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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8일 수요예배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8 ✦
“가족과 민족을 위한 기도”
(로마서 9장 1~5절)
[들어가는 말]
인류 문화가 발전해온 역사를 보면, 씨족 사회에서 부족 사회로, 그리고 국가로 발전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씨족 사회는 철저하게 혈연을 바탕으로 같은 조상을 공유하는 가족 집단이었는데, 점차 자기 부족 외의 다른 씨족과의 혼인을 통해 부족 사회로 발전되었습니다. 초기 부족들은 씨족들의 느슨한 연합체 형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같은 문화와 언어와 종교와 가치관을 기초로 해서 몇 개의 부족들이 연합하여 공통된 지역을 중심으로 해 부족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민족과 국가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한민족의 별명이 몇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백의민족’입니다. 흰 옷을 입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아주 정결하게 살아서 그렇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흰 옷감을 염색할 물감이 없어서 흰 옷을 입다 보니까 백의민족이 된 겁니다. 만약 빨간 물감이 많아서 빨간색으로 염색했으면 ‘홍의민족’이 되었을 것이고, 파란 물감이 많았으면 ‘청의민족’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흰 옷으로 살다 보니 ‘백의민족’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우리 민족을 ‘배달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택배’가 발달한 게 아니라, ‘배달’이라는 말은 ‘밝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밝은 땅의 민족’입니다. 또 전통적으로 우리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단일민족 국가가 딱 두 개입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입니다. 우리 한민족이 역시(?) 최고입니다.
우리가 같은 민족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민족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국수주의(nationalism)가 되어 버리면 민족과 민족 간의 불필요한 싸움이 생기고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독일의 나치도 ‘아리안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다른 민족들을 짓밟는 거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선교학에서도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 ‘자기 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본래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사도 바울은 좁은 의미에서 자기 민족을 ‘나의 형제, 골육, 친척’이라고 부릅니다(3). 그러나 그들은 씨족의 범위를 넘어서, 같은 조상들, 같은 가치관, 같은 문화와 종교를 가진 민족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4-5절)
여기서 조금 의아한 게 있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로마 성도들은 다 이방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왜 이렇게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유대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까?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로마서가 단지 로마 교회에만 쓴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자기 신학을 썼다기보다는 자기 입장을 예루살렘 교회에 설명할 목적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런 편지는 로마 교회만 보는 게 아니라 여러 교회들에 돕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첫 교회인데, 거기의 리더들에게도 로마서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계속 노력했던 것은 오해를 풀려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이방인만 좋아하고 이방인만 위하는 사람이다.’라는 오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게 아니다. 나는 내 민족을 너무나 위한다.’라고 쓴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 회당부터 먼저 갔습니다.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해서 ‘바울은 이방인만 위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을 썼다고 봅니다. 그러한 로마서 9~11장은 나중에 로마서에 들어갔다고 봅니다. 원래 8장까지 쓰고 또 12장부터 16장까지 썼는데, 나중에 8장 뒤에 9~11장 내용을 넣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로서 하나님의 ‘양자 됨’(즉, 자녀 됨), 하나님의 ‘언약들과 율법’, 하나님에 대한 ‘예배’,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 약속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가족과 민족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속한 가족과 민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요소입니다.
우리 가족, 우리 민족이 건강한 집단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으로서 이 땅에 존재하고 기능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구원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1-3절)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큰 근심’,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가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에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로마서의 다음 장에서 그 대답을 발견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내 동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내 기도의 내용은, 그들이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롬 10:1, 새)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대충 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구원이 취소되고 동족이 구원받는다면 그것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과장법입니다. 어떻게 구원이 취소되고 대신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겠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로 원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 중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정말 근심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1권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천이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하지만,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를 비웃고 야단치고 무시합니다. 크리스천은 가족을 불쌍히 여겼지만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마침내 그들을 하나님께 부탁드리며 홀로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천로역정> 2권에 보면, 그의 부인 크리스티아나와 네 아들이 자기 남편, 자기 아버지가 나아간 그 순례의 길을 따라 나서게 됩니다. 크리스티아나는 남아 있던 가족이 그 길을 가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주님이 남편의 눈물을 병에 모아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눈물의 유익과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편의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바울의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의 정체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자신의 가족과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특히 이스라엘 가운데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그들 중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질문을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버니언에게 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직 주님의 병에 우리의 눈물이 다 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기도했지만, 이제부터는 정말로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 56:8)
이 시편 56편은 다윗이 악인들에게 쫓기며 눈물로 간절히 주님 앞에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그렇게 간절했던 다윗의 심정으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위해서만 아니라 가족과 민족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 2:3)
유진 피터슨은 자신이 번역한 <메시지 The Message>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장엄한 구원의 메시지를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의 메시지는 가장 먼저 주님이 직접 전해주셨고 그 다음은 주께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정확히 전해주셨습니다.”
구원은 그냥 별 것 아닌 게 아닙니다. 구원은 ‘큰 구원’이고 ‘위대한 구원’이며, 유진 피터슨에 의하면 ‘장엄한 구원(magnificent salvation)’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멸망입니다. 지옥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그 인생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영원한 멸망의 지옥으로 향하게 됩니다. 만약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구원의 가치를 알지 못하거나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거룩한 피를 흘려주셨는데 어째서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자녀들에게, 배우자에게, 부모님에게, 친척들에게, 이웃들에게, 우리 민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구원입니다. 물론 우리가 애를 쓴다고 우리가 구원을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아서 가족과 친척과 이웃이 구원받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큰 근심으로 고통하면서 가족의 구원과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것을 잘 아는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31).
2.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
바울의 기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그것을 누리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들 중에 보내신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5절에서 바울은 마침내 온 만물 중에서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롬 10:11-13, 새)
여기서 ‘풍성한 은혜’(richly bless; many blessings)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롬 10:14-15, 새)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이 사명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일을 거부한 것입니다. 원래 바로 그것을 위해 그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며 기대하셨던 소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 12:2, 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와 그의 후손들이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는 가족, 복이 되는 위대한 민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통로라는 것은 들어와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에는 큰 물이 두 개가 있는데, 북쪽에는 갈릴리 호수가 있고 남쪽에는 사해가 있습니다. 갈릴리는 물이 들어와서 나갑니다. 그래서 항상 물이 깨끗하고 좋습니다. 그 안에 생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해는 들어오기만 하지 나가는 데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금기가 엄청나고 그 안에 생물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냥 죽어 있는 바다(Dead Sea)입니다.
그러니까 받기만 하고 자기만 누리며 끝나면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받고 내보내고, 받고 내보내고 하는 삶이 통로의 삶이고 그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시내산 언약을 세우실 때도 그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출 19:5-6, 새)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하나님 백성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기 위함입니다. 그저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복 받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 우리 가정 때문에 다른 가정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 우리 민족 때문에 다른 민족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옛날에도 있었지만 특히 몇 년 전부터는 소위 사회의 지도층과 특권층으로 사는 사람들의 갑질 현장을 많이 보게 됩니다. 참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소위 특권층에 있는 부모가 특권을 물려받게 된 자기 자녀에게 가르쳤어야 할 교훈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잘 사용하여 ‘을’의 자리에 있는 이웃들을 섬기고 그들을 복되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삶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주일설교에서 사도행전 18장을 다룰 때 로마의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5월 5일). 그때 그의 친형이 로마의 스토아 철학의 대가인 세네카(Seneca)라고 했습니다(친동생으로 보는 사람도 있음). 그 세네카는, 로마에게 미래가 있으려면 모든 사람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섬기는 삶과 나눔의 삶을 배워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로마의 애국자들이여,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 거기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을 배우십시오.”
작년 4월에 보도된 한 뉴스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끈 적이 있습니다. 28세의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20년간 공화당 10선 의원을 역임하고 45세의 젊은 나이에 국회의 하원의장이 되었으며, 과거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맞먹는 인기를 누리면서 공화당의 차기 대선후보 물망에 오르던 폴 라이언(Paul Ryan)이 갑자기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주말 아빠에서 풀타임 아빠가 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정계에 입문한 후 태어난 그의 자녀들이 각각 16세, 14세, 13세가 되었는데, 그들과 휴가를 함께 지내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가 16세 때 알코올 중독자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소셜시큐리티 연금으로 간신히 살아남았으며, 맥도날드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10대 시절을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은 딱 하나, ‘아버지’였음을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국회의원(그것도 하원의장)으로 있으면서도 주말이면 집이 있는 위스콘신으로 가서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했지만, 여전히 자신은 파트타임 남편, 파트타임 아빠였기 때문에, 후회 없는 축복을 자녀들에게 남기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또 하나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 프로농구 팀인 ‘잘기리스’가 있는데, 그 팀의 주축 선수인 아우구스토 리마라는 선수가 아내의 출산 때문에 결장함으로 중요한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팀이 패배했습니다. 그날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잘기리스 팀의 야시케비시우스 감독에게 그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감독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니며 “내가 다녀오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중요한 플레이오프 시리즈가 진행 중인데 선수가 팀을 떠나는 것이 정상입니까?”라고 되묻는 기자에게 감독은 “그렇게 말하는 기자는 아이가 있습니까?”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도 아이를 갖게 되면 이해할 겁니다. 자기 아이가 태어난다는 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우리 삶에서 농구가 과연 가장 중요합니까? 내 아이의 출생만큼 경이로운 일은 없습니다.”라고 거듭 말했다는 것입니다.
리마 선수는 감독의 배려로 아내 곁을 지키며 그날 태어나는 자신의 소중한 첫 아기를 품에 안을 수 있었고, 곧 팀에 돌아와 눈부신 활약을 펼쳐서 잘기리스 팀은 남은 준결승 경기를 모두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도 리마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야시케비시우스 감독은 리투아니아 농구 국가대표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세계 최강 미국 대표팀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 프로농구(NBA)의 인디애나 페이서스(Indiana Pacers)와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Golden State Warriors) 소속 선수로 뛰기도 했습니다. 그런 야시케비시우스 감독의 마지막 말이 더 중요합니다. “나는 우리 팀이 우승하지 못했어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가족이 최우선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례를 오해해서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삶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가정과 생업과 교회라는 사역의 세 장 사이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처럼 아기를 낳은 경우에는 가정에 조금 더 포커스를 둬야 하고, 직장에서 승진하면 직장에 더 포커스를 둬야 하며, 교회에서 큰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교회에 더 포커스를 둬야 합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셋 사이에 균형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폴 라이언이 국회의원 및 하원의장을 하면서도 정치고 뭐고 다 팽개치고 가족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가정에 무슨 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회를 결석하고 집에 가기만 했다면 올바른 정치인이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아이들이 다 커서 성인이 되었는데도 계속 풀타임 아빠가 되겠다며 다 큰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쫓아다니기만 했다면 그건 사랑의 돌봄이 아니라 참견입니다.
아우구스토 리마 선수가 자기 아기가 태어났다고 너무 좋아서 농구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아기 육아에만 전념하기 원했다면 농구를 그만둬야 했을 것입니다. 단지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만큼은 아내와 또 새로 태어난 아기와 함께 하는 순간이 가장 중요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후회 없는 인생이 되는 것은 축복의 통로로서 인생을 살아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모든 포커스가 자기에게만 맞춰져 있다면 결국 이 세상을 떠날 때 후회 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복이 되어주는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생업에서, 교회에서, 또 사회에서, 누군가의 복이 되는 인생이라는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내 가족과 친지와 이웃과 친구들 가운데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가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눈물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을 통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결단의 기도
1) 가족이나 이웃 중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2) 우리 민족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3) 우리 민족을 통해 복음이 열방 가운데 전해짐으로 우리 민족이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