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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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0일 수요예배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2 ✦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골로새서 1장 24~29절)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엄청난 수적 성장을 경험했는데 그것을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부흥이 맞는 것이, 안 믿던 사람들이 믿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990년대에 들어와 성장이 둔화되더니, 21세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요금은 사회로부터 아주 날카로운 비판을 받고 있으며 신뢰도도 낮습니다. 설문조사를 보면 개신교의 신뢰도가 가장 바닥입니다. 가톨릭이나 불교보다 낮습니다. 왜 그렇게 된 걸까요? 결국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다수 분석가들의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과 삶이 일치되는 변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까? 회개하면 됩니까? 욕심을 버리면 됩니까? 성령을 받아야 됩니까? 최후의 심판을 강조해서 공포심을 조장하면 됩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문제 해결에 필요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각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 해결의 열쇠라고 믿습니다.
1.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삶의 변화와 성화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후 영접한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께서 그의 안에 내주하십니다. 이제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고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그리스도의 통치권으로 옮김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요 15:19; 고전 1:30; 골 1:13; 요일 4:4-6).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한마디로 말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를 외쳤는데, 이 구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타협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 상황과는 전혀 다른 오늘날 그런 구호만 붙들고 있다가는 결과적으로 ‘구원파식’ 구원론에 치우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는 로마 가톨릭이 행위 구원을 강조했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지만, 그것만 강조하게 되면 구원파식 구원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제자로서의 헌신과 선한 행실을 안 해도, 즉 성화의 열매가 없어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심판 때 구원을 ‘떼어 놓은 당상’처럼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이 가르치신 제자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반대로 사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하기를 싫어하고 자기를 주장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조금만 손해가 오면 피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다 오는 박해나 손해가 십자가인데, 그것을 싫어하고 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셨는데 정말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고 있습니까? 당시 1세기 상황에서 마가복음을 읽는 성도들에게는 박해와 고난 속에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진짜 죽는 순교뿐 아니라 내 생명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구원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말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온 의의 열매가 없고, 재림하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지도 않고, 충성을 다하지 않고,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베풀지 않는 삶을 산 사람은 주님의 심판 날 자동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이 유명한 말씀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1-23, 새번역)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귀신을 쫓아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했지만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좋은 일을 행한 사람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십니다.
왜 이렇게 좋은 일을 한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에 답이 있습니다. 말로만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고 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했는데, 주님과 관계가 없이 했다는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고 이름만 빌려서 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비슷한 경고를 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사도 요한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영생이 없고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일 3:14-15). 예수님의 동생이자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 역시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며,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약 2:12-18).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음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주님이 원하시는 행동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든 관심이 온통 자기 쾌락에만 있고 술 취함과 방탕함에만 있는 것을 보니까 그런 게 정말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냐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향해 심판 때 버림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게 하는 부정적인 경고의 말씀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확신과 위로와 소망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 더 많습니다.
성도들이 힘써 제자도를 행하며 거룩하고 선하게 살기를 추구하는 동기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그것은 결코 복음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하면 구원을 못 받을까 봐 무서워서 벌벌 떨며 어쩔 수 없이 한다면 그게 어떻게 진짜 믿음이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하며 자기가 원하는 선을 행치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고 자신의 패배하는 삶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았나? 디모데전서 1장에서도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우리는 말할 것도 없지. 다 죄인으로 살다가 예수님을 믿어 그분의 공로로 천당 가는 거지.”
바울이 이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니다. 완전히 오해했다.’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로마서 7장에 등장하는 ‘나’는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처럼 살지 말고 8장의 교훈처럼 성령을 따라 살라는 것이 그의 말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바울이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표현은 믿기 전에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고백한 말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고 공짜로 구원받아 죽은 후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목표라고 가르치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교적인 생각입니다. 불교에서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인인 아미타불을 향해서 죽은 후 극락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간구의 염불을 합니다. 그게 바로 “나무아미타불 왕생극락”입니다.
그런 불교적인 구원관을 가진 교인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게 됐으니, 죽음 후의 문제는 해결됐어.” 그들은 세상에서 복을 받고 형통하게 잘 살다 죽어 천당 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성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명을 이루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사명이 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 공로로 구원받긴 했지만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나는 연약하고 세상은 악하잖아. 그러니 적당히 타협하면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도 어쩔 수 없지. 세상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겠어? 그러면 망해. 그러니까 예수님의 보혈 공로를 믿는 것이고, 주일마다 교회 가서 회개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겠어?”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꽤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육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에게 구원을 받았거나 못 받았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저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 즉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믿음과 은혜로 우리를 건지신 목적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성령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성령을 따라 성화의 삶, 예수님을 닮아가는 ‘받는 구원’의 삶, ‘혼의 구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 때 심판대 앞에 다 서게 될 텐데, 모든 신자는 선악 간의 모든 행위와 성화의 생활 여부에 대해 심판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놓고, 또 다른 책 하나를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계 20:12-13, 새번역)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계 22:12, 새번역)
자기 밖에 모르는 행위, 자기가 주인인 삶을 산 사람들은 심판하시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쓴 사람들에게는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상도 주시고 벌도 주십니다.
우리는 신약 곳곳에서 내세의 심판을 바라보며 거룩하게 살라는 경고의 말씀을 봅니다. 신약의 모든 서신서는 예수 믿고 은혜로 구원받는 교리에 대해 가르치고 있으며, 동시에 신자의 윤리적인 생활과 성화의 생활, 즉 예수님을 닮는 삶에 관해서 많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언급하면서 구원의 최종적 목표가 신자의 성화, 즉 예수님을 닮은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를 보여주는 구절 몇 군데만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 8:29)
왜 구원하셨습니까?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즉 예수님을 닮으면서 살라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1-22)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신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과 화목하게, 즉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은 바로 천당 가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 즉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도록 그러셨다는 겁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 1:3-4)
오늘 본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사역의 목표와 사명도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8절)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다’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를 통한 성화’를 뜻합니다. 이 목표를 위해 바울은 자기가 고난을 감수하며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크게 네 가지 진리를 이야기해줍니다.
1) 신자들 안에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24-27).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4절)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7절)
믿는 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신 그분은 ‘비밀’이십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말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된 관계를 전제합니다. 우리 안에 분명히 성령님이 계시는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정말 우리 안에 사신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된 관계라는 표현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도이자 ‘교회의 일꾼’(25)인 바울의 목회적 사명은 성도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28b).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5절)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8절하)
우리 각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목표는 우리가 이뤄가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천국 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목표가 아닙니다. 그게 목표라면 믿자마자 죽어 천당에 가야 하는데 지금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자로서 예수님을 닮으라는 겁니다. 그게 목표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삶 속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 즉 신자의 삶의 변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최종적인 목표라는 말입니다.
3) 각 신자의 변화와 성화를 이루는 것은 사역자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을 통해 이뤄집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28절상)
‘그를 전파하다/모든 지혜로 가르치다’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신자 속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비밀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비밀이시며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삶이 무엇이며, 신자와 예수님 간의 관계는 무엇인지,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삶 속에서 어떻게 완전한 자가 되어 가는지에 대해 전파하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4) 이러한 사명을 힘써 수행하는 바울의 힘의 원천은 ‘자기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라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29절)
이 일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데(24),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자 교회의 일꾼으로서 그 고통스러운 수고를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표현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24절, 새번역)
그러므로 구원받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 곧 성화를 이루는 것이 구원의 최종적인 목표인지도 모르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등한히 하며 살고 있다면, 비록 말로는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의 삶은 실패한 생애가 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결국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닮은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의 구원론은 칭의와 성화를 같은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구원론은 성화를 통해 칭의가 완전히 이뤄지는 것이라고 가르치다 보니까 ‘연옥설’이라는 게 나오는 겁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완벽하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죄를 지으며 사니까 연옥에서 정화가 되어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교리 설명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연옥은 영적 정화(靜化)의 장소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죽으나 세상에서 지은 죄들에 대한 모든 형벌에서 면제되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도 바로 천당으로 갈 수 없다. 자기가 지은 죄들에 대해 아직 참회해야 할 사람들은 먼저 연옥으로 간다... 연옥에서 이루어지는 정화는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초자연적인 생명의 온전한 완성을 위해 준비하는 단계다. 영혼은 지상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과 그분께 영광 돌림에 있어서 부족했던 것을 완전하게 하여야 한다. 영혼이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은 고난을 통해 이뤄진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아직 참회해야 할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바로 천당에 가지 못하고 일단 연옥에 가서 정화된 다음에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보기 때문인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데 성화라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노력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노력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잘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행동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고, 선한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는 봉사 활동이 아주 많습니다.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행 구원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까? 성경의 교훈을 따르면 환난과 연단 및 징계는 이 세상에서 행해집니다(히 12:4-13). 선과 악, 충성과 불충성, 육적인 삶과 성령을 따른 삶에 대한 행위 심판은 연옥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 최후 심판대에서 이뤄진다고 성경 여러 군데에서 이야기합니다.
정말로 죄 사함과 칭의를 은혜로 받은 신자는 이러한 확신과 소망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롬 5:1-2, 9, 새번역)
개신교 안에도 이와 살짝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톨릭은 자꾸 칭의와 성화를 섞어서 뭔가를 행해야 온전히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데, 반대로 ‘예수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아 우리의 구원이 이미 이뤄졌기 때문에 우리가 장차 천당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어떻게 살든지 심판이 통과될 것은 확실하니까 회개나 성화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구원의 확신을 품은 채 안심하며 살아가라.’ 하고 가르치는 반대 극단도 있습니다. 한쪽은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라고 하고, 반대쪽은 ‘구원받았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라고 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구원파식 구원입니다. 둘 다 오류입니다.
칭의와 성화를 철저히 구별하면서도 둘을 분리하기보다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 바로 장로교의 효시가 되는 종교개혁자 칼뱅(John Calvin)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서로 다른 사건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구원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만 있고 부활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또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는데 어떻게 부활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죽음과 부활이 같이 있어야 구원이 이뤄지는 겁니다.
바울에게도 칭의와 성화,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은 분명히 다르지만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이 따라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 때 진짜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롬 6:5, 새번역)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롬 6:19)
요즘에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여전히 조금 전에 말한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 결과로 뭐가 나옵니까? 슬쩍슬쩍 빠지고, 예배 안 해도 되고, 봉사는 귀찮으니까 안 해도 되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뭔가를 해야만 구원을 받는 게 아닌가 하면서 오늘이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합니다. 자기가 예수님은 믿은 건 분명한데, 이 정도로 될지 확신이 없는 겁니다.
이런 두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다 있습니다. 둘 다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완벽히 살겠습니까? 하지만 매일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애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롬 6:6, 새번역)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다음 단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롬 6:11, 새번역)
이러한 믿음을 모두 종합하여 바울이 한 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새번역)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오늘 성경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바울과 같은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27-29절, 새번역)
예수님의 은혜를 구원받았음을 기억하면서, 바로 그 구원받은 사람답게 다른 사람도 구원받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