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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8 6/26/19(수요예배)

탕부 하나님 7

천국 잔치의 비전은 이 땅에서의 삶을 변화시킨다”(1)

(이사야 256~8)

 

1.   매일의 삶이 달라지다

 

우리는 이렇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이루어주신 일로 우리가 구원을 얻으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은혜와 소망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에 기초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믿지 않던 때와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이사야가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할 때 선포했듯이, 우리 본향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마지막 귀향의 특징 도 다른 모든 귀향처럼 결국은 잔치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저번 주에는 이사야 35장을 봤는데, 오늘은 이사야 25장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또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가 영원한 저 천국에 들어갈 그때를 머릿속에 그려보시면서 읽어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5:6-8)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는 약 2,700년 전 사람인데, 여기 내용을 우리가 읽으면서 아마도 요한계시록 말씀과 비슷하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또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처럼, 여기서도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신다는 내용이 미리 예언되어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고 하여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천국은 잔치입니다. 엄청난 축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은 잔치요 축제로 끝납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이루시는 구원을 늘 잔치(축제)로 묘사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8:11, )

 

예수님은 구원의 은혜의 표시로 한 식사를 우리에게 남겨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만찬또는 성만찬입니다. 물론 그 동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도 잔치로 끝납니다. 이 잔치는 역사의 종말에 벌어질 하나님의 대축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의 구원 사역에 기초하여 살아간다는 의미를 그보다 더 생생히 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네 가지 방식으로 잔치를 경험할 수 있는데, 각각 우리 삶이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빚어지는 방식과도 같습니다.

 

1)  구원은 체험적이다

 

잔치는 우리의 식욕과 오감이 채워지는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어느 혼인잔치에 가셨는데 포도주가 너무 일찍 떨어집니다. 신혼부부는 물론 진행자에 해당하는 연회장도 자칫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할 판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몇 개의 커다란 항아리에 든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2:11)

 

예수님이 신적인 능력을 공적으로 행사하시기는 이 잔치 자리가 처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놀랍게도 이 기적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사역의 핵심을 알리는 표시(sign)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500리터가 넘는 물로 최상급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가 계속될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 자신이 무슨 일을 하러 왔는지를 굳이 이런 식으로 알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흥겨운 잔치를 베풀러 오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연회장이시고 잔치의 참 주인이신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형벌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법적 측면에 대해 말하면서, 그분이 유죄였던 우리에게 무죄판결을 받게 해주셨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죗값을 치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객관적이고 법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관적이고 체험적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 감각적 어법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4:8)

 

여호와의 선하심을 믿고 동의하는 데 그치지 말고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합니다.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청교도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빛이라는 유명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분이심을 믿는 것과, 그분의 거룩함과 은혜의 멋과 매력을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과 맛보는 것의 차이는 꿀의 단맛을 머리로 믿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의 차이와 같다.”

 

예수님의 구원은 잔치이고 축제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이루신 일을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면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실제로 거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꿀이나 포도주와 같아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믿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력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어느 누구의 사랑보다도 더 절절합니다. 신앙이 감정주의로만 나가면 곤란하겠지만, 신앙에는 분명히 감정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기쁨과 활력과 위로를 줄 수 있고, 다른 무엇과도 다르게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줍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에 변화를 가져오고 사람마다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내 마음이 수치심을 느끼고 있고 믿는 사람이 이래서 되나?’ 하는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믿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 자비와 은혜의 단맛을 정말 심령의 입속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받아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분의 눈부신 위엄과 영광을 심령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전부 다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기질상 이성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는 것을 남들에 비해 더 어렵게 여깁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신비주의적인 체험에 너무 심취해 있어서 모든 떠오르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을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대부분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려는 열정이 너무 부족하거나 아니면 너무 과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하늘아버지의 임재에 들어가게 해 주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은 맛보기에 불과하며, 신앙생활에도 기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천국을 누릴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2)  타락한 물질세계도 구속하신다

 

식사는 매우 물리적인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도록 주의 만찬(성만찬)이라는 식사를 남기셨고, 역사의 마지막 자리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는 식사입니다(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24:41-43)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21:9, 13)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 물질세계가 중요하다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후 창조세계를 보시며 좋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물질세계를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과 또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보이듯이, 그분은 지금도 세상을 돌보십니다.

 

이 세상은 그저 사람들의 회심을 위해 쓰이는 일시적 무대가 아니고, 모두가 천국에 가고 나면 결국 버려지고 말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최종적 목적은 개인의 구원과 죄 사함뿐 아니라, 이 세상을 새롭게 하셔서 질병과 가난과 불의와 폭력과 고난과 죽음을 끝내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은 육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고차원의 의식(意識) 상태가 아니라 잔치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실 때 모든 색깔과 맛과 빛과 소리를 함께 창조하셨고, 온갖 종류의 생명체들이 상호 의존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생태계가 훼손되고 망가졌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바로잡기 전까지 쉬지 않으십니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질세계가 그저 어떤 환상 같은 것이거나,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상적 세계의 일시적인 복제품에 불과하다면, 지금 이 땅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들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영이나 혼의 문제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영으로부활하신 게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을 다 지으셨고, 또 몸과 혼과 영을 다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의 구원, 혼의 구원, 몸의 구원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며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아주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물질세계와 몸이 중요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몸이 아픈 사람들과 배고픈 사람들을 무시하고 말씀만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돌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심판 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날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겠지만, 그들이 굶주린 사람과 난민과 환자와 죄수를 섬기지 않았다면 정말로 주님을 섬긴 게 아니라고 판결하십니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할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25:40, 45-46,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충격적이지만, 사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결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여기서 사회사업가들이나 열심히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는 게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은혜로만 구원받은 죄인이라면, 그 증거로서 다른 이웃들, 특히 그 중에도 나에게 도움이 되고 부유하고 연줄을 만들어놓으면 나중에 좋을 만한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라, 나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나 별로 쳐다보기도 싫은 종류의 사람, 즉 지극히 작은 자들과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해, 둘째아들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무관심하고, 맏아들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독선적인 생각에 젖어서 무관심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자연 질서를 깨뜨렸다기보다 오히려 회복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는 아무 질병도, 굶주림도, 죽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분의 창조세계에 침입해 들어온 이 모든 타락상태가 언젠가는 모두 없어질 것이라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과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일을 함께 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불의와 악과 죽음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이 땅에 친히 오셔서 그것을 다 당하여 승리하셨고, 언젠가는 다시 오셔서 그런 것들을 세상에서 모두 없애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질병과 굶주림과 불의에 대해 수동적일 수 없습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종교라는 진정제 때문에 사람들이 불의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죽음 이후의 천국만 바란다는 것입니다. 물질세계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환상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다른 종교에는 그 말이 해당될지 모르지만,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이 물질세계의 고난과 압제를 심히 미워하셔서 기꺼이 그 속에 들어와 그것과 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정신이 들게 하는 명약입니다.

 

 

3)  복음의 내면화와 생활화

 

식사는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여 성장하게 해줍니다. 성찬식이라고도 하는 주의 만찬 역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게 합니다. 인간이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각자가 꾸준히 먹고 마시며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같이 해야 합니다. 각자 주님의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먹고 소화시키고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며, 점점 더 자신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의 중심에 두어야 복음을 두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인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에서 영적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인 데카르트가 한 말 중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통 종교가 작동하는 원리를 말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순종한다. 고로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라는 원리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그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고로 나는 순종한다.’ 순서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다른 종교는 다 한마디로 “Do!”입니다. 뭔가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Done!”,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처음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 새로운 정체성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복음의 메시지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깨달은 것은, 요즘 표현으로 해서 종교가 인간 심령의 기본값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일부러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설정(setting)을 바꾸지 않는 한 내 컴퓨터나 폰은 기본값 모드로 작동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루터는 나의 마음 역시 복음으로 회심한 후에도 다른 원리로 되돌아가 작동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종교입니다. ‘내가 순종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신다.’라는 종교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나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에 감사해서 나는 순종한다.’라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복음 모드로 설정하지 않는 한 도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삶의 의미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들로부터 찾으려는 게 인간의 습성이자 본능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복음을 믿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실제로 의지하는대상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 사회적 성공, 권력, 재물, 좋은 가문 같은 것들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계속해서 두려움과 분노와 무절제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의지력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원리들을 배워 실천에 힘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변화는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마음에 속속들이 배어들게 해야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늘 섭취하고 소화해서 자신의 일부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후히 베풀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후하게 베풀어야 한다!’라고 의지에 강한 압력을 가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헌금을 더 많이 하십시오!’라고 압력을 가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아낌없이 베풀지 못하게 나를 막고 있는 원인을 잘 살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재물이란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얻어 내는 길입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우리 모임에 오면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 돈이 많으면 내 삶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돈은 단지 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소망을 거기에 두고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돈에 대해 성경이 그렇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돈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두 번째 편지를 쓸 때,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 후히 베푸는 은혜 안에서 자라가도록 돕는지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후 8:9, ).

 

이것은 사도인 나에게 너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다.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는데 너희가 나를 통해 헌금을 보내야지!’라는 식으로 그들의 의지에 압력을 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또 무조건 감정에 호소해서 저 가난한 사람들의 불쌍한 처지를 보십시오.’라고 사연을 늘어놓거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은 저 고생하는 예루살렘 성도들보다 훨씬 더 부자입니다.’라고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단순하게 그들을 다시 복음 속으로 데려갑니다. 이것은 이런 말과도 같습니다. ‘그분의 값비싼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결국 당신들도 그분처럼 베풀고 싶어질 것입니다.’

 

인색함을 해결하려면 그리스도의 베푸심이 담긴 복음으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부를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셨기에, 우리는 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가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철저히 지키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 주셨는데 뭘 못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놀라운 신분을 부여해주었습니다.

 

믿음의 길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에 기초하여 살아가면, 결국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최고의 잔치와 축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또는 우리가 살아 있는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그 천국잔치에 들어가 완전한 구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천국잔치를 이 땅에서도 미리 맛볼 수가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 바로 교회를 통해, 또 이웃 섬김을 통해, 주님 안에서의 치유된 관계를 통해, 지금 이곳에서도 저 영원한 하늘나라를 우리가 미리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좋아 보이더라도 그러한 것들은 장차 올 영원한 천국잔치에 비하면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므로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매일 그날을 바라보며 매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다하고 또 주신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머지 내용은 다음 주에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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