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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7일 수요예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5

축복의 정석

(요한삼서 11~4)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축복할 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해 주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쓴 모든 편지에는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하는 축복의 인사가 나옵니다. 말 자체는 약간 다르더라도 항상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이서에서 이런 축복의 인사를 한 것을 보았습니다(요이 1:3).

 

유대인들은 평강(샬롬)으로 인사했는데, 사도들은 거기에 은혜를 더하여 축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 상대방에게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은혜와 평강만큼 성도에게 필요하고 복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좀 특이한 축복의 인사가 나옵니다. 은혜와 평강을 비는 인사가 빠지고 대신 다른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2)

 

이처럼 영혼과 범사와 건강을 위한 축복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왜 이런 색다른 축복으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축복할 때 어떤 마음과 원리에 따라 복을 빌어 주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축복의 정석이기도 합니다.

 

요한삼서는 성경 66권 중 가장 짧은 성경입니다. 요한삼서와 같이 빌레몬서, 요한이서, 유다서도 한 장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삼서는 가장 적은 수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편지에 나오는 축복의 정석은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소중히 여겨온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수학에서는 수학의 정석이라는 참고서도 있었듯, 오늘 본문은 축복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된 축복의 정석, 교회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축복의 대상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를 시작하면서 가이오라는 사람을 향해 축복의 인사를 합니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1)

 

이 가이오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19장에 마케도니아 사람인 가이오가 나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니던 동역자로서, 에베소 폭동 때 흥분한 사람들에게 붙잡힙니다.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19:29)

 

또한 사도행전 20장에는 더베 사람 가이오가 나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20:4)

 

그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서 소아시아까지 동행하고 나중에 예루살렘까지 같이 가는 7명의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후대 교회 전승에 의하면 이 가이오는 나중에 버가모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16장에도 가이오가 나오는데, 그는 바울을 환대하고 고린도 교회를 돌본 사람입니다.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6:23)

 

로마서는 방금 전에 언급한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서 6개월 정도 머물고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기 전에 기록한 편지입니다. 아까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사건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서 3년 정도 머물며 두란노 학당을 중심으로 사역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이고, 사도행전 20장에는 더베 사람 가이오가 7명 중에 끼어 있습니다. 또 로마서에서는 온 교회를 돌보는 가이오입니다.

 

여기서 온 교회라는 것은 고린도 교회를 의미합니다. 고린도에서 편지를 써서 로마 교회에게 문안하기 때문에 이것은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가이오는 고린도에 살면서 고린도 교회를 돌보는 사람, 즉 고린도 교회의 리더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삼서에 언급된 가이오는 이 중 누구입니까?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가이오와 사도행전 19장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는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쪽이고 고린도는 그리스 남쪽 아가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남쪽 아가야의 고린도에 가이오가 있고,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에 가이오가 있고, 갈라디아 지방에 속한 더베의 가이오가 있습니다. 세 명의 다른 가이오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 누구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가이오였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이오라는 이름이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들 중 어떤 가이오이든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가이오가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3)

 

3절에 따르면 형제들이 요한에게 와서 가이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하는데, 여기에 가이오를 설명하는 두 가지 특징이 언급됩니다.

 

1)  진리를 가진 사람

 

먼저 가이오에게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사도들이 예수님께 받아서 전해준 정통 복음의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1세기 당시 소아시아 지역(지금의 투르티예)에서는 진리에 대한 싸움이 치열해서, 교회 안에 거짓 가르침이 들어와 복음을 왜곡시키고 교회를 파괴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주님의 복음의 진리 위에 교회를 튼튼히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다른 편지인 요한일서와 요한이서를 보면 당시 거짓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거짓 교사들은 잘못된 그리스도론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사실을 부인했으며(요일 4:1-3; 요이 1:7),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고대 영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 사역의 핵심이 변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됩니다. 이런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우리의 죄 용서도 부활도 무효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둘째, 거짓 교사들은 신자의 행함을 무시하는 가르침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이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육체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의 구원파 이단도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육체는 어차피 악하기 때문에 구원의 대상도 아니고 윤리의 대상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런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7 자녀 된 이 여러분,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습니다. 8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짓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마의 일을 멸하시려는 것입니다. 9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요일 3:6-9, 새번역)

 

이런 말씀을 읽으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지지 않습니까? ‘나는 죄를 짓는데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니, 그럼 나는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지속적으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지속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겁니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이상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순간적으로 지을 수는 있지만, 마음에 성령님이 찔러주시기 때문에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도 아무 거리낌도 없고 찔림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고 뭐 어때? 나는 구원받았는데.’라고 한다면 그건 진짜 믿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특히 요한일서 36절에 열쇠가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믿은 사람이 아니라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데, 순간적으로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 노릇을 할 때 우리가 죄를 짓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할 때 죄에 빠질 수도 있지만,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 즉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계속 살아가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의 자녀들이라고까지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여기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곧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요일 3:10, 새번역)

 

그러니까 가장 큰 부분은 형제자매를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사랑한다는 겁니다. 물론 약간 껄끄러운 관계가 있을 수 있고 미워할 때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맥락을 토대로 가이오에게 진리가 있다는 말을 보면, 그가 당시 교회를 미혹하던 거짓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의 진리를 굳건하게 붙들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의 바로 이런 믿음을 칭찬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2)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

 

가이오를 설명하는 또 다른 특징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3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3b-4)

 

우리말로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페리파테오)걷다라는 기본적인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의역하면 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그 진리대로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5-6)

 

가이오는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나그네는 1세기 당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다니는 순회 전도자를 뜻하는데, 가이오는 이런 순회 전도자들을 잘 대접하고 후원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들은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며 기뻐합니다.

 

순회 전도자는 교회가 없는 곳에 가서 복음의 진리를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거나, 교회는 있지만 목회자가 없는 곳의 성도들에게 가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교회를 굳건하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1세기 당시는 교통이나 숙박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이었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숙박시설을 찾지 못하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밤에 언제 강도가 올지, 아니면 옆에 있던 사람이 언제 강도로 돌변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진 에드워즈가 쓴 바울에 대한 소설을 읽어보면 실감이 납니다. 여관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시설이 너무 안 좋고 주변의 사람들도 믿을 수 없으며 언제 강도가 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것이 바울의 상황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회 전도자들은 그런 위험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안전한 숙박시설을 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례를 받지 않고 사역하던 순회 전도자들은 늘 재정적인 부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7-8)

 

요한삼서가 쓰인 1세기 후반에는 이런 순회 전도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순교한지 오래고, 그 후 그 전통에 따라 여러 전도자들이 이곳저곳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재정이 없습니다. 불안하고 상황이 힘듭니다. 이방 교회들에게서 돈을 받고 일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숙소를 제공하고 음식을 제공하고 여비를 제공하고 헌금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전도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가이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초대 교회에는 수많은 순회 전도자들의 수고 못지않게 그들을 후원하고 환대해준 많은 성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복음이 계속 전파된 것이지, 다니는 사람만 있어서 된 게 아닙니다. 이런 후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런 환대는 가장 큰 계명과 새 계명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 안에서 산다는 것은 진리가 무엇인지 연구하는 등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게 진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환대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복음의 진리가 귀하니까 그것을 전하는 사람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들을 환대하고 후원했습니다.

 

가이오가 바로 이런 후원자 중 한 사람으로서 순회 전도자에게 넉넉한 환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그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오에게 잘 대접을 받은 전도자들이 사도 요한에게 와서 가이오 형제가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요한은 그것을 듣고 가이오로 인하여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3). 그러면서 가이오를 향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라고 칭찬합니다.

 

 

2.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축복

 

1) 영혼을 위한 축복

 

사도 요한은 이렇게 진리 안에서 행하는 가이오를 축복해줍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2)

 

먼저, 가이오에게 영혼이 잘되는 자라고 칭찬합니다. 이는 영혼이 평안한 자라는 말입니다. ‘잘되다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유오도오)안녕하다혹은 번영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이오는 영혼이 건강하고 안녕하고 평안하고 번영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가 진리 안에서 행하기 때문입니다. 가이오가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전도자들을 잘 대접하고 돌보았다는 사실은 그가 복음의 진리를 사랑하고 잘 믿으며 그것을 전하는 일을 좋아한 사람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저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영혼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영혼이 건강하고 성숙하고 평안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이 복음의 진리를 잘 믿고 사랑해서 그것을 널리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너무 좋아서 복음 전도자들을 기도와 물질로 기꺼이 후원하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영혼이 잘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끼리 믿고 예배하고 교제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우리를 통해 복음의 진리가 전파되는 것을 기도하며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진리를 행하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가정교회를 하면서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우리끼리만 즐거운 교회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복음의 진리가 전파되어 영혼들이 구원받고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며, 또 선교사님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면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교회로 나아갈 수 있었기에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2)  범사를 위한 축복

 

이렇게 영혼이 잘된 사람을 위해 사도 요한은 두 가지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2, 새번역)

 

이미 가이오의 영혼은 평안합니다. 영혼이 잘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첫째로, 범사(모든 일)에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말해, 가이오가 하는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기를 기도한다는 겁니다.

 

가이오가 사업을 하는 사람인지 직장에 나가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사업이든 직장이든 잘되기를 원하고 가정도 잘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복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물질적인 복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 16:2)

 

여기서 수입에 따라라는 말이 수입이 잘 들어오는 대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잘되는 것은 모든 일상에 어려움이 없이 발전하는 상태,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재정적인 축복을 해주는 경우는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3)  건강을 위한 축복

 

요한은 이어서 가이오의 건강을 위해서도 축복합니다. 건강하기를 비는 것은 헬라 세계의 전통적인 인사인데,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범사에 잘되기를 비는 것도 당시의 일반적인 축복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얼핏 보면 세속적인 기복주의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그런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 앞에 네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오래전 1970년대에 한국의 유명했던 교회에서 바로 이 구절을 가지고 소위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영의 축복, 일의 축복, 건강의 축복을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세 가지가 아니라 사실은 두 가지를 비는 것이고, 그 두 가지의 근거가 첫 번째인 겁니다. 영혼이 잘되라고 비는 게 아니라, 이미 영혼이 잘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범사와 건강을 위해 축복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 축복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말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잘 믿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그 진리의 전파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본문에는 가이오의 상황에 대해 특별히 건강이 좋지 않다든지 또는 재정적으로 궁핍하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그의 범사와 건강을 위해 축복해줍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이 알려주는 축복의 정석은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위한 축복의 원리는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른 성경 본문에서 가르쳐줍니다. 물론 야고보서 5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는 급한 건강의 문제나 재정의 문제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다만 오늘 말씀이 알려주는 것은 건강도 괜찮고 살림살이도 나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일반적인 축복의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의 건강이 계속 잘 유지되도록 축복해주고, 사업과 직장이 무탈하고 잘되기를 축복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신약성경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축복입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에는 돈을 조심하라는 경고가 더 자주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디모데전서 6(9-10)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6:24)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범사와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이 잘된 사람, 즉 영혼이 건강하고 부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행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더 나아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자들을 돕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건강하면 복음의 진리가 그를 통해 더 많이 전해질 것이고, 그의 생업이 잘되면 더 많은 후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형통하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기를 축복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영혼은 잘되지 않고 있는데, 즉 영혼이 건강하지 않은데 하는 일은 더 잘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것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좋은 직장을 잡게 해달라고, 좋은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영혼이 건강한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영혼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런 것만 잘되기를 원할 때 잘못되는 겁니다.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한 복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 이게 바로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영혼이 먼저 잘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절대 영혼이 잘되라고 축복해주는 게 아닙니다. 이미 영혼이 잘되어 있는 사람에게 나머지 두 개의 축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먼저 잘되어 있을 때 생업이 잘되고 몸이 건강해도 시험에 들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영혼이 잘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구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 하나님을 떠나 버리고 믿음을 떠나 버리며 잘못된 길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기준으로 최고의 부와 권력을 누렸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솔로몬입니다. 그는 말년에 이방 여인들의 손에 이끌려 이방 신들에게 제사하면서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사후에는 나라가 둘로 갈라지게 되었고, 결국 그 후손들은 나중에 포로로 끌려가며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그러한 것을 나중에 결국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2)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이 왜 헛되다고 합니까? 영혼이 잘됨이 없이 잘되면 헛되다고 고백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헛됨은 영혼의 잘됨 없이 형통할 때 경험할 수밖에 없는 헛됨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최종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12:13, 새번역)

 

바로 이것이 영혼의 잘됨을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잘됨이 없는 형통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영혼의 잘됨을 위해서 먼저 애써야겠습니다. 우리 자녀의 영혼이 먼저 잘되도록 인도해야겠습니다. 다른 형제자매의 영혼이 먼저 잘되도록 도와야겠습니다. 어떤 기도 제목을 닐 때, 영혼이 먼저 잘되어야 그다음에 잘되어도 진짜 복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잘됨이 없이 일이 잘 풀리고 건강하면 오히려 저주의 길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영혼이 잘된 가이오를 기뻐하면서 그가 하는 모든 일 역시 잘되기를 축복했습니다. 또 건강하기를 축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도 요한의 방식대로 서로를 위해 똑같이 축복하며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영혼이 잘되기를 먼저 간구하며 돕고, 그것을 토대로 범사가 잘되며 건강하기를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축복의 정석입니다. 우리가 이 축복의 정석대로 살아감으로 기쁨이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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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1-10) - 송년 메시지/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7 (12/31/22) admin_p 2023.01.01 714
357 거짓 교사를 분별하라 (유 1:1-10)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6 (12/14/22) admin_p 2022.12.15 361
» 축복의 정석 (요삼 1:1-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5 (12/7/22) admin_p 2022.12.08 641
355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요이 1:1-13)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4 (11/30/22) admin_p 2022.12.01 313
354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다 (요일 4:16-2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3 (11/23/22) admin_p 2022.11.24 408
353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벧후 1:1-1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1/16/22) admin_p 2022.11.17 1276
352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 4:12-19)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1 (11/9/22) admin_p 2022.11.10 1294
351 행함으로 드러나는 믿음 (약 2:14-26)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0 (10/19/22) admin_p 2022.10.20 1176
350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순종의 삶 (히 4:1-1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9 (10/12/22) admin_p 2022.10.13 348
349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때 (몬 1:8-1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8 (10/5/22) admin_p 2022.10.06 755
348 영생 상속자의 삶 (딛 2:14-3: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7 (9/28/22) admin_p 2022.09.29 400
347 완전한 사랑, 완전한 승리 (에스더 8:3-13) - 조준오 목사 (9/21/22) admin_p 2022.09.22 234
346 당신은 제자입니까? (마 7:21-23) - 이기환 장로 (9/14/22) admin_p 2022.09.22 186
34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 3:15-4:5)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6 (9/7/22) admin_p 2022.09.08 2778
344 신실한 사역자 디모데 (딤전 1:1-1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5 (8/31/22) admin_p 2022.09.01 686
343 충성스럽게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삶 (살후 3:6-14)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4 (8/24/22) admin_p 2022.08.25 654
342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일들 (살전 4:13-1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신약 설교) 13 (8/17/22) admin_p 2022.08.18 874
341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골 1:24-29)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2 (8/10/22) admin_p 2022.08.11 1037
340 사도 바울의 소망 (빌 3:17-2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1 (8/3/22) admin_p 2022.08.04 635
339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 (엡 4:17-24)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0 (7/27/22) admin_p 2022.07.28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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