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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3일 수요예배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5 ✦
호세아(회복의 기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장 1~3절)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
호세아 하면 음란한 아내를 맞이해야 했던 예언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호세아서의 내용은 하나님을 떠나 타락과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시고, 그 여인이 음란한 자녀 곧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는 것과,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바람이 나 집을 나간 후 노예가 된 상황에서 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다시 되찾아 오는 상황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우상 숭배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가정을 깨고 고통스럽게 하는 불륜과 같은 것임을 통렬히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데, 호세아가 고멜을 끝까지 찾아오는 상황들을 통해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이긴, 아주 생생하고 눈물이 젖은 진짜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책 속에 들어 있는 이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딘가 다른 데에 있는 고상하고 거룩하고 수준 높은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사랑으로 살 수 있게 만드는 진짜 사랑입니다. 바로 그것이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1. 온전한 사랑을 먹으라
우리는 흔히 고통은 끔찍한 사고나 질병 등 외부적 요인을 통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만히 보면 고통은 대개 마음속의 상처 때문에 생기고, 그 상처는 결국 사랑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문제를 일으키며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를 가리켜 ‘권위의 존재’라고 합니다. 그의 사랑 때문에 행복해질 수도 있지만, 그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 상처받을 수도 있는 그런 존재가 ‘권위의 존재’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대개 부모가 이 권위의 존재(인물)입니다. 이 권위의 존재로부터 사랑의 문제와 상처를 일으키는 요소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결핍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음식을 먹지 못해서 굶주리는 것처럼, 사랑을 받지 못해 감정에 결핍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상함입니다. 사랑과 상처를 함께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한 음식을 먹은 것과도 같은데, 상한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 토해내거나 배탈이 나서 아주 고생하게 됩니다. 상한 것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왜곡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원하는 사랑이 아닌 왜곡된 사랑입니다. 먹기 싫은 음식, 좋아하지 않는 음식, 소화시킬 수 없는 음식을 계속 먹게 되는 경우와 같은 것으로, 이것은 정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소화를 시킬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그것은 고통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에 대한 답이 무엇입니까? 온전한 사랑을 제대로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사랑을 제대로 먹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들을 통해서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모님, 배우자, 친구, 존경할 만한 목회자나 선생님을 통해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사랑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사랑은 늘 부족합니다.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만족할 만큼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사랑을 주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상처는 대부분 누구에게 받습니까?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습니다.
셋째가 아주 결정적인데, 인간의 사랑은 찾고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상처가 많은 사람은 상처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전한 만남을 가질 수 없고, 결국 더 심각해지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인간이 가진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궁극적 권위의 존재이면서도 온전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와 문화와 종교를 뛰어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야 합니다. 그 사랑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4:7-8, 새번역)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역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가운데 있을 때에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며 그분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모든 것입니다.
2. 회개를 통한 사랑의 회복
그렇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회개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회개는 뉘우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회개가 뉘우침이었던 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회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합니다. 그 이야기의 절정이 무엇입니까? 탕자의 뉘우침이 아닙니다. 그가 뉘우친 다음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회개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행복해집니다.
회개했는데 고통스럽거나 비참해진다면 그것은 진짜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모든 죄의 세력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좋은 회개를 안 하려고 합니까? 이에 대한 기가 막힌 대답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회개를 촉구하고, 이어서 그렇게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면 치유와 회복이 있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1-2절)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만 하면 치유되고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에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3절)
우리는 이 말씀 앞에 ‘그러므로’가 붙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는 문법적으로 ‘인과접속사’로서, 원인이 되는 문장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결과가 되는 문장이 나올 때 결과 앞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앞에 나온 내용 중에서 어떤 것이 이유가 되는지를 보면 내용의 전개가 매끄럽지 않게 느껴질 수 있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보통은 ‘A다. 그러므로 B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를 쓰면 오히려 문법적으로 맞지 않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문법이나 논리에 어긋나는 단어나 문장이 등장하면, 그것은 정말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파격적으로 사용한 경우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러므로’는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한 다음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즉,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 말씀으로 볼 때,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알지 못해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자기들을 찢으신 분, 자기들을 치신(상처를 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고, 그분에게 돌아가려면 그분을 잘 알자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온전히 알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정말 많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네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무관심한 분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무관심한 부모(특히 아버지)로 인한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잘 안 됩니다. 무관심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응답하실 리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의 필요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나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나 아픔을 해결해주실 수는 없는 무능력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삶 가운데 원하지 않는 아픔이나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무능력한 경우에도 하나님에 대한 그림이 그렇게 깨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고, 기도 또한 잘 되지 않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처를 많이 준 부모로부터 비롯된 오해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부모인 경우에는 권위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삶 가운데 역사하신다고 하면 덜컥 겁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더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간섭을 바라지 않으니 기도 또한 되지 않습니다.
넷째는, 하나님을 일방적인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 모임에 나가기도 싫고, 기도하는 것도 잘 안 됩니다. 혹시라도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무언가를 결정하고 통보하실 것처럼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안 주시고 저 아프리카에 선교를 가라고 하실 것 같아 두렵습니다.
국제선교단체인 Youth With A Mission(YWAM, 한국에서 등록된 이름은 예수전도단) 출신 목사인 플로이드 맥클랑(Floyd McClung)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오래 전에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예수전도단 역간, 2002)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분은 호주에서 오래 사역하셨는데, 이 책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주 신앙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그들 안에 ‘무관심한 하나님, 특권 의식이 있는 하나님, 독선적인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한계에 부딪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았더니, 호주는 원래 영국에서 죄수들을 데리고 와서 시작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죄수들을 감시하는 교도관 역할을 하게 되면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미지가 ‘무서운 하나님, 특권 의식이 있는 하나님, 독선적인 하나님’으로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 있는 많은 문제의 원인은 대부분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죄 때문이며, 죄에서 돌이키려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미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진 것은 죄 때문이고, 죄에서 벗어나려면 바른 이미지를 가져야 하는데 죄 때문에 잘못된 이미지만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악순환이며, 이것이 계속되어서 사람들이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4. 죄의 악순환을 끊는 기도의 능력
현실의 모든 죄 문제는 그런 악순환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신앙에 바로 이 악순환을 깨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영적 악순환을 깰 수 없습니다. 어떤 노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반드시 악순환을 깨뜨립니다. 호세아는 그러한 영적 악순환을 보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악순환을 깰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담대히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깨어진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더욱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깨어진 채로 살아갑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비록 현실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악순환의 반복이지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깨어진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것이 회개라고 외치며, 바로 이것이 영적 회복을 일으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영적인 악순환을 끊으려면 이러한 영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죽어도 하나님 앞에서 죽겠다는 결단이 있을 때 악순환을 끊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어떤 노력들이 이러한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예배로 가능합니다. 정말 예배드리고 싶어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배드릴 수 없는 힘든 마음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드리는 가운데 마음이 바뀌고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도 그렇습니다. 정말 힘들고 이해되지 않고 현실적이지 않게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도 간의 교제도 그렇습니다. 정말 좋아서 교제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섬기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고, 그 안에서 천국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순환을 끊어내는 것보다 더 강력한 최고의 영적 결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회개 기도입니다. 회개는 곧 돌이키는 것인데, 돌이키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 방향, 곧 어디로 돌이키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잘못된 데서 또 다른 잘못된 데로 돌이키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5. 그럼에도 기도하고 여전히 기도하라
호세아의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도 방법이 있습니다.
1) ‘그럼에도’의 기도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1절, 새번역)
상황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이 느껴지지만, 나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이 느껴지지만, 어떨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능력의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그럼에도’의 기도를 통해서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응답의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 보물이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나를 향한 막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결코 사라지거나 중단되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2) ‘여전히’의 기도
기도는 마라톤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안 되나보다 하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여전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순간 짧고 굵게 기도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기도는 여전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7장에서 유명한 ‘화덕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6 새 왕을 세우려는 자들의 마음은 빵 굽는 화덕처럼 달아오르고, 그들은 음모를 품고 왕에게 접근한다. 밤새 그들의 열정을 부풀리고 있다가 아침에 맹렬하게 불꽃을 피워 올린다. 7 그들은 모두 빵 굽는 화덕처럼 뜨거워져서, 그들의 통치자들을 죽인다. 이렇게 왕들이 하나하나 죽어 가는데도 어느 누구도 나 주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호 7:6-7, 새번역)
남유다는 다윗의 후손 중에 계속 왕이 나왔지만, 북이스라엘에는 툭 하면 쿠데타가 일어나서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죽이고 새 왕을 세우겠다는 사람들이 계속 나온 겁니다. 그것을 여기서 말하는 겁니다. 반역해서 지금의 왕을 죽이고 새 왕을 세우자는 사람들이 마치 달아오른 화덕처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자기들의 음모를 이룬다는 겁니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뜨거운 열정으로 하는데, 기도야말로 이런 뜨거운 열정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맹렬한 불꽃으로 화덕을 뜨겁게 달구듯이 기도의 화덕이 늘 달구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기도하는 것, 또 ‘여전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닌 것 같아도,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고 영적인 화덕, 기도의 화덕을 달구면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그럼에도 여전히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로 영적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우리 삶 속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승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복된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