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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일 수요예배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8

어찌하여 우느냐

(요한복음 2011~18)

 

1.   새 소망으로 초대하는 질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가 써야 할 가시 면류관을 대신 쓰셨고, 우리 손과 발에 박혀야 할 못이 예수님의 몸에 대신 박혔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무리 커도 주님의 사랑에는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사모하는 주님이 지금까지 계속 무덤에 계셨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슬픔이며 절망일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 기독교 신앙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어 있는 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은 우리 삶에 소망과 능력을 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런 것은 수요예배까지 나오는 우리라면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때때로 좌절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이 질문은 우리를 새로운 소망으로 초대하는 질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내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내 삶에 살아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내 삶에 풍성합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놀랍게도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아니고,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낳고 기른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만나신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님이 치유해주신 여자입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다 폐인 같은 삶을 살았던 여자입니다. 창녀와 같았던 여자인데 예수님이 고쳐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마리아야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셨듯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 각자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의 문제가 너무 커서 눈물이 앞을 가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절망으로 울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1-13)

 

또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알았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4-15)

 

13절에서 천사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고, 15절에서는 예수님이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울었다는 것은 슬퍼 우는 통곡을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마리아가 왜 우는지 몰라서 물어봅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도 마리아가 왜 우는지, 누구를 찾는지 몰라서 물으십니까? 다 아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질문을 하십니까? 울 필요가 없는데 울고 있어서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시는데, 찾는 것 때문에 운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마리아가 찾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시신입니다. 죽어서 무덤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어찌하여 우느냐물었을 때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가 찾던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물으셨을 때에도 동산지기인 줄 착각하고 새번역에 의하면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15) 하고 말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7일 동안 아주 슬프게 애곡하는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무덤으로 찾아가 시신에 향품이나 기름을 바르면서 애곡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러기 위해서 왔는데, 이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이제는 애곡할 대상마저 사라진 그 사실 앞에 너무 슬퍼서 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안식일 후 첫 날(지금의 주일) 새벽에 온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빈 무덤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슬퍼합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만일 거기에 자기 생각대로 예수님의 시체가 있었다면 마리아가 울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찾던 것이 있으니까 하려던 일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찾던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으니까 슬퍼서 울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 열심 때문에 울었습니다. 자기 설움 때문에 울었습니다.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완전히 자기 생각 속에 갇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예 머릿속에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0장 앞부분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고 하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와서 보았는데, 그들의 마음에도 부활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리아도 오직 돌아가신 주님의 시체에 자기가 향품을 바르게싸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주님만을 생각하면서, 오직 주님의 시체만을 주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해 애통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하는데 못 하게 되어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을 사랑해서 애통해하며 울었던 게 아니라, 사랑한 것은 맞지만 자기 열심이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애통해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죽하면 1970년대에 나온 그 유명한 Rock Opera<Jesus Christ Superstar>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모했다고 그렸겠습니까? 또 둘이 나중에 결혼했다고 음모론을 쓴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주님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일찍 새벽부터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왔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열심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갔다가 잡히면 곤란하니까 무섭기도 하고, 그 정도의 열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주님을 향한 열심과 사랑과 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자기 열심이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참 귀하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려 했던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때 이미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시체에나 바르는 향품이나 기름이 전혀 필요가 없으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자기가 그것을 하려고 했다가 못하게 되었으니까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운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들에게 대답한 뒤에 누군가 뒤에 있는 것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거기에 자신이 그토록 찾던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14). 그러나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께서 자기 바로 앞에 계신데도 그분이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어둡기도 했고, 부활 후의 예수님 모습이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 후 저녁때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있던 곳에 쑥 나타나셨습니다. 분명히 달라진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못 알아본 것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고 있었는데 살아 계신 예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천사들의 표현에 의하면,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찾고 있는데 산 자가 나타나니까 전혀 생각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또 예수님이 여자여, 어찌하며 울며 누구를 찾느냐?”(15)라고 직접 물으셨을 때에도, 자기가 너무나 잘 알았고 가까이에서 섬겼던 주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서도 마리아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합니다. 게다가 시체를 가져갔으면 돌려달라고 애원까지 합니다.

 

오직 돌아가신 주님, 오직 그분의 시체에만 모든 생각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살아나셨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마리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나신 주님을 보고도 또한 그 음성을 듣고도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은 원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추진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주님의 일이 되지 않는다하며 한탄하고 괴로워하며 울기도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또 그것이 사실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좋아 보이는 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주님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더 크고 위대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한 경향을 가리켜 소위 내가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또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자꾸만 내가복음을 쓰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건 니가복음이고 내가 말하는 건 내가복음인데, ‘니가복음은 무시하고 오직 내가 원하는 내가복음만 주장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복음도 뒤로 제쳐놓고 내가복음을 외칩니다. 그래서 실패합니다. 이것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또 우리 삶 속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 속에 가두어놓은 주님, 죽어 있는 주님을 찾는 사람은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기가 만들어놓은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나 성경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안 믿는 분들 중에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이건 내가 생각하는 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신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에 안 믿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성경에서 말씀하는 주님의 방향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주님께서 원하실 거라고 생각하며 나아갈 때, 결국 그것이 죽어 있는 주님을 찾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죽어 있는 주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안에 능력과 치유와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 주님을 잘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그 이후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부활하신 주님을 붙들아야 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붙들라는 뜻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고는 낙담하며 슬퍼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하셨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조롱과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빈 무덤을 보면서 예수님이 말씀대로 살아나셨구나!’라고 기뻐하며 부활의 소식을 전한 것이 아니라,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고 하면서 절망하고 슬퍼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설교도 듣고, 자기 스스로도 성경을 읽고 큐티를 하고 성경을 읽고, 요즘 유튜브에 올라오는 좋은 설교도 듣는 등, 얼마나 많이 듣고 압니까? 그런데 정작 말씀을 깨닫지는 못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까 여전히 우리의 삶에 절망과 슬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고 그렇게 말씀을 많이 듣고 잘 알면 기쁨과 소망과 사랑이 넘쳐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잘 알고 붙들면 어떻게 절망과 눈물과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니까 그 위대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그 반대로 나아가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43:1-2, )

 

정상적으로 하면 어떻게 강에 빠졌는데도 물속에 빠지지 않고 또 불속에 들어갔는데 불에 타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로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4:18)

 

이외에도 주님께서는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아주 많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외롭다. 나는 고독하다. 나는 괴롭다. 내 인생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혼자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붙들어야겠습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28:20b, )

 

소위 지상대명령또는 대사명을 주실 때 끝에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명령만 주신 것이 아니라 약속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끝 날까지 함께 하니까 가서 사명을 다해라.’라고 하신 겁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6)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33:3)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1:10)

 

이러한 생명과 소망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놀라운 부활의 증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기 나온 것처럼 천사들이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을 가장 먼저 만나셨습니다. 당시 여자는 증인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저번 오병이어의 기적을 살펴보았을 때에도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며 여자는 숫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숫자를 셀 때 여자가 제외될 만큼 소외 계층이었습니다.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신화라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유력한 인물이나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지도자급 남성을 부활의 증인으로 내세웠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을 만하지만, 이름도 없고 일곱 귀신에 들렸던 비천한 여자가 부활의 증인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믿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인, 그것도 창녀와 같은 삶을 살았던 비천한 여인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고 또한 그것을 가장 먼저 확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둘째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우리는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은 사도 요한 외에는 모두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요한만 예수님 어머니와 몇몇 여인들과 같이 십자가 앞에 있었지, 나머지는 다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쿼바디스라고 하면서 로마까지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할 수 있었겠습니까?

 

거짓에 생명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거짓말이 있는데 그것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며 복음이 진리이기 때문에 생명 걸고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이 거짓이었다면, 뭐 하러 그렇게 고생을 하고 죽었겠습니까? 거짓을 위해 그렇게 고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또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전한 복음은 곧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했던 메시지는 한국 교회 초기에 전했던 것 같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아니라 예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증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분을 보았다. 우리가 그 증인이다.’였습니다.

 

 

3.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 믿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마리아가 언제 주님을 알아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6)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실 때 깨달았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이름을 불러주실 때 그제야 그분이 예수님인 줄 깨달았고 정말 부활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산지기였다면 자기 이름을 알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산지기인줄 알았던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르니까 깜짝 놀라서 돌이켜”(16) 보았습니다.

 

이 말은 고개를 돌렸다는 말도 되지만, 마음을 돌이켰다는 말이 됩니다.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그 시체에 향품을 발라야겠다.’라고만 하며 갇혀 있던 것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연약해도, 때로는 주님을 배신해도, 심지어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만 찾을 때에도, ‘내가복음을 주장할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절대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덜 사랑하시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면 더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마리아야!” 자기 이름을 넣어보십시오. “____!” “____!”

 

주님의 목적은 , 너는 나도 못 알아봐?’ 하며 우리를 혼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고 제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너의 뜻대로 하기를 그치고 바로 네 곁에 있는 나를 알아보아라. 그리고 내 뜻을 따라라.’ 그렇게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을 깨달은 사람은, 그분의 사랑에 감격해서 나의 주님이라고 외치며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만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막달라 마리아가 행한 일입니다. 주님을 알아본 마리아가 너무 감격해서 히브리어로 "랍오니여"라고 외치는데, 그 뜻은 선생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으로 나의 선생님’(My Dear Teacher)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7)

 

이것은 무슨 부정 타니까 만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내게 매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실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승천을 믿게 되고, 예수님의 승천을 믿는 사람은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완전히 가는 게 아니니까 지금 그렇게 나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다. 너는 나를 다시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대신 네가 할 일이 있다.’라고 하시면서 그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그것을 전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8)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런데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은혜가 물론 크지만 어쩌면 더 큰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도움이 하나도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사명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전도 없이 이 세상 사람들을 다 믿게 하실 능력이 없으십니까? 당연히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왜 그러시겠습니까? 우리가 저 영원한 천국에 가서 살뿐 아니라 영원한 상급을 쌓아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너무나 유한하고 제한적인 존재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영원한 천국의 가치를 이 땅에서 가지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혼마다 새로워집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민족과 도시와 나라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의 능력이 임하면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삶이 변화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 5:17, )

 

저처럼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아 그렇지,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하는 정도로, 이 말씀이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믿은 분들은 이 말씀이 정말 실감나게 다가온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분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예수님을 믿고 세례받은 형제님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는 회사에서 전화 한 통을 받으면 전전긍긍하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지시를 받으면 분통을 터뜨리거나 조바심을 내거나 걱정하고 염려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놀랍게 변했다는 겁니다. 그 아내가 말했으니까 확실합니다. 10년 동안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바뀌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그냥 바뀌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최근에도 회사에서 전화가 많이 왔는데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겠지.”라고 고백하면서 너무 평안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실제로도 기도 응답이 척척 되었습니다. 너무 평안하게 변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옛 것이 지나고 새 것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보여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여러분, 혹시 지금 울고 있다면, 뭔가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뭔가로 걱정하며 불안해하고 있다면, 왜 그렇습니까? 또 지금 뭔가를 찾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혹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찾다가 그것이 되지 않아 우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부활하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땅에 우리가 사는 동안 주님의 목적을 위해 온전히 쓰임을 받고, 주님 앞에 갔을 때 잘했다고 칭찬받는 신실한 종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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