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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5일 수요예배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8 ✦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때”
(빌레몬서 1장 8~18절)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자기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상처 주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 살아야 하는 가족들은 불편해도 참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내가 선택하고 만들 수 있는 인간관계에서 불편함이 느껴지면 피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관계도 성숙하게 받아들이고, 우리 손에 놓인 인간관계도 잘 가꾸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빌레몬서 본문 말씀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1. 빌레몬이 사랑하기 힘든 사람 오네시모
빌레몬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가르쳐줍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다른 이방인들 사이를 가로막은 벽을 무너뜨리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서에서는 단순히 인종적, 민족적 갈등뿐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주인과 종이라는 신분의 벽도 복음을 통해 신앙 안에서 극복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본능적으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는 우리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빌레몬서가 주는 가르침에 귀 기울이기 원합니다.
1)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는 바울의 부탁
빌레몬서의 중심인물은 빌레몬인데, 그는 이 편지의 수신자로서 바울이 부탁하는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은 17절에 한마디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7절)
여기서 ‘그’는 오네시모를 말하는데,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이 집에서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영접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롬 14: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 15:7)
로마서에서 ‘받아들이다’ 혹은 ‘영접하다’라는 말은 의견과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며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 환영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은 이 단어를 쓰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영접하라’ 하고 부탁하는데, 오네시모를 친절하게 환대하고 그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2) 빌레몬의 불편한 입장
바울의 이런 부탁을 받은 빌레몬의 입장을 생각해보십시오.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빌레몬은 에베소를 방문했다가 마침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약 3년을 머물며 사역하던 바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빌레몬 집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도망쳐서 로마로 간 겁니다. 그랬다고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바울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고 회심했습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8절)
이것을 보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큰 손해를 끼친 배신자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어떤 손해를 끼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불의’나 ‘빚’은 종이 도망친 기간에 주인을 위해 일하지 않아서 생겨난 경제적 손해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서 훔쳐 달아난 돈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빌레몬 입장에서는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달갑게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빌레몬서에 직접적인 설명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게 된 주인 빌레몬이 평상시에 자기 종을 무자비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을 보면, 빌레몬은 자기 집을 교회가 모이는 장소로 내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은 목자이자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자기 집에서 교회가 모일 정도의 제자이자 리더가 평상시에 자기 종인 오네시모를 가혹하게 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종 오네시모는 어떤 이유인지 도망을 칩니다. 자유를 찾아 도망한 것인지, 아니면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두려워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을 갑니다. 이런 오네시모를 보며 주인인 빌레몬이 어떤 감정을 가졌겠습니까?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 분명하고, 도망간 이 종을 도저히 좋게 볼 수 없었습니다.
3) 바울이 보낸 한 통의 편지
이런 와중에 빌레몬은 당시 로마에 갇혀 있던 바울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이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빌레몬에게 그를 배신하고 도망친 오네시모가 돌아가면 자기를 대하듯이 받아들이고 환영하라는 부탁을 합니다(17). 그러면서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자기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밝힙니다.
“10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10-12절, 새번역)
쓸모없던 그가 이제는 빌레몬에게와 바울에게 유익한 자(11)가 되었고 심장같이 소중한 사람(12)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빌레몬 입장에서 보면,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간 사람을 칭찬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해서 싫어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칭찬하면 좋을까요, 싫을까요? 당연히 싫습니다.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부탁을 받아들여 오네시모를 환영했는지 아니면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빌레몬서가 신약성경에 포함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오네시모를 환영하고 영접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빌레몬은 자기를 배반하고 도망간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다시 받아들이고 환대한 것입니다.
그 당시 문화에서 종을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도망간 종은 잡으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간 오네시모를 마치 그가 사도 바울을 대하듯 맞이하고, 심지어 종 이상으로 대한 것 같습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6절)
그렇다면 빌레몬은 자기를 배반한 종을 어떻게 영접하고 환영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빌레몬서를 통해 우리의 본성으로는 포용할 수도 없고 사랑하기도 힘든 사람을 어떻게 대할 수 있는지를 배웁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상처가 되는 타인이 있다면 방어막을 치고 그를 밖으로 밀어냅니다.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선천적인 기질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 후천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기질과 본성을 내려놓고 이 담을 뛰어넘어 사랑하기 힘든 사람의 손을 다시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게 됩니다.
2. 빌레몬이 배워야 했던 세 가지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만날 때 바울이 빌레몬에게 해준 말들을 주목해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세 가지 점을 지적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이 권면을 통하여 도저히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었던 오네시모를 영접하고 품어줄 수 있었습니다.
1) 희생
첫째, 바울은 ‘희생’에 대해 설명합니다. 빌레몬은 희생을 배워야 했습니다. 13절은 희생을 설명합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3절)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다시 되돌려 보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 13절에서 주목할 부분은 ‘갇힌 중’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총 4번에 걸쳐 자신이 갇혀 있다는 설명을 합니다(1, 9, 10, 13).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다시 따뜻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을 하면서 왜 자신이 갇혀 있는 상황을 굳이 언급하는 겁니까? 이미 갇혀 있는 것을 아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바로 복음은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전하다 보니 갇히는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위해 살다 보면 복음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빌레몬이 새겨 들어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 때문에 갇히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빌레몬도 복음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간 종을 영접하고, 더 나아가 종 이상으로 대접하는 것은 누구나 선뜻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배신자를 따뜻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희생을 배우라고 권면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빌레몬 그대가 오네시모를 받아들여서 종 이상으로 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압니다. 그런데 당신은 쉬운 일만 하면서 사실 겁니까? 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다가 끝나겠습니까? 복음은 때로 희생을 요구합니다. 복음 때문에 갇혀 있는 나를 한 번 보십시오. 나도 복음을 전하면서 희생했고 지금도 희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힘든 일임을 잘 알지만, 나는 그대에게 부탁합니다. 오네시모를 다시 받아주십시오.’
우리는 살면서 나와 마음이 맞거나 대화가 통하는 사람만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 대화가 하나도 통하지 않는 사람, 심지어 나에게 상처와 배신감을 주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고 사랑하는 일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내가 희생해야 할 때가 있어야 하며, 져주고 양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희생을 이야기하면 마음이 불편한 수 있습니다. 내가 왜 희생해야 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고,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희생해야 하는 게 맞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상대방은 나를 괴롭혀도 되고 나는 희생하고 용서하고 참야야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빌레몬서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실 예수님의 길이 바로 희생 아닙니까?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자체가 벌써 엄청난 희생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개미가 되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또 생명까지 내어주시며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잘 깨달은 바울도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전하다 온갖 고난을 겪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 정도 되는 복음의 일꾼이라면 평생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살았으니 대접받고 인정받으며 편안고 만사형통하게 살아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로마제국의 죄수가 되어 말년에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순교하게 됩니다. 복음을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희생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눈물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희생으로만 맺힙니다. 희생이 없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내 삶과 사역에 별 열매가 없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는 산모는 극심한 산고를 겪는 희생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죄인을 살리는 위대한 결과를 낳았고, 바울의 희생은 로마제국 전역에 교회를 세우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후천적으로 희생이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진 후천적인 사랑의 힘은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마저도 용납할 수 있도록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희생하지 않는 문화, 몸을 사리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왜 희생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희생을 싫어하고, 자기를 보호하며 몸을 사리게 이끕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분으로부터 희생을 배웁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희생을 제대로 배운 바울을 통해 우리는 희생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쉬운 것만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만만한 것만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편안한 것만 추구하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은 편한 것만 찾는 본성이 있고, 사람을 대할 때도 편한 사람만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돌길을 맨발로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불편한 사람들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의 손도 잡아주어야 합니다.
2) 선한 일
둘째로, 빌레몬은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4절)
여기 보면,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가리켜 "너의 선한 일"이라고 부릅니다. ‘선한 일’이라는 말은 단지 악한 일과 반대되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들을 보면 그는 ‘선하다’라는 단어를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합니다(롬 12:2; 갈 6:10; 살전 5:15).
그러니까 ‘선한 일’이라는 말은 단지 윤리 도덕적으로 착한 일이라거나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원하시는 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빌레몬이 배신자인 종 오네시모를 다시 따뜻하게 영접하는 일은 단지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며, 주인과 종 사이의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상처를 주고 배반한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를 배반한 사람을 환대하고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을 위해서만 좋은 일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단지 나를 고상한 인격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의 손을 다시 잡아주는 것은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하는 일도 아니고, 상처받은 나의 감정을 치유하는 일도 아닙니다. 상처 준 사람의 손을 다시 잡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일은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가게 되면, 상처와 배신 때문에 생긴 우리의 상한 감정을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3)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셋째로, 바울은 15절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언급합니다.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5절)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다시 영접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입니다. 언뜻 보기에 이 구절은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서 ‘떠나게 되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문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의미상의 주어가 되는 소위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잠시 떠났다는 의미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잠시 떨어뜨려 놓았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을 배신하고 도망간 것은 악한 일이고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한 인간의 악함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오네시모가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친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말하는 겁니까? 15절 뒷부분이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무슨 말입니까? 오네시모가 잠시 빌레몬을 떠나 도망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결국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주님의 교회 안에서 믿음의 가족으로 영원히 함께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만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관계가 되었다는 겁니다.
나와 다른 사람 또는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나를 배반하고 엄청난 실망을 준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그 힘은 상처와 배신 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볼 수 있을 때 나옵니다.
하나님은 상처와 배신이라는 포장지 안에 당신의 선한 계획과 섭리를 숨겨 놓고 계십니다. 배신감과 상처에만 집중하다 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보게 되면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용납하고 용서하며 따뜻하게 받아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 나에게 깊은 실망감을 주는 사람, 정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보는 데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를 실망시키거나 섭섭함을 느끼게 하거나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선한 계획을 이루신다는 관점을 가지고 그 사람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새로운 관점이 생길 것입니다.
[나가는 말: 쉬운 사랑을 넘어서]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빌레몬서는 그럴 때 세 가지를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희생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의 손을 다시 따뜻하게 잡아줄 힘을 주십니다.
이 빌레몬서가 빌레몬에 어떻게 전해졌을까요? 빌레몬이 직접 들고 가서 전한 것입니다.
그와 함께 골로새서를 전하는 것도 함께 했습니다(골 4:7-9). 그때 그는 자기가 배신했던 주인 빌레몬을 다시 만나게 되고, 빌레몬의 용서와 사랑으로 노예에서 해방되어 함께 주님을 섬기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주님의 교회에 열심히 헌신했는지는 그로부터 약 50년 후 위대한 그리스도인 순교자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에 나옵니다. 주후 107년에 안디옥 교회 감독이던 이그나티우스는 처형당하기 위해 안디옥에서 로마로 연행되는 도중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때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들의 감독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의 높은 평가를 하며 그들의 감독에 대해서 이렇게 부탁의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을 본받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감독으로 모실 만한 자격이 있는 분들이며, 여러분의 감독이 된 그분은 축복 받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그나티우스가 언급한 그분이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골로새의 도망자 노예가 세월이 지나 에베소 교회의 위대한 감독이 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인 디모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은 신실한 일꾼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섬김을 받은 교회이며, 사도 요한이 말년에 섬긴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로마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함께 다섯 개의 최고 감독 교회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 교회는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동서방 교회를 통틀어 다섯 명의 최고 감독직 가운데 한 석을 차지하는 그런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이 교회의 감독이었다는 기록은 그의 엄청난 변화를 보여줍니다.
바울의 믿음의 권면과 빌레몬의 용서와 사랑의 결단으로 인하여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변화되었고, 주님의 일꾼으로 잘 성장하며 결국 에베소 교회의 감독까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품어줄 때, 그러한 우리의 결단을 통해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역사로 가득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