아모스는 나라 전체가 타락해서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탄식하면서,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근본적인 죄가 무엇인지를 지적합니다.
“그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암 8:11, 새번역)
이스라엘이 타락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의 기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양식이 없어 주리지도 않고 물이 말라 기근으로 고통당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어려운 곳들도 있지만, 그래도 역사상 이보다 더 부유했던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세상은 풍요롭습니다. 지난가을 한국에 가보니 물자가 너무 풍성하고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갈수록 더 어렵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또한 도무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집니다.
이곳 미국의 풍요로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물질적 부유함과 풍성함은 하나님이 주신 복일까요? 아니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지금은 지켜보고 계신 걸까요?
호세아는 그 당시 아모스와 함께 활동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했는데, 고멜은 걸핏하면 바람을 피우며 집을 나가는 겁니다. 더구나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을 셋이나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음란한 아내와 그녀의 아들을 끝까지 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삶을 통해 보여 주기를 원하셨던 것은 이스라엘을 향해 안타까워하시는 당신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영적으로 음란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적 사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와 호소를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나라를 잃은 채 세계 각처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부와 명성과 번영과 성공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한순간에 재로 변하고 맙니다. 성공과 풍요에 도취하는 순간 패망을 보게 됩니다. 성공했다고 만족하는 순간 실패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 패배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일 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성공했다고 자부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헛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보된 것이지, 때가 되면 반드시 옵니다.
1997년 한국에 IMF 경제 위기가 오기 전까지 한국은 물론이고 서방 국가들조차 ‘대한민국의 경제는 튼튼하다.’라고 진단했습니다. 하지만 곧 경제 위기가 터졌고,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휘청거렸습니다. 아무리 강성한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시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 애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기 싫은데 억지로 ‘나만 따라와.’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물론 하기 싫어도 따라야 합니다. 그게 옳은 길이고 정말 성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데로 가면 망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길을 따라와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킨다.’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정말 몸부림쳐야 합니다.
삶이 편해지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우리는 대개 어떤 것을 추구합니까? 더 좋은 차, 더 큰 집, 더 고급 음식, 더 비싼 명품, 더 좋은 체육관, 더 좋은 골프클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 삶이 나아질수록 세상과 구별된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의 본질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믿음의 본질이 뭡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위해 더 베풀고, 베풀 게 없으면 더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8-30, 새번역)
예수님은 여기서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하시니까 ‘나는 주님의 멍에를 메기 싫어요. 자유롭게 살래요.’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거부하게 되면 다른 어떤 것에 코가 꿰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묶여서 살지 않으면 다른 것에 묶여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면 다른 것에 꿰여서 오히려 힘들고 괴로운 삶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분이 가신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고 하지만 십자가는 너무 무섭고 힘드니까 다른 것을 하겠다고 말하며 십자가를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삶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고 성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입니다. 다른 길은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파멸과 죽음의 길입니다.
혹시 지금 번영과 안락과 편안함에 취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금식기도 같은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푹 빠져서 즐기던 것들을 3주 동안이라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물질주의에 푹 빠져서 살았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이 아니라 경고라면, 우리는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마음과 행동을 돌이키며 아모스와 호세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겠습니다. 우리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진정한 성공,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