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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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7일 수요예배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2 ✦
“참된 지식을 위한 기도”
(에베소서 1장 15~23절)
[들어가는 말]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그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청소년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신 후에 예수를 믿고 영접할 사람은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목사가 되어 주의 종으로 헌신할 사람은 일어나라고 했을 때 제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집에 가서 말씀드리니까 잘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한 다른 친구들은 다 혼났습니다. “너 미쳤냐?” 하지만 제 부모님은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님께서는 아들을 주시면 목사로 바치겠다고 ‘서원기도’를 하셨던 것을 알았습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에 대학교에서 어떤 학과를 갈까 생각하는데, 부모님께서 섬기시던 교회 담임목사님의 큰아드님이 일반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그 후 신학대학원에 가서 목사가 된 것을 좋게 보시고, 저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전 단계로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하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시 시험을 본 다음 대학교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하는데, 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제 장래희망이 전부 ‘신학자’나 ‘목회자’만 적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면접을 하던 교수님이 저를 째려보시면서 (?) “자네는 전공을 잘못 선택해서 왔구먼. 신학과를 가야지 왜 철학과를 왔나?”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뜨끔하면서 ‘야, 말 한마디 잘못하면 떨어질지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저 나름대로 열심히 ‘썰’(?)을 풀며 대답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기는 하지만, 먼저 철학을 공부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심오한 철학의 세계를 탐구하고 싶습니다.’ 하는 식으로 간신히 대답을 했습니다. 눈치를 보니 교수님이 은근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간신히 합격을 했습니다.
저의 철학과 친구들과 선후배들 중에 목사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유명한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IVF라고 하고 한국말로는 ‘한국기독학생회’입니다. 대학 때 그 그룹에서 활동할 때 멤버 중에 철학과 출신이 많아서 ‘철 군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철학과가 많으니까 어떤 선배가 분명히 철학과가 아닌데 자기도 철학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대 철학과인 금속공학과였습니다.
철학과 신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철학은 영어로 ‘philosophy’인데, 이 단어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ia)’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자는 지혜와 지식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철학자의 최대 관심은 인간입니다. 한마디로 철학은 인간에 대한 지식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알라’ 하지 않고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습니다.
반면 신학은 영어로 ‘theology’인데, ‘신’이라는 뜻의 ‘데오스(theos)’와 ‘말씀’이라는 뜻의 ‘로고스(logos)’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말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철학자가 인간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저는 철학과에서 철학을 많이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방법론은 비슷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유명한 <기독교강요> 책에서 ‘인간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모르면 인간에 대한 지식도 알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았던 1세기 당시 ‘새로운 로마’라고까지 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던 에베소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세 가지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 성숙의 여정, 즉 성화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 중에 방문했던 도시들 중에서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시입니다. 그는 3년 동안 거기 머물렀는데, 그렇게 3년이나 머문 도시는 또 없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신자들을 양육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흔들림 없이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 반드시 알고 붙들어야 할 영적 지식이 있다고 오늘 편지에서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16~19절의 키워드는 ‘알게 하시고’입니다. 17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했고, 19절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끝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 영적 지식, 우리가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알도록 기도하라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5-16절)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의 소식을 들었다고 말한 다음,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이전에 자신이 3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제자들을 양육했던 에베소 교회를 향해 사랑의 마음으로 편지를 쓴 것이 에베소서입니다. 그들에 대해 좋은 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7절)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알다’라는 단어는 단지 머리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항상 경험적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경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특히 구약이 그렇습니다. 히브리어로 ‘알다’라는 단어가 ‘야다’인데, 부부간에 서로를 아는 경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알지만 부부끼리만 진짜로 아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10년 동안 연애하고 결혼한 커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연애했기 때문에 결혼할 때 서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두 사람이 깨달은 것은, ‘내가 내 배우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아내는 남편에 대해 ‘결혼하더니 사람이 변했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변한 게 아닙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전까지는 배우자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서 배우자에 ‘대해서’ 알았던 것이고, 결혼 후에는 배우자를 ‘직접 경험’하며 진짜 배우자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압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천지창조 등 많은 것을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knowing about God).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아는 것’, ‘하나님을 정말로 아는 지식’입니다(knowing God). 그래서 기독교 고전이 된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짜로 아는 지식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아야 했던 하나님,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알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어떤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제자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9)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오신 것입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어떤 하나님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신아 이나라,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과 비슷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일하심을 보여주고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영광의 아버지
세상의 아버지들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해서, 때로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을 안겨줍니다. 저도 아버지이지만, 아들을 실망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아버지, 빛으로 충만하신 그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와 함께 거하게 되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삶이겠습니까? 그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은 놀랍게 변화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바로 그것을 위해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과 연구로는 그 하나님을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7)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와 계시의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살피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그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영국 출신의 영성신학자이며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전트 칼리지(Regent College)에서 가르쳤던 제임스 휴스턴(James Houston)은, 자신이 쓴 <기도>라는 책에서 기도를 ‘하나님과의 우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도해야 한다고 하면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기도가 하나님과의 우정이라는 것은 참 적절한 표현입니다. 기도하면 정말로 하나님과 친해집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과 우정이 쌓입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에 변화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기도라면 기도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휴스턴은 이 우정을 가리켜 ‘변화시키는 우정’(the transforming friendship)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구로서의 우정의 관계를 쌓는 것을 넘어 연인과 같은 애정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된 찬양 곡들을 보면 “I love you”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마치 연인이 서로 고백하는 것 같은 표현이 많습니다. 찬양 곡인 줄 모르고 그냥 가사를 보면 마치 애인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은 우리를 아시는 연합의 관계, 즉 하나 되는 일치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고자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그분의 품 안에 깊이 안기기까지,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그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얼마나 큰 특권인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소망을 알도록 기도하라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8절)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소망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실제로 미래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놀라운 미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이 소망을 여러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 중 세 가지를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벧전 1:3-4, 새)
이 소망을 가리켜 베드로는 ‘산 소망(living hop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딛 2:13, 새)
여기서는 ‘복된 소망(blessed hope)’라고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히 6:11)
이것은 ‘확실한/풍성한 소망’(sure hope)입니다. 바울은 여기 에베소서 1장에서는 이 소망을 가리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18)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소망은 우리가 상속자로서 받아 누리게 될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재벌이 자녀에게 상속해주면 그 엄청난 재산이 다 자녀의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욱 엄청난 기업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에는 그 영광을 완전히 누리게 될 것이며, 지금은 그 상속을 어느 정도 맛보면서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약속된 기업을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벧전 1:4)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전부 썩고 더러워지고 낡어 없어지는데, 하늘에서 받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찰스 스펄전은, 우리가 훗날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이 생각보다 성경에 많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한 ‘놀라운 선물’(놀래줄 선물)을 준비해놓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깜짝 놀라게 해줄 만한 선물로 준비해놓으셨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 그리 많이 알려주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배우자나 자녀의 생일 선물을 준비할 때, 매번은 아니더라도 아닌 척하거나 무슨 선물인지 미리 알려주지 않고 있다가 깜짝 놀라게 해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시한 것을 준비했다가 깜짝 놀래주려 하면 욕(?) 먹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것을 가지고 “Surprise!” 하면 놀라면서도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바로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에 대한 묘사가 가장 많이 나오는 부분을 찾으라면,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을 들 수 있습니다. 거기에 묘사된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그 약속만 제대로 읽어도 우리를 위해 예비 된 천국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생각하며 크게 기뻐하며 감격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더 이상 사망도, 질병도, 애통도,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열두 문, 열두 보석으로 빛나는 성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우리가 만지는 진짜 보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남으로 해나 달의 비췸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보았던 모든 아름다움과 모든 선함과 모든 감동과 예술과 문화가 그 극치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큰 감동을 받았던 미술 작품이나 음악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것들을 뛰어넘고 훨씬 초월하는 아름다움과 감동의 극치를 이루는 곳이 천국입니다.
매번 말씀드리지만, 천국은 우리가 흰 옷 입고 날개 달고 머리 위에 둥그런 것이 있고 하프나 켜는 그런 데가 아닙니다. 천국은 정말 재미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곳보다도 재미있는데, 퇴폐적이지 않고 건전하면서도 재미있는 곳입니다. 취미생활이 곧 일이 되고 일이 취미생활이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받은 감동보다 몇 천억 배 이상 무한대로 더 감동적인 곳입니다.
천국은 일체의 속됨이나 거짓됨이 없는 곳입니다. 생명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들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곳입니다. 아픈 것들이 다 치료되고, 영원한 건강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 땅에 병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병이 하나도 없고 하나도 아프지 않은 곳입니다. 어떻습니까? 저절로 사모함이 생기며 가고 싶지 않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새)
그 영광을 안다면 우리는 세상의 헛된 영광에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과 신실이 금은보석으로 가득한 ‘허영의 도시’를 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곁눈질하며 거기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영광, 시온의 영광, 궁극적인 천국의 영광을 그들이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진짜를 발견하면 가짜는 시시해집니다.
3. 하나님이 약속하신 현재의 능력을 알도록 기도하라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빌 3:10, 새)
바울은 이 말씀에서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기도로 나타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의 능력을 간절히 알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의 성도들도 그 능력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19-20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이 ‘창조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발달되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창조의 신비, 그 창조물 안에 역사하는 능력을 조금밖에 알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보다 더 위대한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에게 삼켜집니다. 그런데 부활은 죽음을 삼켜버립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20-23절)
여기서 바울은 교회 가운데 역사하는 부활의 능력,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 능력을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 능력에 사로잡힐 때,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쓰임 받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그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통해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만물 가운데 행하시는 이 능력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러니까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소망’뿐 아니라 ‘현재의 능력’을 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약속만 받고 세상에서는 패배자처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온갖 어려움과 위험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노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5, 37)
복음을 전하다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보았던 환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인데,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거기 에베소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유일하게 사도 바울로부터 그리고 사도 요한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는 말씀 중에 ‘이기는 교회’의 환상을 말합니다.
“이기는 사람, 곧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계 2:26, 새)
바로 이 능력 안에서 교회가 보호되고, 복음이 전파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넘어지고 패배하는 교회도 있고, 넘어지고 패배하는 목회자들도 있으며, 넘어지고 패배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주님의 교회의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된 우리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능력 안에서 오늘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소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주께서 우리를 위해 약속하시고 예비하시고 베푸신 그 능력이 시시한 능력이 아니라 얼마나 큰 능력인지를 알아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이 마치 땅에 버려진 장미꽃처럼 짓밟히신 이유는,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힘차게 일어나 주님을 섬기며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받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런 능력을 입도록 기도하라고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위해, 진로를 위해, 가족을 위해, 성공을 위해, 건강을 위해 다 기도를 해야 되겠지만, 무엇보다 이런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신 주님 앞에 늘 엎드려서, 약속하신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입혀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갈 때,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 결단의 기도
1) 무엇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소망을 잘 알게 해달라고 기도
3)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현재의 능력을 잘 알게 해달라고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