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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9일 수요예배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9 ✦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애굽기 4장 1~7절)
1. 보잘것없는 우리를 부르시는 질문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아홉 번째 영적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질문으로,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2)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을 하심으로 모세를 부르셨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3가지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부르신다
첫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을 아시고, 나의 모든 형편과 여건과 은사를 알고 계십니다.
모세의 120년 인생을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40년 동안은 이집트에서 왕자로 자라났고, 그 다음 40년 동안은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20세가 될 때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지신 때는 모세가 40년간 애굽에서 훈련을 받고 왕궁의 부와 귀를 풍족하게 누리던 때가 아닙니다. 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전락하고 동족에게 냉대를 받아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서 모든 꿈과 소망을 광야에 묻어 두고 살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던 일상 가운데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자리로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작정 기도를 하거나 금식 기도를 할 때, 또는 특별집회나 수련회 같이 특별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를 부르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신 산의 이름은 ‘호렙’입니다(3:1). ‘호렙’이라는 말은 ‘황폐하다’, ‘적막하다’ 또는 ‘사막’이라는 뜻입니다. 사막 같은 인생 또는 황폐한 가정이나 생업이나 삶의 현장 등, 그 어디든 내가 서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그곳은 곧 거룩한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주신 곳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였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출 3:2-3, 새)
당시 광야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요즘도 캘리포니아 같은 곳에서는 자연 발화로 산불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덥고 건조해서 그런 겁니다. 당시 호렙 산 같은 곳이나 광야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신기하게도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재가 되지 않는 겁니다. 계속 불이 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너무 신기하여 다가갔을 때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단순히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모세가 다가갔다가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라, 불이 붙었는데 타 없어지지 않기에 신기해서 보러 갔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모세는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광야에 널려 있는 보잘것없는 가시떨기나무입니다. 쓸모가 많은 백향목이나 상수리나무 같은 나무가 아니라, 잘해보아야 땔감 정도 밖에 안 되는 나무입니다. 이것은 마치 초라한 우리 인생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초라한 그의 삶, 황폐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가시떨기나무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면서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 곳곳을 살펴보면 ‘불이 임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뜻합니다. 여기 호렙산에서도 하나님은 불 가운데 역사하셨습니다. 미국장로교 로고를 보시면 십자가 좌우에 불꽃 네 개가 있습니다.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불,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불을 의미하면서 로고를 만든 것입니다. 이 떨기나무에 붙은 불은 나무를 태우기 위한 불이 아니라,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불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그 성령의 불이 성도들의 가슴을 태우고, 그들의 죄를 태웠습니다. 예루살렘을 태운 성령의 불길이 사마리아를 불태우고, 유대를 불태우고, 더 나아가 로마제국 전 지역을 불태웠습니다. 그 불을 끌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핍박도, 조롱도, 죽음도 끄지 못했습니다. 성령의 불은 순교의 현장에서도 계속해서 타올랐습니다.
130년 전 하나님은 한국 땅에 성령의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1903년 원산, 1907년 평양 대부흥 때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일제치하나 6.25 한국전쟁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보잘것없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성령의 불이 임합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기만 하면 선교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불은 그렇게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매일매일 우리의 삶 가운데도 계속해서 임합니다. 잘난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찾아와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태초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시고, 이제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중에 기쁜 일도 있고 후회되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것조차 다 하나님이 실수 없이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예배자로 부르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데는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면서 가장 먼저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
모세가 서 있는 땅은 원래부터 거룩했던 땅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니까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지 않으셨을 때에는 거룩한 땅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이 임하시니까 그곳이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당시 종들은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 당시는 샌들인데, 신발 없이 지내면 광야의 돌에 걸려 찢어지거나 상처가 날 수 있습니다. 또 가시에 찔릴 수도 있고, 뱀이나 전갈에 물릴 수도 있습니다. 발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결국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너의 주도권과 경험과 생각과 지식과 네가 가진 모든 가치를 다 내려놓으라.’라고 하시는 의미입니다. 신을 벗는 것은 곧 나를 버리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더 이상 내가 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을 벗어야 하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롬 12:1, 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합당한 예배’인데, 그것은 곧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까? 자신의 자랑이나 행위나 의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거룩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되며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을 벗어버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십니다. 나의 모든 죄와 허물과 욕심과 자아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면서, 십자가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 사명자로 부르신다
세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 사명자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와 부르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가 하나님의 귓가에 울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출 3:7, 9-10, 새)
하나님은 귀가 밝으셔서 우리의 작은 신음과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스로 그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셔서 그를 통해 그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모세의 도움이 필요하셨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왜 모세를 부르셨습니까? 그로 하여금 영광을 맛보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아론이 왜 제사장의 시초가 되었는지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단시 모세의 형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도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순종하여 했기 때문에 그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베풀어주십니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습니까?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기회를 주실 때 순종하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으며, 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살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뭔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 때문입니다. 죽음과 죄와 심판과 저주 가운데 놓인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복음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선교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만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 각자도 모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모세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소유와 은사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주님의 비전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이며 열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2. 내 손에 있는 것을 주님께 드리는 삶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1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믿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며 의심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2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없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시지 않았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는 것, 손에 없는 것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도 ‘나는 지식이 없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학벌이 없습니다. 가진 게 없습니다.’라고 변명합니다. 하나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며 가지고 있는 게 뭔지 물으시는데, ‘나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하며 없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것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막 6:37-38, 새)
이것을 보십시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유일하게 모두 기록한 기적 사건이 이 오병이어 사건인데, 그 놀라운 오병이어의 기적도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일으키신 게 아닙니다. 작은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잘것없는 도시락을 사용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아이가 먹어도 배가 부를까 말까 하는 정도의 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능력이 있으셨고 여기서도 아무것도 없는데서 뚝딱 나오게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희에게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고 가져와라.” 하십니다. 그래서 갖고 온 것은 형편없는 아이의 도시락이었고, 요한복음에 보면 안드레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게 있기는 있는데, 요까짓 것 가지고 뭘 하겠습니까?”라고 합니다.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손에서 찾으신 것도 그가 평상시에 들고 다니는 볼품없는 지팡이였습니다. 목자라면 다 들고 다니는 평범한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지팡이를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3-4절)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땅에 던지자 뱀(아마도 코브라)이 되었습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셔서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뱀을 잡을 때는 머리부터 잡아서 제압해야 물리지 않습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면 뱀이 휙 돌아서 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모세는 광야생활 중에 수많은 뱀들을 보았기 때문에 이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당연히 뱀을 잡을 때는 머리부터 잡아서 제압해야 함을 압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상식이나 경험과 맞지 않는 요구를 하셨을 때 놀랍게도 순종합니다. 이것을 보면 나중에 모세가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뜸을 들이는 것이 무조건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정말 가도 되나? 내가 살인자이고 도망자인데, 나 같은 사람이 위대하신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나?’ 하는 자신에 대한 생각이었지, 불순종하려고 마음 먹은 게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많은 신학자들에 따르면, 뱀은 당시 이집트의 왕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뱀으로 변한 지팡이를 잡으라고 하신 이유는 애굽의 왕권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애굽의 왕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하여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흔히 하는 말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이 왔고,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각자 가진 것이 다르고 처한 여건도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 제 손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같이 사역하며 섬겨보자고 할 때 ‘나는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고 도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 이상한 것은,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여행도 가고 한국에도 갑니다. 그러니까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 할 때 거기 생략된 말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는 사용할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대신 나를 위해서는 사용한 돈도 있고 시간도 있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이 똑똑하게 사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정말 행복한 인생입니까? 아닙니다. 너무 불행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아주 제한적이고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 영원한 상을 쌓아놓을 기회를 주겠다고 하시는 것인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불행한 삶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정말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순간에도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내 몸을 드리는 겁니다. 쉬운 예로, 내가 열심히 기도하는 일을 드리는 겁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영국의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어린 시절 예배 중 헌금 시간에 하나님께 드릴 돈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자 헌금 바구니에 안에 자기가 들어가 자기 인생을 주님 앞에 드렸다고 합니다. 오랜 후에 리빙스턴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돈이 정말 한 푼도 없었지만, 하나님께 정말로 내 몸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어린아이였는데 얼마나 귀한 마음입니까.
사실상 우리 가운데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최소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0절)
이 지팡이는 원래 누구의 지팡이입니까?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이것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하고 나아가니까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은 내가 가진 것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지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지식이 됩니다. 내게 있는 물질이 얼마 안 되어도 하나님께 드려 사용하시게 되면 하나님의 물질이 됩니다. 내게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능력이 됩니다. 내게 있는 시간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내가 그냥 써버렸을 때는 별로 필요도 없는 일에 낭비되고 말았을 그 시간이 생명을 살리는 데 사용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 손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혹시 공부를 많이 하셨습니까? 그 지식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사업을 하십니까? 사업적인 재능과 물질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어떤 분야에 전문지식을 가지고 일하는 직장에 다니십니까?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은사가 있다면,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드려야 합니다. 올해 ‘333기도’에서 저에 대한 기도제목이 그것입니다. “이준원 목사가 받은 은사들을 마음껏 발휘하여 사역하게 하시고...” 받은 은사들을 숨겨두거나 묻어두지 말고 마음껏 발휘하여 사용하도록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실 때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드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생명을 주셨고 오늘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혼자 다 하실 수 있는데도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내 손에 무엇이 놓였든, 그것이 크든 작든, 강하든 약하든, 귀하든 초라하든,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만물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게 뭐든지 상관없이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져서 그분의 손에 붙들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잘것없는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 손에 붙들렸을 때, 그것으로 나일 강을 치니까 물이 피가 되었고, 하늘을 향해서 드니까 우박이 내렸고, 땅을 치니까 티끌이 이로 변했습니다. 그 초라한 지팡이를 하나님이 붙들어주시자, 홍해를 향해서 손을 드니까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또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 붙잡힐 때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늘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주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어 주님께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