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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6일 수요예배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1~15)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 수요예배 새 말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입니다. 수요예배 때는 좋은 책을 한 권 정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느 책을 정하든지 똑같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맞는 적용을 위해 책 내용을 빼기도 하고 더하기도 합니다.

 

요즘 좋은 책들이 아주 많은데 한국은 책을 정말 안 읽는다고 합니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보니까 책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지하철 타고 가면서 사람들에게 웃음이 많아졌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면서 막 웃기 때문에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이 없어서 책이 안 팔리고, 미국도 책방들이 다 문을 닫아서 온라인으로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렇게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책은 많은데 무엇으로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몇 권 정도가 제 주의를 끌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흥미로운 책이 황덕영 목사라는 분이 쓴 <살리는 질문, 사는 대답: 사명자를 향한 열여덟 가지 질문>(두란노 간)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니까 아주 좋았습니다.

 

요즘 팀 켈러 목사께서 쓴 한국어 번역 최신간 <인생 질문>이 나왔는데, 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것을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요즘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분노의 이슈를 다룬 책도 있었지만, 그 책들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사명자에게 주신 질문들을 답하는 내용을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하나님의 중요한 질문들이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던지신 최초의 질문

 

오늘 첫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던지신 최초의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며,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운 해를 시작할 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때, 아니 매일 우리의 삶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오늘 뭘 할지, 무슨 옷을 입을지도 관심을 갖고 보십니다. 운전을 할 때도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운전할 때 스피드를 낼까 안 낼까에도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법규를 지킬까 안 지킬까, 음식을 뭘 먹을까, 안 먹어야 하는 것을 먹는 건 아닌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며 나아갈 때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어긋날 때는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의 영적 현주소, 즉 우리가 영적으로 어디 있느냐에 관심이 크십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류에게 던지신 질문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9)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범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났을 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준엄한 음성으로 물으셨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느냐가 우리 삶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0)

 

아담은 죄를 짓고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멀어지자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영적으로 자리를 이탈한 것입니다.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대답을 잘 보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벗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속 벗고 살았는데,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벗어서 두려워 숨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잘못하면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기보다는, 항상 뭔가 다른 데서 이유를 찾으려고 합리화하거나, 실제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벗고 있었고, 그것이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정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어 사니까 벗고 있어도 괜찮고, 그것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니까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7)

 

참 궁색합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순간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몰랐는데 이제야 벗은 줄을 알았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둔감했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이전에는 벗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고 괜찮았는데, 이제는 벗고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없는데 자기가 벗은 몸을 누가 봅니까? 자기 아내가 보고 남편이 봅니다. 이전에는 벗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죄가 들어오니까 이제는 배우자가 자기 벗은 몸을 보면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 앞에서 가리게 되었습니다. 여기 가리는 게 누구에게서 가리는 겁니까? 서로에게서 가리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안 가렸는데 이제는 가리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는 완전한 공동체로 하나였던 두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즉 성부 성자 성령이 완벽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스타일(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 남자만 있으니까 좋지 못하다’, 미완성이라고 하시며 여자를 만들어 완벽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 되어 공동체가 될 때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온전한 공동체로 사니까 아무 문제가 없고,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벗고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죄 때문에 깨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였을 때는 창피하지 않았는데, 상황은 똑같지만 이제 하나인 것이 깨지니까 창피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벗었기 때문이 아니고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도 수치스러운 관계가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이 하나님을 두려워한 진짜 이유는, 그가 죄를 범하여 죄의식과 죄책감과 수치심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죄를 짓고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다 죄를 지어봐서 알지만,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별로 기도나 말씀이 싫습니다.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부부 간에 잘못한 일이 있으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껄끄럽지 않습니까? 부모와 자녀 간에도 티격태격하면 됩니다.

 

교회에서도 신앙에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됩니다. 만나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의 자리와 예배의 자리에 오지 않고 자꾸 빙빙 겉돌게 됩니다. 교회 예배에 자꾸 가기 싫어지고 빠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내 신앙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껄끄러워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람은 죄를 범하면 마음속에 두려움과 부담감과 어색함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 문이 닫히게 됩니다. 그 결과 다른 지체들을 향해서도 마음 문이 닫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둘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며, 그러나 첫째와 둘째라는 순서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이웃과의 관계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두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문제, 질병,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의 문제, 또 그 밖의 많은 문제들 때문에 세상 살기가 참 힘들고 두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진정한 이유는 단순히 어떤 어려움이 닥쳤기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어려움 때문에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두려움의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지켜주실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실까?’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런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그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어려움 때문에 두려운 게 아닙니다.

 

사자 굴에 들어갔기 때문에, 풀무불 속에 던져졌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고 그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 처했지만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 던져 넣고 보니까 우리가 던져 넣은 사람은 세 명이 아니냐? 그런데 왜 저기는 네 명이냐?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직면하는 여러 어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 때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내가 두렵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시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나?’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고 믿음이 흔들릴 때, 어느새 두려움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너는 지금 영적으로 네가 있을 자리에서 있느냐? 혹시 벗어났느냐? 그렇다면 빨리 돌아오라!”

 

 

2.   끊임없이 추적하며 질문하시는 이유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하며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와 질문하십니다. 무슨 스토커처럼 하나님이 쫓아다니시나 할 수 있지만, 그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따라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해주시는 게 은혜입니다. 그게 없다면 버림을 받은 것인데,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찾아와 지금의 영적 주소가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물으십니까? 심판이나 저주나 멸망이나 죽음을 주시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소망과 능력을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계속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를 고쳐주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 후반부인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는 아담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려면 짐승을 죽여서 가죽을 벗겨 입혀주어야 합니다. 이때 짐승이 피 흘려 죽는 모습을 처음 본 아담과 하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시대에 너무나 많은 짐승들이 인간의 죄를 대신한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서 피 흘리며 죽었습니다. 고기는 각을 뜨고 제사장이 피를 뿌리는, 피 비린내 나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죄가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깨닫고, ‘저 죄 없는 짐승이 내 죄 때문에 죽는구나하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4-5)

 

그분은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치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하여,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9:11-12, )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14:6).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죄 사함의 은혜를 받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4-15)

 

여기서 특히 15절은 신학적으로 소위 원시 복음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벌써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1-13)

 

아담은 죄에 대한 핑계를 하와에게 돌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하나님은 왜 아내 핑계를 대느냐고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또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뱀을 심판하시면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실제로 그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깨뜨려 상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는데(23:45),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인간에게 열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을 길을 마련해놓으셨고,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거나 많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가만히 보면, 정말로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모든 시험과 유혹 가운데 승리하게 합니다.

 

주님을 믿습니까?’라고 하면 믿슙니다!’ 하고 대답은 잘하는데, ‘주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하면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시험이 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늘 기도하듯,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고 또 악에서 구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시험과 수치와 죄책감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영원한 형벌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무슨 능력을 받거나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왜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와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하십니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5:8, )

 

예수님은 우리가 의인이 된 다음이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8-10, )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아담을 찾아와 네가 어디 있느냐하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책망하고 심판하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렇게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 사랑을 가지고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다시 말해 너의 영적 현주소는 어디냐? 내 안에 머물러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과 어려움과 두려운 일들이 찾아와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 때 그것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네가 어디 있느냐?” = “너는 누구냐?”

 

놀랍게도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질문은 너는 누구냐하는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3:21-22)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어떤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이후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은 이후에 예수님은 사탄의 모든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떤 시험과 유혹이 와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확신하기만 하면 어떤 것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확신이 없으니까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바꾸고, 빼고, 틀어서 변질시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1)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살짝 흔듭니다. 그런데 그런 사탄의 말에 하와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2-3)

 

하와의 답을 듣고 뱀이 뭐라고 합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4)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앞선 창세기 217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보태거나 빼거나 살짝 트는 것이 사탄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사탄은 예수님도 그러한 방법으로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바꾸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받는 아들인데 사랑받는이라는 단어를 쏙 뺐습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사랑받는이라는 단어를 빼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하며 유혹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영적 전쟁에서 결코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4.   우리가 있어야 할 영적 자리는 하나님 곁

 

아담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데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대화하고 있는데도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죄와 어두움을 내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라고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삶의 주인인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나의 죄와 허물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게 되면, 예배하고 봉사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다 해도 여전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 안에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 맡기고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때 자유를 얻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 앞에 온 여인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율법대로 돌을 들어서 그녀를 쳐서 죽일까 하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도 다 죄가 있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한 명씩, 한 명씩 그 자리를 피해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을 쓰셨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의 이름과 죄를 다 적으셨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때 여자는 거기 계속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거기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를 피해 도망갔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도망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피해선 안 됩니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해결을 받고 떠나야 합니다. 그 여자처럼 자신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피해 다니며 겉돌게 되면,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누구냐? 너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면서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의 자리,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벗어나서 살면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부르시고 찾아오시면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부르셨지만, 언제 데려 가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몇 년 전 한국 어느 교회에서 한 젊은 자매가 투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그 어머니가 교회 목사님에게 임종예배를 드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날 그 자매의 어머니는 오른손 밑에 성경책을 놓고 그 밑에 딸이 마지막으로 주님께 드리는 감사헌금을 두고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날 그들은 눈물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기도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제 딸이 끝까지 믿음 지킨 것, 감사합니다. 딸의 투병생활을 통해서 믿지 않던 가족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그 자매에게는 소원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선교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그 후 누군가에 의해 복음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회가 언제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배를 안 해도 다음이 있겠지. 오늘 성경을 안 읽어도 다음이 있겠지. 오늘 기도 안 해도 내일 하면 되지.’ 그러나 기회가 언제까지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영원히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기회가 있을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아닌데 다음에 있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 헌신하고 지금 충성해야 합니다. 그 기회가 영원히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염려할 것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영적 자리를 이탈하면 하나님이 어김없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기뻐하는 자리에서 네가 조금 멀어져 있구나. 속히 내게로 돌아와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분명히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제가 있습니다.” 하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천국을 바라보며 살지만, 사실은 천국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을 살지만 천국을 맛보며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며 하나님 앞에서 대답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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