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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3일 수요예배

탕부 하나님 7-2

천국 잔치의 비전은 이 땅에서의 삶을 변화시킨다”(2)

(이사야 256~8)

 

1.   매일의 삶이 달라지다

 

이사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할 때 선포했듯이, 본향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마지막 귀향의 특징도 다른 모든 귀향처럼 결국은 잔치로 끝나게 된다고 했습니다(25). 예수님도 자신이 이루시는 구원을 늘 잔치로 묘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은혜의 표시로 한 식사를 남겨주셨는데, 그것이 곧 성만찬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도 역시 잔치로 끝납니다. 이 잔치는 역사의 종말에 벌어질 하나님의 대축제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네 가지 방식으로 주님의 잔치를 경험할 수 있는데, 각각 우리 삶이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빚어지는 방식과도 같습니다.

 

 

1)  구원은 체험적이다

 

잔치는 우리의 식욕과 오감이 채워지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표시(sign)라는 뜻입니다.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흥겨운 잔치를 베풀러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잔치이고 축제입니다.

 

 

2)  타락한 물질세계도 구속하신다

 

식사는 매우 물리적인 경험입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부활하셨고 그 후 제자들과 함께 음식도 드셨다는 것은, 그분에게 물질세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저 영으로구원받으신 게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몸과 혼과 영을 다 지으셨고 몸과 혼과 영을 다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며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아주셨습니다.

 

 

3)  복음의 내면화와 생활화

 

인간이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각자가 꾸준히 먹고 마시며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같이 해야 합니다. 보통 종교는 나는 순종한다. 고로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라는 원리로 작동하지만, 복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그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고로 나는 순종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 때 삶의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후히 베풀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지에 강한 압력을 가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아낌없이 베풀지 못하게 나를 막고 있는 원인을 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은 단지 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소망을 거기에 두고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내가 결혼생활을 더 탄탄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부부들에게 말하지만 특히 그 대상은 남편들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던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 다수는 결혼할 때 이교의 영향을 받아서 결혼에 대해 아주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계급 사회에서 결혼은 주로 거래로 여겨졌습니다. 사회경제적 신분을 얻으려면 결혼을 최대한 잘해야했고, 성적인 만족을 얻는 길은 결혼생활의 외부에 따로 존재했습니다. 결혼 따로 성생활 따로였습니다. 게다가 고대사회의 남자들은 여자를 동료나 친구로 대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고 하대하도록 배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남편들에게 권면한 내용은, 성적인 정절을 지킬 뿐 아니라 아내를 아끼고 높이며 아내가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혼에 대해 사회 통념과 완전히 다른 태도였으며, 너무나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성도들의 동기를 유발하는지 잘 보십시오. 그는 위협하거나 무조건 훈계하지 않고, 본받아야 할 훌륭한 모범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구원을 남편의 희생적 사랑으로 생생히 그려냅니다.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25-27, ).

 

예수님은 우리가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 남편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결혼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결혼윤리를 지키라고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신부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도 당연한 것이 되며, 특히 그분이 우리에게 철저히 정절을 지키신 십자가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알 때 정욕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차고도 넘치기 때문에, 그 사랑을 깊이 알게 되면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결혼 밖의 관계에서 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핵심이 무엇입니까?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덕규범을 지키려는 노력을 더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리스도의 구원과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하고, 그 깨달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변화들이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복음을 믿으면 우리 마음의 동기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이 변화됩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 겉으로 규칙만 지키는 행동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며, 결코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종착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보십시오. 그 대부분은 우리가 끊임없이 복음으로 돌아가 그것을 내면화하고 생활화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새로 나온 여성 신도가 있었는데, 어릴 때 교회에서 자라며 우리가 충분히 착하고 윤리적이어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말을 늘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에 와서 하나님이 과거나 현재의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로 인하여 순전히 은혜로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메시지를 들었는데, 그것은 처음 듣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정말 무서운 개념이네요! 좋은 쪽으로긴 하지만, 그래도 무섭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이 그 자매에게 공로 없이 거저 받는 은혜의 어떤 점이 그렇게 무서우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면 하나님도 일정한 한도 내에서만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거나 역경을 통과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 나는 마치 권리를 지닌 납세자와도 같아서, 세금을 내는 의무를 다했으니 이제 웬만큼 행복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게 되지요. 하지만 정말로 내가 하나님의 무한한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받은 죄인이라면, 그분이 내게 요구하실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그 자매가 바로 깨달았듯이, 순전히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이 놀라운 가르침은 양날 검과도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두려움을 베어 버려서, 나의 약점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값없이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나에게 그렇게 해주셨다면, 이제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를 값 주고 사신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에 대해 듣고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거라면 이제 아무렇게나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 1막만 있고 2막은 없는 것처럼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이 없지만, 그것은 무한한 희생의 결과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30년대 초에 독일 교회의 수많은 사람이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게 항복하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그가 쓴 책이 <The Cost of Discipleship(나를 따르라)>라는 명작입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표현으로 값싼 은혜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그것은 값없는 은혜만 강조하여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는 별로 중시하지 않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가 말한 해답은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죄를 한없이 심각하게 대하시며 그분의 무한한 희생을 통해서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우리 삶이 속속들이 다시 빚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더는 비겁하게 이기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정의를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오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떤 희생도 그분이 우리를 구하려고 치르신 대가에 비할 바가 못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 본문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13장에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인데,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씨 뿌리는 자로 비유됩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길 가로 묘사되고, 나머지 세 종류의 땅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들인데, 그 중 둘은 변화된 삶을 결실하지 못합니다.

 

돌밭은 끈기와 인내가 없어 고난이 올 때 감당하지 못하고, ‘가시덤불은 계속 염려하며 물질주의적 삶을 살다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변화된 삶을 결실하는 땅은 좋은 땅인데, 더 열심히 노력했거나 더 순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입니까?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13:23)

 

좋은 땅과 같이 결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13:23)들입니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은혜로 삶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은혜에 따르는 엄청난 희생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고, 따라서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막연히 알 뿐이지,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에 핵심이 잘 압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믿음으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얻어 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음을 믿고,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희생적으로 우리를 섬기신 분을 참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도 희생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그것이 우리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해결책은 지금부터 힘써 믿음에 행위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믿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4)  혼자서는 성장할 수 없다

 

잔치는 본질상 공동체적입니다. 혼자서 파티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손님들을 초대해서 함께 잔치를 벌입니다. 가족 모임이나 결혼식이나 어떤 중요한 친목 행사도 식사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초대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곧 긴장을 풀고 서로 알아 가자는 초대입니다. 많은 문화에서 식사하자고 제의하는 것은 곧 우정을 맺고 교제하자는 말입니다.

 

미국뿐 아니라 요즘은 한국에서도 개인의 유익과 개인이 원하는 것이 가족이나 단체나 공동체보다 우선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면서도 교회에 속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 중에도, 주일예배에만 참석하고 나머지는 전혀 교회와 관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아주 많습니다.

 

비신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 중에,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는 싫다.’라든가 나는 예수는 좋은데 기독교는 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나쁜 경험 때문에 교회와 관련된 일을 멀리하거나 크리스천들과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데 관심이 있지만, 자기가 교회의 멤버가 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교회들이나 종교 기관들이 종종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맏아들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멀리한다면,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역시 자기 스스로를 의롭게 여긴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지 않고도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믿는 지체들과 함께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은 없습니다.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신자들의 가족에 속해야만 하며, 바로 그것이 교회입니다.

 

영국의 지성인 C. S. 루이스(Lewis)<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을 쓴 J. R. R. 톨킨(Tolkien, 로널드라 불림)과 함께 문인들의 유명한 모임인 잉클링스(Inklings)의 회원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작가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도 잉클링스 회원이었는데,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사랑(The Four Loves)>에 찰스의 죽음을 인상 깊게 묵상한 우정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나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친구들 안에는 각각 누군가 다른 친구만이 온전히 이끌어내 줄 수 있는 뭔가가 있다. 나 혼자는 너무 작아서 전인격을 모두 불러내어 활동하게 할 수 없다. 상대의 모든 면을 드러내려면 나 말고도 다른 빛들이 필요하다. 이제 찰스[윌리엄스]가 죽었으니 찰스 특유의 농담에 대한 로널드[톨킨]의 반응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찰스가 떠난 지금 로널드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지만, 내가 누리는 로널드가 더 많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정은 천국을 가깝게 닮았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로 인하여, 우리 각자에게 있는 하나님의 열매가 배가됩니다. 그분을 보는 눈이 각 사람마다 달라서 그 독특한 시각이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확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본 환상 속의 스랍 천사들은 함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6:3) 하고 외칩니다.

 

루이스는 한 개인을 알아가는 데에 공동체가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더 잘 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드시 교회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여 사랑 안에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져주는 관계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섬기고 사랑하려 애쓰는 크리스천들의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우리 각자는 그분을 알아가고 닮아갈 수 있습니다.

 

 

2.   생명 길이 되어 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성경 전체의 이야기와 인류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에 멋지게 압축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율법주의적이었던 맏아들 쪽이든, 자기 마음대로 살기 원했던 둘째아들 쪽이든, 그 두 가지 삶의 방식은 둘 다 영적으로 막다른 골목입니다. 둘 다 막힌 길, 잘못된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윤리도덕에 갇혀서 살든지, 자기 마음대로 살든지,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오직 주님 안에서만, 즉 주님의 인격을 닮고 주님이 주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서만 행복한 결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둘째아들처럼 감각적 쾌락을 따라가는 세속적 삶과, 맏아들처럼 엄격한 윤리를 따라가는 종교적 삶은, 둘 다 인간의 심령이 구하는 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덴마크의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그 두 가지를 가리켜 각각 탐미적인길과 윤리적인길이라고 부르면서, 둘 중 어느 쪽도 충분한 인생관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32-35)

 

예수님은 내가 하늘의 떡이다.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둘째아들의 감각적인 길도, 맏아들의 윤리적인 길도 모두 우리가 추구할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면서,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그분 자신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14:6, )

 

이것은 구원에 대한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을 믿은 후의 신앙생활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한 동행을 통해서만 천국의 참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로 들어가 그분의 구원에 기초해서 살아가면 결국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최고의 잔치와 만찬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미래의 그 구원을 기도, 다른 사람들을 섬김, 복음으로 인한 내적 본성의 변화, 지금 그리스도가 주실 수 있는 치유된 관계 등을 통해서 지금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좋아도 그런 것들은 장차 올 일의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 저 영원한 천국을 늘 바라보면서 매일매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오래 전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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