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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3일 수요예배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1 ✦
에스더: 도전의 기도 -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 4장 9~17절)
[들어가는 말]
유대인들은 절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기를 참 잘 지키는 사람들이어서 각 절기별로 성경을 읽는데, 그것을 ‘다섯 개의 두루마리’라는 뜻의 ‘메길로트’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절기인 ‘유월절’에 그들은 ‘아가’서를 읽습니다. 두 번째 절기인 ‘칠칠절’(오순절)에는 ‘룻기’를 읽습니다. 세 번째 절기인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읽습니다. 네 번째 절기인 ‘티샤 베아브’(아브 월 아홉 번째 날 즉 5월 9일, 성전이 파괴된 날)에는 ‘예레미야애가’를 읽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절기인 ‘부림절’에는 ‘에스더’서를 읽습니다.
각 절기마다 그에 해당하는 메길로트를 읽을 때, 그들은 책 읽듯이 줄줄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노래나 공연을 하면서 읽습니다. 각 절기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온몸과 삶으로 다시 한 번 누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즐거운 책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대개 에스더서를 꼽습니다. 에스더서의 내용 자체가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반전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1. 반전과 우연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1) 십자가를 가리키는 반전 이야기
에스더서에는 수많은 반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굉장히 낮은 위치에 있던 모르드개가 나중에는 왕의 다음 가는 높은 신분까지 올라가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반면, 아주 높은 위치에 있던 하만은 마지막에 자기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아주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또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기 위해서 세운 교수대 위에 결국 하만 자신이 매달려 죽습니다.
이처럼 에스더서 안에는 극적인 반전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서 최고의 반전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제비를 뽑은 그날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축제의 절기가 된 반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날을 ‘제비 뽑은 날’이라는 의미의 ‘부림절’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날은 원래 죽게 될 날이었는데, 오히려 그날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대적들을 멸망시킴으로써 그날이 곧 축제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반전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부수고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예수 그리스도의 반전 이야기와 에스더 이야기가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에스더서에는 전체적으로 십자가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십자가야말로 반전 중의 반전이 아닙니까? 가장 잔혹한 사형의 도구였던 십자가 형틀이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끔찍한 죽음의 자리가 생명과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고통이 가득한 십자가가 놀라운 평화가 되는 역사의 반전 이야기가 바로 에스더서에 쭉 깔려 있는 것입니다.
2) 반전을 향해 흐르는 우연의 역사
그런데 이런 반전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아주 ‘우연히’ 일어납니다. 이것이 에스더서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우연의 일치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에, 문을 지키는 왕의 두 내시 빅단과 데레스가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 음모를 알게 된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또 에스더는 그것을, 모르드개가 일러주었다고 하면서, 왕에게 말하였다.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 음모가 밝혀지니, 두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이런 사실은, 왕이 보는 앞에서 궁중실록에 기록되었다.” (2:21-23, 새번역)
이것을 보십시오. 두 내시가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우연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는 이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루는 왕이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그날따라 평소에는 전혀 읽지도 않던 역대 일기(궁중실록)를 읽게 되는데,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모르드개가 했던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날 밤, 왕은 잠이 오지 않아서 자기의 통치를 기록한 궁중실록을 가지고 오라고 하고, 자기 앞에서 소리를 내어 읽게 하였다. 실록에는, 대궐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죽이려고 한 음모를, 모르드개가 알고서 고발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6:1-2, 새번역)
이 일에 대해 나라에서 모르드개에게 아무 상도 내리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은 왕은 모르드개에게 상을 내리려고 하고, 마침 그 순간 아주 ‘우연히’ 하만이 궁궐 뜰에 들어와 있습니다(6:3-4). 그것도 자기 집에 세운 장대에 모르드개를 달아 죽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으려고 거기 와 있던 순간입니다.
그때 왕은 ‘내가 특별히 대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하고 마침 그때 거기 있던 하만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하만은 ‘나 말고 누가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최고의 대우를 해줄 것을 건의합니다. 즉, 왕의 옷을 입히고 관으로 꾸미고 왕의 말을 타게 해주며 성을 돌면서 이 사람이 높다고 외치라고 건의합니다.
그러자 왕은 하만에게 유다 사람 모르드개를 그렇게 대우하라고 하여,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왔던 하만이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게 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가 말을 끌고 다니며 그렇게 해주게 됩니다.
이처럼 에스더서에는 너무나도 많은 우연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이 우연들이 놀라운 반전의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른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만이 자기를 높여주는 줄 알고 최고의 대우를 해줄 것을 건의했을 때, 그 대우를 받는 사람은 하만이 아니라 모르드개인 것과 같은 반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반전은 고대 근동 문학에서 중요합니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시학>에서 ‘운명의 역전’이라는 의미를 갖는 ‘페리페테이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어떤 행동이나 상황이 예상했던 결과와는 전혀 반대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고대 문학에서 그러한 ‘운명의 역전’ 방식을 사용했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해야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의 역전’(페리페테이아)을 통해 인간의 좌절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항로가 인간의 통제권 밖에 있는 힘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서에서 사용된 ‘운명의 역전’ 기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그리스의 연극과는 다릅니다. 그리스 연극에서의 ‘운명의 역전’은 인간의 통제권 밖에 있는 어떤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에스더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에스더서 전체에 ‘하나님’이나 ‘주님’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운명을 바꾸면서 우연하게 보이는 사건들 가운데 반전의 반전을 일으키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에스더서의 기록 방식입니다.
3장에 보면, 하만이 계략을 꾸며 아하수에로 왕에게 유다 민족 전체를 진멸하도록 허락을 받고 조서를 전국에 보내며 선포하게 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쓴 채로 성 안에 들어가는데, 베 옷을 입으면 대궐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대궐 문 밖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합니다(1-2).
이 소식을 들은 에스더는 왕이 자기를 보살피도록 붙여준 내시 하닥을 불러 모르드개에게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하닥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주고 에스더에게 부탁의 말을 전합니다.
“모르드개는, 수산 성에 선포된 유다 사람을 전멸시키라는 칙령의 사본을 하닥에게 건네 주면서, 에스더에게 그것을 보이고, 설명하여 드리라고 하였다. 또한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직접 어전에 나아가서, 왕에게 자비를 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 겨레를 살려 달라고 탄원하도록, 하닥을 시켜서 부탁하였다.” (8절, 새)
이 말을 전해들은 에스더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11절)
이 말을 전해들은 모르드개가 다시 하닥을 통해 에스더에게 강력한 도전의 말을 전합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3-14절)
이러한 말에는 하나님 이야기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읽는 순간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야기임을 너무나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이러한 반전 드라마를 하나님이 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감동인 것은,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역사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놀라운 반전 드라마를 쓰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반전을 이끌어 내는 기도의 능력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반전 드라마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기가 막힌 반전의 역사를 일으키시되, 그 모든 반전의 역사를 혼자 알아서 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더서에 나오는 모든 일들과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가 있기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스더서에 ‘하나님’이나 ‘기도’라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강력한 기도의 이야기가 바로 에스더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의 두 주인공인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성경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강력한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를 일으키는 기도의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 세 가지가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첫째로, 기도의 사람은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둘째로, 기도의 사람은 기도에 모든 것을 겁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도의 사람은 실제로 결단하고 기도합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기도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기도할 상황이 아니어도 결단하고 기도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를 일으키는 기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바로 에스더 4장입니다. 모르드개의 강력한 도전의 말을 전해들은 에스더는 믿음의 결단, 비장한 결단을 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6절)
에스더의 이 결단의 선언에는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를 일으키는 기도의 세 가지 특징이 들어 있습니다.
1) 도전하는 기도
기도하고 나서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죽으면 죽으리이다.” 진짜 기도는 도전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자기 생각과 감정과 상식과 판단을 뛰어넘지 않으면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에스더가 왕의 규례를 어기고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나아간 것처럼, 우리도 아무 때나 법을 어기면서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나가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에스더가 범죄를 저지르면서 ‘죽으면 죽으리이다.’ 한 게 아닙니다. 나라의 법을 막 어겨가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입니다. 악한 계략에 의해 자기 민족이 모두 말살 당하게 된 상황입니다. 아주 급박한 상황이고 악한 상황에서, 나라의 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는 겁니다. 유다 민족이 말살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처럼 무고하게 말살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때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나아간 것이지, 무조건 법을 어기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으니 그냥 기도나 한 번 해 보자.’ 하며 마지막 수단으로 기도하는 것은 진정한 도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도전하는 기도는 정말로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그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유다 민족이 말살 당하는 게 아닙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서 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에스더를 보십시오. 도전하는 기도 후에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왕에게 나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를 일으키는 기도, 도전하는 기도의 특징입니다.
2) 힘쓰는 기도
본문에 기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금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금식이 무엇입니까? 힘쓰는 기도의 전형적인 용어입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완전금식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시녀와 함께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시녀는 무슨 죄가 있어서 같이 금식해야 하나?’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자기 시녀는 페르시아 사람 아니면 페르시아가 정복한 식민지에서 온 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을 모르던 시녀였는데 에스더가 자기처럼 하나님을 믿도록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시녀가 괜히 죄도 없는데 금식해야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시녀도 기꺼이 왕비의 금식에 동참할 정도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일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 사람이 탈진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완전금식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대부분 물은 마시는 일반금식이나 채식중심의 부분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물도 안 마시면 사람이 탈진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동안 왕비로서 얼마나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며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끊고 오직 금식하며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도 목숨을 걸고 기도할 테니, 유다인들 모두 목숨을 걸고 같이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끈질기게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왜 선택된 백성의 이름이 하필 이스라엘이 되었습니까? ‘아브라함 백성’이라고 해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힘쓰는 기도, 목숨 걸고 하는 기도를 하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씨름하듯,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3) 분량을 채우는 기도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무엇을 부탁합니까? 수산 궁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에게 3일의 금식 기도를 요청합니다. 기도의 분량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별로 기도한 게 없는데 생각보다 일찍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일방적인 은혜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 주변 누군가의 기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하는 중보기도가 중요하고, 또한 교회의 중보기도 사역이 아주 중요합니다.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물리학에 ‘비등점(沸騰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끓는 점’입니다. 물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를 말합니다.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습니다. 온도가 아무리 높고 물이 아무리 뜨거워도 끓지 않습니다. 100도에 도달하지 않으면 물은 끓지 않습니다. 99도라도 끓지 않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영적 비등점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기도의 분량이 채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일어나도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필요한 만큼의 분량이 채워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혼자 못하십니까? 얼마든지 혼자서 어떤 기적도 일으키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겁니다. 이 은혜를 모르니까 기도를 안 하지, 이 은혜를 알면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통해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하시는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또 경우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해야 되는지를 느낍니다. ‘그걸 어떻게 아나요?’라고 하신다면, 기도해보면 압니다.
기도의 분량을 채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얼마나 기도의 분량을 채워야 하는 것인지, 영적 비등점이 어느 정도 되는지, 기도하는 사람들은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그것을 느낍니다.
어떤 기도제목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기도시간을 마치고 일어날 때 아직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 아직 채워진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렇게 오래 기도한 것도 아닌데 일어날 때 이상하게 기쁨이 오고 평안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들은 그 기도의 분량이 채워지기까지 자신의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 했는데 안 채워졌다면 내일 또 하는 겁니다. 그 다음 날 또 하는 겁니다. 영적 비등점에 도달할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혼자 기도하지 않고 다른 지체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의 분량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분량을 채워주고 나는 그들의 분량을 채워주며 기도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분량을 채울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전혀 응답될 것 같지 않고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문제들에 대한 기도가 거짓말처럼 응답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영적 비밀이고,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분량이 채워질 때까지, 영적 비등점에 도달할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끌어 올리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거의 다 도달했는데 그만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이 끓기 직전에 끄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조금만 더 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런 기도를 하고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기도의 분량을 채울 때까지, 영적 비등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반전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