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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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5일 수요예배
✦ 누가 나의 왕인가 3 ✦
여로보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열심을 버리라
(열왕기상 12장 25~33절)
[들어가는 말]
이 시대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교회’와 ‘빚 가운데로 걸어가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빛 가운데 있을 것인가, 빚 가운데 있을 것인가는 누군가가 정해준 운명이 아니라, 그 교회가 선택한 길일 뿐입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우상숭배를 뿌린 근원이 되는 사람으로 두고두고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후대 왕들은 항상 여로보암의 악함과 비교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저버리고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여로보암 왕의 이야기를 보면 본디오 빌라도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사도신경을 반복해서 고백합니다. 왜 그는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으로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습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은 운명이었습니까, 아니면 그가 선택한 것입니까? 당연히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당시 빌라도가 아니었어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로 하셨다면 예정된 순서가 아니었겠냐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운명론적으로 이끌어 가시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각자가 선택하도록 하시고, 거기서부터 또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결정한 것은 운명이 아니라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한 것은 운명이 아니라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1. 내가 하려고 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여로보암을 택하신 이유는 솔로몬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천 명이나 되는 처첩들을 거느리고 온갖 이방 신을 들여와 온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에 빠뜨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솔로몬을 버리시고 나라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이렇게 둘로 나누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존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존하시려고 한 것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과 한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엄청나게 많은 건축과 토목공사를 벌였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이 부과한 엄청난 세금과 각종 부역으로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은 이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며 부담을 덜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어리석게도 백성의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자기는 아버지 솔로몬보다 더 많은 짐을 지우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르호보암은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불안감 때문입니다. 아버지 솔로몬이 누리던 부와 명예를 지킬 자신이 없었기에 르호보암은 불안했고, 그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더 강하게 통치하려고 한 것입니다. 세게 보이려고 그랬습니다.
그러자 백성이 화가 나서 르호보암에게서 등을 돌리고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백성이 잘못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려고 여로보암을 택하신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왕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던 세겜과 부느엘을 왕국의 중심지로 삼았고, 종교개혁도 일으켰습니다. 여로보암은 왕이 된 후 아주 열심히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로보암의 열심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열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왕으로서 열심을 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5-26절)
여기 보면 분명히 여로보암이 자기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잘못으로 파탄에 빠진 나라를 구원하시려고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열 지파를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특권을 은혜로 받은 여로보암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릴까?’ 이랬어야 했는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성전이 있는 남유다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걱정한 겁니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7절)
예루살렘은 북이스라엘의 바로 남쪽이자 남유다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성전을 허락하신 곳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주 상징적인 곳입니다. 여로보암은 그러한 예루살렘을 백성이 그리워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가서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백성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갔습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까? 그들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혼자 별 상상을 다 하고 있습니다. 망상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혼자 ‘소설을 쓰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도 많은 문제가 바로 혼자 상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실이 아닌데 혼자 상상하면서 잘못 갈 때가 많습니다.
르호보암이 불안함 때문에 일부러 더 강경하게 나간 것처럼, 여로보암도 혼자 상상하다가 불안해져서 이것저것 열심을 내며 일합니다. 그러나 열심을 낸다고 불안함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주일예배 외에도 새벽에 나와 열심히 기도하고 수요예배도 매주 참석하고, 목장과 삶 공부도 열심히 하면 불안함이 사라집니까? 예, 그렇습니다. 제대로 기도하고 예배하면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이라면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방향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열심히라면, 불안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할수록 더 불안해지고 염려가 많아집니다.
여로보암은 나라를 세워보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자기 마음대로 열심히 한 겁니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은 하나님께 묻고 또 물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면서 열심히 일합니다.
얼마나 할지를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가 결정합니다. 언제 어떻게 할지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가 결정합니다. 양쪽 다 열심히 일하지만, 하나님 편에 서지 않은 사람의 열심은 불안에서 시작하고 그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여로보암의 문제는 게으름이나 타락이나 악한 행실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의 진짜 문제는 ‘잘못된 방향’에 있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변해서 자기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함 때문에 그는 스스로 판단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열심히 했지만, 그건 자기 열심이었습니다.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28-29절)
교회에서 어떤 직분이나 사역을 맡을 때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수집사나 장로 직분에 공천받을 때, 목자 목녀를 해보라고 제안받을 때, 약간 고민하며 주저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왜 고민하고 주저하는지를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거절하는 경우 대개 ‘제가 부족해서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뭐가 부족하다는 겁니까? 나이? 경력? 세상에서의 지위? 재산의 많고 적음? 학식이나 학벌? 아니면 믿음?
직분이나 사역을 맡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제안을 받았을 때 뭘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 직분(사역)에 부르시나?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순종해보려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중심에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괜히 이 직분을 맡았다가 내 삶이 더 바빠지고 힘들어지지 않을까? 괜히 이 사역을 맡았다가 피곤하고 지치지 않을까? 나에게 손해가 오지 않을까? 시간 빼앗기고 돈 빼앗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불안하고 염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족해서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대로 헌신하지 못하는 핵심 원인은 결국 불안과 염려입니다.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면 결국 불순종이고, 모든 불순종의 중심에는 불안과 염려가 있습니다. 무슨 불안입니까? 괜히 헌신했다가 자기에게 손해가 올까 봐 불안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헌신해도 적당히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똑같습니다. 모든 헌신과 순종의 중심에는 신뢰와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것을 하라고 하실 때는 분명히 나에게 유익하기에 하라고 하시는 것이라는 신뢰가 있고, 주님을 신뢰하니까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헌신하고 순종하라 하시겠습니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을 하게 하셔서 하늘의 상급을 받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다.
2. 열심히 하는 것이 우상숭배는 아닌지 점검하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고 하게 되면 자기가 좋은대로만 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여로보암도 굉장히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일합니다.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30-32절)
북이스라엘 백성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에 절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2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왕의 명령에 따라 우상에 절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명백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이 인생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우상을 만듭니까? 인간은 태생적으로 눈에 보여야 믿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불편하게 여깁니다. 섬겨야 하는 대상이 눈에 보이면 그 앞에서만 신실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면서도 어디에나 계신 분이기에 부담스러운 겁니다. 언제 어디서든 신실하게 살기가 어렵기도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은 겁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성전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적용해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앙적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더라도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하면서도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 무서운 얘기입니다.
왜 우리는 굳이 이렇게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합니까? 왜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까? 그것은 교회당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함께 모이기를 힘쓰며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 건물을 짓고 좋은 음향과 영상 장비를 설치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임재와 상관없습니다. 각 사람이 교회인 회중을 위한 시설일 뿐입니다. 좋든 안 좋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건물 규모에 따라 하나님의 권위가 커진다고 생각한다면 우상숭배 식으로 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자기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는 않고 편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면 우상숭배 식으로 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매일 매순간 우리와 직접 동행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십계명이 부족하여 11계명과 12계명이 더해졌다고 합니다. 제11계명은 “죄를 짓더라도 들키지 말라.”이고, 제12계명은 “혹시 들키더라도 같은 교회 성도에게는 들키지 말라.”라고 합니다. 단순히 웃으며 넘기기에는 뼈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만들고 나서 우상 앞에서만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모인 회중 앞에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내 안에 교회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거룩한 척하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거룩의 옷을 벗어버린다면 교회가 우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는 성전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국한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늘 함께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산당을 지어 백성을 죄악 가운데 빠뜨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종교로 전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을 대신하여 자기가 마음대로 뽑은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비슷한 시기에 절기를 만들어 제사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동행하시는 분임을 여로보암이 알았더라면,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 산당을 짓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곳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몰랐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으로 나아가다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의 열심이 결국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북이스라엘 백성을 죄악 가운데 빠뜨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은 이렇게 죄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오면서 ‘내 문제만 해결 받으면 돼. 이익만 얻으면 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종교를 가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이단 중 하나가 박태선이 세운 천부교입니다. 박태선은 한강 모래사장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했는데, 박태선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이 된 이유는 ‘병만 나으면 그만이다. 내 문제만 해결 받으면 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인생의 목적이 병 낫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구원파가 이단인 이유는, 그들의 목적이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구원을 받았나 못 받았나,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종교를 개혁하고 성을 쌓으며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죄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하기 싫으면 안 했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번역한 <메시지> 성경에는 여로보암이 드린 제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이 절기를 능숙하게 치러 냈고, 제단 예배도 자신이 직접 인도했다.” (33절, 메시지)
사람들은 여로보암의 능숙한 모습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는 외적인 행동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저와 같은 설교자도 강단에 오를 때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그저 능숙한 행동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찬양대와 찬양팀과 반주자가 노래하고 연주할 때 마음에 떨림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은혜롭고 거룩한 가사로 찬양하더라도 그것은 능숙하게 치러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떨리지 않고 설레지 않는다면 여로보암이 세운 가짜 단에 오르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3-24)
3. 자기 마음대로 열심히 하면 남는 것은 허무뿐이다
군대에서 사단장이나 연대장의 당번병들은 자기들이 모시는 분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실까를 항상 신경 씁니다. 그들이 모시는 상관이 편안해야 자신도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왕이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실 때 우리도 기쁩니다.
내 안의 불안을 없애고 싶다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힘쓰면 됩니다. 그러면 평안해지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옳을 길을 걸으면, 우리를 괴롭히던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해집니다.
여로보암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럴 때 죄가 자기 삶에 들어온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에 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 얼마나 기뻐하시느냐에 달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데 이렇게 돼?”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열심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래전 한국에서 어떤 젊은 목사님 부부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지방에 갔다가 주일이 되어 그곳의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꽤 큰 교회였는데,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한 아이는 업고 다른 아이는 유모차에 앉혀 끌고서 예배당에 들어가 앉았다고 합니다.
그때 예배를 준비하시는 권사님처럼 보이는 분이 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본당에서 예배드리면 안 돼요. 목사님 설교를 녹화하는데 아이가 울면 크은~일 납니다. 로비로 나가서 예배드리세요.”
그 목사님은 그때 속으로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게 예배를 드리는 건지 방송을 위한 행사를 하는 건지… 권사님, 우린 연예인이 아니잖아요. 우린 예배자잖아요.’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결국 로비로 나가서 끝까지 예배를 드리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야말로 우리 생명을 다해 드려야 하며, 예배 준비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영성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
여로보암은 왕으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이었기에 백성을 죄의 길로 인도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우리의 열심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기쁨을 누리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